*긴 글 주의 호숫가의 벤치에 토니는 아직 앉아 있었다. 노을은 이미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그 빈자리를 기지의 불빛들이 하나씩 길게 늘어져 채우고 있었다. 물가의 갈대가 바람에 서걱거렸다. 토니의 무릎 옆에는 마시멜로가 다 녹아 버린 코코아 잔이 놓여 있었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오는 발소리에 토니가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다음 주 토요일이라고 말하던 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토니는 그걸 한눈에 알아보았는지, 웃으려다 말고 입꼬리를 내렸다. "뭐야. 그새 무슨 일 있었어?" "…메이한테 문자가 왔어요." 피터는 토니 옆에 앉아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화면의 불빛이 둘의 얼굴을 파랗게 물들였다. 철물점 근처 골목에 밤마다 이상한 사람들이 어슬렁거린다는 줄, 그래서 삼촌이 가게 문을 일찍 닫는다는 줄, 별일 아니라는 줄. 메이의 문자는 늘 그랬다. 걱정되는 일일수록 마지막에 별일 아니라는 말을 붙였다. 토니는 그 짧은 문장들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화면에서 눈을 떼고 피터를 보았다. "이게 왜. 퀸즈 골목에 수상한 놈들 어슬렁거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그 골목이에요." "응?" "제가 열다섯 살 때요. 아니, 제가 아는 그 세계에서요. 벤 삼촌이 그 골목에서 쓰러졌어요. 철물점에서 집으로 같이 걸어가던 길이었어요. 골목 어귀에서 강도가 막아섰고요. 저한테는 그 사람을 막을 힘이 있었어요. 거미한테 물린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삼촌한테도 메이한테도 숨기고 있던 힘이요. 들킬까 봐 망설였어요. 반 박자요. 그사이에 삼촌이 저를 등 뒤로 감싸고 앞으로 나섰어요. 그리고…" 문장은 거기서 끊겼다. 피터는 휴대전화를 쥔 손을 무릎 위로 떨구었다. 화면이 저절로 꺼지며 메이의 문장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주 토요일에 하겠다던 그 이야기의 한 귀퉁이가, 아무 계획도 없이 먼저 새어 나와 버린 것이었다. 토니는 묻지 않았다. 아는 세계라는 말에도, 열다섯 살이라는 말에도. 갈대 소리만 한동안 둘 사이를 채웠다. 그러다 토니가 아주 낮게, 피터의 옆얼굴에 대고 물었다. "그 일이, 여기서도 일어날 것 같아?" "모르겠어요. 콜슨 씨는 원래대로 쓰러졌어요. 해피 씨도 원래대로 다쳤고요. 근데 피에트로는 살았어요. 그러니까 모르겠어요. 막을 수 있을지, 아니면 그 골목이 결국 삼촌을 데려갈지." "그럼 막자." 너무 쉬운 말이었다. 피터가 놀라 고개를 들자, 토니는 식은 코코아 잔을 벤치 끝으로 밀어 두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 어깨에 기지의 불빛이 얇게 걸렸다. "……" "이유는 안 물을게. 토요일에 다 듣기로 했으니까. 근데 그 골목에 뭔가 생길 것 같다는 네 얼굴, 그건 방금 봤어. 그럼 막아야지. 그 골목, 그 철물점, 그 주변 블록 전부. 감지기 깔고, 비전한테 지켜보라고 하고, 너는 매일 저녁 벤 아저씨랑 같이 걸어." "…같이 막아 주시는 거예요?" "같이 막는 거지. 내가 해 주는 게 아니라. 너 혼자 그 골목 지키게 둘 거면 내가 그동안 왜 7년을 따라다녔겠어." 토니의 손바닥이 피터의 정수리에 얹혔다가 머리칼을 한 번 헝클어뜨렸다. 손은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피터는 그 무게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열다섯 살의 그 봄에는 이 말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 밤이 오리라는 걸 미리 아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 힘을 숨기고 있었고, 혼자였기 때문에 망설였다. 그리고 그 망설임의 값을 삼촌이 치렀다. 갈대가 다시 서걱거렸다. 이번엔 그 소리가 덜 춥게 들렸다. 기지로 돌아가는 잔디밭은 이슬로 젖어 있었다. 운동화 밑창이 젖은 풀을 밟을 때마다 서늘한 냄새가 올라왔다. 토니가 앞서 걷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기지의 유리창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그 등 뒤로 길게 누웠다. 토니가 돌아섰다. 어둠 속에서도 얼굴이 진지했다. "하나만 물어도 돼? 이유 말고. 그 골목 얘기 말고." "…네." "그 세계에서 그 일 있고 나서. 너는 어땠어. 열다섯 살이었다며."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학교도 안 가고, 방에서 안 나오고. 메이가 문 앞에 밥을 놓고 가면 그것도 안 먹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밤에 창문으로 나갔어요. 거미줄 쏘는 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 힘을 숨기느라 삼촌을 잃었으니까, 이제는 숨기지 않고 쓰고 싶었어요. 누구라도 붙잡고 싶었어요. 그날 제가 망설인 그 반 박자 대신이요." "…그게 스파이더맨의 시작이었구나." "네. 그리고 그 뒤로 지금까지, 저는 늘 누군가를 붙잡으려고만 했어요. 이번엔 놓치지 않으려고. 근데 매번 반 박자씩 늦었어요. 잉센 씨도, 콜슨 씨도." 토니는 대답 대신 피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와 손목을 붙잡았다. 거미줄이 나오는 그 손목을. 엄지가 손목 안쪽의 맥이 뛰는 자리를 덮었다. 피터는 자기 맥박이 그 엄지 아래에서 빨라지는 걸 느꼈다. "이번엔 반 박자 늦어도 돼. 내가 그 반 박자 먼저 그 골목에 가 있을게. 그러니까 너는 늦어도 돼, 피터. 늦어도 아무도 안 놓치게." "……" "대답." "…네. 늦어도 돼요. 대신 먼저 가 계세요." 토니가 웃었다. 그리고 손목을 놓는 대신, 손바닥을 미끄러뜨려 피터의 손을 잡았다. 둘은 그렇게 젖은 잔디밭을 끝까지 걸었다. 반 박자. 그 골목 어귀에서 망설였던 반 박자 이후로, 그 말은 늘 피터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그날 밤 처음으로, 그 말이 손바닥 안의 온기에 묻혀 무섭지 않게 들렸다. 이튿날 오후, 토니는 정말로 퀸즈에 나타났다. 검은 세단이 아니라 할리의 엄마에게 받은 그 낡은 픽업트럭이었다. 엔진이 철물점 앞에서 몇 번 콜록거리다 꺼졌다. 짐칸에는 신발 상자만 한 상자들이 빼곡히 실려 있었다. 토니가 그중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가게 문을 밀자, 문 위에 매달린 종이 쨍하고 울었다. 계산대 뒤에서 신문을 읽던 벤이 돋보기를 코끝으로 내리며 눈을 치켜떴다. "이번엔 또 뭐 고치러 오셨어요. 우리 집 냉장고 멀쩡한데." "냉장고 말고 이 동네요. 골목에 수상한 놈들 어슬렁거린다면서요. 메이 씨가 해피한테 그랬대요. 그래서 감시 장치 좀 달려고요. 철물점 사장님 허락만 받으면요." "감시 장치요?" "쥐덫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주 비싼 쥐덫." 벤이 신문을 접어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다. 토니가 내민 상자 속에 손바닥보다 작은 금속 상자 수십 개가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피터의 방 창틀에서 5년째 초록빛으로 깜빡이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벤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 형광등 불빛에 비춰 보았다. 엄지로 이음새를 쓸고, 뒤집어서 나사 자리를 확인했다. 철물점 주인의 손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가게 구석에서 나사 상자를 정리하던 피터를 보았다. "이거, 너 방 창틀에 붙어 있는 그거랑 같은 거지." "…네." "그럼 됐어. 그거 5년째 한 번도 안 고장 났잖아. 달아요, 스타크 씨. 간판 위든 골목 담벼락이든. 대신 조건 하나만요." 토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조건이든 들어줄 얼굴이었다. 벤은 감지기를 상자에 도로 넣고 계산대에 두 손을 짚었다. 30년 동안 동네 사람들과 나사 한 개 값을 두고 실랑이해 온 사람의 자세였다. "나사는 우리 가게 거 쓰세요. 스타크 인더스트리 나사 말고요. 동네 철물점 장사도 좀 시켜 주셔야죠." 토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 계산대 위에 내려놓으며 가게에서 제일 비싼 나사로 한 상자 달라고 했다. 벤은 제일 비싼 나사가 제일 쓸데없는 나사라고 혀를 차면서도, 진열대 맨 위 칸에서 먼지 앉은 상자를 꺼내 왔다. 피터는 그 둘을 보며 웃었다. 웃으면서도 눈은 자꾸 유리창 너머로 갔다. 길 건너, 빵집과 세탁소 사이에 난 좁은 골목 어귀. 오후의 햇살이 그 입구의 벽돌을 따뜻한 주황색으로 데우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빛이었다. 토니는 해가 질 때까지 블록을 돌며 감지기를 달았다. 가로등 위에, 소화전 옆에, 담벼락의 금 간 벽돌 틈에. 높은 곳은 피터가 거미줄을 타고 올라가 붙였다. 마지막 하나는 골목 어귀의 녹슨 배수관이었다. 토니가 나사를 조이는 동안 피터는 그 옆에 서서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다. 쓰레기통 두 개가 비스듬히 서 있었고, 그중 하나 위에 털이 부스스한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맞은편 벽에는 누군가 스프레이로 그려 놓은 웃는 얼굴 하나. 페인트가 흘러내려 웃는 얼굴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골목이지." "…네." "생각보다 평범하네. 쓰레기통 두 개, 고양이 한 마리, 이상한 낙서." "원래 그래요. 그런 골목은 늘 평범해요. 그날 밤 전까지는." 토니는 한참 그 골목을 보았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눈이 쓰레기통의 찌그러진 뚜껑과 벽돌 사이의 이끼와 흘러내린 페인트 자국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새겨 넣듯 훑고 있었다. 배수관 위에서 감지기가 초록빛으로 깜빡이자, 토니가 손을 털었다. "비전. 들리지." [네, 스타크 씨. 서른두 개 전부 연결되었습니다. 이 블록에서 누가 재채기를 하면 제가 제일 먼저 알게 될 겁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소견을 덧붙이자면, 이 골목은 저도 지켜보고 싶습니다. 피터 씨의 얼굴이 이 골목 앞에서 유난히 하얘지시는 걸 보았으니까요.] 피터가 놀라 배수관을 올려다보자 토니가 피식 웃으며 그 어깨를 두드렸다. 몸이 생겨도 저 녀석은 여전히 다 본다고. 그리고 트럭에 올라타 창문을 내렸다. 엔진이 다시 몇 번 콜록거렸다. "밤마다 전화해. 그리고 벤 아저씨 집에 들어가시는 거 확인하면 그때도 전화해. 문자 말고 전화. 네 목소리로." "…네." "그리고 피터." "네?" "그 골목 앞에서 그 얼굴 할 거면, 혼자 하지 마. 나한테 전화하면서 해." 트럭의 꽁무니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배기가스 냄새가 저녁 공기 속에 잠깐 남았다가 흩어졌다. 피터는 골목 어귀에 서서 배수관의 초록빛을 올려다보았다. 5년 전, 메이의 창문을 지키라며 토니가 밤새 다듬어 건넨 작은 상자 하나. 그게 이제 서른두 개가 되어 이 평범한 골목을 둘러싸고 있었다. 월요일 저녁 7시, 피터는 철물점 앞에 서 있었다. 셔터가 덜컹거리며 반쯤 내려오다 멈추더니, 그 아래로 벤이 허리를 숙이고 나왔다. 열쇠 꾸러미가 손에서 짤그랑거렸다. 벤이 가게 앞에 선 피터를 보고 눈썹을 올렸다. "뭐야. 마중 나온 거야?" "…산책이요. 저녁 먹기 전에 좀 걸으려고요." "산책을 철물점 앞에서 시작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 그러면서도 벤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피터 옆에 나란히 섰다. 철물점에서 붉은 벽돌 건물까지는 걸어서 12분. 빵집과 세탁소를 지나면 그 골목이 나왔다.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피터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바꿔 벤의 바깥쪽으로 섰다. 골목과 벤 사이로. 벤이 그걸 알아챘는지 곁눈질로 피터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은 골목을 지나쳤다. 쓰레기통 위의 고양이가 하품을 하며 앞발을 쭉 뻗었다. 그게 그날 저녁 일어난 일의 전부였다. 화요일에도 피터는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길 건너 빵집에서 그날 마지막으로 구운 빵을 정리하는 냄새가 흘러왔다. 버터와 탄 설탕 냄새. 벤은 이번엔 놀라지 않았다. 셔터를 내리다 말고 피터를 흘끗 보더니, 어제부터 정해진 약속이라도 되는 것처럼 투덜거렸다. "어제 산책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네. 마음에 들었어요." "메이가 그러더라. 너 이번 주 내내 여기 있을 거라고. 기지인가 뭔가는 안 가도 돼?" "이번 주는 여기 있어도 돼요. 스타크 씨가 그러라고 했어요." 벤이 열쇠를 주머니에 넣다 말고 손을 멈췄다. 그 양반이, 하고 중얼거리더니 걷기 시작했다. 한 블록쯤 지나서였다. 벤이 앞을 본 채 불쑥 말했다. "그 양반, 어제 우리 가게에서 나사 한 상자 사 갔잖아. 오늘 아침에 또 왔어. 출근 전에. 골목 배수관에 뭘 하나 더 붙이고 가더라. 그러고는 나한테 그래. 혹시 저녁에 가게 닫을 때 네가 안 오면 자기한테 전화하라고. 자기가 데리러 오겠다고. 아이언맨이 철물점 주인 퇴근길을 데리러 온다는 거야. 세상 참." 벤은 웃었다. 그런데 웃음의 끝이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농담으로 흘려보내기엔 너무 오래 생각해 온 사람의 웃음이었다. 벤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안경 너머의 눈이 피터의 옆얼굴에 머물렀다. "……" "너희 둘, 이 동네에서 뭘 지키는 거야. 나야?" 골목 어귀 바로 앞이었다. 피터의 걸음이 멈추자 벤도 멈췄다. 골목 안쪽에서 저녁 바람이 불어 나와 쓰레기통 뚜껑을 덜컹거리게 했다. 흘러내린 페인트의 웃는 얼굴이 어둑한 벽에서 둘을 보고 있었다. 피터는 그 벽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벤을 보았다. 이 사람에게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부엌 식탁에서 모든 걸 털어놓은 그 밤 이후로는. "…네. 삼촌이요." "왜." "그건… 토요일에 말할게요. 스타크 씨한테도 그날 다 말하기로 했어요. 그 자리에 삼촌도 계셔야 해요." "그 세계 얘기구나. 네가 온 데." "네." 벤은 피터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골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쓰레기통 두 개, 고양이 한 마리, 우는 것처럼 흘러내린 웃는 얼굴. 벤은 그 골목을 한참 바라보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크고 거친 손으로 피터의 어깨를 쥐었다. 공구를 오래 쥐어 온 손바닥은 굳은살로 단단했다. "그 세계의 나는, 이 골목에서 무슨 일을 당했나 보네." 피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깨를 쥔 손에 한 번 힘을 주었다가 놓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골목 어귀를 지날 때, 이번엔 벤이 피터의 바깥쪽에 섰다. 골목과 피터 사이에. 피터는 몇 걸음 뒤에서 그 등을 따라 걸었다. 낡은 작업복 점퍼의 어깨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희끗했다. 벤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 "토요일에 들을게. 근데 이건 지금 말해 둘게. 그 세계의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든, 그건 네 탓 아니야. 네 얼굴 보니까 네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피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열다섯 살 이후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었다. 그 말을 해 줄 사람이 바로 그 골목에서 떠나 버렸으니까. 가로등 아래에서 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피터의 발끝까지 닿아 있었다. 벤이 몇 걸음 앞에서 멈추고 돌아보았다. "……" "뭐 해. 메이 수프 식는다." "…네. 가요." 수요일 오후, 피터는 평소보다 일찍 철물점에 들렀다. 벤은 계산대 뒤에서 나사 상자에 가격표를 붙이고 있었다. 피터가 들어서자 고개도 들지 않고 가격표 뭉치를 내밀었다. 피터는 그걸 받아 들고 벤 옆에 섰다. 계산대 위의 낡은 라디오에서 야구 중계가 지직거리며 흘러나왔다. 원래 세계에서도 이랬다. 열 살 무렵, 방학이면 이 계산대 뒤에서 가격표를 붙였다. 벤이 나사의 크기를 부르면 피터가 숫자를 적었다. "이건 얼마예요?" "그건 5센트. 근데 그 옆에 건 10센트." "똑같이 생겼는데요." "똑같이 생긴 게 제일 다른 거야. 나사산 간격 봐. 하나는 촘촘하고 하나는 성기잖아. 촘촘한 게 더 단단히 물고 안 놔. 그래서 비싼 거고." "…사람도 그래요?" "사람? 사람은 촘촘하든 성기든 값 안 매기지. 근데 단단히 물고 안 놓는 사람은 알아봐. 그 양반처럼." 피터의 손이 가격표 위에서 멈췄다. 벤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다음 상자를 끌어왔다. 귀 끝이 아주 조금 붉었다. 피터는 그 귀를 보며 웃음을 꾹 눌러 삼켰다. 이 사람은 원래 그랬다. 하고 싶은 말을 꼭 나사 얘기에 섞어서 했다. 피터는 촘촘한 나사 상자에 10센트짜리 가격표를 꾹 눌러 붙였다. 단단히 물고 놓지 않는 것. 그 말이 손끝에 오래 남았다. 그날 저녁에는 비가 왔다. 오후 내내 낮게 깔린 구름이 퀸즈의 지붕들을 눌러 앉히더니, 셔터를 내릴 무렵 기어이 쏟아졌다. 철물점 차양 끝에서 빗물이 가는 줄을 지어 떨어졌다. 피터는 그 줄 너머에 서서 우산 두 개를 쥐고 있었다. 하나는 메이가 현관에서 쥐여 준 낡은 체크무늬, 하나는 1층 방 문 뒤에 7년째 걸려 있던 검은 것. 셔터 아래로 몸을 숙이고 나온 벤이 피터의 손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둘이나 들고 왔어? 하나면 돼." 벤은 체크무늬 우산을 받아 펼치고, 검은 우산은 도로 피터의 겨드랑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턱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 둘은 우산 하나 아래서 걸었다. 둘을 다 가리기엔 좁은 우산이었다. 우산살 끝에서 굴러떨어진 빗방울이 피터의 왼쪽 어깨를 조금, 벤의 오른쪽 어깨를 많이 적셨다. 피터는 걷는 내내 그 기울어진 우산대를 보았다. 벤의 손목이 그렇게 기울이고 있었다. 스스로는 알지 못한 채, 아주 오래전부터 몸에 붙어 버린 각도로. "그 세계에서도 나랑 이렇게 걸었어?" "…가끔요. 어릴 때. 학교 끝나면 삼촌이 가게 문 닫고 데리러 왔어요. 우산 하나 들고." "그럼 그때도 이렇게 젖었겠네." "네. 삼촌이 늘 우산을 제 쪽으로 기울여서, 삼촌 어깨만 다 젖었어요." 벤이 그제야 우산대를 내려다보았다. 자기 손목이 만들어 놓은 기울기를, 처음 보는 물건처럼. 빗방울이 그 손등 위로 하나 굴러떨어졌다. 벤은 그걸 털어 내지도 않고 피식 웃었다. "어느 세계에서나 똑같은가 보네, 나는." 그런데도 벤은 우산대를 바로 세우지 않았다. 피터는 그 웃음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빗소리가 우산을 두드렸다. 피터의 뺨을 타고 내려온 것이 빗물인지 아닌지, 우산 아래에서는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날 밤 피터는 1층 방의 침대에 누워 토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창문 유리에 빗방울이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터는 화요일 저녁 골목 앞에서 벤이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수화기 너머가 한참 조용했다. […그 세계의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든 네 탓 아니다. 아저씨가 그렇게 말씀하셨어?] "네. 정확히 그렇게요." […좋은 분이네. 진짜로.] "…스타크 씨." [응.] "그 세계에서는 이 말 해 줄 사람이 없었어요. 그 일 있고 나서. 메이는 너무 슬퍼서 저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저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고요. 그래서 7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 그게 제 탓인 줄 알고 살았어요." [……] "근데 삼촌이 해 주셨어요. 그 세계의 삼촌 대신. 이상하죠. 그 말 해 줘야 할 사람이 그 말을 할 수 없어서, 다른 세계의 같은 사람이 해 주는 거." […안 이상해. 나도 매일 그래. 네가 새벽마다 숫자 세어 줄 때. 그게 원래 누가 너한테 해 줘야 했던 건지 나는 몰라도, 그냥 받고 있어. 고맙게.] 빗소리가 수화기 양쪽에서 겹쳐 들렸다. 맨해튼에도 비가 오는 모양이었다. 같은 비를 맞는 두 개의 창문 사이로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러다 토니가 아주 작게 덧붙였다. [오늘 밤은 네가 숫자 안 세어 줘도 잘 수 있을 것 같아. 대신 전화는 끊지 마. 네 숨소리 들으면서 잘래.] 피터는 전화를 끊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수화기 너머의 숨소리가 천천히, 빗소리의 박자에 맞춰 고르게 가라앉는 걸 들으며 눈을 감았다. 목요일 저녁, 피터는 셔터가 내려오기 전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벤은 계산대 뒤에서 낡은 금전등록기와 씨름하고 있었다. 피터가 들어서자 벤이 턱으로 진열대를 가리켰다. "왔으면 나사 좀 정리해 줘. 오늘 그 양반이 또 와서 진열대를 다 뒤집어 놨어. 제일 비싼 나사 찾는다고." "또 오셨어요?" "점심때. 감지기 하나 더 단다더라. 이번엔 우리 가게 천장에. 그러고는 나사 한 상자 또 사 갔어. 이 동네에서 우리 가게 매상 제일 많이 올려 주는 손님이 아이언맨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 피터는 웃으며 진열대 앞에 쪼그려 앉았다. 뒤섞인 나사들을 크기별로 골라 칸에 나눠 담았다. 쇠 냄새가 손가락 끝에 묻어났다. 새끼손가락이 저절로 들렸다. 계산대 너머에서 벤이 그 손을 흘끗 보더니, 금전등록기 서랍을 닫으며 불쑥 물었다. "그 세계에도 이 가게 있었다고 했지." "네. 똑같았어요. 이 진열대도, 저 금전등록기도. 저 서랍이 잘 안 닫혀서 삼촌이 맨날 엉덩이로 밀어서 닫았어요." "…지금도 그러는데." "알아요. 아까 봤어요." 벤이 소리 내어 웃더니, 보란 듯이 엉덩이로 서랍을 밀어 닫았다. 덜컹. 피터도 웃었다. 웃음이 가라앉자 벤은 계산대에 팔꿈치를 괴고 피터를 내려다보았다. 형광등 하나가 끝에서 가늘게 깜빡였다. "그 세계의 나는 이 가게를 누구한테 물려줬어?" "…아무한테도요. 그 일 있고 나서 메이가 몇 달 혼자 하다가, 결국 팔았어요. 지금은 커피숍이에요." "…커피숍이라. 하." 벤은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손때 묻은 진열대, 먼지 앉은 선반, 계산대 모서리에 수십 년 동안 닳아 반들반들해진 자리. 그리고 다시, 쪼그려 앉아 새끼손가락을 든 채 나사를 고르는 피터를 보았다. "이번엔 커피숍 안 되게 해 줘. 내가 나이 먹어서 못 하게 되면 네가 해. 아니면 그 양반이랑 같이 하든지. 아이언맨 철물점. 장사 잘되겠다." "…그날까지 삼촌이 하셔야죠. 오래오래." "그러니까 오래 할 수 있게, 그 골목 잘 지켜 줘." 피터의 손에서 나사 하나가 미끄러져 진열대 밑으로 굴러갔다. 벤은 아무렇지 않게 셔터를 내리러 걸어갔다. 피터는 진열대 밑으로 손을 넣어 그 나사를 더듬어 찾았다. 촘촘한 나사산이 손끝에 걸렸다. 이 사람은 알고 있었다. 이번 주에 무엇을 지키는 건지. 전부는 몰라도, 그 무게만큼은. 그날 밤, 피터가 벤을 3층 문 앞까지 바래다주고 1층 방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약속대로 전화를 걸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먼저 울렸다. [오늘도 무사해?] "네. 무사해요. 그 골목도 조용했어요." [비전도 그러더라.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통에서 생선 대가리 훔쳐 간 거 말고는 아무 일 없었대. 그 고양이 이름도 지어 줬대. 생선 도둑이래.] 피터는 침대에 걸터앉아 웃었다. 창밖으로 3층 창문의 불빛이 보였다. 커튼 너머로 메이와 벤의 그림자가 부엌을 오갔다. 웃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스타크 씨. 내일 오세요?" [응. 금요일 저녁에. 토요일 식탁 같이 준비하기로 했잖아. 메이 씨가 소금 문제로 할 말이 있다더라. 그리고 토요일엔 하루 종일 퀸즈에 있을 거야. 그 골목이 조용할 때까지.] "…고마워요." [고맙긴. 같이 막는 거라니까. 그리고 피터. 토요일에 할 얘기 말이야. 무서우면 순서 같은 거 안 정해도 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안 해도 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나머지는 내가 물을게. 이번엔 물어봐도 되잖아.] 피터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가 볼 수 없는데도. 창틀 위에 빛이 꺼진 원자로와 녹아내린 가장자리의 아머 파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옆에서 감지기의 초록빛이 깜빡였다. 그 너머, 철물점이 있는 블록 쪽 어둠 속에서 서른두 개의 작은 초록빛이 같은 박자로 깜빡이고 있었다. "네. 물어보셔도 돼요. 이번엔 다 대답할게요." [좋아. 그럼 자. 내일 봐, kid.] 전화가 끊겼다. 피터는 휴대전화를 가슴 위에 얹고 누웠다. 토요일 저녁까지 이틀.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그 골목의 밤이 있을지도 몰랐다. 피터는 천장을 보며 숨을 셌다.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열다섯 살의 그 봄에는 아무도 이 숫자를 몰랐다. 지금은 달랐다. 서른두 개의 초록 불빛이 있었고, 빗길에 우산을 피터 쪽으로 기울이던 손목이 있었고, 내일 저녁 콜록거리는 낡은 트럭을 몰고 올 사람이 있었다. 피터는 그것들을 하나씩 손에 쥐듯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금요일 새벽 2시, 비전의 목소리가 피터의 귓속을 두드렸다. 이번 주 내내 빼지 않고 잠들었던 이어폰이었다. 피터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눈을 떴다. 처음부터 잠든 적이 없었던 것처럼. [피터 씨. 철물점에서 두 블록 떨어진 식료품점입니다. 셔터가 강제로 열렸습니다. 안에 네 명. 그중 하나는 총을 들고 있습니다.] 슈트는 베개 밑에 있었다. 이번 주 내내 그 자리에 두었다. 피터는 마스크를 머리에 씌우며 창틀을 넘었다. 새벽의 퀸즈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가로등이 노랗게 졸고, 어딘가에서 개 한 마리가 짧게 짖다 그쳤다. 맞은편 건물의 벽에 거미줄을 걸고 몸을 날리자 차가운 공기가 마스크 안으로 밀려들었다. 블록 너머로 서른두 개의 초록 불빛이 같은 박자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붉게 바뀌어 있었다. 식료품점 앞의 가로등 위였다. 식료품점의 셔터는 아래쪽이 뜯겨 반쯤 들려 있었다. 그 틈으로 손전등 불빛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피터는 맞은편 건물의 옥상 끝에 엎드려 안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후드를 깊이 눌러쓴 넷. 셋은 계산대를 뜯어내고 담배와 술병을 가방에 쓸어 담고 있었다. 병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긁었다. 나머지 하나는 문가에 서서 바깥을 망보고 있었다. 손에 총을 쥔 채였다. 그 총구가 떨렸다. 가는 손목이었다. 다른 셋보다 어깨가 한 뼘은 좁았다. 많아야 열일곱쯤 된 아이였다. 이어폰 너머로 토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잠이 덜 깨 갈라진, 그런데 이미 날이 서 있는 목소리. 맨해튼의 탑에서 비전의 경고를 함께 받은 모양이었다. 숨소리 너머로 이불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비전이 깨웠어. 지금 어디야.] "식료품점 맞은편 옥상이요. 넷이에요. 셋은 물건 담고 있고, 문가에 하나. 총 들고 있어요. 어린애예요." [기다려. 아머 보낼게. 5분이면 돼.] "5분이면 끝나요. 제가 할게요. 아무도 안 다치게 할게요." [피터.] "알아요. 혼자 하지 말라는 거. 그러니까 전화 안 끊을게요. 계속 듣고 계세요." 토니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더니, 낮게 알았다고 했다. 피터는 옥상 끝을 박찼다. 셔터의 뜯긴 틈 위로 거미줄을 걸고, 그 반동을 타고 가게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손전등 불빛이 닿지 않는 천장의 어둠 속으로. 진열대 사이의 셋은 아무것도 모른 채 가방을 채우고 있었다. 피터는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손목을 세 번 튕겼다. 가방을 쥔 손목 셋이 차례로 진열대에 들러붙었다. 비명이 셋, 거의 동시에 터졌다. 문가의 아이가 홱 돌아섰다. 총구가 가게 안의 어둠을 향해 마구 흔들렸다. 손전등 불빛이 진열대의 통조림들 위로 미친 듯이 튀었다. 겁에 질린 목소리가 갈라졌다. "누구야! 나와! 쏜다!" 피터는 천장에서 내려와 진열대 그늘 끝에 섰다. 손전등 불빛이 겨우 닿는 자리. 두 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렸다. 빨갛고 파란 슈트가 불빛 속으로 드러나자 아이의 눈이 커졌다. 총구가 피터의 가슴 쪽으로 돌아왔다. 미친 듯이 떨면서. "……" "…스파이더맨." "응. 그 총 내려놓을래? 아무도 안 다쳤어. 아직은. 네 친구들도 손만 붙어 있는 거야. 금방 떼 줄 수 있어." "오지 마. 오지 마! 진짜 쏜다고!" 방아쇠 위의 손가락이 떨렸다. 피터는 그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위의 얼굴을 보았다. 후드 그늘 아래, 여드름 자국이 남은 뺨과 꽉 깨문 입술. 겁에 질린 사람이 쥔 총은 겁 없는 사람이 쥔 총보다 쉽게 나간다. 피터는 그걸 알았다. 열다섯 살의 봄, 그 골목 어귀에서 강도의 총구도 이렇게 떨렸다. 그때 피터의 손목 안쪽에서는 갓 생긴 힘이 근질거렸다. 한 걸음이면 됐다. 그런데 그 한 걸음을 떼면 삼촌이 피터의 비밀을 보게 될 것이었다. 피터는 그 사이에서 반 박자를 망설였다. 그리고 그 반 박자 동안 삼촌의 등이 피터의 앞을 가렸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번엔, 이 아이가 그 방아쇠를 당기지 않게 하는 것도 피터의 몫이었다. 피터는 아주 천천히 한 걸음 다가갔다. "이름이 뭐야." "…뭐?" "네 이름.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마일스. 그건 왜 물어!" "마일스. 그 총, 처음 쥐어 본 거지. 손이 그렇게 떨리는 거 보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처음 쥔 총은 생각보다 무겁고, 생각보다 쉽게 나가. 한 번 나가면 다시는 못 되돌려. 너도 알잖아. 그래서 그렇게 떨리는 거잖아." 아이의 눈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총구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내려갔다. 그 순간 진열대에 손이 붙은 사내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쏴, 이 멍청아! 쏘라고!" 아이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피터의 손목에서 거미줄이 먼저 뿜어져 나갔다. 총구를 정확히 덮었다. 잡아당기자 총이 아이의 손을 떠나 허공을 가로질러 피터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묵직했다.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셔터 밑으로 몸을 굴렸다. 다른 손으로 쏜 거미줄이 후드 끝을 스치고 셔터의 쇠살에 붙었다. 반 박자. 아이는 이미 새벽의 골목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피터는 셔터를 들어 올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이의 뒷모습이 두 블록 너머의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피터는 손목을 들었다가 멈췄다. 손에 아이의 총이 들려 있었다. 손잡이에 아직 그 떨리던 손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저 아이에게는 이제 총이 없었다. 비틀거리며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등을, 서른두 개의 불빛 중 하나가 따라가며 깜빡였다. [피터. 방금 그거 뭐야. 쏘라는 소리 들렸는데.] "…괜찮아요. 총은 제가 갖고 있어요. 셋은 가게 안에 붙여 뒀고요. 하나는 놓쳤어요. 제일 어린 애요." [놓쳤어? 네가?] "…일부러 놓친 건 아니에요. 반 박자 늦었어요. 근데 쫓을 수도 있었는데 안 쫓았어요. 총이 없으니까요." [그 골목이랑 관계있는 놈들이야?] "…네. 아마도요. 메이가 말한 그 이상한 사람들이요." [알았어. 비전한테 그 애 쫓으라고 할게. 눈으로만. 너는 경찰 부르고 들어가서 자. 오늘 저녁에 갈게. 벌써 금요일이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피터는 총을 계산대 위에 내려놓고, 진열대에 손이 붙은 사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쏘라고 소리친 그 사내였다. 피터는 그 눈을 똑바로 보았다. "방금 그 애한테 쏘라고 했지. 그 애가 쐈으면 그 애 인생은 거기서 끝났어. 당신 인생은 아니고. 그런 거 시키지 마." 사내가 욕설을 내뱉었다. 피터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섰다. 셔터 위로 거미줄을 걸고 새벽의 지붕들 위로 몸을 날렸다. 1층 방 창문을 넘어 침대에 누웠을 때, 하늘이 희부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떨리던 손가락과, 쏘라고 소리치던 목소리가 천장에서 번갈아 떠올랐다. 저런 목소리가 곁에 있는 한, 그 아이는 언젠가 또 총을 쥐게 될 것이다. 금요일 늦은 아침, 3층 부엌에는 버터 녹는 냄새가 가득했다. 메이는 새벽의 일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었다. 동네 식료품점이 털렸다는 소식이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으니까. 강도들이 스파이더맨에게 붙잡혔다는 것도. 메이는 계란 프라이를 피터 앞에 내려놓으며, 프라이팬을 든 채 무심한 척 물었다. "새벽에 나갔었지. 창문 소리 들렸어." "…네. 식료품점이요." "하나는 놓쳤다며. 라디오에서 그러더라. 제일 어린 애 하나는 도망쳤다고." "…네. 근데 총은 뺏었어요." "어려?" "열일곱쯤이요. 손이 엄청 떨렸어요. 처음 총 쥐어 본 손이었어요." 메이는 프라이팬을 개수대에 내려놓고 피터 맞은편에 앉았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김이 피어오르는 잔 너머로 피터를 오래 보았다. "너도 그 세계에서 처음 그 힘 생겼을 때, 그런 손이었니." "…총은 안 쥐었어요. 근데 손은 떨렸어요. 그 힘으로 뭘 해야 할지 몰라서요. 숨기는 것밖에 몰랐어요." "그때 누가 옆에 있었어? 그 손 잡아 준 사람." "…처음엔 아무도요. 그러다 1년쯤 지나서 한 사람이 왔어요. 그 사람이 제 손에 슈트를 쥐여 줬어요." 메이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피터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이미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으니까. 메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창밖의 골목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애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총 대신 다른 걸 쥐여 줄 사람." "……" "너도 이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잖아. 그 세계의 그 사람처럼. 아니, 그 사람이랑 같이." 접시 위의 노른자가 터져 천천히 흘러내렸다. 피터는 그 노란 줄기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가 웃으며 피터의 접시에 베이컨 한 조각을 더 얹었다. 기름이 접시 가장자리에서 반짝였다. 정오에는 피터가 메이가 싸 준 도시락을 들고 철물점에 갔다. 벤은 계산대 뒤에서 라디오의 야구 중계를 들으며 열쇠를 깎고 있었다. 기계가 쇳소리를 내며 은빛 가루를 흩뿌렸다. 피터가 도시락을 내밀자 벤이 기계를 멈추고 뚜껑을 열어 보았다. 샌드위치 두 쪽과 사과 하나. "메이가 또 사과 넣었네. 나 사과 싫어하는 거 알면서." "…삼촌 그 세계에서도 사과 싫어하셨어요. 근데 메이가 맨날 넣었어요." "그럼 그 세계의 나는 그 사과 어떻게 했대?" "…저한테 줬어요. 학교 끝나고 가게 오면, 오늘도 메이가 사과 넣었다고 투덜거리면서요." 벤이 사과를 집어 들어 피터에게 던졌다. 피터가 한 손으로 받아 냈다. 거미에게 물린 뒤로 무언가를 놓쳐 본 적이 없는 손이었다. 벤이 그 손을 보며 웃었다. "그럼 어느 세계에서나 그건 네 몫이네." 피터는 그 사과를 손안에서 굴리며 웃었다. 매끈하고 차가웠다. 계산대 위의 라디오에서 홈런을 알리는 해설자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오후 4시, 낡은 픽업트럭이 붉은 벽돌 건물 앞에서 콜록거리며 멈췄다. 토니가 짐칸에서 종이봉투를 몇 개씩 끌어 내렸다. 감자, 양파, 셀러리, 핏물이 비치는 커다란 고기 덩어리, 그리고 와인 몇 병. 피터가 1층 창문으로 그걸 보고 뛰어나가자, 토니는 제일 무거운 봉투를 피터의 품에 안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메이 씨가 내일 수프 끓인다길래 재료 사 왔어. 근데 소금은 안 샀어. 일부러." "메이가 화낼 거예요." "그러라고 안 산 거야. 내일은 내가 소금 통 관리할 거야. 진정제는 적당히." 3층 부엌에서 메이가 앞치마를 두른 채 둘을 맞았다. 식탁 위에 늘어놓인 봉투들을 하나씩 들춰 보던 메이가 고개를 들었다. "소금은요?" "집에 있잖아요." "집에 있는 건 반 통이에요. 내일 수프에는 한 통 들어가요." "한 통이요? 메이 씨, 그건 수프가 아니라 바닷물이에요." "그 바닷물을 진정제라고 부른 사람이 누군데요. 해피 씨한테 다 들었어요. 세상에서 제일 센 진정제라고. 짜서." 토니가 피터를 돌아보았다. 피터는 봉투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메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토니도 웃으며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알았어요, 한 통 사 올게요. 대신 내일 제 그릇에는 소금 빼 주세요." "안 돼요. 내일은 다 같이 짜게 먹는 날이에요. 무거운 얘기 들을 거라면서요." 메이는 그렇게 말하며 감자를 개수대에 쏟았다. 감자들이 스테인리스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웃던 토니의 얼굴이 아주 잠깐 굳었다. 피터도. 메이는 아무렇지 않게 수도꼭지를 틀어 감자를 씻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손이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메이도 알고 있었다. 내일 저녁의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전부는 아니어도, 그 무게만큼은. 해 질 무렵 벤을 마중하러 나갈 때는 토니도 따라나섰다. 셋이 나란히 철물점에서 돌아오는 길, 벤이 가운데에서 걸었다. 피터가 골목 쪽, 토니가 차도 쪽. 벤이 양옆을 번갈아 보더니 혀를 찼다. "경호원 둘 달고 퇴근하는 철물점 주인이 세상에 나 말고 또 있을까." "아이언맨이랑 스파이더맨이요.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경호원이에요." "월급은 누가 줘요." "수프로 받을게요." 벤이 웃음을 터뜨렸다. 피터는 그 웃음을 들으며 골목 안을 흘끗 보았다. 쓰레기통 두 개, 흘러내린 웃는 얼굴. 비전이 생선 도둑이라고 이름 붙인 그 고양이가 쓰레기통 뚜껑 위에서 셋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꼬리 끝만 느릿하게 흔들면서.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 오늘은. 저녁을 먹은 뒤, 메이는 피터를 부엌에 붙잡아 내일 쓸 셀러리를 다듬게 했다. 거실에서는 토니와 벤이 낡은 라디오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음질이 요즘 좀 이상하다는 벤의 말에 토니가 뒤판을 열었다. 벤이 말없이 드라이버를 건넸다. 둘의 새끼손가락이 똑같이 들려 있었다. 피터는 셀러리의 질긴 심을 벗겨 내며 문틀 너머로 그 두 손을 보았다. "이 라디오, 그 녀석이 처음 우리 집 왔을 때 고친 거예요. 7년 전에. 그 뒤로 한 번도 안 고장 났어요." "…그 녀석 손이 원래 그래요. 고친 건 안 고장 나요. 제 원자로도 그랬어요." "원자로요?" "동굴에서요. 제 가슴에 처음 박았던 거. 그 녀석이 코일 감는 걸 도와줬어요. 안쪽을 반대 방향으로 한 겹 더. 그거 덕에 5년을 버텼어요." "…그 녀석이 그런 것도 알았다는 거예요? 동굴에서?" "알았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녀석은 그때 이미 다 알고 있었어요. 제가 그 동굴에 갈 것도, 거기서 그 원자로가 필요할 것도." "……" "내일 그 얘기도 들을 수 있겠죠. 그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벤은 라디오의 뒤판을 닫으며 토니를 오래 보았다. 7년 동안 냉장고와 라디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해 온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리고 부엌의 피터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피터에게는 들렸다. "무섭지 않아요? 그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듣는 게." "무서워요. 근데 모르는 게 더 무서웠어요. 7년 동안." "……" "그럼 하나만 부탁할게요. 내일 그 녀석이 무슨 얘기를 하든 끝까지 들어 줘요. 중간에 일어나지 말고, 표정도 바꾸지 말고. 그 녀석, 그 얘기 하려고 몇 년을 버텼어요. 우리한테 할 때도 숨이 넘어갔어요. 스타크 씨한테 하는 건 그보다 100배는 힘들 거예요. 그 얘기 안에 스타크 씨가 있다니까." "…저도 대충은 알아요. 제가 그 얘기 안에 있다는 거. 그게 좋은 얘기는 아니라는 것도." "알면서 들으실 거예요?" "7년을 기다렸어요. 무슨 얘기든 들을 거예요. 다 듣고 나서도 그 녀석 옆에 있을 거고요." 벤은 한참 토니를 보다가, 드라이버를 내려놓고 토니의 어깨를 크고 거친 손으로 한 번 쥐었다. 아무 말 없이. 피터는 부엌에서 셀러리를 쥔 채 굳어 있었다. 옆에서 메이가 피터의 손등을 톡 두드렸다. 피터가 내려다보니, 셀러리가 손아귀에서 짓이겨져 초록 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밤이 깊어 토니는 1층 피터의 방 옆 빈방에서 자기로 했다. 낡은 트럭에서 자는 아이언맨은 이 동네에 들일 수 없다고 메이가 우겼다. 잠들기 전 피터가 창문을 열자, 맞은편 지붕의 물탱크 그늘에 누군가 먼저 앉아 있었다. 언제 올라갔는지 모를 토니였다. 피터도 창틀을 넘어 그 옆에 앉았다. 한 뼘 없이. 3층 부엌 창문의 불이 막 꺼지고 있었다. 지붕의 타르 냄새가 밤공기에 섞여 미지근하게 올라왔다. "내일이네." "…네. 내일이에요." "떨려?" "엄청요. 스타크 씨는요?" "나도. 근데 좋은 쪽으로. 7년 동안 문 앞에서 서성이기만 하던 방에 드디어 들어가는 기분이야. 그 안에 뭐가 있든." "……" "근데 피터. 내일 그 얘기, 어디서부터 시작할 거야." "…아직이요. 삼촌은 처음부터 하래요. 제가 다섯 살 때부터. 그 교차로에서 삼촌 손을 안 놓친 그 세계의 저부터요. 거기서부터 들어야 나머지가 들린대요." "그럼 나는 내일 처음 듣겠네. 네가 다섯 살 때 그 손 안 놓친 얘기." "네. 그리고 엄청 길어요. 메이 수프가 다 식을 만큼요." "괜찮아. 식으면 데우면 되지. 밤새 데워도 돼." 피터는 웃었다. 토니도 웃었다. 그런데 토니의 웃음 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피터는 그 떨림을 들었다. 이 사람도 무서운 것이었다. 내일 무엇을 듣게 될지. 그 이야기 안에 자기가 있다는 걸 알면서. "…무서우세요?" "응. 근데 모르는 게 더 무서웠어. 확실한 건 하나야. 무슨 얘기를 듣든, 다 듣고 나서도 나는 여기 있을 거야. 이 지붕 위에. 네 옆에." 그때 이어폰 너머에서 비전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흘러들었다. 그 아이가 퀸즈 남쪽의 낡은 아파트로 들어갔다고. 그 아파트 앞에서 무리의 다른 놈들이 담배를 피우며, 내일 저녁에 뭔가 크게 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피터가 토니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토니도 들었다. 어둠 속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토니가 피터의 손을 찾아 손가락 사이로 자기 손가락을 엮었다. "내일 저녁. 둘 다 지키자. 그 골목도, 그 식탁도." "…네. 둘 다요." 피터는 깍지 낀 손을 꽉 쥐고 3층의 꺼진 창문을 바라보았다. 내일 저녁, 저 창문 안에서 소금 한 통이 들어간 수프가 끓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식탁이 차려지기 전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먼저 시작될 것이다. 피터는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품은 채 토니의 어깨에 다시 이마를 기댔다. 오늘 밤만큼은 그 어깨가 피터의 것보다 덜 떨리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은 넷이 함께 먹었다. 옆방에서 자고 일어난 토니가 머리가 사방으로 뻗친 채 3층에 올라오자, 벤이 신문 너머로 그 머리를 보며 혀를 찼다. 아이언맨도 아침엔 별수 없네. 메이가 커피를 따라 주며 토니에게 물었다. "잘 잤어요? 그 방 침대 삐걱거리죠. 피터가 처음 왔을 때 쓰던 거예요." "엄청 삐걱거리던데요. 근데 잘 잤어요. 이상하게. 요즘 새벽에 숨 안 걸리고 잔 날이 손에 꼽는데." "그 침대가 원래 그래요. 우리 피터도 처음 왔을 때 그 침대에서 처음으로 깊이 잤대요." 피터가 토스트를 씹다 말고 메이를 보았다.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었다. 메이가 커피 주전자를 든 채 눈을 찡긋했다. 벤이 신문을 반으로 접어 식탁에 내려놓으며 토니를 보았다. "오늘 저녁 얘기 듣고 나서도 그 침대에서 잘 잘 수 있겠어요?" "…모르겠어요. 근데 못 자도 괜찮아요. 오늘 밤은 안 자도 돼요. 들을 얘기가 많을 테니까." "그럼 커피 많이 내려 놔야겠네." "블랙으로요. 진하게." "내 취향이네. 메이, 이 사람 커피는 나랑 같은 걸로 줘." 메이가 커피 주전자를 든 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넷이 함께 웃었다. 창밖은 맑았다. 토요일 아침의 햇살이 식탁 위의 잼 병을 투명한 주황색으로 비추고 있었다. 오늘 저녁 이 식탁에서 모든 걸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저녁보다 먼저, 그 골목이 있었다. 피터는 토스트를 내려놓고 토니를 흘끗 보았다. 토니가 커피잔 너머로 피터를 보며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지키자는 끄덕임이었다. 오후의 3층 부엌은 김으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커다란 냄비 두 개가 끓었다. 하나는 수프, 하나는 고기 스튜. 메이가 그 사이를 오가며 국자로 간을 보았다. 토니는 식탁에 앉아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칼이 감자 위를 지날 때마다 껍질과 함께 살이 절반씩 날아갔다. 메이가 도마 위에 쌓인 앙상한 감자들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세계 최고의 천재라면서 감자 하나를 못 깎아요?" "감자는 설계도가 없잖아요. 모양이 다 제멋대로고." "사람도 다 제멋대로예요. 그래도 잘만 깎고 다니시던데." "…그거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둘 다요." 메이가 토니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감자를 한 바퀴 돌려 깎아 보였다. 껍질이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져 도마 위로 내려앉았다. 토니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피터는 개수대 앞에서 그릇을 헹구며 그 둘을 보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웃는 동안에도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젖은 그릇이 손바닥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오늘 저녁이었다. 감자 껍질을 다 벗긴 뒤, 메이는 토니에게 양파를 맡겼다. 토니는 양파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투덜거렸다. 아머에 방독면 기능을 넣은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메이가 웃으며 그 칼도 빼앗았다. 피터는 그 소란을 등지고 돌아서다, 거실 소파에 앉은 벤과 눈이 마주쳤다. 벤이 신문 너머로 손짓했다. 피터가 다가가자 벤은 신문을 접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저녁에 할 얘기. 순서 정했어?" "…아뇨. 못 정했어요.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해. 너 다섯 살 때부터. 그 교차로에서 내 손 안 놓친 그 세계의 너부터. 그 양반은 네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잖아. 거기서부터 들어야 나머지가 들려." "…삼촌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나도 메이한테 청혼할 때 처음부터 했어. 내가 왜 떠났었는지부터. 중간부터 하면 전부 변명처럼 들리거든." 피터는 그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젊은 벤이 메이 앞에서 처음부터 더듬더듬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이 떠올라서. 벤은 그 웃음을 못 본 척 신문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신문 너머에서 덧붙였다. "그리고 다 말하고 나서, 그 양반이 무슨 얼굴을 하든 도망치지 마. 너 도망치는 버릇 있는 거 알아. 박람회장인가 뭔가 한 날 밤에 지붕에서 외벽 타고 도망쳤다며."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 양반이 해피라는 사람한테 했고, 해피가 메이한테 했고, 메이가 나한테 했지. 이 동네 소문은 철물점보다 빨라." 부엌에서 토니가 양파 때문에 연달아 재채기를 했다. 벤이 신문 너머에서 어깨를 들썩였다. 피터는 귀 끝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번엔 안 도망칠게요. 그 사람이 무슨 얼굴을 하든요." "그래. 그럼 됐어." 오후 4시가 넘자 메이는 피터에게 식탁 차리는 일을 맡겼다. 피터는 찬장에서 접시를 꺼내다 멈칫했다. 넷. 접시를 넷 꺼내는 게 이 집에서는 처음이었다. 피터는 그 네 번째 접시를 한참 손에 들고 있었다. 메이가 냅킨을 접다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뭐 해. 그거 그 사람 자리야. 네 옆에 놔." "…네." "떨려?" "…엄청요." "나도 네 삼촌한테 그 얘기 처음 들었을 때 떨렸어. 근데 떨리는 건 좋은 거야.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니까. 안 떨리면 그게 더 문제지." 메이가 접은 냅킨을 네 번째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끝을 삼각형으로 세운, 손님용 접기였다. 피터는 그 냅킨의 뾰족한 끝을 보며 숨을 골랐다. 이 집 식탁에 손님용 냅킨이 놓이는 걸 피터는 7년 동안 몇 번 보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그 냅킨은 손님이 아니라, 이제 이 식탁의 한 사람이 될 사람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벽시계가 5시를 쳤다. 벤이 소파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치고 열쇠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짤그랑, 하는 소리에 피터가 개수대에서 돌아섰다. "어디 가세요?" "가게. 오늘 일찍 닫는다고 셔터만 반쯤 내려놓고 왔어. 나사 정리도 덜 했고. 30분이면 돼." "같이 가요." "넌 여기 있어. 메이 혼자 저 감자 더미 감당 못 해. 그리고 저녁 얘기 준비해야지. 아까부터 얼굴이 하얘." "삼촌 혼자 가시면 안 돼요. 이번 주 내내 같이 갔잖아요." "이번 주 내내 아무 일 없었잖아. 그리고 지금은 해도 안 졌어. 30분이면 다녀온다니까." 벤이 피터의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툭 헝클어뜨렸다. 토니가 하던 그대로였다. 피터가 그 손 아래에서 입을 열려는 순간, 토니가 식탁에서 일어나 양파 즙이 묻은 손을 행주에 닦았다. "그럼 제가 같이 갈게요. 감자는 메이 씨가 저보다 100배는 잘 깎으니까, 제가 빠지는 게 도와드리는 거예요." "…동네 사람들이 아이언맨 경호원 붙은 철물점 주인이라고 놀리겠네." "놀리라고 하세요. 월급은 수프로 받기로 했잖아요." 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토니가 외투를 걸치며 피터를 돌아보았다. 눈으로 말했다. 내가 갈게, 넌 여기 있어. 피터는 그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토니가 벤의 바깥쪽에 설 것이다. 서른두 개의 불빛도 있었다. 현관문이 닫히고,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피터는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벤과 토니가 나란히 골목을 걷고 있었다. 벤이 안쪽, 토니가 차도 쪽. 그러다 그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토니가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바꿔 벤의 골목 쪽에 섰다. 이번 주 내내 피터가 그랬던 것처럼. 벤이 그걸 알아채고 토니를 흘끗 보았다. 무언가를 말했다. 토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노을이 두 등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피터는 그 광경을 눈에 새기며 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 골목은 토니가 지킬 것이다. 나중에 피터는 그 골목 어귀에서 둘이 무슨 말을 나눴는지 알게 되었다. 산소 호흡기를 뗀 지 이틀째 되던 날, 병실 침대에 기대앉은 벤이 사과를 깎아 주며 직접 들려주었다. "그 녀석이 이 골목 앞에서 왜 그렇게 하얘지는지, 스타크 씨는 알아요?" "…몰라요. 근데 오늘 저녁에 들을 거예요. 그때까지는 그 녀석 대신 제가 이 자리에 설게요." "……" "골목 쪽은 제가 걸을게요. 아저씨는 안쪽으로 걸으세요." 벤은 그 대답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토니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3분 뒤, 그릇을 헹구던 피터의 이어폰에서 비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평소의 담담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피터 씨. 퀸즈 남쪽, 그 아이가 들어간 아파트입니다. 불이 났습니다. 1층에서 시작해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불을 질렀습니다. 건물 안에 열두 명 이상. 3층과 4층에 아이들이 있습니다. 소방차 도착까지 11분입니다.] 피터의 손에서 행주가 떨어졌다. 메이가 돌아보았다. 피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메이의 손에서 감자가 굴러떨어졌다. 메이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가." "…메이." "가라고. 그 얼굴은 누가 위험하다는 얼굴이잖아. 벤은 그 양반이 같이 있어. 가." 피터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며 이어폰을 눌렀다. 토니였다. 벤과 함께 걷는 중인지 숨소리 너머로 동네의 저녁 소음이 흘러들었다. 신호 한 번 만에 받았다. [들었어. 비전이 나한테도 보냈어. 남쪽 아파트, 불.] "스타크 씨, 이상해요. 그 무리가 어젯밤에 오늘 저녁 크게 하자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애가 사는 아파트에 불이 났어요. 저를 그쪽으로 끌어내려는 거예요. 스파이더맨이 불을 보면 갈 거라는 걸 알고요." [그럼 가지 마.] "갈 거예요. 안에 아이들이 있어요. 11분 동안 아무도 못 꺼내요." [……] "스타크 씨. 벤 삼촌 옆에 있어 주세요. 절대 떨어지지 마세요. 그 골목 지날 때 삼촌 바깥쪽에 서 주세요. 부탁이에요." […알았어. 안 떨어져. 약속해. 너도 약속해. 불 속에서 혼자 다 꺼내려고 하지 마. 비전 보낼게.] 1층 방에서 30초 만에 슈트를 갈아입고 창문을 넘었다. 남쪽 하늘에 검은 연기가 기둥처럼 솟아 있었다. 지붕과 지붕을 건너는 동안 귓가에서 비전이 남은 시간을 셌다. 9분, 8분. 탄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왔다. 고무와 오래된 나무가 함께 타는, 목구멍을 긁는 냄새였다. 아파트는 5층짜리 낡은 벽돌 건물이었다. 1층 창문마다 불길이 혀처럼 날름거리며 위층을 핥아 올라가고 있었다. 길에 모인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위층 창문마다 사람들이 매달려 손을 흔들었다. 4층에 노인 하나, 3층에 아이 둘. 피터는 길 건너 건물의 벽을 박차고 4층 창문으로 뛰어들었다. 연기가 폐를 할퀴었다. 노인을 안아 들고 창밖으로 거미줄을 쏘아 가로등에 걸고, 그 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사람들 품에 넘겼다. 다시 위로. 3층. 아이 하나를 등에 업고 하나를 품에 안았다. 다시 아래로. 다시 위로. 연기 속에서 숫자를 셌다. 셋, 넷, 다섯. 반대편 창문들 사이로 하얀 빛 하나가 오가고 있었다. 비전이었다. 여섯 번째로 3층 복도에 뛰어들었을 때, 피터는 연기 속에서 잠긴 문 하나를 걷어차 열었다. 안에 작은 여자아이가 웅크린 채 기침하고 있었다. 피터는 아이를 끌어안고 창밖으로 거미줄을 쏘아 길 위로 내려섰다. 아이를 사람들 사이에 내려놓는 순간, 군중 속에서 누군가 피터의 팔을 붙잡았다. 그을음으로 범벅이 된 얼굴. 식료품점의 그 아이였다. 아이가 숨을 몰아쉬며 피터의 귓가에 다급하게 말했다. "불 지른 거 그놈들이야. 스파이더맨 끌어내려고. 근데 그게 끝이 아니야. 그놈들 지금 철물점 털러 갔어. 그 주인이 요즘 아이언맨이랑 친하다고. 그리고 총 있어." 피터의 등줄기를 찬물이 훑고 지나갔다. 철물점. 이어폰을 눌러 토니를 불렀다. 대답 대신 잡음이 지글거렸다. 다시 불렀다. 비전을 불렀다. [스타크 씨의 회선이 방금 끊겼습니다. 철물점 블록의 감지기 일곱 개가 동시에 꺼졌습니다. 누군가 전파 방해 장치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5층에 갇힌 가족을 꺼내는 중입니다. 피터 씨, 지금은 그쪽으로 갈 수 없습니다.] 피터는 아이의 손을 뿌리치듯 떼어 내고 가장 가까운 건물의 지붕으로 솟구쳤다. 북쪽으로. 철물점으로. 열두 블록. 지붕과 지붕 사이의 허공에서, 피터는 그 봄을 보았다. 열다섯 살의 피터와 벤이 나란히 걷던 저녁. 골목 어귀에서 튀어나온 남자. 떨리는 총구. 피터의 손목 안쪽에서 근질거리던 힘. 한 걸음이면 됐다. 그 한 걸음을 떼지 못했던 반 박자. 그리고 그 반 박자 사이에 피터의 앞을 가로막던 벤의 등. 그날 피터는 벤 바로 옆에 있었다. 너무 가까이 있었는데도 늦었다. 오늘은 열두 블록이나 떨어져 있었다. 피터는 이를 악물고 다음 지붕을 박찼다. 이번엔 그 자리에 토니가 있었다. 약속했다. 떨어지지 않겠다고. 같은 시각, 철물점의 셔터는 반쯤 내려진 채였다. 벤은 가게 안에서 나사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토니는 문틀에 기대 서서 바깥의 골목 어귀를 보며 손목의 칩을 만지작거렸다. 감지기 몇 개가 꺼졌다는 걸 토니도 알았다. 이어폰이 끊긴 것도. 그 지글거리는 정적 속에서 토니는 손목의 칩을 두 번 두드렸다. 탑에서 아머가 출발하는 신호였다. 도착까지 3분. "스타크 씨, 이 상자 좀 저 위 선반에 올려 줘요. 키 큰 사람 쓸모가 이럴 때 있네." "…아저씨. 오늘은 그냥 셔터 다 내리고 가시죠. 나사는 내일 정리하고요." "왜요. 뭔 일 있어요?" "감이요. 그 녀석한테 옮은 감." 벤이 나사 상자를 든 채 토니를 보았다. 굳은 얼굴이었다. 벤은 그 얼굴을 알았다. 이번 주 내내 피터가 그 골목 앞에서 짓던 얼굴이었다. 벤은 상자를 계산대에 내려놓고 외투를 집어 들었다. "알았어요. 가죠." 그 순간 바깥에서 비명이 들렸다. 아이의 목소리였다. 골목 쪽이었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골목 어귀에서 열 살쯤 된 남자아이가 뛰어나오고 있었다. 2층 할머니의 손자, 벤이 지난주에 자전거 체인을 고쳐 준 그 아이였다. 그 뒤로 후드를 쓴 사내 둘이 쫓아 나왔다. 하나가 아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아이가 아스팔트에 무릎을 찧으며 넘어졌다. 사내가 아이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아이가 소리를 지르자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 검고 묵직한 것이 들려 있었다. 벤은 생각하지 않았다. 반쯤 내려진 셔터 아래로 몸을 숙여 뛰쳐나갔다. 등 뒤에서 토니가 벤을 불렀지만 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벤은 골목 어귀로 달려가 넘어진 아이 앞을 막아섰다. 두 팔을 벌리고. 총구가 벤의 가슴을 향했다. 벤은 피하지 않았다. 아이를 등 뒤에 감춘 채 사내를 보았다. 식료품점에서 쏘라고 소리치던,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벤은 그 얼굴을 몰랐다. 하지만 그 눈이 어떤 눈인지는 알았다. 무서워서 쏘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그 애 놔줘요. 돈 필요하면 가게에 있는 거 다 가져가요. 애는 건드리지 말고." "늙은이는 빠져. 아이언맨이랑 친하다며. 가게에 뭐 숨겨 놨어." "나사밖에 없어요. 제일 비싼 나사. 그거라도 가져가요." 토니가 셔터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맨몸이었다. 아머는 아직 퀸즈의 하늘 어딘가에 있었다. 토니가 벤과 사내 사이로 몸을 던지며 손목의 칩을 비틀었다. 하늘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붉은빛 하나가 저녁 하늘을 가르며 내리꽂혔다. 판금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와 토니의 팔에, 어깨에 맞물리기 시작했다. 사내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골목을 찢었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토니에게 맞물리려 날아들던 붉은 가슴판 하나가 벤의 가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 총탄이 그 판금에 부딪혀 불꽃을 튀기며 튕겨 나갔다. 두 번째 총탄은 그 가장자리를 비껴, 벤의 가슴으로 들어갔다. 벤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등 뒤의 아이를 감싼 채로. 반쯤 아머에 감싸인 토니의 팔이 그 무게를 받아 냈다. 벤의 외투 가슴께에 검붉은 얼룩이 번지기 시작했다. 골목 어귀의 배수관 위에서 꺼져 있던 감지기 하나가 다시 켜지며 붉게 깜빡였다. 그리고 열두 블록 남쪽의 지붕 위에서, 피터의 이어폰이 다시 연결되었다. 처음 흘러든 건 총성의 메아리였다. 그다음은 토니의 목소리였다. 7년 동안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로, 벤을 부르고 있었다. 마지막 지붕의 가장자리에서 피터는 그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철물점의 셔터가 반쯤 내려진 채 저녁노을을 받아 녹슨 주황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 둥근 인파의 한가운데, 아스팔트 위에 회색 외투가 누워 있었다. 그 옆에 무릎 꿇은 붉은 형체 하나. 반쯤 아머에 감싸인 토니였다. 맨손 두 개가 회색 외투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고, 그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것이 자꾸만 배어 나왔다. 그 풍경을 피터는 너무 잘 알았다. 열다섯 살의 봄. 골목 어귀. 아스팔트 위의 같은 외투. 그때는 피터의 손이 그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너무 어리고 서툰 손이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박동이 점점 약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피터는 지붕 끝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다리가 그때처럼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골목 반대편 끝에서 후드를 쓴 사내 하나가 달아나는 게 보였다. 손에 총을 쥔 채였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 봄의 남자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피터는 그날 벤 곁에 무릎을 꿇느라 그 남자의 등을 놓쳤고, 경찰은 몇 달 뒤 수사를 접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채로, 그 남자는 피터의 꿈속에서만 몇 년이고 골목을 달아났다. 이번엔 놓치지 않을 것이다. 피터는 지붕을 박차고 사내가 달아나는 쪽으로 손목을 뻗었다. 거미줄이 사내의 발목을 감았다. 사내가 고꾸라져 아스팔트 위를 굴렀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발목의 거미줄을 단번에 그어 끊었다. 다시 일어나 달렸다. 피터가 허공에서 다음 거미줄을 쏘려는 순간, 이어폰 너머에서 토니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갈라지고 떨리는,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분명한 목소리였다. [피터! 그놈 놔둬! 여기로 와! 지금! 혼자 붙잡지 마. 같이 붙잡아!] 피터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손목을 거두었다. 사내의 등이 골목의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놓쳤다. 또. 그런데 이번엔 놓친 게 아니라 놓아준 것이었다. 피터는 그 모퉁이를 등지고 골목 어귀의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토니 옆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에 닿는 아스팔트가 아직 한낮의 열기를 품고 있었다. 벤은 눈을 뜨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얬다. 회색 외투의 가슴께가 검붉게 젖어 있었고, 토니의 두 손이 그 자리를 덮고 있었다. 아머의 장갑이 미처 맞물리지 못한 맨손이었다. 벤의 등 뒤에서 2층 할머니의 손자가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무릎이 까졌을 뿐, 다친 데는 없었다. "…피터." 벤이 피터를 보았다. 그리고 웃으려 했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가 힘없이 무너졌다. 피터는 벤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웠다. 그 봄에도 이 손을 붙잡았었다. 그때는 이 손이 마지막으로 피터의 손을 한 번 쥐었다가, 다시는 쥐지 않았다. 피터는 이번엔 그 손이 풀리지 않게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삼촌. 저예요. 여기 있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늦어서…" "…늦긴. 딱 맞춰 왔네. 그 애는. 그 애 괜찮아?" "괜찮아요. 삼촌 뒤에 있어요. 다친 데 하나도 없어요." "…그럼 됐어." 벤의 눈꺼풀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저녁에 내려오는 무거운 셔터처럼. 피터의 목구멍이 꽉 조여들었다. 그 봄에도 이 눈꺼풀이 이렇게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열리지 않았다. 피터가 벤을 부르려는 순간, 토니가 먼저 외쳤다. "눈 감지 마세요! 아저씨, 눈 뜨고 계세요! 나사 값 아직 덜 냈어요. 제일 비싼 거 한 상자 더 사야 된다고요. 그러니까 눈 뜨고 계세요!" 벤의 눈꺼풀이 다시 열렸다. 흐릿하던 눈동자가 토니의 얼굴을 찾아 천천히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피가 섞인 숨으로, 아주 작게 웃었다. "…제일 비싼 나사는 제일 쓸데없는 나사라니까." 토니가 그 웃음 앞에서 이를 악물었다. 두 손에 더 힘을 실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계속 흘렀다. 토니가 피터를 돌아보았다. 그 눈이 젖어 있었다. 그런데 흔들리지 않았다. "……" "피터. 거미줄. 상처를 막아. 사막에서 그걸로 내 상처 감았잖아. 지금 그거 해. 내가 누르고 있을 테니까 그 위에 감아. 같이 해." 피터는 손목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거미줄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토니가 반쯤 아머에 감싸인 손으로 피터의 떨리는 손목을 붙잡았다. "숫자 세. 네가 나한테 맨날 세어 주던 거. 지금 너한테 세."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손목의 떨림이 아주 조금 잦아들었다. 피터는 토니의 두 손이 누르고 있는 그 자리 위로 거미줄을 쏘았다. 얇게, 촘촘하게. 사막의 그 밤처럼. 토니가 손을 한 뼘씩 떼는 자리마다 거미줄이 상처를 덮었다. 하얀 붕대 같던 거미줄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피터는 그 위에 다시 쏘았다. 다시, 또다시. 하얀 층이 붉은 층을 덮고, 그 위를 또 하얀 층이 덮을 때까지. 토니가 마지막으로 손을 떼었다. 거미줄의 층이 벤의 가슴을 단단히 싸매고 있었다. 더는 피가 배어 나오지 않았다. 아직은. 토니가 피범벅이 된 손으로 아스팔트를 짚고 숨을 몰아쉬다가, 손목의 칩을 두드렸다. 허공에 떠 있던 나머지 판금들이 날아와 하나씩 맞물렸다. 다리, 등판, 장갑, 그리고 마지막으로 투구. 토니가 투구의 앞판만 열어 둔 채 벤을 내려다보았다. "병원 가요. 지금. 구급차 기다리면 늦어요. 제가 안고 날아갈게요." "…날아요? 이 나이에 하늘을?" "하늘 한 번 날아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박람회장에서. 하늘 나는 기계 나온다고 메이 씨 생일 선물로 가셨을 때." "…그걸 기억해요?" "그 녀석 가족 일은 다 기억해요." 벤이 다시 웃었다. 이번엔 피가 섞이지 않은 웃음이었다. 토니가 아머의 팔을 벤의 등 아래와 무릎 아래로 밀어 넣었다.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숨까지 참는 게 보였다. 벤을 들어 올리자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피터는 벤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일어섰다. "같이 가. 손 놓지 말고. 내 등에 매달려." 피터는 토니의 등판에 거미줄을 걸고 그 등에 매달렸다. 한 손은 아머의 어깨를, 다른 한 손은 벤의 손을 쥔 채.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2층 할머니의 손자가 울면서 아저씨를 불렀다. 피터가 아이를 돌아보며 괜찮을 거라고, 할머니한테 가 있으라고 하자 아이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의 발밑에서 불꽃이 터졌다. 셋이 골목 위로 솟구쳤다. 솟구치는 순간 피터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골목 반대편 끝의 모퉁이 너머, 지붕들 사이로 후드 쓴 그림자 하나가 아직 달아나고 있었다. 이어폰 너머에서 비전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아파트의 마지막 가족을 소방관들에게 넘겼다고, 이제 그쪽으로 가겠다고. [그 사람은 제가 쫓겠습니다. 눈으로만. 손대지 않고. 피터 씨가 나중에 직접 만나셔야 할 사람 같으니까요. 지금은 벤 씨 곁에 계십시오. 개인적인 소견을 덧붙이자면, 피터 씨가 오래 바라시던 선택이 그쪽일 겁니다.] 피터는 대답하는 대신 벤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그 봄에 피터는 벤 곁에 남았고, 그 남자는 영영 사라졌다. 오늘도 피터는 벤 곁에 남았다. 다만 이번엔 그 남자의 등을 지켜보는 눈이 하나 더 있었고, 피터를 매단 채 하늘을 가르는 팔이 있었다. 퀸즈의 저녁 하늘은 불에 달군 쇠처럼 붉었다. 강 너머 맨해튼의 빌딩 유리창마다 노을이 한 조각씩 박혀 있었다. 토니는 지붕들 바로 위를 낮게 날았다. 빠르게, 그러나 흔들리지 않게. 아머의 품 안에서 벤의 몸이 바람결에 아주 조금씩 흔들렸다. 피터의 손 안에서 벤의 손이 점점 식어 갔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삼촌. 눈 뜨세요. 하늘이에요. 보세요. 퀸즈가 다 보여요. 철물점도 보이고, 우리 집도 보여요." "…그래. 보인다. 하늘에서 보니까 우리 동네 작네. 이렇게 작은 데서 평생 살았구나." "작아도 좋은 동네예요. 삼촌이 있어서요." "…피터." "네." "그 세계의 나도, 이렇게 하늘에서 동네를 봤을까." 피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봄의 벤은 하늘을 보지 못했다. 아스팔트 위에서, 골목 벽의 낙서와 쓰레기통 사이에서, 피터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떠났다. 피터는 벤의 손을 꽉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못 봤어요. 그러니까 삼촌이 대신 보세요. 그 세계의 삼촌 몫까지요. 다 보시고, 나중에 저한테 얘기해 주세요. 어땠는지." 벤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피터의 말뜻을 알아들은 눈이었다. 그 세계의 자기가 이 하늘을 보지 못했다는 것. 그 골목에서 끝났다는 것. 벤의 손가락이 피터의 손 안에서 아주 약하게 움직였다. 쥐려고. 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노을, 그 아래의 작은 동네, 멀리 은빛으로 흐르는 강물. "…그럼 오래 봐 둬야겠네. 두 사람 몫이니까." 날아가는 동안 벤의 눈은 아래의 동네를 하나씩 짚어 나갔다. 빨래가 널린 옥상들, 지붕마다 녹슨 위성 안테나, 학교 운동장의 하얀 선. 그리고 강변의 작은 야구장. 벤의 눈이 거기서 멈췄다. "…저기. 저 야구장. 우리 피터가 다섯 살 때 저기서 처음 공을 쳤어. 이 세계의 우리 피터가. 공이 2미터도 안 굴러갔는데, 홈런이라고 베이스를 네 바퀴나 돌았어. 한 바퀴만 돌면 되는 거라고 해도 안 듣고." "…그 세계의 저도 저기서 쳤어요. 똑같이 네 바퀴 돌았어요. 삼촌이 그때도 한 바퀴면 된다고 했는데요." "…그랬구나. 둘 다." 벤이 웃었다. 피 섞인 숨이 아니라, 정말로 웃었다. 그리고 야구장이 발아래에서 멀어지는 걸 오래 눈으로 좇았다. 피터는 벤의 손을 쥔 채 그 시선을 따라갔다. 두 세계의 다섯 살이, 같은 운동장에서 같은 바퀴를 네 번 돌았다. 그 아이 하나는 이 세계에서 멈췄고, 하나는 지금 이 하늘에서 그 아이의 삼촌 손을 붙잡고 있었다. 피터는 이어폰을 눌러 메이를 불렀다. 신호가 가자마자 메이가 받았다. 비전에게서 이미 들었는지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였다. [피터. 벤은. 벤은 어떻게 됐어.] "메이. 살아 있어요. 지금 같이 날고 있어요. 스타크 씨가 안고 병원으로 가고 있어요. 퀸즈 종합 병원이요. 메이도 지금 그리로 오세요." [살아 있어? 정말이야? 숨 쉬어?] "네. 숨 쉬어요. 하늘 보고 있어요. 하늘에서 보니까 동네가 작대요." 수화기 너머에서 메이의 울음이 터졌다. 그 울음 너머로 낮고 서툰 남자의 목소리가 메이를 불렀다. 해피였다. 해피가 메이를 차에 태우겠다고 말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피터는 그 목소리에 숨을 내쉬었다. 메이 곁에도 누군가 있었다. [스타크 씨. 병원에 연락했습니다. 흉부외과 의료진이 옥상에서 대기합니다. 혈액형은 메이 씨에게 확인했습니다. 메이 씨는 해피 씨의 차로 출발했습니다. 12분 뒤 도착합니다.] "고마워, 비전." 토니가 투구 안에서 짧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바람 소리에 묻히지 않을 만큼만, 피터에게만 들리게 목소리를 낮췄다. "피터. 아까 그 남자 쫓으려다 멈췄지." "…네." "잘했어. 그 남자 쫓았으면 지금 이 손 못 잡고 있었어. 그 세계에서 그 남자가 영영 사라진 거, 네 잘못 아니야. 그때 넌 이 손을 잡고 있었잖아. 그게 맞았어. 오늘도 맞고. 그러니까 지금은 이 손만 잡고 있어." 바람이 마스크를 때렸다. 아래로 퀸즈의 지붕들이 흘러갔다. 피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가 볼 수 없는데도. 그런데 토니는 알았는지, 투구 안에서 짧게 숨을 내쉬었다. 벤의 손이 피터의 손 안에서 스르르 힘을 잃었다. 피터가 고개를 숙여 보니 벤의 눈이 감겨 있었다. 피터는 그 손을 흔들며 벤을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토니가 투구 안에서 빠르게 말했다. 맥박은 있다고. 약하지만 있다고. 의식만 잃은 거라고. 피터는 벤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참고. 하나, 둘. 내쉬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삼촌, 따라 하세요. 들리잖아요. 들이쉬고." 투구 안에서 토니의 목소리가 그 숫자에 겹쳐졌다.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두 목소리가 붉은 하늘 위에서 한 사람의 숨을 위해 같은 박자를 셌다. 그 봄의 골목에서는 아무도 이 숫자를 몰랐다. 병원의 옥상이 저 앞에 보였다. 헬기 착륙장 위에 하얀 가운들이 들것을 들고 서 있었다. 토니가 착륙장에 내려앉아 벤을 들것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의사 하나가 벤의 가슴을 감싼 하얀 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냐고. 피터는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지혈이라고. 떼면 다시 피가 나니까 수술실에서 조금씩 떼어 달라고. 의사가 빨갛고 파란 마스크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들것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렸다. 피터는 그 옆을 따라 달렸다. 벤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 앞에서 간호사가 피터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냈다. 여기서부터는 안 된다고. 벤의 손이 피터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피터는 그 앞에 서서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피범벅이 된 장갑. 손가락 사이에 아직 벤의 손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봄의 밤에도 이렇게 빈손이 남았었다. 그 손은 다시 채워지지 않았다. 피터는 그 손을 쥐었다 폈다. 등 뒤에서 아머의 무거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투구를 벗은 토니가 피 묻은 얼굴로 피터 옆에 섰다. 그리고 피 묻은 아머의 손으로 피터의 빈손을 붙잡았다. 꽉. "…스타크 씨. 우리, 같이 붙잡았어요?" "응. 같이 붙잡았어. 네가 거미줄 감고, 내가 누르고, 둘이 숫자 세고.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어. 너도, 나도." "…근데 아직 몰라요. 저 안에서." "알아. 그러니까 기다리자. 같이." 한참 뒤, 토니가 먼저 일어섰다. 아머를 벗어 착륙장 한쪽에 세워 두고, 피 묻은 셔츠 차림으로 피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피터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하자, 토니가 피터의 허리를 받쳤다. "아래로 가자. 수술실 앞. 메이 씨 곧 올 거야. 메이 씨 왔을 때 네가 거기 있어야 해." "…네. 근데 이 슈트로요?" "아, 그렇지. 피투성이 스파이더맨이 수술실 앞에 앉아 있으면 다들 기절하겠다." 토니가 세워 둔 아머의 등판을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반듯하게 접힌 회색 운동복 한 벌이었다. 토니가 그걸 피터의 품에 안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7년 동안 네가 대신 맞고 옷 찢어지는 걸 하도 봐서. 아머마다 한 벌씩 넣어 다녀." 피터는 그 운동복을 끌어안은 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젖은 웃음이었다. 7년 동안 몰랐던 것이 또 하나, 이 사람의 아머 등판 안에 접혀 있었다. 피터를 위한 여벌옷이. "…이것도 몰랐어요. 7년 동안." "너도 나한테 말 안 한 거 많잖아. 나도 좀 있어야지." 둘은 옥상의 비상구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피터는 토니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 봄의 밤, 피터는 이런 계단을 혼자 내려갔었다. 지하의 차가운 방으로 가는 계단을. 오늘은 수술실로 가는 계단이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었다. 수술실 앞 복도는 하얗고 길었다. 소독약 냄새가 공기 속에 얇게 깔려 있었다. 끝에서 형광등 하나가 끊어질 듯 깜빡였고, 벽을 따라 놓인 플라스틱 의자들이 일렬로 비어 있었다. 맞은편의 이중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위에 붉은 글씨 하나. 수술 중. 피터는 그 불빛을 올려다보며 의자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토니가 아머에서 꺼내 준 회색 운동복은 소매가 손등까지 내려왔다. 손톱 밑에는 아직 검붉은 것이 남아 있었다. 화장실에서 세 번이나 씻었는데도 지워지지 않았다. 콜슨의 그날처럼. 메이가 도착하기 직전, 피터는 복도 끝의 화장실에서 손을 씻었다. 세면대의 물은 미지근했다. 비누 거품이 손가락 사이에서 연분홍으로 물들었다가 배수구로 빙글빙글 빨려 들어갔다. 피터는 그 거품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비누를 짰다. 거울 속에 회색 운동복을 입은 얼굴이 있었다. 눈 밑이 검게 꺼지고, 관자놀이에 그을음이 한 줄 남아 있었다. 열다섯 살의 봄에도 이 얼굴로 거울 앞에 섰었다. 그때는 아무리 문질러도 손에서 그 색이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도 손톱 밑의 색은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그 피의 주인이 저 문 너머에서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피터는 젖은 손으로 세면대 가장자리를 짚고 숨을 골랐다.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거울 속의 얼굴이 아주 조금 덜 하얘졌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뛰어왔다. 메이였다. 앞치마도 벗지 못한 채였다. 앞치마 자락에 감자 껍질 한 조각이 아직 붙어 있었다. 그 뒤로 해피가 숨을 헐떡이며 따라왔다. 메이는 피터를 보자마자 달려와 끌어안았다. 양파와 수프 냄새가 났다. 메이가 피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들어 올렸다. "살아 있지. 아직 살아 있지." "…네. 수술 중이에요. 스타크 씨가 안고 날아왔어요. 하늘에서 삼촌이 동네를 봤어요. 작대요." "그 사람이, 하늘을 날았어?" "네. 두 사람 몫까지 오래 봐 둬야겠다고 했어요." 메이가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소리를 냈다. 그리고 피터를 다시 끌어안았다. 토니는 복도 벽에 기대 선 채 그 둘을 보고 있었다. 셔츠는 아직 피에 젖어 있었다. 해피가 토니 옆으로 가서 무언가를 낮게 물었고, 토니가 고개를 저었다. 해피는 메이를 한 번 돌아보더니 말없이 복도 끝의 자판기로 걸어갔다. 잠시 뒤 돌아온 해피의 두 손에 종이컵 네 개가 겹쳐 들려 있었다. 해피는 그중 하나를 메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설탕 두 개 넣었어요. 메이 씨는 단 거 좋아하시잖아요. 저번에 병원에 수프 갖다주실 때 커피에 설탕 넣으시는 거 봤어요." "…고마워요, 해피 씨." 해피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이에게서 의자 하나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피터는 그 빈 의자 하나를 보며 숨을 내쉬었다. 해피는 늘 그랬다. 토니의 곁에서도, 페퍼의 곁에서도, 그리고 이제는 피터의 가족 곁에서도. 투덜거리면서 가장 먼저 달려와, 방해되지 않을 만큼 한 자리를 비워 두고 앉아 있는 사람. 그 서툰 다정함이 오늘 밤 메이에게 얼마나 큰 의지가 될지 피터는 알았다. 토니는 맞은편 벽에 기댄 채 움직이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수술실의 붉은 글씨를 노려보며. 피터가 일어나 그 옆으로 갔다. 토니가 피터를 흘끗 보았다. "앉아 있어. 메이 씨 옆에." "메이 옆에는 해피 씨가 있어요. 저는 여기 있을래요." "…피터. 오늘 저녁 얘기. 식탁에서 하기로 한 거. 오늘은 못 하겠네." "…네." "괜찮아. 미뤄도 돼. 아저씨 깨어나고, 퇴원하고, 다시 식탁 차려지면 그때 해. 나 기다리는 거 잘하잖아. 7년이나 했는데 며칠 더 못 하겠어?" 토니는 웃었다. 피터는 웃지 못했다. 또 미뤄도 된다고 했다. 7년 동안 그랬듯이. 다음 주 토요일에, 이 일이 끝나면, 언젠가. 그 말들이 한 겹씩 쌓여 온 무게를 피터는 알았다. 그리고 그 무게를 이 사람이 매번 웃으면서 들어 왔다는 것도. 피터는 수술실의 붉은 글씨를 보았다. 그 문 너머에서 벤이 숨을 쉬고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끝났던 사람이. 오늘 그 이야기 하나가 바뀌었다. 그렇다면 오늘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한 시간, 두 시간. 붉은 글씨는 꺼지지 않았다. 해피가 메이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피터 옆자리로 옮겨 와 앉았다. 메이는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잠깐 눈을 붙이고 있었다. 해피가 그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스가 그 골목에 있었다며. 아머도 다 안 입고." "네. 맨몸으로 삼촌 앞에 뛰어들었어요. 아머는 하늘에서 날아오는 중이었고요." "그 양반은 늘 그래. 내가 경호원 할 때도 그랬어. 경호원이 앞에 서야 하는데 자기가 먼저 뛰어나가. 그래서 내가 맨날 혼났지." "…알아요." "근데 이번엔 좀 다르더라. 그 양반이 자기 사람 말고, 네 사람 지키려고 뛰어나간 거잖아. 7년 전엔 그 양반이 자기 말고 누굴 위해 맨몸으로 뛰어나간 적이 없었어." 해피는 맞은편의 붉은 글씨를 본 채 말했다. 투박한 옆얼굴이었다. 문자에 답장도 잘 안 하면서, 부르면 결국 늘 차를 몰고 오는 얼굴. 해피가 피터를 흘끗 보았다. "너 덕이야. 그 양반 변한 거. 7년 전에 처음 봤을 땐 네가 무슨 사기꾼인 줄 알았어. 카지노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보스한테 매달리는. 근데 이제는 알겠어. 네가 그 양반한테 뭘 해 줬는지." "…저는 아무것도…" "숫자 세 줬잖아. 새벽마다. 비전이 다 말해 줬어. 그거 아무나 못 해." 해피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외투 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초콜릿 바 하나를 꺼내 피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지 않냐는 듯이. 포장지가 체온에 살짝 물러져 있었다. 피터는 그 초콜릿 바를 두 손으로 감쌌다. 말 대신 무언가를 손에 쥐여 주는 사람. 해피는 어느 세계에서나 그랬다. 간호사 하나가 문을 열고 나와 짧게 말했다. 아직이라고. 총탄이 폐를 스치고 심장 가까이에 박혀 있어서 꺼내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다만 가슴에 감겨 있던 그 하얀 것 덕분에 출혈이 생각보다 적었다고. 그게 아니었으면 병원에 오는 동안 이미. 간호사는 거기서 말을 끊고 문 안으로 사라졌다. 잠에서 깬 메이가 피터의 손을 더듬어 붙잡았다. 세 시간째, 피터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수술실 문 앞까지 걸어가 그 문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금속이 이마의 열을 빨아들였다. 문 너머에서 기계가 삐삐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벤의 심장 소리. 아직 뛰고 있는. 피터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떨렸다. 숨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토니가 벽에서 몸을 떼고 다가와 피터의 등에 손을 얹었다. "피터. 숨 쉬어. 들이쉬고…" "…원래 세계에서요." 피터의 목소리가 토니의 숫자를 끊었다. 피터는 문에 이마를 댄 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등에 얹힌 토니의 손이 멈췄다. "원래 세계에서, 삼촌은 오늘 같은 저녁에 죽었어요. 그 골목에서요. 제가 열다섯 살 때요. 거미한테 물린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그 힘을 삼촌한테도 메이한테도 숨기고 있었어요. 그날 철물점에서 삼촌이랑 같이 걸어오는데, 골목 어귀에서 강도가 막아섰어요. 저한테는 그 사람을 한 번에 넘어뜨릴 힘이 있었어요. 근데 그 힘을 쓰면 삼촌이 알게 될 거잖아요. 그래서 망설였어요. 반 박자요. 그 반 박자 사이에 삼촌이 저를 등 뒤로 감싸고 앞으로 나섰어요. 그리고 총소리가 났어요." "……" "그 사람은 도망쳤어요. 저는 쫓지 못했어요. 삼촌 옆에 무릎 꿇고 있었으니까요. 삼촌은 제 품에서 저를 보면서 그러셨어요. 네가 뭘 숨기고 있는지 안다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거라고. 그게 마지막 말이었어요. 삼촌은 하늘도 못 보고 아스팔트 위에서 떠났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끝내 안 잡혔어요." 메이가 의자에서 일어나 피터 옆으로 와서 섰다. 피터의 다른 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해피는 의자에 앉은 채 굳어 있었다. 토니의 손이 피터의 등 위에서 아주 조금 떨렸다. 피터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7년 동안 둑처럼 막아 두었던 것이, 이 하얀 복도의 차가운 문 앞에서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그 골목에 불이 나고, 제가 그쪽으로 끌려가고, 삼촌 혼자 남겨졌을 때. 또 늦을 줄 알았어요. 원래대로요. 그런데 스타크 씨가 거기 있었어요. 그 남자 쫓지 말라고 했어요. 같이 붙잡자고. 그래서 삼촌은 아직 저 안에서 숨 쉬고 있어요. 그 세계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어요." "……" "저는 2008년의 라스베이거스에 갑자기 떨어졌어요. 사고였어요. 다른 세계에서요. 이 세계랑 거의 똑같은데, 하나만 다른 세계요. 거기서는 다섯 살의 피터 파커가 안 죽었어요. 살아서 자랐어요. 그게 저예요. 열다섯 살에 거미한테 물렸고, 그해에 삼촌을 잃었고, 그 이듬해에 한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이 저한테 슈트를 만들어 줬어요. 저를 kid라고 불렀어요. 숨 쉬는 법을 알려 줬어요.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그 숫자,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알려 준 거예요." "……" "그리고 하늘에서 그게 왔어요. 스타크 씨가 구멍 너머에서 본 그 의자에 앉은 그림자요. 타노스라고 불렀어요. 여섯 개의 보석을 다 모아서 손가락을 튕겼어요. 세상의 절반이 먼지가 됐어요. 저도요. 우주선 위에서, 그 사람 품에서요. 가고 싶지 않다고, 미안하다고 하면서요. 그 마녀가 보여 준 그 장면이요. 그거 진짜예요. 제가 그 사람한테 실제로 한 말이에요." 토니의 숨이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등에 얹힌 손이 굳었다. 피터는 이마를 문에서 떼지 않았다. 아직 마지막 말이 남아 있었다. 7년 동안 목구멍 끝에서 몇 번이고 삼켰던 말. "그리고 5년 뒤에, 그 사람이 저를 되살렸어요. 남은 사람들이랑 보석을 다시 모아서. 마지막 싸움에서 그 사람이 직접 만든 장갑을 꼈어요. 그 보석들을 박아서. 그리고 손가락을 튕겼어요. 우리를 지키려고. 저를 지키려고. 그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어요. 가슴의 빛이 꺼졌어요. 제가 이름을 불렀는데 대답을 못 했어요. 목소리가 안 나와서요. 저도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사랑한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만 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이 눈을 감았어요." "……" "그 뒤에 호숫가에서 장례식을 했어요. 작은 화환에 그 사람이 처음 만든 원자로를 올려서 물에 띄워 보냈어요. 증거라고 적힌 거요. 그리고 몇 년 뒤에 또 일이 생겨서, 세상이 저를 잊었어요. 피터 파커라는 이름을 아무도 기억 못 하게 됐어요. 메이도 없었고, 그 사람도 없었고, 아무도 없었어요. 4년 동안 혼자였어요. 그 파편 하나만 들고요." "……" "그 사람이요. 스타크 씨. 제가 아는 그 사람이 당신이에요. 그 세계의 토니 스타크요. 그 사람이 저 때문에 죽었어요. 그래서 저는 여기 왔어요. 사고였지만, 떨어진 뒤로는 사고가 아니었어요. 당신이 그렇게 되는 걸 막으려고요. 카지노에서 당신을 붙잡은 것도, 동굴에서 울었던 것도, 그 코일 감는 법을 알려 준 것도, 다 그 사람이 알려 준 거예요. 당신이요. 다른 세계의 당신이요." 복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형광등이 끝에서 깜빡였다. 문 너머의 기계만 규칙적으로 울었다. 메이가 피터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해피가 의자에서 반쯤 일어선 채 굳어 있었다. 그리고 토니의 손이 피터의 등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피터는 그 손이 떠나는 걸 등으로 느꼈다. 그제야 돌아보았다. 한 걸음 뒤에 토니가 서 있었다. 피 묻은 셔츠, 하얗게 질린 얼굴. 그 눈이 피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피터는 읽을 수 없었다. 7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 사람의 얼굴이 읽히지 않는 건.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무언가가 그 얼굴에서 통째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토니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2001년 8월 10일." "네. 제 생일이에요. 진짜 생일이요. 묘비에 있는 그 날짜요. 손이 기억하는 대로 적어 버렸어요." "…그 붉은 파편. 녹아내린 가장자리. 사막에서부터 들고 다니던 거." "…그 사람 거예요. 마지막 싸움에서 그 사람 아머에서 떨어져 나온 거요." "…그 사람." "네." "내가. 나였어. 처음부터. 네 마음속의 그 사람이. 네가 7년 동안 나를 보면서 보던 사람이. 네가 미안하다고 하던 사람이. 나는 네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그 사람이. 나였어." 토니가 웃었다. 소리 없이. 웃는 모양인데 웃음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안에서부터 금 가는 얼굴이었다. 피터는 한 걸음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토니가 한 걸음 물러섰다. 피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생일 밤에도, 절벽 위에서도 허공에서 멈췄던 건 늘 토니의 손이었다. 이번엔 피터의 손이었다. "스타크 씨…" "잠깐만. 잠깐만, 피터. 지금은… 지금 나는…" 토니가 피 묻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 손 아래에서 숨이 걸리기 시작했다. 피터는 그 소리를 알았다. 수없이 많은 새벽에 들었던 소리. 피터가 다가가려 하자 토니가 다른 손을 들어 막았다. "…숫자 세지 마. 지금은 세지 마. 그거 내가 너한테 알려 준 거라며. 다른 세계의 내가. 지금 그거 들으면… 지금 누가 세어 주는 건지 모르겠어." 토니는 손을 내렸다. 피터를 보지 않았다. 바닥의 리놀륨 무늬만 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복도 끝의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이 조금씩 비틀렸다. 피터가 그 등을 쫓으려 하자 메이가 피터의 팔을 붙잡았다. 피터가 돌아보았다. 메이가 젖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보내 줘. 그 사람도 숨 쉴 데가 필요해. 네가 7년 동안 혼자 들고 있던 걸 저 사람은 방금 한꺼번에 받았어. 그것도 자기가 죽는 얘기를." "…메이. 저 사람이 저를 이제 어떻게 봐요. 제가 7년 동안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는데. 그 사람이 자기라는 걸 알았는데." "그건 저 사람이 정할 거야. 그리고 너도 알잖아. 저 사람이 7년 동안 어떤 사람이었는지." 비상계단의 문이 닫혔다. 철문이 맞물리는 둔한 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렸다. 피터는 그 문을 보며 원래 세계의 마지막 눈을 떠올렸다. 무너진 잔해 위에서, 꺼져 가는 빛 속에서 피터를 보던 눈. 원망하지 않던 눈. 네가 살아서 다행이라는 눈. 방금 저 문 너머로 사라진 눈은 달랐다. 7년 동안 사랑해 온 사람이 사실은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한꺼번에 알아 버린 사람의 눈이었다. 그 눈을 만든 게 자기라는 사실이 피터의 숨통을 조였다. 메이가 피터를 의자에 앉히고 그 옆에 앉아 피터의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 피터는 그 어깨에 이마를 묻고 소리 없이 울었다. 맞은편의 해피가 둘을 오래 보다가, 자기 몫의 종이컵을 피터의 손에 쥐여 주었다. 다 식은 커피였다. "…나는 반도 못 알아들었어. 다른 세계니, 보석이니. 근데 하나는 알아들었어. 보스가 죽는다는 거. 그리고 네가 그거 막으려고 7년을 여기 있었다는 거. 그럼 됐어. 그거면 나는 네 편이야. 보스도 그럴 거고. 지금은 시간이 좀 걸릴 뿐이야." 피터는 메이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종이컵을 쥐었다. 식었는데도 손바닥에 미지근한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수술실 위의 붉은 글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비상계단의 철문 너머 어딘가 위쪽에서, 7년 동안 피터를 기다려 준 사람이 이번엔 피터 없이 혼자서 자기 자신의 죽음과 마주 서 있었다. 병원 옥상의 바람은 차가웠다. 강 쪽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헬기 착륙장의 하얀 원을 핥고 지나갔다. 토니는 그 가장자리, 낮은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있었다. 몇 시간 전 벤을 안고 내려앉았던 자리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아직 검붉은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토니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셔츠 소매에, 손톱 밑에, 손금의 골마다 같은 색이 배어 있었다. 손이 떨렸다. 이상하게도 숨은 걸리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이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7년 치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서랍이었다. 말리부의 작업실에서 탑의 작업실로, 탑에서 기지로. 토니는 작업실을 옮길 때마다 그 서랍만은 통째로 들고 다녔다. 굴미라 무기의 일련번호. 동굴에서 휘갈긴 코일 메모. 사막의 모래가 아직 바닥에 깔린 유리병. 카지노의 주사위 두 개. 2001년 8월 10일이라고 적었다가 줄을 그어 고친 첫 신청서. 원자로를 처음 켠 날짜를 새긴 드라이버. 그 녀석의 쪽지. 그리고 몇 달 전에 올려놓은, 가고 싶지 않아요, 미안해요, 라고 적은 메모 한 장. 토니는 그 조각들을 머릿속 작업대 위에 하나씩 늘어놓았다. 7년 동안 그것들은 늘 하나의 그림을 그리려 들었다. 토니는 매번 그 그림을 끝까지 보지 않았다. 끔찍할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그 그림 속에 자기가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 녀석이 바라보는 사람이 자기가 아닐 것 같아서. 그런데 방금 그 하얀 복도에서, 그 녀석이 그 그림을 통째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 그림 한가운데에, 처음부터 토니가 있었다. "…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람 속에서, 소리 내어. 멈출 수가 없었다. 어깨가 들썩였고, 웃는데 눈물이 흘렀다. 토니는 피 묻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바닥 안에서 웃음과 울음이 뒤엉켰다. 7년. 7년 동안 질투했다. 그 녀석의 마음속에 사는 그 사람을. 서른여섯 번째 아머를 못 입는 이유였던 그 사람의 기억을.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던 절벽 위의 그 문장 속의 사람을. 그 모든 질투의 끝에 서 있던 그 얼굴이,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이었다. 손을 내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퀸즈의 밤하늘에 별 몇 개가 박혀 있었다. 강 건너 맨해튼의 불빛이 그 별들을 자꾸 지웠다. 그 하늘 너머 어딘가에서 의자에 앉은 그림자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멍 너머에서 토니가 본 그것. 타노스. 그 녀석이 그 이름을 말했다. 여섯 개의 보석. 손가락. 먼지. 토니는 그 단어들을 혀끝에서 굴렸다. 그리고 그 끝에 오는 단어까지. 장갑. 그 사람이 직접 만들어 꼈다고. 손가락을 튕겼다고. 돌아오지 못했다고. 토니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이 손이 그 장갑을 낄 것이다. 그 녀석이 아는 이야기대로라면. 그리고 손가락을 튕길 것이다. 그 녀석을 되돌리려고. 토니는 그 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이상했다. 무섭지 않았다. 자기가 죽는 이야기를 방금 들었는데. 토니는 그 이유를 알았다. 그 사람이 왜 그 장갑을 꼈는지 알았으니까. 너무 잘 알았다. 지금의 자기도 그 녀석을 위해서라면 똑같이 할 것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무서운 건 그쪽이었다. 자기가 그걸 할 거라는 것. 그리고 그 녀석이 그걸 막으려고 7년 동안 혼자 그 무게를 들고 있었다는 것. 카지노의 번쩍이는 불빛 아래, 낯선 청년 하나가 토니의 팔을 붙잡았었다. 숨이 넘어가는 얼굴로. 그 협곡으로 가지 마세요, 제발요, 하고. 그때는 술 취한 팬이 헛소리를 하는 줄 알았다. 그 손이 왜 그렇게 떨렸는지 이제 알았다. 그건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난 사람의 손이었다. 4년 만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무기상의 팔을, 그 녀석은 그렇게 붙잡았던 것이다. 동굴의 어둠 속에서 처음 켜진 원자로를 보며 울던 얼굴도 떠올랐다. 알아요, 그래서 울어요. 그 녀석은 그때 처음 켜진 빛을 보면서 그 빛이 꺼지는 날을 보고 있었다. 사막에서 토니를 업고 걷던 등. 생일 밤, 언제 죽는지 아느냐는 질문 앞에서 무너지던 얼굴. 그 녀석은 알고 있었다. 정확히. 그리고 7년 동안 단 한 번도 그걸 내려놓지 않았다. "…바보 같은 녀석." 숫자도 그랬다.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토니는 그 숫자로 7년을 버텼다. 그런데 그 숫자를 처음 만든 건 그 녀석이 아니었다. 다른 세계의 토니였다. 그 사람이 열여섯 살의 그 녀석에게 가르쳐 주었고, 그 녀석이 그걸 이 세계로 들고 와서, 아직 아무것도 가르쳐 줄 줄 모르던 토니에게 거꾸로 세어 주었다. 코일도 그랬다. 안쪽 고리는 반대 방향으로 한 겹 더. 피터 배열이라고 이름 붙였던 그것도, 결국 토니가 토니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그 녀석의 손을 거쳐서. 토니는 그 고리를 머릿속으로 따라갔다. 끝이 없는 고리였다. 자기가 자기에게 건넨 것들. 그 고리의 한가운데에는 늘 그 녀석이 서 있었다. 두 세계의 토니 사이에서, 두 사람 몫을 다 짊어진 채로. 질투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앉았다. 그 녀석이 들고 있던 무게가, 처음으로 토니의 가슴에 그대로 얹혔다. 토니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화면을 켜자 맨 위에 그 녀석의 이름이 떠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어제 오후의 것이었다. 오늘 밤 전화할게요, 꼭요. 토니는 그 아래로 손가락을 내렸다. 7년 치의 메시지가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지금 도착했어요. 오늘 철물점 들렀어요. 메이가 수프 남겨 놨대요. 해바라기 싹 났어요. 무사해요. 무사해요. 무사해요. 대부분이 그 말이었다. 무사하다는 말. 토니는 그 단어가 화면 위를 수백 번 지나가는 걸 보며 웃음이 났다. 그 녀석은 7년 동안 토니에게 자기가 무사하다는 걸 알리는 데 그 많은 문자를 썼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아주 드물게, 다른 말이 끼어 있었다. 오늘은 숨 괜찮으세요. 주무셨어요. 오늘은 혼자 계시지 마세요. 토니는 그 문장들 앞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그 녀석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언젠가 숨을 못 쉬게 된다는 걸. 그래서 7년 동안, 숨 괜찮으세요, 하고 물어 왔던 것이다. 토니는 메시지 창을 닫고 연락처를 내렸다. 그러다 한 이름에서 엄지가 멈췄다. 로디. 망설이다 눌렀다. 신호가 두 번 가고 로디가 받았다. 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 워싱턴은 한밤중이었다. […토니?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로디. 이상한 질문 하나만 할게. 대답만 해 줘." […말해.] "만약에 네가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게 되면. 정확히 언제, 어떻게. 그리고 그게 누군가를 살리려고 죽는 거라는 걸 알게 되면. 넌 어떡할 거야." […토니. 너 지금 어디야. 목소리가 왜 그래.] "병원 옥상. 괜찮아. 대답만." 수화기 너머가 한동안 조용했다. 로디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군 시절, 작전 브리핑을 하던 그 목소리였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에 따라 다르겠지. 근데 그게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이면, 아마 그렇게 하겠지. 군인이니까. 근데 토니, 군인한테 제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죽는 날을 알면, 그날이 오기 전에 할 수 있는 걸 다 하는 거야. 그날이 안 오게. 아니면 그날이 와도, 그 사람 혼자 남겨지지 않게.] "…그렇지. 그렇겠지." [그 꼬마 때문이지. 피터.] "…응." [그럼 그 꼬마한테 가. 옥상에서 혼자 그러고 있지 말고. 너 혼자 그런 생각 할 때가 제일 위험한 거 알잖아. 아머 서른다섯 벌 만들던 그 새벽들처럼.] 토니는 피식 웃었다. 서른다섯 벌의 새벽을 로디도 기억하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오래된 친구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인지 나중에 다 말해. 꼭. 그리고 그 꼬마한테 내 대신 안부 전하고.] "……" [대답해, 토니.] "…알았어. 다 말할게. 고마워, 로디." 그날이 와도 그 사람 혼자 남겨지지 않게. 전화를 끊고도 토니는 그 말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원래 세계의 그 녀석은 혼자 남겨졌다. 4년 동안. 세상이 그 녀석의 이름을 잊은 채로. 토니는 휴대전화의 연락처를 다시 내렸다. 그리고 왜 그 이름을 눌렀는지 자기도 모른 채 한 번 더 눌렀다. 할리. 테네시의 그 창고. 신호가 길게 가다가, 졸린 목소리가 받았다. […아저씨? 이 시간에 왜요. 엄마가 자라고 했는데.] "미안. 깨웠지. 하나만 물어보고 끊을게." […아저씨는 맨날 이상한 질문 하잖아요. 원자로 모형 조립하는 법 물어봤더니 엔트로피가 어쩌고.] "…피터 형 처음 봤을 때. 그 창고에서. 그 형 어땠어. 네 눈에."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이불을 끌어당기는 소리, 무언가를 골똘히 떠올리는 숨소리. 그리고 졸린, 그런데 아주 또렷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형은 아저씨 볼 때 맨날 울 것 같은 얼굴이었어요. 근데 안 울었어요. 꾹 참는 얼굴. 그리고 아저씨가 안 볼 때는 엄청 오래 쳐다봤어요. 아저씨가 사라질까 봐 계속 확인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형이 아저씨 엄청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아저씨는 몰랐어요?] "……" [아저씨?] "…응. 몰랐어. 아니, 알았는데 다른 사람 때문인 줄 알았어." [다른 사람이요? 형이 보는 건 맨날 아저씨였는데. 아저씨 바보예요?] 토니는 소리 내어 웃었다. 바람이 그 웃음을 강 쪽으로 실어 갔다. 할리가 진짜 바보 같다고 투덜거리더니, 하품 끝에 덧붙였다. 형한테 다음에 올 때는 꼭 붙어 앉으라고 전해 달라고. 그 그림처럼. 전화가 끊기자 토니는 셔츠의 가슴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 안에 할리가 그려 준 그림이 아직 접혀 있었다. 둘이 한 의자에 붙어 앉은 그림. 열한 살짜리도 알던 걸, 토니는 7년 동안 엉뚱한 이름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비상구 문이 열렸다. 토니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발소리로 알 수 있었다. 맨발처럼 소리 없는 걸음. 비전이 토니 옆에 와서 섰다. 그리고 난간 너머의 퀸즈를 함께 내려다보았다. 이마의 노란 보석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한참 뒤 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들었지. 아래서. 다." "네. 피터 씨의 이어폰이 켜져 있었습니다. 일부러 들은 건 아닙니다." "알고 있었어? 전에도." "아니요. 저는 피터 씨가 무언가를 아신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무엇을 아시는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습니다. 피터 씨가 스타크 씨를 볼 때, 그 눈 안에 늘 두 사람이 있었다는 것. 한 사람을 볼 때는 슬퍼하셨고, 다른 한 사람을 볼 때는 웃으셨다는 것." "…그 둘이 다 나였대." "네. 들었습니다." "웃기지 않아? 7년 동안 질투한 놈이 나였어. 나는 그 녀석 마음속 그 사람한테 지는 줄 알았어. 근데 그 사람이 나야. 내가 나한테 진 거야. 아니, 이긴 건가. 모르겠다." 비전은 대답하는 대신 토니 옆의 난간에 손을 얹었다. 토니가 고개를 들어 비전의 이마를 보았다. 노란 보석. 그 녀석이 말한 여섯 개 중 하나. 언젠가 그 그림자가 저걸 뜯어 가러 올 것이다. 토니가 그 보석을 오래 보자 비전이 고개를 돌렸다. "스타크 씨. 개인적인 소견을 하나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피터 씨는 아래에서 그 사람이 당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7년 동안 제가 본 바로는, 피터 씨가 웃으며 보시던 쪽은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계의 스타크 씨였습니다. 숨을 못 쉬시는 새벽에 숫자를 세어 드린 것도, 소코비아의 숲에서 우신 것도, 오늘 그 골목을 맡기신 것도. 그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 계신 스타크 씨에게 하신 일입니다. 피터 씨는 둘이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지만, 제가 보기에 피터 씨가 사랑하시는 건 그중 살아 계신 쪽입니다." 토니의 숨이 걸렸다가 풀렸다. 비전은 담담한 얼굴로 퀸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7년 동안 천장에서 하던 그 말투 그대로였다. 살아 계신 쪽. 토니는 피 묻은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 손은 아직 그 장갑을 끼지 않았다. 아직 손가락을 튕기지 않았다. 아직 여기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걔가 안 했어." "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에게도 끝내 못 하셨다고 하셨지요. 그러니 이번엔 하실 수 있도록, 스타크 씨가 살아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도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토니의 입에서 젖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몸이 생겨도 저 녀석은 여전히 저렇다. 토니는 난간을 짚고 일어섰다. 다리가 휘청했다. 바람이 피 묻은 셔츠 자락을 펄럭였다. 저 아래 어딘가에 붉은 벽돌 건물이 있을 것이다. 1층 창가의 해바라기와, 창틀 위에 나란히 놓인 원자로와 붉은 파편. 그 파편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토니는 이제 알았다. 다른 세계의 자기가 남긴 마지막 조각. 그 녀석은 7년 동안 토니의 유품을 품에 안고, 살아 있는 토니의 곁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 녀석의 손이 떠올랐다. 그 하얀 복도에서, 7년 동안 혼자 들고 있던 것을 처음으로 내려놓으며 토니에게 뻗었던 손. 토니가 물러서는 바람에 허공에 멈춰 버린 손. 생일 밤에도, 절벽 위에서도 허공에 멈췄던 건 늘 토니의 손이었다. 그 녀석이 토니를 밀어냈을 때. 그 멈춘 손이 얼마나 오래 아팠는지 토니는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토니가 그 녀석의 손을 허공에 멈추게 했다. 숫자 세지 말라는 말과 함께. 누가 세어 주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비전. 수술실 불, 아직이야?" "아직입니다. 하지만 의료진의 통신을 보면 거의 끝나 갑니다. 총탄은 꺼냈습니다. 지금 봉합 중입니다." "그 녀석은." "메이 씨의 어깨에 기대 계십니다. 울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숨을 고르지 못하고 계십니다. 아까부터 혼자 숫자를 세려고 하시는데, 자꾸 셋에서 멈추십니다." 토니는 비상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등에 대고 비전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셋에서 멈추시는 건 아마 그다음 숫자를 누가 세어 주던 건지 떠올라서일 거라고. 이것도 개인적인 소견이라고. 토니는 철문을 밀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피 묻은 셔츠 차림으로, 한 층, 또 한 층. 숨이 찼다. 상관없었다. 7년 동안 그 녀석이 셋 다음의 숫자를 대신 세어 주었다. 그 숫자가 원래 누구의 것이었든, 지금 그 녀석에게 넷을 세어 줄 사람은 토니뿐이었다. 피터는 메이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숫자를 세고 있었다. 속으로. 들이쉬고, 하나, 둘, 셋. 그리고 멈췄다. 넷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또 그 자리에서 목이 막혔다. 넷 앞에서 목소리가 끊길 때마다 그 넷을 처음 세어 주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원래 세계의 작업실, 악몽에서 깬 열여섯 살의 피터. 피터의 손을 끌어다 자기 가슴 위에 얹어 두고 낮게 세어 주던 목소리. 그리고 방금 비상계단으로 사라진 목소리. 숫자 세지 마. 누가 세어 주는 건지 모르겠어. 피터는 그 두 목소리 사이에서, 셋에 멈춘 채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메이가 피터의 등을 쓸었다. 손바닥이 등뼈를 따라 천천히, 몇 번이고 오르내렸다. 맞은편의 해피는 식은 커피를 쥔 채 복도 끝의 비상계단 철문을 보고 있었다. 수술실 위의 붉은 글씨는 아직 그대로였다. 형광등 하나가 끝에서 가늘게 떨었다. 피터는 다시 셌다. 들이쉬고, 하나, 둘, 셋. 그리고 숨이 걸렸다. 목구멍 깊은 곳에 무언가 단단한 게 박힌 것처럼. 숨이 이렇게 걸리는 건 두 번째였다. 워싱턴의 지붕 위, 버키의 비명을 들은 밤이 처음이었다. 그때는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대신 세어 주었다. 비상계단의 철문이 거칠게 열렸다. 발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빠르고 무거운 발소리. 해피가 의자에서 반쯤 일어섰다. 메이가 고개를 들었다. 피터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메이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숨을 붙잡고 있었다. 발소리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누군가 피터 앞에 무릎을 꿇었다. 피 묻은 셔츠 소매가 시야 끝에 들어왔다. 그 손이 메이의 무릎 위에서 움켜쥐고 있던 피터의 두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자기 가슴 위로 끌어갔다. 원자로가 없는 가슴. 셔츠 너머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온 심장이었다. "넷." 토니의 목소리였다. 숨이 차서 갈라져 있었는데, 그 한 글자만은 분명했다. 피터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토니가 피터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피터의 두 손을 자기 가슴에 붙들고 있었다. 젖은 눈이었다. 그런데 그 눈이 아까와 달랐다. 무언가가 통째로 빠져나간 눈이 아니었다. 무언가로 꽉 차 있는 눈이었다. "……" "셋 다음은 넷이야. 참고, 하나, 둘. 내쉬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다시.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피터는 그 숫자를 따라 숨을 쉬었다. 처음엔 엉망이었다. 들이쉬다 걸리고, 내쉬다 떨렸다. 토니는 멈추지 않았다. 피터가 따라올 수 있는 빠르기로, 몇 번이고.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피터의 숨이 아주 천천히 그 박자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넷을 지나 다섯으로, 여섯으로. 피터의 손바닥 아래에서 토니의 심장도 조금씩 느려졌다. 피터의 숨을 따라. 숨이 돌아오자 토니는 숫자를 멈췄다. 그런데 피터의 손은 놓지 않았다. 자기 가슴 위에 그대로 붙든 채, 피터를 똑바로 보았다. "……" "아까 그 말. 숫자 세지 말라는 거. 누가 세어 주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 다 취소할게. 미안해. 네가 7년 동안 혼자 들고 있던 걸 처음 내려놓는데, 내가 그 앞에서 물러섰어. 네 손이 허공에서 멈췄어. 내 손이 네 앞에서 멈췄을 때 얼마나 아팠는지 아는 놈이, 그 짓을 했어." "…스타크 씨." "들어 봐. 끝까지. 오늘은 네가 다 말했잖아. 이번엔 내 차례야." 메이가 피터의 등에서 손을 떼고, 소리 나지 않게 의자 하나 옆으로 옮겨 앉았다. 해피도 그 옆으로 따라 앉았다. 둘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지켜보았다. 하얀 복도에 피터와 토니만 남은 것 같았다. "……" "옥상에서 생각했어. 그 숫자, 원래 누구 거였는지. 다른 세계의 내가 너한테 알려 준 거라며. 그걸 네가 여기 들고 와서 나한테 세어 줬고. 7년 동안. 그 코일도. 안쪽 고리 반대 방향으로 한 겹 더. 그것도 그 사람이 너한테 가르쳐 준 거고. 그러니까 나는 나한테서 배운 거야. 너를 거쳐서. 웃기지. 근데 하나는 확실해. 지금 이 숫자 세어 주는 건 나야.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숫자가 원래 누구 거였든, 지금 여기서 네 손 붙잡고 세어 주는 건 살아 있는 나야." "……" "그리고 네가 본 그 끝. 그 장갑. 손가락. 그 호숫가. 그거 틀리게 만들 거야. 오늘처럼. 오늘 그 골목도 원래는 끝이었다며. 근데 아저씨 지금 저 안에서 숨 쉬고 있잖아. 네가 거미줄 감고, 내가 누르고, 둘이 숫자 세서. 그러니까 그 끝도 틀리게 만들 수 있어. 너랑 같이. 앞으로도 계속." 피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토니가 피터의 손을 놓고 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피 묻은 손이었다. 엄지가 피터의 눈가를 쓸자 젖은 뺨에 벤의 피가 옅게 번졌다. 토니는 그걸 개의치 않았다. "……" "그리고 하나 더. 이제 그 사람 말고 나를 봐. 그 사람이 나라는 거 알아. 같은 사람이라는 거. 근데 그 사람은 너한테 그 말을 못 하고 갔어. 나는 아직 여기 있어. 아직 그 장갑 안 꼈고, 아직 손가락 안 튕겼고, 아직 네 앞에 무릎 꿇고 있어. 그러니까 이제 나를 봐. 그 사람의 그림자 말고. 그 사람 다음 말고. 나." "…저는요. 저는 처음부터…" "알아. 비전이 그러더라. 네가 웃으면서 보던 쪽은 나였다고. 슬퍼하면서 보던 쪽이 그 사람이었고. 그래서 묻는 거야. 이제 슬퍼하지 말고 나만 봐 줄 수 있냐고. 그 사람 몫까지 울지 말고." 피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토니의 두 손 안에서 얼굴을 감싸인 채 고개만 끄덕였다. 몇 번이고. 그리고 토니의 가슴에 이마를 떨구었다. 원자로가 없는 그 가슴. 셔츠 너머에서 심장이 뛰었다. 쿵, 쿵. 원래 세계의 무너진 잔해 위에서 피터는 이 박동이 멈추는 걸 들었다. 꺼진 원자로에 이마를 댄 채로. 이 박동은 멈추지 않았다. 피터의 이마 아래에서 계속 뛰고 있었다. 피터가 웃으며 보던 쪽에서. 토니가 피터의 등을 감싸 안았다. 꽉. 피 묻은 셔츠 위로 피터의 눈물이 번졌다. 토니가 피터의 정수리에 뺨을 얹고, 아주 작게 말했다. "……" "7년 동안 혼자 들게 해서 미안해. 이제 반 줘. 아니, 다 줘. 나 그거 들 수 있어. 너보다 나이도 많고, 원자로도 뗐고, 숨도 이제 혼자 쉴 줄 알아. 네가 가르쳐 줘서." 피터는 토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웃었다. 울면서. 그 웃음이 셔츠 너머 심장에 닿았다. 메이가 의자에서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해피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메이 손에 들린 빈 종이컵을 말없이 받아 들었다. 새 커피를 뽑으러 가려는 듯이. 메이가 해피를 올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그 순간 수술실 위의 붉은 글씨가 꺼졌다. 복도가 그대로 굳어 버린 것 같았다. 메이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해피의 손에서 종이컵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피터가 토니의 가슴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중문이 열리며 마스크를 끌어내리는 의사 하나가 걸어 나왔다. 땀에 젖은 이마. 의사가 복도의 넷을 둘러보다가 메이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벤저민 파커 씨 보호자분이세요." "네. 아내예요. 그 사람, 그 사람은…" "수술 잘 끝났습니다. 총탄은 꺼냈고 폐 손상도 봉합했습니다. 심장 바로 옆이었는데 아슬아슬하게 비껴갔어요. 출혈이 컸지만, 가슴에 감겨 있던 그 하얀 게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총탄이 무언가 금속에 한 번 부딪혀 속도가 줄었더라고요. 그게 아니었으면 심장을 뚫었을 거예요.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며칠 지켜봐야겠지만, 사실 겁니다." 메이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해피가 그 팔을 붙잡았다. 메이는 해피의 팔에 매달린 채 소리 내어 울었다. 살았다고, 살았다고, 몇 번이고. 해피가 메이의 등을 서툴게 두드렸다. 그 해피의 눈가도 젖어 있었다. 피터는 그 말을 들었다. 사실 겁니다.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피터는 토니의 품 안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 봄의 골목에서는 이 말을 듣지 못했다. 경찰차의 불빛과 웅성거림 속에서 아무도 피터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말해 주지 않았다. 지금은 하얀 가운의 의사가 피터의 가족에게 그 말을 하고 있었다. 사실 겁니다. 피터는 그 말을 몇 번이고 속으로 굴리다가 토니를 올려다보았다. "…금속이요. 총탄이 금속에 부딪혀서." "…가슴판. 아머 가슴판이 아저씨 앞을 스쳐 지나갔어. 나한테 맞물리려고 날아오던 거. 첫 번째 총알은 그게 튕겨 냈고, 두 번째는 그 가장자리에 스쳤나 봐." 토니가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원자로가 있던 자리. 피터도 그 자리를 보았다. 그 녀석을 지키려고 7년 동안 다듬어 온 아머의 한 조각이, 오늘 벤의 심장을 지켰다. 반 박자 차이로. 7년 동안 피터를 괴롭혀 온 그 반 박자가, 오늘은 처음으로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늦지 않게. 아슬아슬하게. 피터는 토니의 셔츠를 움켜쥐고 그 가슴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이번엔 울음도 웃음도 아니었다. 길고 깊은 숨이었다. 7년 동안 한 번도 끝까지 내쉬어 본 적 없는 숨. 메이가 의사를 따라 회복실 쪽으로 걸어간 뒤, 토니는 피터를 데리고 복도 끝의 자판기 앞으로 갔다. 자판기는 낡아서 동전을 넣을 때마다 덜컹거렸다. 토니가 핫초코 두 잔을 뽑아 하나를 피터의 손에 쥐여 주었다. 종이컵이 손바닥을 데울 만큼 뜨거웠다. 둘은 자판기 옆의 창틀에 나란히 기대섰다. 창밖으로 새벽이 오기 직전의 퀸즈가 남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핫초코요?" "커피는 이제 그만. 오늘 밤 커피 몇 잔 마셨는지 세다가 포기했어." "…저 핫초코 좋아하는 거 아셨어요?" "7년 동안 네가 기지 부엌에서 몰래 마시던 거, 다 핫초코였어. 마시멜로 두 개. 비전이 그러더라. 이건 개인적인 소견이 아니라 데이터라고." 피터는 종이컵에 입술을 댄 채 웃음이 터졌다. 핫초코가 컵 가장자리에서 출렁였다. 토니도 웃었다. 지친 얼굴이 웃음으로 조금 펴졌다. 7년 동안 이 사람이 몰래 알고 있던 것들이 오늘 밤에만 벌써 몇 개째였다. 여벌옷, 핫초코, 매년 8월 10일. 피터는 그 목록을 속으로 세다가 그만두었다. 앞으로 평생 걸려도 다 셀 수 없을 것 같아서. 회복실로 가는 복도에서 비전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이마의 노란 보석이 은은하게 빛났다. 비전은 맨발처럼 소리 없는 걸음으로 다가와 피터 앞에 섰다. "피터 씨. 벤 씨 소식 들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아파트에 불을 지른 사람들 셋은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벤 씨를 쏜 사람은 아직 강변 쪽에 있습니다. 계속 보고 있습니다." "…고마워요, 비전. 아파트 사람들은요?"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열네 명. 피터 씨가 일곱 분, 제가 다섯 분, 소방관이 두 분을 꺼냈습니다. 다친 분은 있지만 돌아가신 분은 없습니다. 개인적인 소견을 덧붙이자면, 오늘 이 동네에서는 아무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벤 씨까지 포함해서." 피터는 그 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봄의 밤은 한 사람이 떠난 밤이었다. 오늘은 열다섯 명이 모두 남았다. 비전이 피터를 내려다보다가, 피터와 맞잡힌 토니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전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리고 스타크 씨. 옥상에서 드린 소견, 맞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거." "피터 씨가 웃으며 보시는 쪽이요. 지금 피터 씨 얼굴을 보니 데이터로도 확인됩니다." 토니가 헛기침을 했다. 피터는 귀 끝까지 뜨거워졌다. 비전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강변의 그 남자를 계속 지켜보러 복도 끝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토니가 그 등을 보며 몸 생기더니 눈치가 더 빨라졌다고 투덜거렸다. 피터는 웃음을 참으며 토니의 손을 끌었다. 회복실 앞에서 메이가 해피의 팔을 놓고 일어섰다. 젖은 얼굴로 복도를 둘러보다가, 피터의 손을 쥔 토니에게 걸어왔다. 토니 앞에 멈춰 서서 그 얼굴을 오래 올려다보았다. 피 묻은 셔츠, 손톱 밑에 남은 검붉은 자국. 메이가 손을 뻗어 토니의 손을 잡았다. "…스타크 씨." "…네." "그 사람이 골목에서 애 하나 감싸고 쓰러졌을 때, 당신이 그 앞에 있었다고 들었어요. 아머도 다 안 입고." "…반 박자 늦었어요. 그 녀석한테 약속했는데. 안 떨어지겠다고. 근데 아저씨가 먼저 뛰어나가셔서." "그 사람은 원래 그래요. 애가 위험하면 생각도 안 하고 뛰어나가요. 30년 동안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이랑 결혼했고, 그래서 맨날 무서웠어요. 언젠가 그 버릇 때문에 그 사람을 잃을까 봐." "……" "근데 오늘은 안 잃었어요. 당신이 거기 있어서요. 고마워요. 정말로. 그리고 하나만 부탁할게요. 그 사람이 그렇듯이 당신도 그 버릇 있는 거 알아요. 우리 피터가 그 버릇 때문에 7년을 무서워했고요. 그러니까 그 버릇, 이 녀석 앞에서는 조금만 참아 줘요. 이 녀석이 다시는 그런 얼굴 안 하게." "…노력할게요. 아니, 약속할게요." 메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돋움을 해서 피터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회복실 문을 열었다. 유리창 너머 하얀 침대 위에 벤이 누워 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쓴 채, 가슴에 두꺼운 붕대를 감고. 거미줄이 감겨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침대 옆의 모니터가 벤의 심장 박동을 초록색 선으로 그려 내고 있었다. 오르고, 내리고, 다시 오르고. 메이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벤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뺨에 댔다. 그리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유리 너머라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읽혔다. 하늘 봤다며. 다음엔 나도 데려가. 피터는 토니와 나란히 유리창 앞에 섰다. 맞잡은 손은 그대로였다. 피터가 유리창에 이마를 댔다. 차가웠다. 그 너머에서 초록 선이 오르내렸다. 피터는 속으로 그 박동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멈추지 않았다. 토니가 옆에서 그 초록 선을 함께 보며 낮게 말했다. "…그 세계에서는 이 유리창이 없었지." "…네. 없었어요. 바로 장례식이었어요." "그럼 오늘은 처음 보는 유리창이네. 너도, 나도." "…네. 처음이에요." "잘 봐 둬. 앞으로 처음 보는 거 많을 거야. 그 세계엔 없던 것들. 내가 다 보여 줄게." 피터는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웃었다. 토니가 맞잡은 손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유리 너머에서 메이가 고개를 돌려 둘을 보았다. 맞잡은 손을 보았다. 메이가 젖은 얼굴로 웃으며, 잠든 벤의 손을 들어 올려 둘을 향해 작게 흔들어 보였다. 피터는 숨이 막혔다. 그리고 맞잡은 토니의 손을 들어 올려 함께 흔들었다. 원래 세계에는 없던 유리창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네 사람의 손이 처음으로 같은 쪽을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새벽 4시, 병원은 바닥을 닦는 기계 소리만 낮게 웅웅거렸다. 메이는 회복실 안에서 벤의 손을 쥔 채 의자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해피는 복도 의자에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었다. 토니는 피터 옆자리에서 피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든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비전의 목소리가 피터의 귓속에 낮게 흘러들었다. [피터 씨. 그 사람의 위치입니다. 강변 공업 지대의 낡은 창고. 혼자 있습니다. 몇 시간째 움직이지 않습니다. 가방을 싸는 것 같습니다. 날이 밝으면 도시를 떠날 모양입니다.] 피터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 봄의 남자는 끝내 떠났다. 피터는 그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골목 어귀의 어둠, 후드 그늘, 떨리던 총구. 그게 전부였다. 경찰은 몇 달 뒤 수사를 접었고, 그 남자는 피터의 꿈속에서만 몇 년이고 골목을 달아났다. 얼굴 없는 등으로. 피터가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어깨에 기대 있던 토니의 머리가 움직였다. 토니가 눈을 떴다. 처음부터 자고 있지 않았던 눈이었다. "가려고?" "…네. 그 사람이요. 비전이 찾았어요. 날 밝으면 떠난대요." "혼자?" "…혼자 가야 할 것 같아요. 이건 제가 해야 하는 거예요." "그 세계에서 그 사람, 잡았어?" "…아뇨. 끝내 못 잡았어요. 얼굴도 못 봤어요. 제가 삼촌 곁에 있느라 놓쳤고, 그 뒤로 영영이요. 그래서 몇 년 동안 길에서 후드 쓴 사람만 보면 그 사람인가 싶었어요. 그러다 화가 나면… 화가 나면 무서웠어요. 그 사람을 찾으면 제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요." 토니는 피터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그 얼굴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읽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 들었다. "같이 가. 근데 안 끼어들게. 네가 하는 거, 지붕 위에서 볼게. 네가 부르기 전엔 안 내려가. 그거면 되지." "…네. 그거면 돼요." 병원을 나서기 전, 피터는 회복실 문을 조용히 밀었다. 메이는 의자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벤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피터는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가 벤의 다른 손을 쥐었다. 따뜻했다. 몇 시간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빠져나가던 그 차가운 손이 아니었다. 모니터의 초록 선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피터는 그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몸을 숙였다. "삼촌. 다녀올게요. 그 사람 만나러요. 걱정 마세요. 화난 채로는 안 갈게요. 그리고 삼촌 눈 뜨기 전에 꼭 돌아올게요." 벤의 얼굴은 평온했다. 피터가 그 손을 이불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메이가 의자에서 눈을 반쯤 떴다. 피터를 보고는 다시 눈을 감으며 웅얼거렸다. "다녀와, 우리 피터. 그 사람이랑 같이." 병원 정문 앞 자판기 앞에서 해피가 둘을 불러 세웠다. 밤새 한숨도 못 잔 눈이었다. 해피는 토니와 피터를 번갈아 보더니 짧게 물었다. "어디 가." "…삼촌 쏜 사람 찾으러요. 비전이 찾았어요." "…보스도 가?" "응. 지붕 위에서 보기만 할 거야. 이 녀석이 하는 거야." 해피가 둘을 오래 보다가 피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경호원 시절의 버릇처럼, 투박한 손으로 피터의 어깨를 쥐었다. "너 화났지. 얼굴 보면 알아. 근데 화난 채로 주먹 쓰면, 나중에 그 주먹이 너를 쳐. 경호원 하면서 그런 놈들 많이 봤어. 화난 채로 한 번 휘두르고, 평생 그 주먹 보면서 사는 놈들." "…알아요. 그래서 무서워요." "무서우면 됐어. 무서운 놈은 함부로 안 휘둘러. 메이 씨 깨면 내가 그러더라고 전할게. 너 사람 패러 간 거 아니라고. 사람 잡으러 간 거라고." 해피가 둘의 등을 떠밀어 정문 밖으로 내보냈다. 피터가 돌아보았을 때, 해피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하나 뽑아 회복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메이의 몫이었다. 정문 앞에서 토니가 주머니에서 손톱만 한 금속 원반을 꺼내 피터의 손목 안쪽에 붙였다. "이거 맥박도 재. 네 숨 걸리면 나한테 바로 와. 그래도 안 내려가. 약속했으니까. 대신 지붕 위에서 숫자 셀 거야. 네가 못 들어도. 그냥 내가 셀 거야." 강변의 공업 지대는 새벽 안개에 잠겨 있었다. 녹슨 창고들이 회색 그림자처럼 웅크린 채 늘어서 있었고, 강물 냄새와 기름 냄새가 안개에 섞여 축축하게 코끝에 달라붙었다. 피터는 그중 하나의 지붕 위에 내려섰다. 마스크를 쓴 채. 건너편 창고의 지붕에 붉은 아머가 내려앉았다. 투구의 눈구멍이 피터를 향했다.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피터는 지붕의 깨진 채광창으로 안을 내려다보았다. 창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기름때에 절은 바닥, 쓰러진 나무 상자 몇 개. 그 한가운데 남자 하나가 쪼그려 앉아 가방에 무언가를 쑤셔 넣고 있었다. 고무줄로 묶은 지폐 뭉치들. 동네 가게들을 털어 모은 것이었다. 그리고 총 한 자루. 남자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침착하게, 서두르지도 않고 가방을 채우고 있었다. 식료품점에서 쏘라고 소리치던 그 목소리. 어젯밤 벤의 가슴에 총탄을 박아 넣은 그 손. 피터는 그 손을 보는 순간 피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걸 느꼈다. 손목의 원반이 맥박을 따라 미세하게 떨렸다. 피터는 채광창을 부수고 뛰어내렸다. 유리 조각이 쏟아지며 바닥에서 튀었다. 남자가 고개를 들고 총을 집으려 했다. 거미줄이 먼저였다. 총이 남자의 손에서 뽑혀 나가 창고 벽에 들러붙었다. 피터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멱살을 틀어쥐고 그대로 들어 올려 철골 기둥에 처박았다. 쿵. 기둥이 울렸다. 남자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빨갛고 파란 마스크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그 스파이더맨이구나. 어젯밤 그 늙은이 친구. 아이언맨이 안고 날아간." "그분 이름은 벤이야. 벤 파커. 철물점 주인. 네가 쏜 사람." "그래서 뭐. 죽었냐. 죽었으면 미안하다고 해 줄까." 피터의 주먹이 들어 올려졌다. 저절로. 남자의 얼굴을 향해. 피터는 그 주먹을 보았다. 떨리고 있었다. 이 주먹이 저 얼굴에 닿으면 저 남자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거미의 힘이었다. 몇 년 동안 꿈속에서만 보던 등이 지금 얼굴을 하고 피터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 봄의 남자가 아닌 줄 알면서도, 피터의 주먹은 그 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의 회색 외투. 하늘도 못 보고 감기던 눈. 끝내 잡히지 않은 등. 그런데 이 남자는 그 봄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번엔 아무도 떠나지 않았다. 이 주먹을 내리친다고 벤의 가슴에서 총탄이 빠져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이미 끝났다. 의사들의 손으로, 토니의 아머로, 피터의 거미줄로. 같이 붙잡아서. 피터의 주먹은 그 어디에도 필요하지 않았다. 손목의 원반이 미친 듯이 뛰는 맥박을 재고 있었다. 지붕 위 어딘가에서 누군가 그 맥박에 맞춰 숫자를 세고 있을 것이다. 들리지 않아도. "…죽지 않았어." "뭐?" "안 죽었어. 살았어. 수술 잘 끝났어. 지금 병원에서 자고 있어. 아내가 손 잡고 있어. 깨어나면 너를 용서할지도 몰라. 그분은 그런 사람이니까. 근데 나는 그분이 아니야." "……" "나는 너 안 때려. 그럴 힘은 있어. 근데 안 해. 그분이 나한테 가르쳐 준 게 그거니까. 그 힘으로 뭘 해야 하는지. 대신 너는 감옥에 갈 거야. 오래. 그 아파트에 불 지른 것도, 동네 가게들 턴 것도, 어린애 손에 총 쥐여 주고 쏘라고 시킨 것도. 다 거기서 갚게 될 거야." "…웃기고 있네. 영웅 놀이 하는 꼬맹이가." "영웅 놀이 아니야. 이웃이야. 그 철물점 아저씨네 1층에 사는." 피터는 주먹을 천천히 내렸다. 멱살을 쥔 손은 놓지 않았다.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피터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스쳤다. 두려움이었다. 주먹이 내려가자 오히려 더 무서워하는 눈. 피터는 그 눈을 끝까지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남자를 철골 기둥에 거미줄로 단단히 묶었다. 손목, 발목, 가슴. 가방의 지폐 뭉치를 남자의 발치에 쏟아 놓았다. 벽에 붙은 총도 그 옆에. 경찰이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피터가 돌아서자 남자가 등 뒤에서 욕설을 퍼부었다. 피터는 돌아보지 않았다. 창고 밖에서 사이렌이 안개를 뚫고 다가오고 있었다. 비전이 미리 알린 것이었다. 붉고 푸른 불빛이 깨진 채광창으로 스며들어 기름때 묻은 바닥 위에 번졌다. 피터는 그 불빛을 등지고 창고의 문을 열었다. 경찰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맨 앞의 경찰관이 빨갛고 파란 마스크를 보고, 기둥에 묶인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터도 고개를 끄덕여 주고 지붕 위로 거미줄을 걸었다. 건너편 지붕에 토니가 서 있었다. 투구를 벗은 채, 안개 속에서. 피터는 그 옆에 내려서서 마스크를 벗었다. 새벽 공기가 맨얼굴을 식혔다. 토니는 아무 말 없이 피터의 어깨를 감쌌다. 한참 동안. 피터는 그 어깨에 기댄 채 아래의 경찰차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그 봄의 밤에도 이런 불빛이 있었다. 그때 그 불빛 아래에는 하얀 천이 덮인 들것이 있었다. 지금은 거미줄에 묶인 채 욕설을 퍼붓는, 살아 있는 남자 하나가 있었다. 그 남자를 그 자리까지 데려간 건 피터의 주먹이 아니라 거미줄이었다. 경찰관 하나가 창고 문간에서 지붕 위의 둘을 올려다보았다. 모자를 벗어 짧게 흔들었다. 인사였다. 피터는 맨얼굴이라는 걸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토니가 피식 웃으며 피터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경찰관의 시선을 가렸다. 그리고 아이언맨이 직접 손을 흔들어 주었다. 경찰관이 웃으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먹, 내리는 거 봤어." "…들어 올리는 것도 보셨겠네요." "응. 그것도 봤어. 근데 내리는 데 더 오래 걸리더라. 올라가는 건 한순간이었는데." "…그 세계에서는 그 사람을 못 찾아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찾았으면 제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몰라서요." "그래서 오늘은." "…삼촌이 살아 계시니까요. 삼촌이 살아 계신데 제가 그 주먹을 쓰면, 깨어난 삼촌 얼굴을 못 볼 것 같았어요." 토니가 피터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리고 그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댔다. 아주 잠깐. 피터의 숨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토니는 이마를 떼고 피터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 사람, 다른 세계의 나. 너한테 가르쳐 준 거 많다고 했지. 숫자도, 코일도, 슈트도. 근데 방금 그 주먹 내린 건 그 사람이 가르쳐 준 게 아니야. 벤 아저씨가 가르쳐 준 거고, 너 스스로 고른 거야." "…스스로요." "응. 그건 그 사람도 나도 못 가르쳐 줘." 안개 너머로 동이 트기 시작했다. 강물 위에 희미한 빛이 번졌다. 피터는 그 빛을 보며 열다섯 살의 봄을 떠올렸다. 그날 이후 피터는 스파이더맨이 되었다. 혼자서, 죄책감을 등에 지고. 오늘 이 새벽 이후의 피터는 그날의 피터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고, 등에 진 것도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병원으로 곧장 가는 대신, 토니는 피터를 안은 채 그 골목 어귀에 내려앉았다. 동이 막 튼 골목은 고요했다. 경찰이 쳐 둔 노란 테이프가 바람에 펄럭였다. 아스팔트 위에 검게 말라붙은 얼룩이 있었다. 벤이 쓰러졌던 자리. 그 옆에 누군가 놓고 간 해바라기 한 송이와 작은 카드 하나. 2층 할머니의 손주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것이었다. 철물점 아저씨 빨리 나으세요. 토니가 투구를 열고 피터를 내려다보았다. "여기 다시 오면, 무서울 것 같아?" "…아뇨. 아닐 것 같아요." "왜." "이제 이 골목은 삼촌이 쓰러진 골목이 아니라, 삼촌이 일어난 골목이니까요. 하늘 보러 날아오른 골목이요." 피터는 아스팔트의 얼룩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해바라기를 손끝으로 바로 세웠다. 쓰레기통 위에서 생선 도둑이 하품을 했다. 맞은편 벽의 흘러내린 웃는 얼굴이 아침 햇살을 받아 이번엔 정말로 웃는 것처럼 보였다. 토니가 피터 옆에 함께 쪼그려 앉았다. 둘은 한참 그렇게 앉아 있다가, 동시에 일어섰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하늘에서, 토니는 피터를 품에 안은 채 낮게 날았다. 퀸즈의 지붕들 위로 아침 햇살이 엷게 퍼지고 있었다. 철물점의 셔터, 그 골목, 붉은 벽돌 건물이 차례로 발아래를 지나갔다. 토니가 투구를 연 채 불쑥 물었다. "그 세계에서. 네가 그 사람 찾아 헤맬 때. 혼자였지." "…네. 열다섯 살이었고, 스파이더맨이라는 이름도 없었어요. 그냥 화난 애였어요." "그 사람은. 다른 세계의 나는. 그때 어디 있었어." "…그땐 아직 저를 몰랐어요. 그 일이 있고 1년쯤 뒤에 만났어요." "그럼 너 혼자 그 주먹 쥐고 밤마다 골목 헤맬 때, 지붕 위엔 아무도 없었네." "…네. 아무도요." 토니가 잠시 말이 없었다.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피터를 안은 팔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이번엔 있었잖아. 지붕 위에. 솔직히 말하면 네 주먹 올라갈 때 내려갈 뻔했어. 진짜로. 투구 안에서 손목 칩을 세 번 눌렀다 뗐어." "…왜 안 내려오셨어요." "네가 내릴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네가 안 내렸어도, 그건 네가 골라야 하는 거였어. 내가 대신 골라 주면 그건 네 게 아니잖아." "…고마워요. 안 내려오셔서." "고맙긴. 세 번 눌렀다니까. 다음엔 네 번 누르기 전에 내려라." 피터가 아머에 이마를 기댄 채 웃었다. 차가운 판금 너머로 심장이 뛰었다. 병원의 옥상이 저 앞에 보였다. 아침 햇살이 헬기 착륙장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어젯밤의 핏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그 자리를. 토니가 그 위로 천천히 내려앉으며 말했다. "가자. 아저씨 깨어나는 거 보러. 처음으로 그 자리에 서 보자."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착륙장의 마른 핏자국을 지나 비상구 쪽으로 나란히 걸었다. 벤이 눈을 뜨는 순간 그 곁에 가장 먼저 서 있고 싶었다. 그 봄에는 끝내 서 보지 못한 그 자리에. 벤이 눈을 뜬 건 아침 9시였다. 피터는 그 순간 침대 옆에 있었다. 메이는 해피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고, 토니는 복도에서 회사 일로 짧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회복실에는 피터 혼자였다.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온 아침 햇살이 하얀 이불 위에 얇은 줄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피터는 벤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싼 채 모니터의 삐삐거리는 소리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그 손가락이 피터의 손 안에서 꿈틀거렸다. 피터는 숨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열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이 천장의 얼룩을 헤매다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피터의 얼굴에서 멈췄다. 산소 호흡기 아래에서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피터가 몸을 숙여 그 입가에 귀를 대자, 쉰 숨소리 사이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터." "네. 저예요. 여기 있어요. 삼촌, 저 보여요?" "…보여. 근데 왜 울어." 피터는 그제야 자기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웃으면서. 피터는 벤의 손을 자기 이마에 댔다. 따뜻했다. 살아 있었다. 그 봄, 아스팔트 위에서 피터의 손바닥 안에서 식어 가던 그 손이 아니었다. 피터는 그 손을 이마에 댄 채 고개만 저었다. 벤의 손가락이 피터의 이마 위에서 아주 약하게 움직였다. 쓸어 주려는 듯이. "……" "…그 애는. 할머니 손주." "괜찮아요. 하나도 안 다쳤어요. 삼촌이 막아 주셔서요. 어젯밤에 할머니가 오셨어요. 울면서 삼촌 손 잡고 가셨어요." "…그럼 됐어. 그거면." 벤의 눈이 다시 감기려 했다. 피터가 손에 힘을 주자 벤이 눈을 떴다. 피터를 보며 산소 호흡기 아래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손을 마주 쥐려 했지만 힘이 없어 손가락만 겨우 움직였다. 피터는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손바닥으로 받아 내며 숨을 골랐다. "그 사람, 잡았어요. 삼촌 쏜 사람이요. 오늘 새벽에. 강변 창고에서요. 지금 경찰서에 있어요." "…네가 잡았어?" "네. 근데 안 때렸어요. 때릴 수 있었는데. 거미줄로 묶어서 경찰한테 넘겼어요." 벤이 피터를 오래 보았다. 그 눈에 무언가가 천천히 차올랐다. 놀람 아래에서, 아주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 자랑스러움이었다. 벤은 산소 호흡기 아래에서 숨을 몰아쉬며 한 마디씩 겨우 이었다. "…잘했어. 그게 맞아. 네가 그 손으로 그놈을 때렸으면, 나는 깨어나서도 하나도 안 기뻤을 거야." "…알아요. 그래서 안 때렸어요. 삼촌 깨어났을 때 삼촌 얼굴 보고 싶어서요." "…피터. 너 그 힘. 거미한테 물려서 생겼다는 그 힘." "네." "그거, 아무나 갖는 거 아니야.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은 그만큼 무거운 걸 져야 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거야." 세상이 정지했다. 모니터의 소리도, 복도의 발소리도 멀어졌다. 그 말만 남았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 봄, 골목 어귀의 아스팔트 위에서 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 피를 쏟으면서, 피터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안다는 눈으로. 그리고 몇 년 뒤, 메이가 피터의 품에서 마지막으로 똑같이 남긴 말. 피터는 그 말을 두 번 들었다. 두 번 다 누군가를 잃는 자리에서. 그 말은 늘 작별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세계의 벤이 그 말을 했다. 살아서. 피터의 손을 쥔 채. 작별이 아니라 아침 햇살 속에서. 피터는 그 말 앞에서 무너졌다. 벤의 손을 쥔 채 침대 가장자리에 이마를 떨구고 소리 내어 울었다. 7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 묻어 둔 울음이었다. 열다섯 살의 봄부터. 벤이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피터의 머리에 손을 얹으려 했다. 손이 닿지 않았다. 손가락 끝만 겨우 피터의 머리칼에 닿았다. 벤은 그 손가락으로 피터의 머리칼 끝을 아주 약하게 쓸었다. "…왜. 그 말이 그렇게 무서워?" "…아뇨. 그 세계에서 메이도 마지막에 똑같은 말을 해 줬어요. 그래서 저한테 그 말은 누가 떠날 때 듣는 말이었어요." "…그래서 우는구나." "네. 근데 이번엔 삼촌이 살아서 해 주셨어요. 아침에요. 눈 뜨시자마자요." 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터의 머리칼 끝을 손가락으로 쓸 뿐이었다. 그러다 산소 호흡기 아래에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조금 더 단단한 목소리였다. "…그럼 그 세계의 내가 못 한 말, 하나 더 해 줄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거야. 근데 그 책임, 혼자 지라는 말은 아니야. 그 세계의 나는 그 말까지는 못 하고 갔나 보네. 그래서 네가 혼자 다 졌구나. 7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 "……" "이제 나눠서 져. 나랑, 메이랑. 그리고 저 문밖에서 아까부터 못 들어오고 서 있는 그 사람이랑." 피터는 고개를 들었다. 회복실의 유리창 너머에 토니가 서 있었다. 휴대전화를 귀에서 뗀 채.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얼굴이 젖어 있었다. 피터와 눈이 마주치자 토니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다 멈췄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천천히. 침대 옆에 섰다. 벤이 토니를 올려다보며 산소 호흡기 아래에서 웃었다. "……" "…스타크 씨. 하늘, 봤어요. 어젯밤에. 덕분에." "…어땠어요." "작더라고요. 우리 동네. 근데 좋던데요. 그 세계의 나는 못 봤다던데, 내가 두 사람 몫 봤어요." "…다행이에요. 정말로." "그 가슴판인가 뭔가. 의사가 그러더라고요. 그게 총알을 한 번 막았다고. 그거 스타크 씨 거죠." "네. 제 아머요. 원래 저한테 붙으려던 건데, 아저씨 앞으로 먼저 날아갔어요. 반 박자 빨리." "그럼 그것도 고마워요. 그리고 나사 값. 아직 덜 내셨다면서요. 퇴원하면 받으러 갈게요. 제일 비싼 거 한 상자." 토니가 젖은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벤의 다른 손을 잡았다. 벤이 그 손을 아주 약하게 마주 쥐었다. 피터는 침대 건너편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벤의 양손을 피터와 토니가 하나씩 쥐고 있었다. 벤이 천장을 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 "우리 애 잘 부탁한다고 하려고 했는데요. 어젯밤 그 골목에서 보니까 부탁할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스타크 씨는 그 녀석이 부탁하기도 전에 그 녀석 대신 내 앞에 서 있었어요." "……" "그 세계의 스타크 씨도 그랬다면서요. 그 녀석 대신. 근데 이 세계의 스타크 씨는 하나만 다르게 해 줘요. 그 녀석 대신 서는 건 좋은데, 그 녀석 대신 가지는 말아요. 둘이 같이 서요. 어젯밤 그 골목에서처럼." 토니의 손이 벤의 손 안에서 굳었다. 피터는 숨을 멈췄다. 벤은 메이에게서 피터의 고백을 들었을 것이다. 그 세계의 토니가 피터를 위해 무엇을 끼고 무엇을 튕겼는지. 그리고 지금 그 말을, 살아 있는 토니에게 하고 있었다. 토니가 벤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속할게요. 같이 설게요. 그 녀석이랑. 대신 가지 않을게요." "그럼 됐어요. 이제 좀 잘게요. 피곤해서." 벤이 눈을 감았다. 이번엔 무거운 셔터가 아니라 가볍게 드리우는 커튼 같았다.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었다. 모니터의 초록 선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피터와 토니는 그 양쪽에 앉아 벤의 손을 놓지 않았다. 한참 뒤, 토니가 침대 너머로 피터를 보았다. 피터도 토니를 보았다. 잠든 벤을 사이에 두고. 토니가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같이. 피터도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같이. 오전 11시쯤, 회복실 문이 열리며 로디가 들어섰다. 군복이 아니라 평상복 차림이었다. 워싱턴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것이었다. 로디는 문간에서 잠든 벤을 보고, 그 옆의 피터를 보고, 마지막으로 창가의 토니를 보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토니의 어깨를 붙잡았다. "새벽에 그런 전화 해 놓고 끊으면 어떡해. 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잤어." "…미안. 근데 왔네." "당연히 오지. 너 혼자 옥상에서 이상한 질문 할 때가 제일 위험하다니까." 로디가 토니의 어깨를 놓고 피터에게로 왔다. 그리고 피터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헝클어뜨렸다. 토니가 하던 그대로. 피터가 놀라 올려다보자 로디가 웃었다. "이 녀석이 너한테 안부 전하래서 직접 왔다. 괜찮냐, 꼬마." "…네. 괜찮아요. 삼촌도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래, 다행이다. 토니가 새벽에 자기 죽는 날 알면 어떡하냐고 묻길래, 나는 이 녀석이 진짜 큰일 난 줄 알았어." 로디가 그 말을 하며 토니를 흘끗 보았다. 토니가 시선을 피했다. 로디는 그 얼굴을 오래 보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침대 옆 의자를 끌어다 앉아 잠든 벤을 내려다보았다. "이분이 그 철물점 사장님이야?" "네. 벤 삼촌이요." "퇴원하시면 그 가게에서 나사 하나 사야겠다. 토니가 제일 비싼 거 다 사 갔다던데, 남은 게 있으려나." 피터는 웃음을 터뜨렸다. 로디는 그 웃음을 보며 토니를 다시 흘끗 보았다. 둘 사이에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알아챈 눈이었다. 그것도 묻지 않았다. 물어야 할 때가 오면 토니가 먼저 말할 것을 아는, 오래된 친구의 눈이었다. 점심 무렵 메이가 돌아왔다. 해피가 억지로 먹인 샌드위치 반쪽을 손에 든 채였다. 회복실 문을 열자마자 메이의 손에서 샌드위치가 떨어졌다. 벤이 눈을 뜨고 있었다. 메이를 보며 산소 호흡기 아래에서 웃고 있었다. 메이가 침대로 달려왔다. 피터가 자리를 비켰다. 메이는 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한참 아무 말도 못 하더니, 갑자기 다치지 않은 쪽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하늘 날았다며. 나 안 데려가고." "…다음엔 같이 가자. 스타크 씨한테 부탁해 볼게." "총 맞고 나는 거 말고. 멀쩡할 때. 둘이. 알았어?" "…알았어. 멀쩡할 때." 메이가 그제야 울음을 터뜨렸다. 벤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려다 붕대를 보고 멈칫하더니, 대신 벤의 손을 끌어다 자기 뺨에 댔다. 벤이 엄지로 그 뺨을 쓸었다. 피터는 둘에게서 물러나 토니 옆에 섰다. 토니가 피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문간에는 해피가 서 있었다. 1층 꽃집에서 산 해바라기 다발을 든 채, 들어올지 말지 망설이며. 벤과 눈이 마주쳤다. 벤이 해피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쪽이 해피 씨구나. 우리 메이한테 설탕 두 개 넣은 커피 사 줬다는." "…아, 네. 그게, 저는 그냥. 메이 씨가 단 걸 좋아하셔서."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30년 같이 산 나는 맨날 블랙만 타 줬는데. 경호원 하더니 눈썰미 하나는 좋네요." 해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꽃다발을 든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메이가 벤의 손을 놓고 벤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30년 동안 블랙만 마시게 한 사람이 누구냐는 눈으로. 토니가 피터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벤은 산소 호흡기 아래에서 웃으며 해피에게 손짓했다. 해피가 쭈뼛거리며 들어와 해바라기를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았다. 벤이 그 노란 꽃잎들을 한참 보았다. "……" "고마워요. 우리 메이 옆에 있어 줘서. 어젯밤에. 내가 없는 동안." "…아닙니다. 그냥 커피만." "커피만이 아니었던 거 알아요. 피터가 그러더라고요. 앞치마도 못 벗고 뛰어온 메이 옆에,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앉아 있었다고. 그게 제일 어려운 거예요. 고마워요. 친구." 해피의 숨이 멎었다. 친구. 해피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벤의 손을 조심스럽게, 짧게 잡았다. 메이가 젖은 얼굴로 웃었다. 피터는 그 광경 앞에서 숨을 내쉬었다. 7년 동안 해피는 토니의 경호원이었고, 피터에게는 투덜거리는 형 같은 사람이었다. 오늘부터는 벤의 친구였다. 파커 가족의 식탁에 의자가 하나 더 놓인 것 같았다. 오후 늦게, 토니가 회사 전화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벤이 다시 눈을 떴다. 메이는 해피와 함께 매점에 내려가 있었다. 병실에는 피터와 벤 둘뿐이었다. 벤이 산소 호흡기를 조금 내리며 피터를 보았다. 간호사가 잠깐은 괜찮다고 했었다. "…그 사람 어디 갔어." "회사 전화요. 금방 오신대요." "…피터." "네." "그 사람, 좋아?" 피터는 숨을 멈췄다. 벤의 눈이 웃고 있었다. 피터는 귀 끝까지 빨개진 채 한참 대답하지 못하다가, 벤의 손을 잡고 작게 대답했다. "…네. 좋아요. 엄청요." "그 세계의 그 사람보다?" "…같은 사람이에요. 근데 이 사람이 더 좋아요. 이 사람은 살아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를 기다려 줬으니까요. 7년이나." "7년이라. 나는 메이 석 달 기다리게 하고도 평생 미안했는데. 그 사람은 7년을 기다렸네." "…네." "그럼 이제 네가 갚아. 7년 기다린 거. 평생 걸려도." 피터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젖은 웃음이었다. 벤이 피터의 손을 아주 약하게 마주 쥐고, 산소 호흡기를 다시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입가에 웃음이 남아 있었다. 복도에서 토니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피터는 그 발소리를 들으며 벤의 손을 놓지 않았다. 평생 걸려도. 그 말을 손바닥 안에 꼭 쥐듯이. 해 질 무렵, 벤은 다시 잠들었다. 메이는 침대 옆 의자에서 벤의 손을 쥔 채 꾸벅꾸벅 졸았고, 해피는 메이의 어깨에 자기 외투를 걸쳐 주고 복도로 나갔다. 피터와 토니는 복도 끝의 창가에 나란히 섰다. 창밖으로 퀸즈의 지붕들이 노을에 물들고 있었다. 어제 이 시간에 그 골목에서 총성이 울렸다. 꼭 하루 만이었다. "하루네." "…네. 어제 이 시간이었어요." "그 세계에서는 이 하루가 장례식 준비하는 하루였겠지." "…네. 메이가 부엌에서 혼자 울고, 저는 방문 잠그고 안 나왔어요." "오늘은 메이 씨가 남편 손 잡고 졸고 있고, 너는 나랑 창가에 서 있고." "…네." 토니가 창틀에 팔꿈치를 괴었다. 노을이 그 옆얼굴을 붉게 덮었다. 한참 말이 없다가, 창밖을 본 채 낮게 말했다. "오늘 밤에 그 지붕 가자. 물탱크 그늘. 물어볼 게 많아. 어젯밤엔 네가 다 말했지만, 나는 아직 하나도 못 물었어. 그 장갑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놈이 언제 오는지, 그 호숫가가 어디인지. 그리고 그 사람. 다른 세계의 나. 그 사람이 너를 어떻게 불렀는지, 어떻게 웃었는지. 다 듣고 싶어." "…다 말할게요. 이번엔 하나도 안 빼고요." "그리고 이번엔 너도 물어도 돼. 7년 동안 내가 너한테 안 물은 만큼, 너도 나한테 안 물었잖아. 내가 그 서랍에 뭘 넣어 뒀는지, 왜 그 신청서를 안 버렸는지. 왜 기다렸는지." 피터는 토니를 보았다. 노을이 그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7년 동안 피터는 이 사람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으면 자기도 대답해야 할 것 같아서. 이제는 물어도 됐다. 피터는 숨을 고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가 창틀에서 팔을 떼고 피터의 손을 찾았다. 보지도 않고. 피터의 손이 이미 거기 있었다. 복도 끝 회복실에서 모니터가 규칙적으로 울었다. 벤의 심장 소리. 피터는 그 소리를 들으며 노을이 저무는 지붕들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 그 지붕 위에서 7년 동안 묻지 않은 것들을 서로에게 물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아무도 대답을 미루지 않을 것이다. 자정이 가까운 퀸즈의 지붕 위는 조용했다. 물탱크의 그늘, 늘 앉던 그 자리. 지붕에 깔린 타르가 낮의 열기를 다 내놓고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맞은편 붉은 벽돌 건물의 3층 창문은 어두웠다. 메이는 병원에 있었다. 벤의 곁에. 그런데 피터는 그 어두운 창문이 무섭지 않았다. 불이 꺼진 이유가 장례식장이 아니라 병실이었으니까. 내일 아침이면 메이는 벤이 병원 죽을 반이나 남겼다고 투덜거리는 문자를 보낼 것이다. 자정 무렵의 퀸즈는 낮과 다른 소리를 냈다. 멀리 고가 철로 위로 마지막 전철이 덜컹거리며 지나갔고, 어느 집 창문에서 늦은 야구 하이라이트가 흘러나왔다. 골목 어딘가에서 고양이 두 마리가 영역 다툼을 하는 소리가 짧게 이어지다 그쳤다. 피터는 물탱크에 등을 기대고 그 소리들을 하나씩 들었다. 7년 동안 이 지붕 위에서 수없이 들어 온 소리였다. 3층의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며, 혼자서. 오늘은 그 소리들 사이로 비상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하나 섞여 있었다. 토니는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올라왔다. 메이가 냉장고에 넣어 두고 간 수프를 데워 보온병 두 개에 나눠 담은 것이었다. 토요일 저녁 식탁에 오를 예정이던, 소금이 한 통 들어간 그 수프. 토니가 보온병 하나를 피터에게 건네며 옆에 앉았다. 한 뼘 없이, 어깨가 닿도록. 뚜껑을 돌리자 하얀 김이 밤공기 속으로 피어올랐다. 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메이 씨가 그러더라. 원래 이거 먹으면서 네 얘기 듣기로 했으니까, 장소가 바뀌어도 이건 먹으면서 들으래. 진정제라며." "…짜요." "응. 엄청 짜. 근데 따뜻하네." 둘은 한동안 말없이 수프를 마셨다. 정말로 짰다. 혀가 얼얼할 만큼. 피터는 그 짠맛에 웃음이 새어 나왔고, 토니도 따라 웃었다. 밤하늘에 별 몇 개가 박혀 있었다. 강 너머 맨해튼의 불빛이 자꾸 그 별들을 지웠다. 토니가 보온병을 무릎 사이에 내려놓고 하늘을 올려다본 채 입을 열었다. "물어봐도 돼?" "…네. 다요." "그 장갑. 어떻게 생겼어." "금색이에요. 왼손이요. 손등에 보석 여섯 개가 박혀 있어요. 파란 거, 노란 거, 빨간 거, 보라색, 주황색, 초록색. 노란 건 지금 비전 이마에 있는 거고요, 파란 건 뉴욕에서 그 구멍을 연 거예요. 근데 그 사람이 낀 건 그 장갑이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직접 만든 장갑이었어요. 아머 손등에 보석을 하나씩 옮겨 박아서요." "…내가 만들었구나. 그 장갑을." "네. 그걸 만든 사람이 끼고 튕겼어요." 토니가 오른손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낮에 몇 번이나 씻어 낸 손이었다. 그런데 손금의 골 사이에 아직 희미한 검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토니가 그 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피터는 그 손가락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걸 보며 숨을 삼켰다. 원래 세계의 그 손. 검게 타 버린 오른팔. "……" "타노스라고 했지. 그놈. 언제 와." "…3년 뒤예요. 지금이 2015년이니까 2018년이요. 뉴욕에 먼저 와요. 그리고 와칸다라는 나라에서 마지막 싸움을 해요. 거기서 손가락을 튕겨요." "그럼 그 사람이 그 장갑 낀 건." "2023년이요. 타노스가 튕기고 5년 뒤요." 토니가 숫자를 입속에서 굴렸다. 3년. 8년. 밤하늘의 별을 하나씩 세듯이 천천히. 그리고 피터가 예상하지 못한 얼굴로 짧게 웃었다. 두려움보다 계산이 먼저 서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생각보다 기네. 8년이면 할 수 있는 거 많아. 아머 열 벌은 만들고도 남겠다. 아니, 아머 말고. 다른 거." 피터는 그 웃음을 보며 가슴 한쪽이 시큰했다. 원래 세계의 토니도 그렇게 말했었다. 5년이면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그리고 그 5년 동안 그 사람은 정말로 많은 걸 했다. 사라진 사람들을 되돌릴 방법을 찾고, 그리고. 피터는 그다음 말을 삼켰다. 토니가 피터의 얼굴을 보았다. 무언가를 삼키는 얼굴을. 토니가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뭐 삼켰어." "…아니에요." "다 말한다며. 하나도 안 빼고." 피터는 보온병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감쌌다. 그 온기를 붙잡고 숨을 골랐다. 이걸 말하면 이 사람이 무엇을 느낄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도 안 빼겠다고 했다. 피터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 5년 동안, 그 사람은 저를 잃은 채로 살았어요. 나중에 들었어요. 작업실 한쪽에 제 사진을 세워 두고, 매일 그 앞을 지나갔대요. 한 번도 그 앞에서 울지 않았는데, 한 번도 그 사진을 치운 적도 없었대요. 5년 동안요. 그리고 방법을 찾았을 때, 제일 먼저 저를 되돌리고 싶다고 했대요." 토니의 숨이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피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바람이 물탱크를 스치며 낮게 울었다. 한참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토니가 보온병을 쥔 손에 힘을 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5년 동안. 네 사진 앞을." "네." "그리고 너 되돌리려고 그 장갑 꼈구나. 그 5년 끝에." "…네. 저 때문에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한테 더 미안했어요. 그 사람 5년을 제가 다 가져갔어요. 그 사람은 그 5년 동안 웃지도 못하고 제 사진만 보다가, 결국 저 때문에 그 5년 끝에서 갔어요." 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래. 피터는 무릎 위의 보온병만 내려다보았다. 이건 말하지 말았어야 했나. 이 사람은 지금 다른 세계의 자기가 보낸 5년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사진 한 장 앞을 지나며 보낸 5년을. 그리고 그 끝에서 피터를 택한 자기를. 보온병 위에서 피터의 손이 떨렸다. 그때 토니의 손이 그 떨리는 손 위에 얹혔다. "…그 사람, 그 5년 버틴 거 너 때문에 버틴 거야. 네가 가져간 게 아니라. 네 사진이 거기 있어서 버틴 거야. 나라면 그랬을 거니까. 그리고 그 장갑 낄 때도 알았을 거야. 다 알고 꼈을 거야." "……" "근데 그 사람이 너한테 미안해하라고 낀 건 아닐 거야. 그 사람은 네가 살아 있는 세상을 원했어. 5년 동안 그거 하나만 원했고, 그걸 해냈잖아. 너는 돌아왔고. 그 사람이 바란 건 그거였을 거야. 네가 그 사람 5년을 빚진 것처럼 평생 미안해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피터는 고개를 들었다. 토니가 피터를 보고 있었다. 젖은 눈이었다. 그런데 그 눈에 원망이 없었다. 7년 동안 피터가 가장 두려워한 게 그 원망이었다. 그 사람이 원망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사람도 원망하지 않았다. 피터는 그 눈 앞에서 무너졌다. 토니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토니가 피터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그 위에 뺨을 얹은 채 낮게 물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캡, 나타샤, 클린트, 배너, 토르. 비전. 그 사람들은 그 세계에서 어떻게 됐어." 피터는 숨을 멈췄다. 보온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것도 말해야 했다. 피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나씩 꺼내 놓았다. "비전은 타노스한테 이마의 보석을 뜯겨서 죽어요. 완다 눈앞에서요. 나타샤 씨는… 보석 하나를 얻으려면 누군가를 바쳐야 하는 곳이 있었어요. 클린트 씨 대신 떨어졌어요. 절벽에서요. 캡틴은 살아남았어요. 마지막 싸움이 끝나고 보석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러 과거로 갔다가, 거기 남았어요. 페기 씨랑 춤추려고요. 늙은 모습으로 돌아와서 샘 씨한테 방패를 줬어요." "…나타샤가. 클린트 대신." "네. 클린트 씨는 그 5년 동안 가족을 다 잃고 혼자 떠돌았어요. 그 농장 마당에서 다 먼지가 됐거든요. 마지막엔 가족이 돌아왔어요. 나타샤 씨만 못 돌아왔어요." 토니는 오래 말이 없었다. 퀸즈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보온병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비전. 나타샤. 캡의 춤. 클린트의 농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장갑. "…목록이 생겼네. 바꿔야 할 거.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 바꿀 수 있을까요." "피에트로 살렸잖아. 벤 아저씨도. 그럼 이것도. 하나씩. 3년이면 시간 충분해. 모자라면 같이 하면 되고." 피터는 토니의 접힌 손가락들을 보았다. 다섯 개. 원래 세계에서 피터 혼자 품고 있던 무게가 지금 이 사람의 손가락 다섯 개에 나뉘어 접혀 있었다. 피터는 그 손을 붙잡고, 접힌 손가락을 하나씩 펴 주며 그 사이로 자기 손가락을 엮었다. "같이요. 하나씩." "응. 하나씩." "…이번엔 제가 물어도 돼요?" "응. 물어. 다." "그 신청서요. 2001년 8월 10일이라고 적었다가 고친 거. 왜 안 버리셨어요. 7년 동안." "…처음엔 궁금해서. 이상하잖아. 1986년생이라는 녀석이 2001년을 적었다가 줄 긋고. 그다음엔 그 날짜가 네 진짜 생일 같아서. 매년 8월 10일마다 그 신청서 꺼내 봤어. 케이크라도 사 주고 싶었는데, 그럼 네가 또 그 얼굴 할 것 같아서 못 샀어." "…그럼 왜 기다리셨어요. 절벽에서 제가 거절했는데. 당신은 그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어. 아니, 그건 거짓말이고. 넌 기다릴 만한 사람이었어. 7년 동안 한 번도 그걸 의심한 적 없어. 네가 그 사람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 날에도. 왜냐면 네가 나 대신 맞던 그 등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지키던 등이었으니까." 매년 8월 10일. 원래 세계에서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던 그 날짜를, 이 사람은 7년 동안 서랍 속 종이 한 장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케이크를 사지 못한 채. 피터의 얼굴을 걱정해서. 피터는 토니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젖은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올해 8월 10일에는 케이크 사 주세요. 그 얼굴 안 할게요. 약속해요." "그래. 제일 비싼 걸로 사 줄게. 제일 쓸데없는 걸로." "……" "…마지막으로 하나만. 그 사람, 너를 어떻게 불렀어. kid 말고 또." "…놀렸어요. 맨날. 처음 만났을 때 제 옷이 너무 허술하다고, 속옷 차림으로 싸운다고. 그 뒤로 몇 년 동안 그걸로 놀렸어요. 진지할 때는 그냥 kid라고 했고요. 마지막 날에는… 마지막 날에는 제 이름을 부르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어요." "…그럼 그 사람이 마지막에 하려던 말, 내가 대신 해도 돼?" 피터는 숨을 멈췄다. 토니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토니가 아주 가까이서 피터를 보고 있었다. 그 눈에 별빛이 고여 있었다. 토니가 피터의 뺨에 손을 얹었다. 손금 사이에 아직 희미한 자국이 남은 손이었다. "피터." "…네." "그 사람이 그날 너한테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나는 몰라. 근데 나라면 이 말 했을 거야. 살아서 다행이라고.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리고 이 말도. 7년 동안 못 한 말. 절벽에서 했다가 거절당한 말. 이번엔 숨 다 쉬고, 너 똑바로 보면서, 그 사람 몫까지 할게." "……" "사랑해, 피터. 그 사람도 너를 사랑했을 거야. 근데 지금 이 말 하는 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야. 살아 있는 나."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원래 세계의 무너진 잔해 위에서 피터가 끝내 하지 못한 말. 그 사람도 끝내 하지 못한 말. 그 말이 지금 이 지붕 위에서, 이 사람의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그 사람 몫까지. 그리고 이 사람 몫으로. 피터는 눈물을 쏟으며 떨리는 손을 들어 토니의 얼굴을 감쌌다. 두 손으로. 처음이었다. "…저도요. 저도 사랑해요. 그 사람한테 못 한 말이에요. 무너진 잔해 위에서, 미안하다는 말 대신 했어야 했던 말이요. 근데 이제 그 사람한테 하는 게 아니에요. 스타크 씨한테요. 살아 있는 스타크 씨한테요. 사랑해요. 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요." 토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토니는 울면서 웃었다. 그리고 피터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댔다. 강변 창고의 지붕 위에서보다 오래. 둘의 숨이 섞였다. 짠 수프 냄새가 났다. 피터는 눈을 감았다. 토니의 숨이 피터의 입술에 닿았다. 토니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닿았다. 처음엔 아주 가볍게,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7년 동안 한 뼘에서 절반으로, 절반에서 손끝으로, 손끝에서 어깨로 줄어 온 거리가 마침내 사라졌다. 토니의 입술은 짰다. 메이의 수프 맛이 났다. 피터는 그 짠맛에 울음 섞인 웃음이 터질 뻔했다. 토니가 그걸 느꼈는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웃었다. 그리고 다시, 이번엔 조금 더 깊이. 피터의 뺨을 감싼 손에 힘이 실렸다. 피터는 토니의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한참 뒤 토니가 입술을 떼었다. 이마는 떼지 않았다. 둘의 숨이 밤공기 속에서 하얗게 섞였다. 토니는 피터의 이마에 이마를 댄 채, 숨을 몰아쉬며 웃었다. "…짜다." "…메이 수프요. 진정제요." "진정이 하나도 안 되는데." "…저도요." 둘은 이마를 맞댄 채 웃었다. 맞은편의 어두운 3층 창문 아래, 서늘한 타르 지붕 위에서. 피터는 그 웃음 속에서 원래 세계의 그 사람을 떠올렸다. 이번엔 슬프지 않았다. 그 사람이 원했던 게 이거였을 것 같았다. 피터가 살아서, 웃으면서, 누군가의 이마에 이마를 대고 있는 것. 그 누군가가 자기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그 사람은 아마 투덜거릴 것이다. 그리고 웃을 것이다. 지금 이 사람처럼. "근데 피터. 그 사람이 지금 이거 보면 뭐라고 할 것 같아." "…투덜거릴 것 같아요. 자기 얼굴로 무슨 짓이냐고." "그렇겠지. 근데 속으로는." "…다행이라고 할 것 같아요. 제가 혼자가 아니라서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 사람, 너 혼자 두고 간 게 마지막까지 제일 걸렸을 거야. 그러니까 이거 보면 안심할 거야. 아니, 질투도 좀 하겠지. 나라면 하니까." 피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토니도 웃었다. 둘의 웃음이 퀸즈의 밤하늘로 흩어졌다. 피터는 그 웃음 속에서 속으로 그 사람에게 말했다. 질투하지 마세요. 이 사람도 당신이에요. 그리고 이번엔 당신이 오래 살 거예요. 그 말이, 처음으로 슬프지 않았다. 토니가 피터의 손을 찾아 손가락 사이로 자기 손가락을 엮었다. 그리고 그 손을 들어 올려 피터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피터가 귀 끝까지 빨개지자 토니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3년. 그리고 8년. 이제 같이 세자, 그 숫자들.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처럼. 무서우면 같이 세고, 그날이 오면 같이 서고. 그 장갑은 아무도 안 끼게 하자. 너도, 나도." "…네. 같이요." "그리고 피터." "네." "이제 토니라고 불러도 돼. 스타크 씨 말고. 7년 동안 그 호칭, 좀 멀었어." 토니.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그 사람을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못했다. 마지막 날까지 스타크 씨였다. 피터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낯설고, 무겁고, 따뜻한 이름이었다. 피터는 토니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바람에 묻힐 만큼 작게 불렀다. "…토니." 토니가 웃었다. 이번엔 울지 않고. 그리고 피터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피터는 그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맞은편 3층 창문은 여전히 어두웠다. 내일 아침이면 그 창문의 주인이 병원 죽을 남긴 남편 때문에 투덜거리는 문자를 보내올 것이다. 피터는 그 문자를 이 사람의 품에서 읽게 될 것이다. 원래 세계에는 한 번도 없었던, 그리고 이제부터는 어쩌면 매일 찾아올지도 모르는 그런 아침에. 벤이 퇴원한 건 그로부터 열흘 뒤였다.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낡은 픽업트럭이 콜록거리며 멈췄다. 토니가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벤이 그 안에 앉아 있었다. 셔츠 아래 가슴에 아직 붕대를 감은 채, 메이가 무릎에 덮어 준 체크무늬 담요를 두르고. 2층 창문이 덜컥 열리더니 할머니가 손주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골목에서 벤이 감싸 안았던 그 아이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철물점 아저씨 왔다고. 그 소리에 동네의 창문들이 하나둘 열렸다. 빨래를 널던 손, 화분에 물을 주던 손들이 창밖으로 나와 흔들렸다. 벤은 조수석에서 그 창문들을 올려다보며 쑥스럽게 손을 들었다. "이 동네 사람들, 내가 무슨 전쟁에서 돌아온 줄 아나 봐." "비슷하잖아요. 총 맞고 돌아오셨으니까." "총 맞고 하늘 날아서 병원 간 사람은 이 동네에 나밖에 없을걸." "그럼 그걸 자랑하세요. 철물점에 사진 붙여 놓고요. 아이언맨한테 안겨서 날아간 남자." "…그건 좀 창피하다." 토니가 웃으며 벤의 팔을 잡아 차에서 내리게 도왔다. 피터가 반대편 팔을 붙잡았다. 셋이 나란히 건물 입구의 계단을 올랐다. 한 칸에 한 번씩 숨을 고르며, 천천히. 3층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메이가 문틀에 기대 서 있었고, 그 너머 부엌에서 무언가 끓는 냄새가 계단까지 흘러내렸다. 벤이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코를 킁킁거렸다. "…수프야?" "수프요. 소금 한 통짜리." "열흘 전에 먹기로 했던 그거?" "아뇨. 그건 지붕 위에서 저희가 다 먹었어요. 이건 메이가 새로 끓인 거예요. 삼촌 퇴원하는 날 차리겠다던 그 식탁이요." 벤이 피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토니를 보았다.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를 알아챈 눈이었다. 열흘 동안 병실에서 나란히 앉아 있던 모습, 서로의 손을 놓지 않던 모습, 피터가 언제부턴가 바꿔 부르는 호칭. 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다시 계단을 오르며 짧게 혀를 찼다. 그 혀 차는 소리 끝에 웃음이 묻어 있었다. 3층 부엌의 식탁에는 의자가 넷이었다. 메이가 찬장에서 그릇 넷을 망설임 없이 꺼냈다. 수프, 고기 스튜, 그리고 메이가 세 번째로 도전한 파이. 이번엔 바닥이 타지 않았다. 메이가 그걸 식탁 한가운데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토니가 감탄하는 척 박수를 쳤고, 벤은 캐러멜 역할을 할 탄 데가 없어서 아쉽다고 혀를 찼다. 피터의 옆에 토니가, 맞은편에 벤과 메이가 앉았다. 메이가 수프를 한 국자씩 떠 주자 짠 냄새가 김과 함께 식탁 위로 피어올랐다. 벤이 숟가락을 들다 말고 식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리고 피터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이 식탁에서 하기로 했던 얘기. 이제 다 한 거야?" "…네. 병원에서 다 했어요. 순서는 엉망이었지만요." "그 사람한테도." "네. 토니한테도요." 벤과 메이의 숟가락이 동시에 허공에서 멈췄다. 토니. 피터가 그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불렀다. 메이가 토니를 보았다. 토니가 수프를 떠먹으며 시선을 피했다. 귀 끝이 빨갰다. 메이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벤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피터와 토니를 번갈아 보다가, 식탁 위 둘 사이의 손을 보았다. 피터의 왼손과 토니의 오른손. 식탁 밑이 아니라 위에서, 아무렇지 않게 새끼손가락이 서로 닿아 있었다. 식탁 위의 둘의 새끼손가락이 동시에 굳었다. "…언제부터야." "…열흘 전이요. 병원 다녀온 날 밤에. 지붕 위에서요." "그 지붕. 맞은편 물탱크 있는 데." "…네." "7년 동안 거기서 우리 집 불 꺼지는 거 지켜보던 녀석이, 거기서." 벤이 혀를 찼다. 그리고 토니를 오래 보았다. 토니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벤을 똑바로 보았다. 7년 동안 냉장고와 라디오와 감지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해 온 철물점 주인을. 토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순서가 좀 거꾸로 됐어요. 원래는 아저씨한테 먼저 여쭤봤어야 했는데. 병원에선 그럴 정신이 없었고, 지붕에선 그럴 틈이 없었어요." "…뭘 여쭤봐요." "이 녀석이요. 제가 옆에 있어도 되는지요. 아니, 옆에 있을 거예요. 허락 안 하셔도. 근데 허락해 주시면 좋겠어요. 이 녀석한테 제일 중요한 두 분이니까요." 부엌이 조용해졌다. 냉장고가 낮게 웅웅거렸다. 토니가 고쳐 준 그 냉장고였다. 메이는 숟가락을 쥔 채 벤을 보았다. 벤은 무표정하게 토니를 보고 있었다. 식탁 위에서 피터의 손이 굳었다. 토니의 새끼손가락이 피터의 새끼손가락을 조금 더 세게 감았다. 한참 뒤에야 벤이 입을 열었다. "…골목에서 내 앞에 서 있었죠. 아머도 다 안 입고." "…네." "그 녀석 대신 서는 건 좋은데, 대신 가지는 말라고 했죠." "네. 약속했어요." "그 약속만 지키면 돼요. 허락은 그걸로 됐어요. 대신 하나 더. 이 녀석 생일, 8월 10일. 그날은 우리 집에서 밥 먹어요. 매년. 둘이." 토니가 숨을 멈췄다. 피터도. 벤은 그런 둘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숟가락을 들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 "그 녀석 진짜 생일이 그날이라며. 우리는 매년 그날 묘지에 갔어. 해바라기 들고. 이제는 그날 이 식탁에 앉아서 케이크 먹을 거야. 그 녀석이랑, 그 녀석 옆에 있는 사람이랑." 메이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피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구멍이 뜨겁게 막혔다. 토니가 식탁 위에서 피터의 손을 통째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 벤을 보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매년 올게요. 제일 비싼 케이크 들고요." "제일 비싼 건 제일 쓸데없는 거라니까요." "그럼 제일 쓸데없는 거 들고요." 벤이 웃음을 터뜨렸다가 붕대가 당겨 끙 신음했다. 메이가 다치지 않은 쪽 어깨를 탁 쳤다. 벤이 더 크게 웃었다. 피터도, 토니도. 네 사람의 웃음이 김 서린 부엌을 채웠다. 소금 한 통이 들어간 수프가 식어 가고 있었다.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메이가 고기 스튜를 한 국자 더 떠 주며 토니를 흘끗 보았다. 7년 동안 냉장고를 고치러 오던 손님이 아니라, 이제 이 식탁의 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래서 스타크 씨. 앞으로 어디서 지낼 거예요? 말리부? 맨해튼의 그 탑? 아니면 숲속 기지?" "…글쎄요. 다 제 집이긴 한데." "우리 피터는 퀸즈 못 떠나요. 7년을 이 1층 방에서 살았는데. 해바라기도 있고." "그럼 저도 퀸즈에 하나 사야겠네요. 이 근처에." "이 근처에 빈집 없어요. 다 오래된 동네라." "그럼 이 건물 2층이요. 할머니 댁 옆집." "그 집 지금 사람 살아요." "그럼 그분한테 말리부 집이랑 바꾸자고 하죠." 메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벤도 숟가락을 든 채 웃다가 또 붕대를 움켜쥐었다. 피터는 귀까지 빨개진 채 수프만 떠먹었다. 메이는 웃음을 거두고 토니를 보았다. "농담 아니고요. 우리 피터 옆에 있을 거면, 퀸즈 저녁은 자주 먹으러 와요. 이 녀석 혼자 그 지붕에 앉아 있게 하지 말고요. 7년이면 충분했어요." "…매주 올게요. 아니, 매일." "매일 오면 수프 값 받을 거예요." "제일 비싼 걸로 낼게요." 벤이 또 혀를 찼다. 제일 비싼 건 제일 쓸데없는 거라니까. 네 사람의 웃음이 다시 부엌을 채웠다. 피터는 그 소란 속에서 토니를 흘끗 보았다. 토니도 피터를 보고 있었다. 식탁 위에서 맞닿은 새끼손가락이 아주 조금 더 깊이 엮였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토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페퍼의 이름이 떴다. 토니가 식탁에 양해를 구하고 받았다. [토니, 쉬시는 날인 거 아는데 잠깐만요. 다음 주 이사회 일정이 잡혔어요. 그리고 정부 쪽에서 문서가 하나 왔어요. 소코비아 이후로 어벤져스 관련 협조 요청인데, 법무팀이 직접 보셔야 한대요.] "알았어. 월요일에 들어갈게. 문서는 먼저 보내 줘." [보낼게요. 그리고 벤 씨 퇴원 축하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회사 이름으로 꽃 보냈어요.] "고마워. 전할게." 업무 이야기와 축하 인사 한마디. 그게 전부인 짧은 통화였다. 토니가 휴대전화를 식탁에 엎어 놓자 벤이 물었다. "그 페퍼라는 사장님이에요?" "네. 회사 대표요. 다음 주 회의 일정 때문에요. 퇴원 축하드린대요. 꽃도 보냈대요." "바쁜 분이 꽃까지. 고맙다고 전해 줘요." 식사가 끝나자 메이는 피터를 개수대 앞에 붙잡아 설거지를 시켰다. 그 사이 벤은 토니에게 손짓해 현관 밖 계단으로 데리고 나갔다. 피터는 그릇을 헹구며 열린 창문 너머로 둘을 보았다. 벤이 계단에 천천히 걸터앉았고, 토니가 그 옆에 앉았다. 저녁의 골목이 발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피터의 귀에 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들었다. 스파이더 센스가 아니어도 들릴 만큼 조용한 저녁이었다. "…메이한테 다 들었어요. 그 세계 얘기. 그 장갑 얘기도." "…네." "그 녀석이 그 얘기 하면서 제일 많이 운 데가 어딘지 알아요? 스타크 씨 얘기 할 때요. 내가 죽은 얘기 할 때보다 더 울었대요." "……" "그러니까 그 장갑 같은 거, 근처에도 가지 마요. 그 녀석이 그거 막으려고 7년을 버텼어요. 스타크 씨가 그 7년을 헛되게 하면, 내가 이 가슴에 붕대 감은 채로라도 쫓아가서 렌치로 한 대 칠 거예요." "…렌치 맞으면 아프겠네요." "아프라고 치는 거죠." 토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벤도 웃다가 또 붕대를 움켜쥐었다. 토니가 벤의 등을 조심스럽게 받쳤다. 벤은 숨을 고르며 골목 어귀를 보았다. 열흘 전의 그 골목. 배수관 위의 감지기가 초록빛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하나만 더 물을게요. 스타크 씨는 그 녀석이 다른 세계에서 온 거 알고도, 그 녀석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거 알고도, 괜찮아요?" "…처음엔 안 괜찮았어요. 병원 옥상에서 한참 웃었어요. 7년 동안 질투한 상대가 저였더라고요. 근데 이제는 괜찮아요. 그 사람이 저라서가 아니라, 그 녀석이 지금 웃으면서 보는 게 저라서요." "…그럼 됐어요." 벤이 토니의 어깨를 크고 거친 손으로 한 번 쥐고 계단을 짚으며 일어섰다. 토니가 그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피터는 개수대 앞에서 그릇을 쥔 채 굳어 있었다. 메이가 옆에서 피터의 손등을 톡 두드렸다. 그릇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메이가 웃으며 그릇을 받아 들었다. 다 들었냐는 눈이었다. 피터는 귀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설거지를 마치자 메이가 거실의 낡은 텔레비전을 켰다. 저녁 뉴스였다. 벤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메이가 그 옆에 앉았다. 피터와 토니는 부엌 문틀에 나란히 기대섰다. 화면 속의 앵커가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소코비아 사태 이후 여러 나라에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하늘을 나는 사람들, 도시를 들어 올리는 사람들, 그들을 누가 감시하고 누가 책임지느냐고. 화면이 바뀌어 정장 차림의 남자가 기자들 앞에 섰다. 국무장관이라는 자막이 떴다.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그들에게도 규칙이 필요하다고. 100개가 넘는 나라가 함께 서명할 협정이 준비되고 있다고. 피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저 남자가 들고 올 협정이 원래 세계에서 어벤져스를 둘로 갈랐다. 스티브와 토니를. 공항의 활주로에서 서로를 향해 날아들던 두 편. 그리고 시베리아의 얼음 위에서 방패가 아머의 가슴을 내리찍던 순간. 피터는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때 피터는 퀸즈로 돌려보내졌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알았다. 그날 이후 토니가 얼마나 오래 혼자였는지. 토니가 화면이 아니라 피터의 얼굴을 보았다. 피터의 얼굴이 무엇을 아는 얼굴인지, 이제 토니는 그 내용까지 물을 수 있었다. 토니가 피터의 손을 찾았다. 보지도 않고. "…이것도 네가 아는 거야?" "…네. 이것도요. 저 협정 때문에 어벤져스가 갈라져요. 캡틴이랑 토니가요. 서로 싸워요. 공항에서. 그다음엔 시베리아에서." "…캡이랑 내가." "네. 그 세계에서는 그 뒤로 다시 만날 때까지 몇 년이 걸렸어요. 타노스가 올 때까지요. 그때 둘이 갈라져 있어서 막지 못했어요." 토니가 화면 속의 국무장관을 보았다. 턱에 힘이 들어갔다. 피터의 손을 쥔 손에도. 텔레비전의 푸른 빛이 그 옆얼굴 위에서 깜빡였다. 토니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그럼 이번엔 안 갈라지면 되겠네. 3년 전에 할 일 하나 더 생겼어." 토니는 휴대전화를 꺼내 피터를 흘끗 보더니 한 이름을 눌렀다. 스티브. 신호가 두 번 가고 스티브가 받았다. 기지의 훈련장인지 뒤에서 샘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스타크. 뉴스 봤어. 그 협정 얘기.] "나도 봤어. 그래서 전화했어. 캡, 하나만 약속하자." […뭘.] "그 협정 문서가 우리한테 오면, 서명하든 안 하든, 각자 정하기 전에 먼저 만나서 얘기하자. 둘이. 아니, 다 같이. 따로 정하고 나서 서로한테 통보하지 말고." [……] "캡?" […자네가 먼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네. 보통은 내가 하는 말인데.] "요즘 좀 배웠어. 따로 정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주 확실한 데서 들었어." 스티브가 수화기 너머에서 짧게 웃었다. 뒤에서 샘이 누구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고, 스티브가 손을 내젓는 기척이 전해졌다. [알겠네. 먼저 만나자. 문서가 오면 바로. 그리고 스타크, 그 확실한 데가 어딘지는 나중에 꼭 말해 주게. 궁금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으니까.] "나중에. 같이 저녁 먹으면서. 여기 퀸즈에 소금 엄청 들어간 수프 잘하는 집 있어." 토니가 고맙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피터는 문틀에 기댄 채 그 통화를 들으며 숨을 멈추고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이 둘은 이 통화를 하지 않았다. 각자 정했고, 각자 통보했고, 공항의 활주로에서 마주 섰다. 토니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피터를 보았다. "하나 했어. 목록에서." "…네. 하나요." 소파에서 벤이 고개를 돌려 둘을 보았다. 문틀에 나란히 기댄 둘을. 맞잡은 손을. 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메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텔레비전 볼륨을 낮췄다. "뭘 막으러 가든, 다녀와서 저녁은 여기서 먹어. 둘 다. 그게 이 집 규칙이야." 피터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토니도 웃었다. 메이가 벤의 어깨에 기대며 맞장구를 쳤다. 소금은 그때그때 기분 따라 넣겠다고. 텔레비전에서 국무장관의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협정, 서명, 규칙. 원래 세계에서 저 협정은 끝의 시작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엔 그 시작 앞에, 손을 맞잡은 둘과, 저녁은 여기서 먹으라는 철물점 주인과, 소금을 기분 따라 넣겠다는 메이가 함께 서 있었다. 밤이 깊어 피터와 토니는 1층으로 내려왔다. 토니는 오늘도 옆방에서 자기로 했다. 아직은 옆방이라고, 메이가 정했다. 피터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창가로 갔다. 해바라기 화분 옆, 창틀 위에 두 개의 물건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빛이 꺼진 삼각형의 원자로. 그리고 가장자리가 녹아내린 붉은 아머 파편. 토니가 문틀에 기대 그 창틀을 보았다. 5년 동안 감지기 화면으로만 매일 보던 그 둘을, 처음으로 직접. "그게 그거구나. 그 사람 거." "…네." "7년 동안 들고 다녔고." "네. 사막에서부터요. 동굴에서도, 헬리캐리어에서도. 그 세계에서 혼자 남은 4년 동안에도요." 피터는 그 파편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차갑고 단단했다. 녹아내린 가장자리가 손금에 걸렸다. 피터는 그 파편을 오래 내려다보다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벤이 건네준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다. 뚜껑에 크레파스로 서툴게 적힌 피터의 공구라는 글씨. 피터는 그 뚜껑을 열고, 장난감 드라이버들 옆에 파편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 뚜껑을 닫았다. 문틀에서 토니가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 "버리는 거 아니에요. 보내 드리는 거예요. 메이가 그랬어요. 그 애 방 치울 때 하나씩 상자에 담았다고. 버린 게 아니라. 이제 이 파편은 창틀에서 내려와서, 다섯 살 피터 물건들 옆에 있을 거예요. 둘 다 제가 사랑했던 거니까요. 창틀에는 이것만 둘게요." 피터는 창틀 위에 혼자 남은 원자로를 손끝으로 쓸었다. 빛이 꺼진, 안쪽 고리가 반대 방향으로 한 겹 더 감긴 코일. 이 세계의 이 사람이 건넨 심장. 토니가 문틀에서 몸을 떼고 다가와 피터의 등 뒤에 섰다. 그리고 피터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쳐 그 원자로를 함께 쓸었다. "…그 사람한테 한마디 해도 돼? 상자 속에 있는." "…네." "고맙다고. 이 녀석 여기까지 보내 줘서. 그리고 걱정 말라고. 이번엔 내가 이 녀석 옆에서 오래 살 거라고. 그 사람이 못 한 만큼." 피터는 토니의 손 아래에서 원자로를 쥔 채 웃었다. 젖은 웃음이었다. 창밖으로 맞은편 지붕의 물탱크 그늘이 보였다. 오늘 밤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제 아무도 그 지붕에 올라가 3층의 불이 꺼지는 걸 지켜볼 필요가 없었다. 3층의 불은 벤과 메이가 직접 끄고 잠들 테니까. 그리고 피터는 이 방에서, 그 불이 꺼지는 걸 걱정하지 않은 채 잠들 것이다. 옆방의 벽 너머로 들려올 이 사람의 숨소리를 들으며. - 토니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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