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이야기 # 어나더 # 그 말을 들은 그레이스의 얼굴이 즉시 붉어졌다. 그는 당황한 동시에 몹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세상에! 저런 말을 입으로 내뱉는 사람이 어딨어! "너, 너... 그런 말을, 어떻게..." 아. 말하면서도 느꼈다. 자신은 지금 열다섯 살 코틀랜드를 꾸짖듯이 말하고 있었다. 방금 그가 한 말이 정확히 이것과 반대되는 말이었는데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이러는 것이었다. 불편하고 난처한 상황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기 힘들어서 도피 중인 것이다. 이런다고 피해지는 상황이 아닌데도. 그는 엄연히 성인인데, 어린 코트 대하듯 해서 어물쩡 이 상황이 무마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자신의 고질병이었다.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도망칠 생각부터 하는 것. 이 습관을 이겨냈던 적이 단 한 번 있었다. 어린 코트의 살인을 목격했을 때.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일이 터질 때까지 방치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코트의 형량을 줄이려고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외면하고 도망칠 정신은 없었다. 자신 때문에 어린 코트가 받을 상처가 두려웠다. 아끼던 제자의 끔찍한 살인 장면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어린 코트가 처해왔던 환경과 그것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어쩌면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는지도 모른다. 외면하지 않았다고 착각했지만, 그것조차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결국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식스는 그를 내려다 보고 서 있었다. 한참 올려다 봐야 하는 키, 벌어진 어깨, 깊은 눈매. 어떻게 처음에 이 모습을 보고 어린 코트를 떠올렸는지 모를 만큼 그윽한 눈빛에는 위압감까지 어려 있었다. 소년이었던 코트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은 결국 그를 돕는 것에 실패했는데, 그는 저렇게 잘 자랐다. 너무나도 멋있게,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그가 저렇게 멋지게 성장해온 시간에, 자신은 없었다. 자신은 코트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그 사실이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코트와 닮은 식스를 보면서 내내 괴로웠다. 그레이스는 과거의 기억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현재의 삶으로 잠시 덮어뒀을 뿐, 과거는 그 자리에 계속 존재했다. 그가 디디는 땅, 내딛는 걸음마다 있었다. 식스가 코트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나아졌다. 그에게 가진 제 감정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식스가 코트라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으면서, 그가 좋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코트가 아니기를 바라다니. 자신의 이중성과 가식에 손이 떨릴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이토록 쉽게 죄책감을 내려놓으려 하다니. 감히 네가. 그렇게 해서 접으려 했던 마음이었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한 건지는 아는 거야?" 피하지 말자.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까. 한 번이라도 정면으로 맞닥뜨려 보는 거야, 라일랜드. 그러나 손이 너무 떨려 주먹을 쥐었다. 좁은 방안에, 그와 단둘이 있었다. 심장이 제정신으로 뛸 리가 없었다. 어쩌다 이런 객기를 부렸는지 모르겠다. 그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를 좋아했다. '좋아한다'는 건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며 부모가 하던 것을 따라 '사랑해요, 여보' 하고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하는 말이 아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색종이에 '친구야, 난 널 좋아해' 라고 쓰는 여섯 살짜리의 마음이 아니었다. 이 마음이 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건 그와 입맞추고 싶고, 나아가 섹스까지 하고 싶은 마음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위험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방금 식스가 한 말은 자신이 생각만 해왔던 것보다 더 위험한 발언이었다. 식스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레이스는 도통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기분이었다. 식스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으으으,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절망적으로 흘러나왔다. 머리를 부여잡는 그를 식스는 표정 변화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어째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레이스는요." "어?" "내 말뜻을 분명히 이해했나 해서요." "그건......" 갑자기 사고가 멈췄다. 그래, 그건 무슨 뜻이지? 단순히 문장만 놓고 보자면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일단, 알 수 있는 단서부터. 그는 게이다. 바이거나. 최소한 남자에게도 흥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걸 전제로 놓고 생각했을 때 그가 한 말, 잠든 날 보며 수음을... 아무튼 그 말의 의도를 떠올렸다. 첫 번째, 이렇게 몸을 부대끼고 자는 상황은 곤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그에게? 아니면 내게? 어느 쪽이든 단순한 경고의 의미다. 두 번째, 날 놀리려는 것이다. 이유는? 내 반응이 궁금해서? 그러기엔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다. 난 환자인데다가, 이런 농담을 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게다가 오직 그런 의도만으로 저런 식으로 반응하진 않을 것 같으니까 이건 패스. 세 번째, 그는 나를...... 피하지 마, 라일랜드.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생각해. ...그는 나를 좋아한다. 그것도 잠든 날 보며 수음할 수도 있을 만큼. 놀랍도록 선명하게, 세 번째만이 정답이라고 제 이성이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기쁘다는 표현을 하는 게 맞는 걸까. 단순히 생각하면 자신은 그를 좋아하고, 그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는 뜻인데, 그러면 기쁜 것이 정상인데, 그러기엔 많은 것이 복잡했다. 아주 많은 것이. "...날 좋아해? '그런' 의미로?" "......"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이렇게 빠른 결론을 내릴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쉽게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나. "좋아해요. 오래 전부터." 아니, 아니, 아니- 그것까진 물어보지 않았잖아! 언제부터였다고,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해왔다. 아직 앞의 정보도 처리하지 못했는데, 더 무겁고 어려운 데이터가 떠밀려 들어왔다. 난 컴퓨터가 아니라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래 전? 우리가 다시 만난 건 고작... 그건 오래 전이라는 말을 붙이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굳이 덧붙이기에도 이상할 정도였다. 식스가 말하는 '오래 전'은 한 가지 의미밖에 없었다. "하으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난 아직 환자인데. 환자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레이스." "잠깐, 잠깐만..."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아, 눈이 젖고 있는 것 같았다. 생리적인 고통으로 흐르는 눈물이었다. '너무 아파.' 따뜻한 손이 팔목을 잡아왔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식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식스가 얼굴을 문질러 닦는 것이 느껴졌다. 고분고분하게 눈을 감았다. 잠시 멈추었던 손은 다시 천천히 볼과 눈가를 닦았다. "약을 가져올게요." 그 순간 식스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그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참는 표정이었다. 식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레이스는 멍하니 앞을 쳐다봤다. 잠시 후 물컵과 약통을 손에 든 식스가 돌아왔다. 식스는 다시 그의 곁에 앉아 약 한 알을 꺼내 그레이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레이스가 손바닥에 올려진 약을 바라보고만 있자, 식스는 그것을 다시 집어들고 그레이스의 입가에 대 주었다. 그레이스는 얌전히 약을 받아먹었다. 입가에 대준 물까지 얌전히 받아마셨다. "...미안해요." 낮게 가라앉은 식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약은 약 기운이 빠르게 돌지 않는다. 머리가 웅웅 울리는 감각을 느끼며 그레이스는 식스를 쳐다봤다. '...아.' 저 얼굴. 언젠가 본 기억이 있다. 그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코트와 교실에 남은 어느 방과후였다. 그레이스는 그날 일이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코트를 돌려보내야 했다. 코트에게 스키틀즈를 나눠주자 곧잘 받아먹었다. 처음에 껌을 건네줬을 때는 그걸 받아든 채로 한참 바라보기만 하던 아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나눠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서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왠지 기특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는데, 갑자기 뻣뻣하게 굳어선 자신을 쳐다봤다. - 앗, 미안. 나도 모르게. 말도 없이 만져서 미안해. - ...... 코트는 고개를 저었다. - 아뇨. 괜찮아요. - 어... 그래, 혹시 머리 만지는 게 싫으면 말해. - 싫지 않아요. - 응. 그래도 조심할게. 코트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 왜? - 마음대로 만지셔도 괜찮아요. - 응? - ...... 아. 볼 빨개졌다. 아주 미세하게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을 빤히 바라봤다. 그레이스는 엉거주춤 손을 올렸다. 다시 조심스럽게 앞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얌전히 손길을 받는 코트의 입가가 살짝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그레이스 역시 조금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저기 코티,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가 일이 있어서 조금 일찍 가야 해. 오늘은 아쉽지만 이만 일어나야겠는 걸. - ...어디 가세요? - 음, 그건 비밀. 선생님도 사생활이 있거든. 그레이스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면서 코트의 머리카락을 살짝 헝크러뜨리다시피 부볐다. 앞머리가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코트가 고개를 들지 않자 그레이스가 그를 살피려 허리를 숙였다. - 코트? - ...데이트 하세요? - 뭐? 코트가 고개를 들었다. 파란 눈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 선생님, 애인 있어요? 아. 이런. 이런, 이런, 이런- 그때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저건 상처입은 얼굴이었다. _ - 뭐? 아냐! 그런 거...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런 질문을 들으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가끔 학생들이 수업 중에 짓궂은 질문을 하고는 하지만, 오히려 수업 중에 받을 수 있는 예상 질문이기 때문에 쉽게 방어하곤 했다. 그러나 이렇게 개인적인, 1대 1의 상황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학생들도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선을 알고 있다. 코트와는 방과후 면담으로 꽤 가까워지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도 그랬는데, 코트라고 다르게 느낄 리 없었다. 그 질문이 불쾌한 건 아니었다. 다만 너무 놀랐을 뿐이었다. - ...아니에요? 되묻는 얼굴은 약간 밝아보였다. 그때는 자신도 당황해서 그런 표정 변화까지 섬세하게 알아채지 못했던 것 같지만, 돌이켜 보니 그랬던 것 같다.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보다 조금 더 밝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안심했던 거구나. 내게 애인이 없어서. 그때는 저와의 약속을 일찍 파하고 가는 게 서운했나 싶었다. 나랑 이렇게 면담하는 시간을 많이 좋아하게 됐나 봐. 기특해라. 그런 생각에 더 열심히 자료를 준비했다. 우리 코트, 내가 반드시 과학 수재로 대학 보내줘야지. 뭐 그런 희망찬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그 표정이, 고백하기도 전에 차여서 슬픈 표정이었단 말이야? 왠지 좀 억울해졌다. 식스는 침울해 보였다. 그렇지.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자마자 돌아온 반응이 마치 끔찍하다는 듯이 괴로워하며 우는 모습이니까.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리고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강아지 귀 같은 게 달려 있었다면 축 늘어뜨려져 있었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강아지라기엔 좀 많이 크지만. "......" 식스의 눈동자가 약간 커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레이스는 자신이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무심결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을 우뚝 멈췄다. 잠깐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레이스는 자신이 하고 있던 행동을 알아차리고 커다래진 눈을 깜박였다. "...아." 놀라서 손을 떨어뜨렸다. 그러고 나자 그 행동이 더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 갑자기, 말도 없이." 식스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대로 만져도 괜찮다고 말했잖아요." "...아..." 식스의 표정은 차분했다. 그 순간 과거의 코트가 겹쳐 보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제 심장의 고동소리가 제 귀에 들렸다. 눈앞의 식스는 그가 알던 코트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같지만 달랐다. 식스는, 이 남자는 자신을 설레게 했다. 눈물보다는 웃음 짓게 했다. 조금 더 오래 그 얼굴을 바라보고 싶게 만들었다. 죄책감도 잊고 싶을 만큼. 속도 없이 좋아하고 싶게 만들었다. 식스의 커다란 손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머리 위에 닿게 해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런 다음 그는 살짝 미소 지었다. "선생님이 이렇게 날 쓰다듬어 줄 때마다 좋았어요." "......" "그러면 전부 괜찮아지는 것 같았거든요." 집으로 돌아가면 어김없이 찾아올 고통의 순간도, 이 한순간의 기억이면, 견딜만 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폭력적인 손길로 물에 잠겨 있는 동안에도, 이 손길과 그의 미소를 떠올리면 숨통이 막혀 있어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레이스로 인해서 식스는 고통에 무뎌지는 법을 익혔다. 그 기억으로 그는 지금껏 생존해 왔다. 식스의 미소가 조금씩 무너졌다. 그레이스는 그의 손이 다시 뺨에 닿은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자신이 우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줄곧 무의식 중에 어린 코트와 식스를 분리해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식스가 곧 자라난 코트라는 것이 실감났다. 그는 처음부터 코트였다. 식스는 코트의 모든 기억과 고통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식스는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바로 그 아이였다. "...그때는 자주 웃었는데. 이젠 우는 모습을 더 자주 보네요." 식스는 쓰게 웃었다. 그레이스가 다급하게 손을 겹쳐잡았다. "...코트, 이건... 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 목이 뜨거워져 말할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눈물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레이스." "...응." 코를 훌쩍이며 대답하자 코맹맹이 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속 지켜줄게요. 다른 의도 없이, 나을 때까지 옆에 있을게요." "......응."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_ 역시 두 장정이 눕기엔 침대가 비좁았다. 그레이스 자신도 몸집이 작은 편이 아닌데, 식스는 커도 너무 컸다. 침대 밖으로 발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발은 튀어나오지 않는데. 그레이스는 침대 끝에 불편하게 걸쳐진 식스의 커다란 발을 보고 생각했다. 발도 엄청 크네. 식스는 모로 누워 있었다. 둘 다 어깨를 펴고 누울 만한 너비가 아니었다. 아니, 간신히 가능하긴 하겠지만 자신이 불편할까 봐 일부러 몸을 세워 누운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가슴 위에 얹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두통은 어느덧 가신 상태였다. 대신 가슴이 쿵덕대며 뛰고 있었다. 심장이 튀어오르는 모습이 보이기라도 할까 봐 애써 손으로 가린 상태였다. 식스는 불편하게 머리를 괴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보기엔 그 자세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정말 저러고 잘 건가. 자신이 아직 잠들지 않아서 지켜봐주느라 그러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레이스는 그가 눈이라도 붙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잠은 싹 달아난 상태였지만. 눈을 감자 주변의 소리에 온 감각이 집중됐다.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숨소리가 흘러들었다. 규칙적으로 들이마셨다 내쉬는 숨소리. 그리고 약하게 들리는... 심장소리. 식스의 가슴이 바로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건 꽤 크게 뛰고 있어서, 조용한 가운데 아주 약하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알아차리는 순간 시곗바늘 소리가 멈췄다. 몸을 쓰는 사람들은 대개 심장박동이 느린 편인데, 식스 역시 그런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은 느리게, 그리고 크게 뛰었다. 그레이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가 움직였다. 그러자 뺨 위에 숨결이 닿았다. "......" 그레이스는 숨을 멈췄다. 뺨 위로 내려앉던 숨이 갑자기 멈췄기 때문에 따라 멈춘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그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숨을 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숨죽인 채 가만히 있었다. 이제 와서 다시 고개를 빼기엔 너무 티가 날 것 같았다. 식스는 꽤 오래 숨을 참았다. 그런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까지 숨을 참고 있으려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그의 몸이 갑자기 제쪽으로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끄지 않은 조명등 때문에 눈을 감아도 옅은 빛이 보였는데, 갑자기 그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식스와 맞닿지 않은 반대편 팔이 감싸지는 것을 느꼈다. 그레이스는 소리나지 않게 숨을 들이켰다. 식스가 제 몸을 옆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식스는 그레이스가 불편하지 않게 등뒤에 베개를 받쳤다. 그의 어깨를 감싸안은 식스의 손은 그대로 내려가지 않고 머물렀다. 서로를 비스듬히 마주보고 누운 채 맞닿아 있었다. 그레이스는 더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전까지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때, 뒤통수로 올라온 손이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고개 위쪽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세가 좀 불편해서 고쳤어요. 불편하면 말해요." "......으응." 침을 약간 삼키며 대답하느라 목소리가 먹히듯이 말을 끝맺었다. 머리에 닿은 손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뜨면 그의 목울대가 보일 것 같았다. 그보다 고개를 들면, 턱과 입술이 보일 것이다. 좀 더 고개를 들면...... 숨을 쉴 수 없었다, 여전히. 머리에 닿은 손도 계속 신경쓰였다. 기분이 좋은데, 신경쓰였다. 너무 부드러워서, 너무 다정해서. 혹시라도 멈추면 왜 멈추느냐고, 계속 쓰다듬어 달라는 말을 뱉어버릴 것 같아서. "...코트." "네."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놀라는 바람에 부르고는 말을 잇지 않았다. "불편해요?" "...으응. 조금." 그 말에 식스는 곧바로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텁. 그레이스가 그의 셔츠를 붙잡았다. 매끄러운 셔츠 위에서 손이 미끄러져 앞여밈을 겨우 움켜쥐었다. 그 바람에 가슴을 약간 쓰다듬은 꼴이 됐다. "...미, 미안." "...아니에요." "떨어지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그레이스는 고개를 들었다가 흠칫 멎었다. 이쪽을 보는 식스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 저기......." 셔츠를 붙잡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식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바다처럼 깊은 눈동자로 그저 자신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갇혀 눈을 뗄 수 없었다. 눈길이 곧게 뻗은 콧대를 따라 내려가 단정하게 기른 수염 사이 다물어진 굳은 입매에 닿았다. 그 순간 비정상적인 충동이 들었다. 심각하게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인 충동이. 그레이스는 셔츠를 잡은 손을 그대로 당겨내려 입맞췄다. _ 미친놈! 입을 맞추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금세 희미해졌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던 식스의 손이 뒤통수를 완전히 감아당기며, 맞붙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뜨거운 혀가 침범했다. 그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식스의 혀는 덥고 습했다. 그리고 끈질겼다. 당긴 사람은 저였으나 놓지 않는 사람은 그였다. 마치 놓치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숨이 차올 듯하면 떨어져 줄 것처럼 멀어졌다가 혀끝에서 다시 거리를 좁혔다. 줄곧 이러기만을 바라온 사람 같았다. 그레이스는 그가 얼마나 참고 있었는지 몸소 깨달았다. 반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어 몰아붙이는 거라는 걸. 그러면서도 반쯤은 제정신을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중간쯤부터는 조금씩 느려졌다. 간신히 이성을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그레이스가 멈춰세울 때까지 그치지 못했을 것이다.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잦아들고 입술 사이로 틈이 생겨났다. 고여있던 타액이 실처럼 늘어나 이어졌다. 거칠고 낮은 숨소리가 흩어졌다. 식스의 가슴께를 쥐고 있던 손길은 어느새 그의 어깨에 있었다. 이제서야 그걸 인식한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그레이스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식스의 코끝과 입가 사이 어딘가 맺혀있던 시선이 겨우 위를 향했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바라보던 식스와 눈이 마주쳤다. "...으음..."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침을 삼켰다. 습관처럼 또다시 머릿속으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말을 뱉으면 실수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식스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도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어떤 말도 떼기가 조심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식스가 물었다. "실수였어요?" 그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그레이스는 즉시 소리쳤다. "아니, 아니- 아니야!" 세 번이나 대답해버렸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식스의 눈이 약간 커지더니 푸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었어...... 그레이스의 표정이 멍해졌다. 왠지 긴장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걸 묻기엔 늦지 않았나. 이미 잔뜩 입맞췄는데...... 그레이스는 김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실수한 거 아니야... 하고 싶어서 한 거야." 이번에는 그는 웃지 않았다. 다시 공기의 흐름이 약간 팽팽해졌다. 그는 어렵게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충동적으로요?" 질문의 의도가 명확하게 들렸다. 식스는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레이스도 이번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응, 맞아." 변명을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식스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왠지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침묵을 참을 수 없어서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졌는데, 이런 식으로 튀어나간 말이 한 번도 좋은 결과를 불러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식스가 다시 이쪽을 바라봤다. 그레이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무슨 말을 꺼낼 거라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식스의 팔이 어깨를 감싸왔다. 식스는 키스하기 전처럼 다시 그를 안았다. 그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식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망도, 추궁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껴안고 있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 가슴 한 구석이 뜨거워졌다.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이 입을 맞추더니, 이젠 그것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그레이스가 충동적이었다고 대답했기 때문에, 그는 애써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방금 그런 키스를 해 놓고. 그렇게 절박하게 입맞췄으면서. 그러나 이전과 완전히 같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자신을 껴안은 팔이 조금 더 힘주어 안은 것을 느꼈다. 등을 감싼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하고 있지만 실패한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그의 옷깃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조금 잡아당기자 식스는 왜 그러냐는 듯 내려다 봤다. 그랬는데 너무 가깝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 같았다. 당황한 가운데서도 식스는 침착했다. 고개를 뒤로 물린 것은 순전히 그레이스를 배려한 것 같았다. 평생을 기다린 것처럼 말했으면서, 행동만큼은 조심스러웠다. 이런 모습은 어릴 때와 똑같았다. 과묵하고, 배려심 있고, 생각이 깊었다. 어린애답지 않다고 느꼈다. 가끔 수줍게 얼굴을 붉힐 때 빼면. 뭐, 수줍다는 것도 자신이 눈치채지 않으면 모를 정도긴 했다. 그레이스는 그런 코트의 모습을 자기만 아는 것 같다는 생각에 미소를 흘렸다가 표정을 바로잡았었다. 코트가 마음을 여는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니, 담당 선생님으로서 할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는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식스를 쳐다봤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식스는 얼굴을 붉혔다. 조금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식스로서 자신을 대하는 동안에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보며 이렇게 표정을 읽기 쉬운 사람이었나 싶었다.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인데." "......?" "지금 갑자기 든 충동은 아니야." 식스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해 보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널 상대로 몇 번 상상했던 일이라는 거야." "뭐..." 식스는 무심코 말을 뱉고 다시 삼켰다. 이번엔 확실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는 불쑥 몸을 일으키고 그레이스를 내려다 봤다. 그레이스도 따라 일어났다. "너도 무슨 뜻인지 알 거라고 생각해. 난 굉장히 티가 많이 나는 타입이니까..." 그레이스는 문득 쑥스러워져 입술을 핥았다. 식스의 앞에서 몇 번이나 바보 같은 짓을 했던 것 같은데... 그가 코트였다 생각하니 좀 더 부끄러웠다. "...눈치채고 있지 않았어?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거." 고슬고슬 고슬사자 자공자수 식스그레이스 그레이맨 헤일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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