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주일 동안 라일랜드 그레이스의 연구 효율은 최악을 달렸다. 칠판 가득 분자 구조식을 그리다가도 제 다리에 얽히는 탄탄한 허벅지가 아른거렸고, 정밀한 피펫팅을 하다가도 현관 앞에서 제 몸을 밀어붙이며 얽어오던 혀의 뜨겁고 부드러운 감각이 떠올라 랩실 한복판에서 손을 바르르 떨었다. 게다가 절정의 순간에 제 인중으로 끈적하게 흘러내리던 붉은 핏방울과, 안절부절 못하며 코에 휴지를 대주면서도 귀엽게 웃던 얼굴이 정신이 깨어있는 모든 순간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가장 그레이스의 피를 말리는 건, 용기를 쥐어짜 그의 핸드폰을 받아들고 제 번호를 입력했건만 며칠째 휴대폰이 끔찍하리만치 고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정작 본인은 콜트의 연락처를 받아오지 못했기에 먼저 움직일 수도 없었다. 우성 알파로서의 자존심이 짓밟히다 못해 바스라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그에게 난 술김에 거쳐간 흔한 하룻밤 일탈 상대에 불과했던 걸까. 섹스는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는데 알고 보니 나만 즐겼던거지. 아아, 그렇가면 진짜 창피한 일이다, 라일랜드 그레이스... 혼자만 첫사랑을 시작한 열살짜리처럼 사흘 내내 일상생활에 방해가 되는 정도라 그레이스는 랩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바짝 타들어가는 속을 3샷 커피로 적셔댔다. 그러던 수요일 아침, 지도교수가 이른 시간부터 과하게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레이스를 호출했다. "미안하지만 오늘 새로 주문한 오크나무 대형 서가가 공관으로 오기로 했거든. 내가 요새 허리가 영 안 좋아서 그런데, 자네가 가서 가이드 좀 해줄 수 있겠나?" 그걸 왜 제가...? 허나 대학원생에게 교수의 부탁으로 둔갑한 지시를 거절한다 라는건 존재하지 않는 옵션이었다. 그레이스는 영혼이 탈탈 털린 걸음걸이로 교수 공관 앞마당으로 향했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마당에는 거대한 가구 운반 트럭이 주차되어 있었고, 사설 프리미엄 업체 인부들이 뜨거운 볕 아래 땀을 흘리며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피로가 가득한 눈으로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다가가던 때였다. 트럭 뒷칸에서 한 남자가 사람 둘은 붙어야 할 거대한 통원목 서가를 혼자서 번쩍 들어 올리며 가뿐하게 바닥으로 내려섰다. "어어, 뒤에 조심하세요!" 목에 수건을 두르고 땀에 젖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은 민소매 티셔츠 너머로 좋은 몸을 드러낸 남자, 콜트 시버스였다. 파트 타임 말고도 뭘 많이 한다더니 이런 것도 하는구나. 그레이스는 땀에 젖었음에도 보들보들 해보이는 금발 아래 볕 때문에 인상을 쓴 그의 얼굴을 비현실적인 것을 보는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어....." ".....아"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콜트는 들고 있던 원목 서가를 냅다 떨어뜨릴 뻔했고, 그레이스는 들고 있던 교수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쏟을 뻔했다. 지난 시간동안 연락 한 통 없던 상대와 이런 땀 냄새 나는 현장에서 마주칠 확률이 대체 몇 퍼센트나 될까. 뼛속까지 이과생인 그레이스의 머릿속으로 무한대의 제로에 수렴하는 확률 계산이 어지럽게 돌아갔다. "라일랜드." 콜트는 이내 예의 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목에 걸쳐둔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대충 쓱쓱 닦아냈다. 하얗고 깨끗한 랩코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레이스의 앞에서 온통 땀범벅이 되어 있는 제 몰골이 조금 머쓱하긴 했지만 콜트에게는 민망함보다 예상 못한 곳에서 그를 다시 마주했다는 신기함과 반가움이 훨씬 더 컸다. 반면 그레이스는 콜트가 거대한 통원목 서가를 바닥에 부드럽고 가뿐하게 내려놓는 그 엄청난 코어 힘을 가만히 응시하며 슬그머니 마른침을 삼켰다. 불과 며칠 전 제 골반 위에 올라앉아 흐트러진 금발을 늘어뜨린 채 유연하게 흔들던 허리의 굴곡이 햇살 아래의 실루엣 위로 선연하게 겹쳐 들었다. 그 노련하고 뜨거웠던 움직임의 잔상이 뇌리를 스치자 그레이스의 귀 끝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다 만나다니. 무슨 일로 왔어요?" "저는, 크흠. 지도교수님 심부름으로 가구 검수하러 나왔어요. 이런 일도 하시는군요?" 잠깐, '이런 일'이 뭔데. 말을 뱉고도 의도치 않게 깔보는 투가 담겨있는 것 같아 그레이스가 헛기침을 하며 곧바로 정정하려 했지만 콜트가 턱 아래를 셔츠자락을 들어 슥 훔치며 시원스레 대꾸했다. "이거 일급이 꽤 괜찮거든요. LA 렌트비가 보통 비싼가요, 하하." 그때 저편에서 이사 업체 사람이 콜트를 부르는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콜트는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그레이스를 향해 눈인사를 건넸다. "저 가봐야겠네요. 그럼 검수 잘 하세요, 박사님!" 말을 마친 콜트가 트럭 뒤편으로 슝 사라지자 아까까지 영혼이 반쯤 빠진 채 피로에 절어있던 그레이스의 눈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아예 마당 한구석, 가로수 그늘 밑에 자리를 잡고 서서 콜트가 움직이는 동선을 대놓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햇살을 받아 얇은 셔츠 위로 드러난 등근육과 무거운 짐을 옮길 때마다 얕게 핏줄이 돋아나는 팔뚝, 다부진 어깨가 굉장히 이질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저 강인한 모습 안에 부드럽고 여린 면면이 있다게 그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랩코트 안쪽으로 기분 좋은 열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짐을 전부 내린 인부들이 슬슬 철수하려던 참이었다. 콜트가 업체에서 준 저렴한 캔커피 두 개를 양손에 쥐고 그레이스를 향해 사뿐사뿐 걸어왔다. 다 큰 사내한테 사뿐사뿐이라니. 기가 막히는 표현이었으나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용어가 없었다. "엄청 덥네요. 이거 마셔요." "고마워요. 고생 많으셨어요." 그레이스는 콜트가 건넨 차가운 캔을 받아들었다. 두 사람은 차가운 음료를 쥔 채 잠시 멈춰 서서 푸른 나무들이 늘어선 공관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았다. 갑작스러운 재회에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그레이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동안에도 콜트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해 보였다. 햇살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콜트의 눈동자가 천천히 열린 마당 공간을 살펴보고 있을 뿐이었다. "연락이 없으셔서 엄청 바쁘신 줄 알았어요." 평이하고 산뜻하기까지 한 말투였지만 그레이스의 귀에는 그 문장 끝에 묘한 서운함이 묻어나는 것처럼 들렸다. 순간 '바빠서 연락을 안 한 게 아니라 네가 먼저 안 한 거잖아' 하는 억울함과 함께, '역시 나한테만 심각한 밤이었고 이 사람에겐 대수롭지 않은 해프닝이라 먼저 연락을 안 한 건가' 하는 조바심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스는 달아오른 제 뺨에 차가운 알루미늄 캔을 슬쩍 갖다 대며 최대한 상처받지 않은 척 짐짓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번호를 알아야 연락을 하죠. 연락처는 나만 두고 왔잖아요." "아, 맞다! 내가 번호를 안 줬구나!" 콜트가 박수를 짝 치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왜 연락이 없나 내심 궁금해했으면서 정작 제 번호를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꼬인데 없이 맑게 웃는 콜트가 "완전 제 잘못이네요. 잘 들어가셨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그레이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급하게 제 핸드폰을 꺼내 밀어밀었다. 먼저 연락하고 싶어 일주일 내내 안달이 났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표정을 엄숙하게 굳힌 채였다. 콜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그레이스의 폰을 받아 제 번호를 꾹꾹 눌러주었다. 연락처 화면에 드디어 '콜트 시버스'라는 이름과 정갈한 숫자들이 저장되는 것을 확인한 그레이스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콜트는 안경 너머로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레이스의 눈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들고 있던 캔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럼 라일랜드, 제 번호도 가져갔으니까 이번엔 진짜 연락해요." 콜트가 양손을 번쩍 들어 방방 흔들며 트럭을 향해 멀어지자 그 자리에 남은 그레이스는 밀려드는 기쁨을 폭발시키듯 웃고 싶은걸 간신히 참아냈다. 그날 오후 랩실로 돌아온 그레이스의 책상 위에는 내용물이 싹 비워진 차가운 캔커피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다 마셔버린, 고작 90센트짜리 저렴한 알루미늄 조각에 불과한데도 눈앞에 그 흔적이 있는게 무작정 좋아서 그레이스는 마냥 빈 캔을 바라보며 실실 웃어댔다. 그 요상한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랩실 선배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너 왜 그러고 웃고 있냐? 교수님이 잡일 시켜서 공관 갔다 왔다더니 드디어 실성한 거야?" "...아닙니다." 그레이스는 짐짓 엄숙하게 표정을 굳혔지만 치솟은 광대는 쉬이 내려올 줄을 몰랐다. 결국 그날 오후, 그레이스는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알파의 자존심이니 뭐니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인내심을 붙잡고 연락을 할 만한 구구절절하고 완벽한 핑계를 찾고 또 찾았다. 그러다 마침내, 대학원생다운 아주 멍청하고 귀여운 문자를 완성해 찍어 내렸다. [라일랜드 그레이스입니다. 생각해보니 낮에 얻어먹은 캔 커피 값을 갚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 시각, 다음 저녁 알바를 하러 가기 전 잠깐 집에 들러 후다닥 씻고 나온 콜트의 휴대폰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라일랜드 그레이스'라는 이름과 어처구니없는 문장에 콜트는 히히 웃음을 터트렸다. 90센트짜리 캔커피 값을 갚겠다고? 콜트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금발을 대충 털어내며 곧바로 답장을 찍었다. [그럼 이번 주말에 그거보다 훨씬 비싼 걸로 사줘요.] 전송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화면의 읽음 표시가 바로 나타났다. 콜트는 폰을 붙잡고 가볍게 웃었다. 문자 창을 켜놓고 제 답장을기다리고 있었을 그레이스의 뚝딱거리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콜트는 그레이스의 다음 답장을 기다리며 침대 위로 풀썩 몸을 눕혔다. "라일랜드, 자네 요즘 영 집중을 못 하는 것 같군. 혹시 슬럼프인가?" "아닙니다, 교수님. 열심히 데이터 가공 중입니다." 그레이스는 모니터 구석에 띄워놓은 콜트와의 문자 창을 다급히 내리며 태연한 척 안경을 고쳐 썼다. 슬럼프가 아니라 상사병 비슷한 것이었다. 수요일 아침에 겨우 번호를 교환한 이후, 90센트짜리 캔커피를 핑계로 시작된 시시콜콜한 문자는 목요일을 지나 금요일까지 꼬박 이틀째 이어지고 있었다. 특별한 내용도 없었다. 점심은 먹었는지, 오늘 촬영장 분위기가 어떻다느니 하는 영양가 없는 대화조차 그레이스에게는 데이터보다 짜릿한 도파민의 원천이었다. 화면에서 '읽음'이라는 글자가 나타나는 타이밍에 가슴을 졸이느라 24시간 내내 심장이 뛰었다. 그러던 금요일 오후, 콜트가 먼저 다가오는 주말 약속의 운을 띄웠다. 그레이스로서는 정말이지 고마운 일이었다. [저 내일 다운타운에 있는 액션 스튜디오로 오디션 보러 가요! 스턴트 팀원 구한다길래.] [아, 그래요? 마침 잘됐네요. 저도 내일 오후에 그 주변에 선배 만나러 갈 약속이 있거든요. 시간 맞으면 저번에 말한 '비싼 거' 사줄게요.] 당연히 선배와의 약속 같은건 존재하지 않았다. 토요일 오후의 다운타운은 연구실에서 차로 40분이나 걸리는 거리였지만 그레이스는 금요일 밤부터 랩탑과 논문 더미를 가방에 사정없이 쑤셔 넣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주말 랩실 출근 도장을 찍는 대신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가벼웠다. 늦은 오전, 스튜디오 근처의 캐주얼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은 묘하게 내외를 했다. 그레이스는 항상 랩코트 아래 받쳐입던 후줄근한 티셔츠 대신 제법 깔끔하게 다린 단정한 셔츠를 입고 나왔고, 콜트는 오디션을 막 마치고 온 터라 몸에 타이트하게 착 달라붙는 검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대체 무슨 약속이길래 가방이 이렇게 묵직해요?" 콜트가 그레이스의 터질 듯한 백팩을 보며 큭큭 웃었다. 그레이스는 가늘게 테가 들어간 안경을 손등으로 밀어올리며 대꾸했다. "선배 만나기 전에 논문 리뷰 좀 하려고요." 그레이스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며 콜트가 주문한 롱블랙과 초콜릿 칩 머핀을 밀어주었다. 수요일에 얻어먹은 90센트짜리 캔커피 값의 빚을 갚기에는 나름 소박하고 귀여운 사치였다. 나른한 햇살이 카페 통창을 통해 쏟아지는 동안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별의별 일상적인 이야기를 다 나눴다. 그레이스의 까다로운 지도교수 뒷담화부터 콜트가 오디션에서 선보였다는 맨몸 낙법 기술까지, 주제는 끊임없이 튀었다. 콜트가 눈을 반짝이며 스턴트 연기를 설명할 때마다 그레이스는 제 예상보다 이 남자가 훨씬 더 성실하고 제 일을 사랑하는 매력적인 인간이라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다. 대화가 유쾌하게 이어지는 와중에도 그레이스의 신경은 온통 콜트에게 쏠려 있었다. 정확히는 콜트의 향에. 이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일종의 강렬한 열망에 가까웠다. 매일 억제제를 꼼꼼하게 챙기는건지 콜트에게서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예의 그 진득하고 달콤한 바닐라 코코넛 향을 다시 맡고 싶어서 당장이라도 저 타이트한 티셔츠 자락이나 목덜미 어디에든 코를 처박고 숨을 들이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레이스는 웃으며 머핀을 베어 무는 콜트를 보며 속이 타들어 갔다. 그는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첫 만남의 아침에 자신이 멍청하게 그어버린 선 때문에 콜트가 정말 저를 '깔끔한 하룻밤 파트너' 정도로만 정리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저 담백하고 산뜻한 태도가 전부 연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레이스는 생각이 많아져 미간을 긁적였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가 아주 부산스럽게 굴었다. 만약 자신이 그날 밤 베란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넓직한 카페 안으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은근슬쩍 흘려보낸다면 콜트가 그때처럼 허리를 잘게 떨며 제 목을 끌어안아 줄까? 거의 러트가 온것처럼 알파의 머릿속은 이미 온통 변태같고 절박한 가설들로 가득 차올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콜트는 그저 담백한 거리를 유지하며 눈 앞에 앉아 우유가 들어있는 차를 마시는 그레이스가 굉장히 어른스럽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두 사람 모두 그 날 얘기만큼은 완벽하게 함구한 채 한참을 쓸데 없는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곧 콜트가 아쉬운 듯 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가봐야겠어요. 점심에 다른 알바가 있어서요." "아아... 그렇군요." 그레이스의 목소리에 숨기지 못한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겨우 오전에 잠깐 얼굴을 본게 다인데 벌써 헤어져야 한다니, 어떻게 만든 시간인데... 그레이스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콜트는 그런 그레이스의 표정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슬쩍 좋게 웃으며 툭 제안을 건넸다. "너무 아쉬운데.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면 마크 집 루프탑으로 올래요? 우리 스턴트 팀원들이랑 다 같이 바비큐 파티 하기로 했거든요. 마크 생일 주간이기도 하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저랑 마크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다들 편한 사람들이라서 재밌을 거예요." 사실 그레이스는 다음 날인 일요일 자정까지 국제 저널에 투고할 논문 최종 수정본을 무조건 제출해야 했다. 처리해야 할 데이터만 수천 개였고, 오늘부터 밤을 새워도 모자랄 판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학위 과정 전체가 꼬일 수도 있는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네, 갈게요. 재미있겠네요." 하지만 그레이스는 고민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1초 만에 대답했다. 미래의 박사 학위가 뿌연 물안개처럼 날아갈 판이었지만 콜트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열망이 완벽주의자 대학원생의 이성을 완벽하게 뭉개버렸다. "진짜요? 와, 잘됐다! 다들 박사님 오면 엄청 신기해하겠네. 그럼 저녁에 마크네 루프탑에서 봐요!" 환하게 웃으며 손을 방방 흔들고 카페를 나서는 콜트의 뒷모습을 보며 그레이스는 가방끈을 꽉 쥐었다. 속으로는 진짜 큰일날네, 할 일이 신더미인데- 생각라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도 입꼬리가 주체 없이 올라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카페를 나서는 콜트의 걸음걸이는 산뜻했고, 이제 그레이스는 랩실로 돌아가 눈이 빠져라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만나러 가야했다. 고슬고슬 그레이스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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