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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피터 피터 파커가 토니 스타크를 구하는 백 가지 방법 11

*긴 글 주의 라고스의 아침은 뜨겁고 시끄러웠다. 좁은 골목마다 노점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고, 경적과 흥정하는 목소리와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한데 뒤엉켜 공기를 데웠다. 잘 익은 망고 냄새, 기름에 튀긴 반죽 냄새, 매연, 그리고 그 모든 것 위로 바다에서 밀려오는 짠 바람. 피터는 시장 한복판에 있는 낡은 카페의 2층 창가에 앉아 그 소란을 내려다보았다. 앞에 놓인 커피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 가고 있었다. 맞은편에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쓴 스티브가 앉아 있었다. 이어폰 너머로 나타샤가 시장 반대편 건물 옥상이라고 알렸다. 샘은 하늘 높이 떠 있었고, 완다와 피에트로는 노점 앞에서 관광객 흉내를 내며 서성이고 있었다. 벤이 총에 맞은 지 1년이 지났다. 그 1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벤은 다시 철물점의 셔터를 올렸다. 가슴의 흉터는 셔츠 아래에 감춘 채로, 가끔 비 오는 날이면 그 자리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메이는 수프에 넣는 소금을 아주 조금 줄였다. 토니가 매주 금요일마다 그 식탁에 앉게 되면서부터였다. 피터는 매일 아침 숲속의 새 기지로 가서 스티브와 나타샤에게 훈련을 받았고, 저녁이면 퀸즈로 돌아왔다. 그 사이 어디쯤에서 토니를 만났다. 기지의 작업실에서, 탑의 꼭대기에서, 퀸즈의 지붕 위에서. 둘 사이에는 이제 한 뼘이 없었다. 출발 전날 밤, 토니는 기지의 작업실에서 피터를 불러 세웠다. 손바닥 위에 작은 이어폰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귓바퀴의 곡선에 꼭 맞게 휘어진, 피부색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것. 토니는 그걸 피터의 귀에 직접 끼워 주며 투덜거렸다. "라고스는 신호가 엉망이야. 위성 세 개를 거쳐서 연결되게 해 놨어. 아프리카 한가운데서도 내 목소리 들릴 거야." "…대학 강연은요. 내일이잖아요." "갈 거야. 근데 강연하면서도 한쪽 귀는 너한테 열어 둘 거야. 아이언맨이 강단에서 혼잣말한다고 학생들이 수군거려도 상관없어." "…그러다 진짜 이상한 사람 돼요." "원래 이상한 사람이야. 네가 제일 잘 알잖아." 피터가 웃었다. 토니는 피터의 귀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엄지로 귓바퀴를 한 번 천천히 쓸었다. 작업실의 형광등 아래에서 토니의 눈이 피터의 얼굴을 읽고 있었다. "라고스에 뭐 있어. 그 얼굴 보니까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피터는 숨을 골랐다. 이제는 숨기지 않았다. 지붕 위의 그 밤 이후로, 피터는 아는 것을 하나씩 꺼내 놓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1년 동안 천천히, 서툴게. "…원래 세계에서 이 작전 끝날 때 폭발이 있어요. 완다 씨가 그 폭발을 하늘로 밀어 올리는데, 그게 근처 건물에 부딪혀요. 그 건물 안에 와칸다라는 나라에서 온 구호 요원들이 있었어요. 열한 명이요. 다 죽었어요." "…와칸다." "네. 그 일 때문에 협정이 생겨요. 소코비아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그게 마지막 불을 붙여요. 그리고 완다 씨는 그 뒤로 오랫동안 자기 탓을 해요." "그럼 그 건물 사람들부터 빼." "…네. 그러려고요." "그리고 피터. 그 폭발 근처에 너는 가지 마. 건물 사람들 빼는 것까지만. 폭발은 완다 거야."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토니가 그제야 귀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손으로 피터의 뒷머리를 끌어당겨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다녀와. 저녁은 퀸즈에서." "…네. 금요일이니까요." 다음 날 아침, 퀸젯의 해치가 닫히기 직전 피터는 활주로 끝을 보았다. 토니가 커피잔을 든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대학 강연에 늦을 게 뻔한 시간이었다. 피터는 이마에 남은 온기를 손등으로 한 번 눌러 보았다. 라고스로 가는 퀸젯 안에서 피에트로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좌석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창밖을 보다가 피터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가. 바다가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지자 피에트로가 피터의 어깨를 툭 쳤다. "스파이더맨. 다리 다 나았어. 이제 시합하자고. 언제 할 거야." "…작전 끝나고요." "작전 끝나고 너는 또 퀸즈 간다며. 금요일이라고. 그 식탁. 그럼 언제 하냐고." "…다음 주요. 기지 활주로에서요." "활주로는 너무 짧아. 나는 숲을 한 바퀴 돌 거야. 너는 나무 사이로 거미줄 타고. 누가 호수에 먼저 닿나." "…지면 뭐 해 줘요?" "지면 너는 평생 내 빵 셔틀. 내가 지면… 내가 질 일은 없는데. 그래도 지면 완다한테 네 편 들어 주라고 할게." 맞은편 좌석에서 완다가 눈을 감은 채 웃었다.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그 감은 눈꺼풀 위에서 하얗게 흔들렸다. 완다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말했다. "오빠가 질 거야. 스파이더맨은 오빠가 어디로 달릴지 먼저 아니까." 피에트로가 억울하다는 듯 완다를 노려보았다. 피터는 그 둘을 보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코비아의 다리 위에서 총탄을 맞고 쓰러질 뻔했던 사람이, 지금 빵 셔틀을 걸고 시합을 조르고 있었다. 창밖의 바다가 햇빛을 받아 끝없이 반짝였다. 카페 2층의 창가에서 스티브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시장 건너편의 낡은 경찰서 건물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 앞에 쓰레기 수거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엔진은 켜져 있었고, 짐칸은 비어 있었다. "저 트럭. 30분째 저기 서 있어. 쓰레기는 하나도 안 싣고." "…네. 저거예요." "자네 얼굴 보니 맞나 보군. 이번엔 뭐가 오는지 미리 말해 줄 수 있나." "럼로우요. 엘리베이터의 그 사람이요. 헬리캐리어 무너질 때 살아남았어요. 얼굴이 다 타서 마스크 쓰고 다녀요. 저 경찰서가 아니라 길 건너 감염병 연구소를 노려요. 생물 무기요." 럼로우. 그 이름이 스티브의 턱에 힘을 넣었다. 워싱턴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웃으며 칼을 뽑던 얼굴이 떠오르는지, 스티브의 손이 탁자 위에서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스티브는 모자챙을 더 깊이 눌러쓰고 이어폰을 눌렀다. "목표 변경. 경찰서가 아니라 길 건너 연구소다." [이번에도 그 스파이더맨의 감이야?] "감이 아니라 정보야. 믿을 만한." 스티브는 그렇게 말하며 피터를 흘끗 보았다. 워싱턴의 수송기 안에서 처음 뱀 이야기를 들었던 날부터, 이 사람은 피터의 정보를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피터는 그 시선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트럭이 움직였다. 경찰서가 아니라 길 건너 연구소의 정문을 향해. 쇠창살 문이 비명을 지르며 안쪽으로 꺾였다. 짐칸에서 무장한 사내들이 쏟아져 내렸다. 스티브가 카페 창문을 박차고 뛰어내렸고, 피터가 그 뒤를 따랐다. 노점의 알록달록한 차양에 거미줄을 걸어 몸을 날리자, 시장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구니에서 쏟아진 오렌지들이 흙바닥 위를 굴렀다. 싸움은 짧고 거칠었다. 스티브와 나타샤가 연구소 안으로 뛰어들었다. 샘이 은빛 날개를 펴고 옥상을 틀어막았다. 사내들이 던진 가스탄이 터지기 직전에 완다의 붉은빛이 그것들을 허공에 붙잡아 위로 띄워 올렸다. 피에트로는 바람이 되어 시장의 사람들을 골목 안쪽으로 옮겼다. 소코비아의 다리 위에서 총탄을 맞았던 허벅지는 이제 흉터 한 줄만 남기고 다 아물어 있었다. 피에트로가 피터 옆을 스쳐 지나가며 외쳤다. "오늘은 나 먼저 부르기로 했지! 총알 맞을 일 있으면!" "아직 없어요! 근데 이따 부를게요! 저기 저 노란 건물 보이죠?" "저거? 왜!" "이따 거기 사람들 다 빼야 돼요! 3층에 열한 명! 구호 요원들이요!" 피에트로가 바람 속에서 우뚝 멈춰 섰다. 피터를 보고, 그 노란 건물을 보았다. 시장 끝에 선 낡은 5층 건물. 3층 창문마다 하얀 천막이 걸려 있었다. 의료 구호소였다. 피에트로가 피터를 다시 보며 씩 웃었다. 또 그거냐는 얼굴이었다. 미리 아는 거.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피에트로는 알았다고 외치고 다시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이어폰 너머에서 스티브의 목소리가 울렸다. 럼로우가 생물 무기를 들고 시장 쪽으로 달아났다고. 피터는 시장 한가운데로 몸을 날렸다. 사람들 사이로 마스크를 쓴 사내 하나가 달리고 있었다. 얼굴 전체를 덮은 검은 마스크, 두 팔에 감긴 금속 장치. 그 뒤를 방패를 든 스티브가 쫓았다. 시장 한가운데에서 럼로우가 멈춰 섰다. 돌아서서 스티브와 마주 섰다. 피터는 노점의 양철 지붕 위에 착지해 그 둘을 내려다보았다.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었다. 럼로우가 스티브에게 한 사람의 이름을 던질 것이다. 그 이름에 스티브가 멈칫하는 반 박자 사이에, 자기 몸에 감은 폭탄을 터뜨릴 것이다. 피터는 그 반 박자를 알았다. 그리고 그 폭발이 어디로 날아갈지도. 피터는 이어폰을 눌렀다. "완다 씨. 지금 럼로우 몸에 폭탄 있어요. 곧 터뜨려요. 위로 밀어 올려 주세요. 근데 노란 건물 쪽 말고, 반대쪽으로요. 바다 쪽으로요." […어떻게 알아. 아, 너는 늘 알지. 알았어.] "피에트로, 지금이에요. 노란 건물 3층." [벌써 가는 중!] 시장 한가운데에서 럼로우가 마스크를 벗었다. 불에 녹아내린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얼굴이 스티브를 보며 일그러지게 웃었다. "네 친구. 버키. 그 녀석이 너를 기억하더라. 너 다리 위에서 죽을 뻔한 거 끌어냈다며. 근데 그 뒤로 어디 갔는지 알아? 다시 지워지러 갔어. 너 기억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스티브의 방패가 아주 잠깐 내려갔다. 반 박자. 럼로우가 그 틈에 팔의 장치를 눌렀다. 몸에 감긴 폭탄의 불빛이 붉게 바뀌었다. 피터의 뒷목에서 스파이더 센스가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붉은 안개가 럼로우를 감쌌다. 시장 반대편에서 완다가 두 손을 뻗어 럼로우를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그리고 폭탄이 터졌다. 하얀 섬광이 시장 위의 하늘에서 피어났다. 완다의 붉은빛이 그 섬광을 감싸 쥐고 위로, 위로 밀어 올렸다. 섬광이 붉은 손아귀 안에서 일그러지며 몸부림쳤다. 완다가 이를 악물고 그것을 바다 쪽으로 틀었다. 노란 건물의 반대편으로. 섬광은 붉은빛을 찢고 터져 나와, 노란 건물의 지붕 위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바다 쪽 하늘에서 거대한 불꽃으로 피어올랐다. 굉음이 시장을 덮쳤다. 노점의 차양들이 바람에 찢겨 날아갔고, 노란 건물의 창문들이 충격파에 일제히 깨져 나갔다. 피터는 양철 지붕 위에서 그 건물을 보았다. 깨진 창문 너머에서 3층의 하얀 천막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 안에 아직 누가 있다면. 그때 건물 정문에서 바람 하나가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 하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피에트로가 건물 앞 길에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열한 명! 다 뺐어! 마지막 둘은 폭발 3초 전에 뺐어! 내가 빨랐어, 스파이더맨!" 피터는 양철 지붕 위에 무릎을 꿇었다. 열한 명. 하얀 조끼의 사람들이 길 위에 서서 깨진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아서. 원래 세계에서는 저 창문 안에서 끝났던 사람들이었다. 피터가 길게 숨을 내쉬는 순간 이어폰 너머에서 토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강연 중에 한쪽 귀로 몰래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피터. 방금 그거 폭발 맞지. 너 어디야. 다쳤어?] "…괜찮아요. 노점 지붕 위예요. 하나도 안 다쳤어요. 그리고 토니, 노란 건물 사람들 다 살았어요. 열한 명. 피에트로가 다 뺐어요." [……] "토니?" […잘했어. 둘 다. 아니, 셋 다. 완다도. 지금 강연 중인데 학생들이 나 쳐다봐. 아이언맨이 강단에서 갑자기 울컥한다고.] 피터는 지붕 위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폰 너머에서 토니가 헛기침을 하고 강연을 다시 이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피터는 고개를 들어 시장 반대편을 보았다. 완다가 두 손을 내린 채 서 있었다. 하늘의 불꽃을 올려다보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완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노란 건물을 보았다. 깨진 창문들, 그리고 그 앞에 선 하얀 조끼의 사람들. 완다의 몸이 무너지듯 흔들렸다. 피에트로가 바람처럼 달려가 완다를 붙잡았다. 피터가 지붕에서 뛰어내려 달려가자, 완다는 피에트로의 품에 안긴 채 떨고 있었다. 피터를 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 건물로 갈 뻔했어. 미는 방향을 조금만 잘못 틀었으면. 네가 바다 쪽이라고 말 안 했으면. 저 안에 사람들이…" "근데 안 갔어요. 완다 씨가 바다 쪽으로 틀었어요. 피에트로가 다 뺐고요. 아무도 안 죽었어요." "…네 머릿속에서 봤어. 그 세계에서는 저 건물로 갔지. 그렇지." 피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완다는 피에트로의 품에서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길 위의 하얀 조끼들을 다시 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완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피에트로가 완다의 머리를 쓸어 주며 피터를 보았다. 고맙다는 눈이었다. 그러다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이번엔 철판 안 들고 뛰어들었네. 나 불렀네." "…네. 약속했잖아요." "그래. 이제 진짜 시합하자. 이번 판은 내가 이겼으니까, 다음 판엔 기회 줄게." 그때 하얀 조끼를 입은 여자 하나가 길을 건너 다가왔다. 머리에 붕대를 감았고, 조끼 가슴께에 낯선 문양이 수놓여 있었다. 여자는 빨갛고 파란 마스크 앞에 멈춰 서서 피터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거칠고 단단한 손이었다. "당신이 그 스파이더맨이죠. 저 바람 같은 남자가 그러더군요. 스파이더맨이 우리 층에 열한 명 있다고 미리 알려 줬다고." "…네.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3초만 늦었어도 우리는 저 건물이랑 같이 무너졌을 거예요. 우리 왕께서 들으시면 직접 고맙다고 하실 거예요. 그분은 은혜를 잊지 않으시는 분이니까." 여자는 피터의 손을 한 번 더 꽉 쥐고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 피터는 그 손의 온기를 손바닥에 남긴 채 여자의 조끼에 수놓인 문양을 오래 보았다. 은혜를 잊지 않는 왕. 원래 세계의 이야기 속에서 그 왕은 며칠 뒤 빈에서 쓰러졌다. 피터는 그 생각을 밀어내며 주먹을 쥐었다. 완다가 피에트로의 품에서 젖은 얼굴로 웃었다. 시장 한가운데에 스티브가 서 있었다. 방패를 내린 채, 럼로우가 사라진 허공을 올려다보며. 버키. 그 이름이 아직 스티브의 얼굴 위에 남아 있었다. 이번엔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런데도 협정은 올 것이다. 하늘에서 도시가 떨어지던 그날의 무게가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으니까. 피터는 그걸 알면서도 노란 건물 앞의 하얀 조끼 열한 벌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번엔 그 무게에 열한 개의 이름이 더해지지 않았다. 퀸젯으로 돌아가는 길, 스티브가 피터 옆자리에 앉았다. 방패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한참 창밖의 바다만 보다가 낮게 입을 열었다. 엔진 소리가 그 목소리를 반쯤 삼켰다. "럼로우가 그러더군. 버키가 날 기억했다고. 그리고 다시 지워지러 갔다고." "…네." "그거 사실인가. 자네는 알지. 그 얼굴 보면." "…버키 씨는 살아 있어요. 지금은 지워지지 않았어요. 하이드라가 무너진 뒤로 혼자 숨어 지내요. 동유럽 어딘가에서요.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캡틴. 근데 좋은 방식은 아닐 거예요." "좋은 방식이 아니라는 건." "누군가 버키 씨를 이용할 거예요. 버키 씨가 안 한 일을 한 것처럼 꾸며서요. 그때 캡틴이 버키 씨를 믿어 주셔야 해요. 토니도요. 두 분이 따로 정하지 말고요." 스티브는 피터를 오래 보다가 방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1년 전, 토니가 전화로 받아 낸 약속을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각자 정하기 전에 먼저 만나자는. "알겠네. 이번엔 스타크랑 먼저 얘기하지. 자네 정보가 틀린 적은 없으니까." 퀸젯의 반대편에서 나타샤가 팔짱을 낀 채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피터와 눈이 마주치자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이번에도 아무도 안 죽었네.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타샤는 희미하게 웃고 눈을 감았다. 퀸젯이 바다 위를 낮게 날았다. 피터는 귀에 낀 이어폰을 손끝으로 만졌다. 강연을 마친 토니가 무언가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아주 작게 흘러들었다.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는 노래였다. 금요일 저녁, 퀸즈의 식탁까지 남은 시간을 세는 것처럼. 퀸즈의 1층 방에 돌아온 건 금요일 밤 9시가 넘어서였다. 창틀 위의 해바라기 화분이 그새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피터가 물뿌리개에 물을 담아 화분에 붓고 있을 때, 창문 너머에서 누군가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토니였다. 대학 강연에서 곧장 날아온 모양이었다.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반쯤 풀어 헤친 채. 손에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메이 씨가 저녁 남겨 놨대. 라고스 다녀온 사람 먹이라고. 근데 3층 올라가기 전에 너부터 봐야겠어서." "…저 하나도 안 다쳤어요. 이어폰으로 다 들으셨잖아요." "들었지. 근데 보는 건 다르잖아. 손 줘 봐." 피터가 창틀 너머로 손을 내밀자 토니가 그 손을 붙잡고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손바닥, 손등, 손목 안쪽. 거미줄이 나오는 자리까지. 그러고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창틀에 팔꿈치를 괴었다. "강단에서 울컥한 거, 학생들이 인터넷에 올렸더라. 아이언맨, 강연 중 감정 폭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러면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열한 명 살았다는 얘기 듣고 안 울컥하면 사람이야? 다음 강연 땐 아예 손수건 챙겨 갈 거야." 피터는 창틀 너머에서 웃었다. 토니도 웃었다. 3층 부엌 창문에서 메이가 고개를 내밀고 둘을 내려다보았다. 수프 식는다고. 둘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그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금요일 밤의 퀸즈 하늘에 별 하나가 떠 있었다. 국무장관이 기지에 오기 전날 밤, 토니는 퀸즈의 지붕 위에서 한참 말이 없었다. 물탱크 그늘에 나란히 앉은 채, 3층 부엌 창문의 불빛만 보고 있었다. 메이가 설거지를 하는 그림자가 커튼 너머로 오갔다. 그러다 토니가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모서리가 살짝 구겨진 사진이었다. 토니는 그 사진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강연 끝나고 강당 나서는데 어떤 여자가 다가왔어. 회색 코트 입은, 엄청 지친 얼굴로. 이걸 내 손에 쥐여 주더라. 아들이래. 소코비아에서 봉사 활동 하다가, 그 도시 떨어지던 날 건물 잔해에 깔려 죽었대. 그리고 나를 보면서 그러더라. 당신이 내 아들을 죽였다고." "……" "그 사람 말이 맞아. 내가 그 기둥 터뜨렸어. 그 도시 땅에 닿기 전에 부서지게 하려고. 근데 다 부서지진 않았어. 그 사람 아들이 그 조각 밑에 있었어." "…토니. 그건 울트론이 만든 거예요." "울트론은 내가 만든 거고." "보류하셨잖아요. 지팡이 속의 그게 혼자…" "알아. 근데 그 사람한테는 상관없어. 그 사람한테 중요한 건, 그날 그 하늘에 우리가 있었고, 우리가 막지 못했다는 거야." 사진 속의 청년은 웃고 있었다. 어느 해안가에서 찍은 듯, 바람에 머리칼이 헝클어진 채로. 피터는 그 웃음을 오래 보았다. 원래 세계에서도 이 여자는 있었다. 이 사진도. 그리고 원래 세계의 토니는 이 사진 한 장 때문에 혼자 서명을 결심했다. 누군가 우리를 멈춰 세워야 한다고. 이 세계의 토니도 같은 사진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엔 그 사진을 혼자 쥐고 있지 않았다. 지붕 위에서 피터에게 먼저 꺼내 놓았다. 따로 정하지 않기로 한 그 약속 덕분이었다. 이튿날 오후, 기지의 회의실에 국무장관이 찾아왔다. 회색 머리칼, 빈틈없이 다린 정장, 군인 출신다운 꼿꼿한 등. 국무장관은 긴 회의 탁자 끝에 서서 어벤져스를 하나씩 훑어보았다. 스티브, 나타샤, 샘, 로디, 완다, 피에트로, 비전. 그리고 구석 자리의 피터. 토니는 피터 옆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이었다. 피터는 그 얼굴을 알았다. 어젯밤 지붕 위에서 이 회의를 미리 끝까지 그려 본 얼굴이었다. 회의실의 화면이 켜졌다. 국무장관이 리모컨으로 영상을 넘겼다. 뉴욕의 하늘에서 무너지는 빌딩들. 워싱턴의 강물로 곤두박질치는 헬리캐리어. 소코비아의 하늘에서 부서져 내리는 도시. 그리고 라고스의 시장 위에서 피어난 불꽃. 라고스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국무장관도 그걸 알았다. 그래서 그 영상은 짧게 넘기고, 소코비아의 영상을 오래 틀었다. 무너진 건물들, 잿더미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들, 하얀 천에 덮인 들것들. "자네들이 지난 몇 년 동안 세상을 구했다는 거, 알고있네. 고맙소. 진심으로.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세상이 치른 값도 있지. 소코비아에서만 100명이 넘게 죽었다네. 자네들은 그걸 영웅의 일이라고 부르겠지만, 세상은 그걸 통제받지 않는 힘이라고 부를거요." 국무장관이 탁자 위에 두꺼운 문서 한 권을 내려놓았다. 쿵, 하고 탁자가 울릴 만큼 두꺼웠다. 표지에 소코비아 협정이라는 금박 글씨가 박혀 있었다. 피터는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117개 나라가 서명할 준비를 마쳤소. 이제부터 어벤져스는 유엔 산하 위원회가 정한 곳에서, 정한 때에만 움직이게 된다. 서명하지 않으시면 은퇴하시거나, 법을 어기는 사람이 되시는 거지. 사흘 뒤 빈에서 서명식이 열릴걸세. 그때까지 답을 주게나." 국무장관은 그 말을 남기고 회의실을 나섰다. 문이 닫혔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탁자 위의 문서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금박을 번들거렸다. 원래 세계에서 이 문서가 이 탁자를 둘로 갈랐다. 로디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군인답게 단호한 목소리였다. "서명해야 돼. 117개 나라야. 이건 세상이 우리한테 내민 손이야. 그 손 뿌리치면, 우리는 그냥 힘센 무법자가 되는 거고." "그 손이 우리 목줄을 쥐는 손이면?" 샘이었다. 샘이 탁자에 팔꿈치를 괴며 로디를 마주 보았다. 공군과 공군. 날개와 아머. 원래 세계에서 이 둘은 공항의 하늘에서 서로를 향해 날았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로디가 떨어졌다. 피터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무릎 위의 손을 쥐었다. 비전이 조용히 손을 들어 끼어들었다. "제가 계산해 본 바로는, 어벤져스가 공식적으로 결성된 뒤로 지구를 위협하는 사건의 수가 비례해서 늘었습니다. 우리의 힘이 도전을 부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통제는 그 도전을 줄이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럼 넌 서명하자는 거야, 비전?" "저는 숫자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피에트로 씨. 그리고 개인적인 소견을 덧붙이자면, 숫자만으로 정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탁자 끝에서 완다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라고스의 하늘이 아직 그 얼굴에 그림자처럼 남아 있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는데도. "그날 내가 방향을 조금만 잘못 틀었으면, 이 문서는 내 이름으로 시작됐을 거야." "근데 안 틀었잖아. 바다 쪽으로 틀었잖아." 피에트로가 완다의 손을 붙잡았다. 나타샤는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오래 계산해 본 사람처럼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나는 서명할 거야. 안에서 바꾸는 게 밖에서 싸우는 것보다 나아. 레드 룸에서도, 쉴드에서도 그랬어." 스티브는 그 말을 들으며 탁자 위의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토니에게로 모였다. 토니는 팔짱을 낀 채 피터 옆에 앉아 있었다. 원래 세계의 토니는 이 순간 그 여자의 사진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사진 한 장 때문에. 이 세계의 토니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웃는 청년의 얼굴. 회의실의 모두가 그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찰스 스펜서. 소코비아에서 봉사 활동 하다가 죽었어. 그 도시 떨어지던 날. 그 엄마가 사흘 전에 나한테 이걸 줬어. 당신이 내 아들을 죽였다면서."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완다가 숨을 멈췄고, 로디가 고개를 숙였다. 토니는 사진 속의 웃는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서 나는 서명할 거야. 아니, 서명하고 싶어. 이런 사진이 다시는 내 주머니에 안 들어오게. 누군가 우리를 멈춰 세울 수 있어야 해. 우리가 우리를 못 멈출 때." "……" "근데 그 전에 할 게 있어. 캡. 우리 약속한 거 있잖아. 1년 전에. 각자 정하기 전에 먼저 만나서 얘기하자고. 그거 지금 하자. 둘이. 아니, 셋이." 토니가 그렇게 말하며 피터를 보았다. 회의실의 시선이 일제히 피터에게로 옮겨 왔다. 스티브가 토니를 보고, 피터를 보았다. 라고스의 퀸젯 안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두 분이 따로 정하지 말라던. 스티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셋이." 기지의 옥상은 바람이 불었다. 숲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고, 호숫가의 벤치가 저 아래에서 노을빛을 받고 있었다. 셋이 옥상 난간 앞에 나란히 섰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바람만 셋 사이를 오갔다. 한참 뒤 스티브가 숲을 본 채 입을 열었다. "스타크. 나는 서명 못 해. 지금 이대로는." "알아. 이유도 대충 알아. 근데 들을게. 말해 줘." "쉴드가 하이드라였어. 70년 동안. 그 옷을 입고, 그 배지를 달고. 우리는 그 안에서 그게 옳은 일인 줄 알고 싸웠어. 이 위원회도 결국 사람이야. 어떤 사람들이 앉을지 우리는 몰라. 그 사람들이 우리를 어디로 보낼지, 어디로 못 가게 할지도. 우리가 가야 하는데 못 가게 막을지도." "그래서 아무도 우리를 못 멈추게 하자고?" "아니. 멈춰야 할 때는 멈춰야지. 남이 그어 준 선이 아니라, 우리가 옳다고 믿는 선에서." "그 선이 틀리면? 소코비아처럼." 스티브가 대답하지 못했다. 토니도 더 말하지 않았다. 둘은 같은 난간을 붙잡은 채 숲을 보았다. 피터는 그 둘 사이에 서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이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에서 정했고, 각자 통보했다. 그 통보가 칼이 되었다. 지금은 둘이 같은 난간을 붙잡고 있었다. 생각은 여전히 달랐다. 그래도 같은 난간이었다. 피터는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맞아요." 토니와 스티브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피터는 그 두 시선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토니 말도 맞아요. 누군가는 멈춰 세울 수 있어야 해요. 캡틴 말도 맞아요. 그 누군가가 틀릴 수도 있어요. 원래 세계에서는 두 분이 각자 한쪽만 붙잡았어요. 그래서 갈라졌어요. 근데 둘 다 붙잡을 수 있잖아요. 서명하되, 고쳐서 서명하면요. 위원회가 틀렸을 때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조항. 급할 때 먼저 움직이고 나중에 보고할 수 있는 조항. 그리고 그 위원회에 누가 앉는지 우리도 알 수 있는 조항. 그걸 넣어서요." "…그걸 117개 나라가 받아 줄까." "모르겠어요. 근데 받아 줄 때까지 두 분이 같이 요구하면요. 따로가 아니라. 토니가 안에서, 캡틴이 밖에서가 아니라. 둘이 같이 안에서요." 스티브가 피터를 오래 보다가 토니를 보았다. 토니도 피터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에 허를 찔린 얼굴이었다. 그러다 그 얼굴이 천천히 풀리며 웃음이 되었다. 토니가 난간에서 손을 떼고 스티브에게로 돌아섰다. "이 녀석 말 들었지. 수정안. 내가 쓸게. 오늘 밤에. 법무팀 깨워서. 그 세 가지 넣어서. 사흘 뒤 빈에 그걸 들고 가는 거야. 같이. 너도 옆에 서서, 그거 안 받아 주면 서명 안 한다고 버텨 줘. 받아 주면 같이 서명하고." "…안 받아 주면?" "그럼 그때 다시 이 옥상에서 얘기하자. 셋이서. 따로 정하지 말고." 스티브가 손을 내밀었다. 토니가 그 손을 잡았다. 노을이 맞잡은 두 손 위에 붉게 내려앉았다. 스티브는 그 손을 쥔 채, 둘 사이에 서 있는 피터를 보며 웃었다. "자네는 늘 그렇군. 우리가 갈라지려고 할 때마다 그 사이에 서 있어. 헬리캐리어에서도,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서 있고 싶어서요. 원래 세계에서는 못 섰거든요. 그때는 너무 어렸어요." 스티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세계라는 말을 이제 스티브도 알았다. 1년 전 피터의 허락을 받고 토니가 다 들려주었으니까. 스티브는 피터의 어깨를 크고 단단한 손으로 쥐고, 계단 쪽으로 걸어가다 돌아보았다. "수정안 쓰면 나한테도 보여 주게. 법률 용어는 70년 전 거라 좀 낡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알았어. 최대한 쉽게 쓸게. 그림도 그려 줄까." 토니가 웃음을 터뜨렸고, 스티브도 웃으며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70년 전의 군인과 이 시대의 무기상이 같은 옥상에서, 같은 문서를 두고 웃으며 헤어졌다. 피터가 원래 세계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둘만 남은 옥상에서 토니가 난간에 다시 기댔다. 바람이 토니의 셔츠 자락을 부풀렸다. 토니는 어두워지는 숲을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원래 세계에서 우리 둘이 각자 한쪽만 붙잡았다고 했지." "…네." "근데 이번엔 네가 둘 다 붙잡았네. 우리 사이에서." "…두 분이 먼저 같은 난간에 서 주셨잖아요. 저는 그 사이에 선 것뿐이에요." "그게 제일 어려운 거야. 사이에 서는 거. 양쪽에서 다 밀리니까." 토니가 보지도 않고 피터의 손을 찾았다. 피터의 손이 이미 거기 있었다. 둘의 손가락이 난간 위에서 엮였다. 해가 숲 너머로 넘어가고, 호숫가의 벤치가 남색으로 가라앉았다. 저녁을 먹은 뒤, 피터는 기지의 휴게실에서 완다를 발견했다. 완다는 창가의 소파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어두운 호수를 보고 있었다. 탁자 위의 찻잔은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 있었다. 피터가 맞은편에 앉자 완다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아까 회의실에서. 다들 나를 안 봤어. 근데 다 나를 생각하고 있었지. 라고스." "…아무도 안 죽었어요." "알아. 그래서 더 무서워. 이번엔 네가 미리 알려 줘서 바다 쪽으로 틀었어. 다음엔? 네가 모르는 다음엔?" 피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원래 세계의 이야기에도 끝이 있었다. 그 끝 너머에서는 피터도 아무것도 몰랐다. 완다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피터를 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문서에 서명하고 싶기도 해. 누가 나를 멈춰 줬으면 좋겠어. 근데 동시에 무서워. 그 누가 나를 우리 오빠한테서 떼어 놓을까 봐." "…완다 씨. 토니가 오늘 밤에 그 문서 고쳐요. 완다 씨 같은 사람이 갇히지 않게요. 그리고 다음에 제가 모르는 일이 생기면, 그때는 다 같이 모르는 거예요. 혼자 모르는 게 아니라요." 완다가 피터를 오래 보다가, 식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찻잔 속의 차가 조명 아래에서 호박색으로 흔들렸다. 완다는 그 흔들림을 내려다보며 아주 작게 웃었다. "오빠가 그러더라. 너는 꼭 남의 걱정을 자기 걱정처럼 한다고." "…피에트로 씨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완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라고스 이후 처음 듣는 웃음이었다. 피터도 따라 웃었다. 창밖의 어두운 호수 위로 기지의 불빛이 길게 떨렸다. 그날 밤, 기지의 작업실에는 새벽 3시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토니는 작업대 앞에 앉아 허공에 협정의 문장들을 띄워 놓고 있었다. 117개 나라의 문장들. 그 사이사이에 붉은 글씨로 고친 자리들. 피터는 작업대 옆 소파에 앉아 그 붉은 글씨들을 보았다. 화면 너머에서 법무팀 변호사 셋이 졸린 얼굴로 받아 적고 있었다. 토니가 문장 하나를 손가락으로 끌어당기며 피터를 돌아보았다. "급할 때 먼저 움직이고 72시간 안에 보고. 이거 어때. 48시간은 너무 빡빡하고, 일주일은 저쪽에서 안 받아 줄 거고." "…72시간이면 될 것 같아요. 원래 세계에서 타노스가 뉴욕에 처음 왔을 때, 위원회는 회의도 못 열었어요. 그 사이에 다 끝났거든요." "그럼 72시간. 위원회 명단 공개. 이것도 넣고. 거부권은. 위원회 결정을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조항." "그건 저쪽이 제일 싫어할 거예요." "알아. 그러니까 넣어야지. 협상은 제일 싫어할 걸 먼저 내밀고, 하나씩 물러나는 척하는 거야. 무기 팔던 시절에 배운 거. 그땐 이걸로 사람 죽이는 걸 팔았지만." 피터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토니가 붉은 글씨를 하나 더 써 넣다가 손을 멈췄다. 피터의 얼굴에서 웃음 아래 깔린 무언가를 읽은 눈이었다. "빈에 뭐 있어." "……" "있구나. 말해. 이제 숨기지 않기로 했잖아." "…서명식장에서 폭탄이 터져요. 와칸다의 왕이 죽어요. 그리고 범인으로 버키 씨 얼굴이 화면에 떠요. 근데 버키 씨가 한 게 아니에요. 제모라는 남자가 버키 씨로 꾸민 거예요. 소코비아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이에요. 어벤져스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려고 해요." "…소코비아에서 가족을." "네. 찰스 스펜서의 엄마처럼요. 근데 그 사람은 사진을 건네는 대신 폭탄을 택했어요." 토니가 허공의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글씨들 사이에 끼워 둔 그 사진. 웃는 청년의 얼굴. 토니는 그 얼굴을 오래 보다가 문서를 닫았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피터 앞에 섰다. "그럼 빈에 같이 가. 서명식장에. 그 폭탄, 막을 수 있으면 막고. 못 막으면 그 왕이라도. 그리고 버키라는 사람이 범인으로 몰리면 네가 아는 거 다 말해. 캡한테도. 이번엔 처음부터 셋이서." "…네. 셋이서요." 토니가 피터의 머리칼을 한 번 헝클어뜨리고 다시 작업대 앞에 앉았다. 피터는 소파에서 그 등을 보았다. 새벽 3시의 작업실. 원래 세계의 토니는 이 시간에 이 작업실에서 혼자 아머를 만들었다. 이 세계의 토니는 같은 시간, 같은 작업실에서 117개 나라의 문장을 고치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사흘 뒤 빈의 서명식장에는, 그 폭탄을 미리 아는 사람이 서 있을 것이다. 새벽 4시가 넘자 변호사들의 화면이 하나씩 꺼졌다. 마지막 화면이 꺼질 때쯤, 토니는 작업대에 팔을 괸 채 잠들어 있었다. 허공에는 붉은 글씨투성이의 문서가 아직 떠 있었다. 피터는 소파에서 일어나 담요를 집어 들었다. 토니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덮어 주자, 토니가 반쯤 눈을 떴다. 잠에 젖은 눈이었다. "…몇 시야." "4시요. 주무세요. 문서는 비전이 저장해 둔대요." "…72시간 조항. 그거 들어갔지." "들어갔어요. 거부권도, 명단 공개도요. 다 들어갔어요." "…그럼 됐다. 피터." "네." "다른 세계의 나는 이 시간에 혼자 아머 만들었다며. 이번엔 문서 만들다 잠들었네. 네 옆에서." 토니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입가에 웃음이 남아 있었다. 피터는 그 옆의 의자에 앉아 토니의 숨소리를 들었다. 느리고 고른 숨이었다. 숫자를 세어 줄 필요가 없는. 창밖으로 기지의 호수 위에 새벽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터는 작업대 위에서 깜빡이는 붉은 글씨들을 올려다보며, 그 글씨 하나하나가 원래 세계의 공항 활주로를 조금씩 지워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페기 카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빈으로 떠나기 이틀 전 아침에 왔다. 스티브는 기지의 부엌에서 그 전화를 받았다. 한 손에 커피잔을 든 채였다. 피터는 식탁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스티브의 손에서 커피잔이 천천히 내려왔다. 아주 조심스럽게, 식탁 위에. 잔 바닥이 나무에 닿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스티브는 아무 말 없이 부엌을 나섰다. 피터는 그 등을 보며 숨을 삼켰다. 이 아침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있었다는 게 아무것도 덜어 주지 않았다. 식탁 위에서 스티브가 남기고 간 커피가 천천히 식어 갔다. 토니가 같이 가겠다고 했을 때, 스티브는 놀란 얼굴이었다. 협정 문제로 날이 서 있던 사이였으니까. 토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페기 이모 알아. 어릴 때 우리 집에 자주 왔어. 아버지랑 같이 쉴드 만든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집에서 나한테 아버지 얘기를 좋게 해 준 사람은 그 이모밖에 없었어." 피터는 그 말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가슴 한쪽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집, 그 아버지. 피터가 알고 있는 그 아버지의 마지막 밤이 그 말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따라왔다. 런던으로 가는 전용기 안은 조용했다. 스티브는 앞쪽 좌석에서 눈을 감고 있었고, 나타샤와 샘은 낮은 목소리로 빈의 일정을 맞추고 있었다. 구름 위의 햇살이 창을 통해 기내 바닥에 하얀 사각형을 그렸다. 토니는 창가에 앉아 구름만 보았다. 피터가 그 옆자리에서 옆얼굴을 지켜보고 있자니, 한참 뒤 토니가 창밖을 본 채로 입을 열었다. "페기 이모가 우리 집에 오면, 엄마가 피아노를 쳤어. 이모가 좋아하는 곡으로. 아버지는 서재에서 안 나왔고. 근데 이모가 서재 문을 두드리면 그때는 나왔어. 아버지가 그 서재에서 나오는 거, 이모 올 때밖에 못 봤어." "…어머님이 피아노를 치셨어요?" "응. 잘 쳤어. 나 어릴 때 잠 못 자면 엄마가 피아노 쳐 줬어. 아버지는 시끄럽다고 투덜거렸는데, 서재 문은 조금 열어 놨더라. 그건 나중에 알았어." "……" "1991년 겨울에 둘 다 갔어. 교통사고. 아버지가 운전했대. 술 마시고. 나는 그날 마지막으로 아버지한테 짜증을 냈어. 엄마한테는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하고. 그래서 그 뒤로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했어. 술 마시고 운전대 잡은 사람이라고." "……" "근데 오늘 이모 장례식 가면서 생각해 보니까, 이모는 아버지를 끝까지 좋게 말했어. 이모가 아는 아버지랑 내가 아는 아버지가 달랐던 것 같아. 그게 좀 궁금해." 피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밤은 교통사고가 아니었다. 술도 아니었다. 피터는 그걸 알았다. 그리고 이 사람은 25년 동안 아버지를 엉뚱한 이유로 미워해 왔다. 말해야 했다. 그런데 장례식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엄마의 피아노를 이야기하는 이 사람에게. 피터는 손을 뻗어 토니의 손을 붙잡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토니가 놀라 피터를 돌아보았다. 피터의 얼굴을 한참 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손을 마주 쥐었다. 창밖의 구름이 끝없이 흘러갔다. 전용기가 런던에 내려앉을 무렵, 비가 그쳤다. 활주로의 물웅덩이마다 흐린 하늘이 고여 있었다. 토니는 트랩을 내려가기 전 피터의 손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비행기 안에서 잡았던 손을, 사람들 앞에서는 놓아 주겠다는 듯이. 그런데 활주로를 몇 걸음 걷다가, 토니는 다시 피터의 손을 찾아 잡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피터는 그 손을 마주 쥐며 고개를 숙였다. 앞서 걷던 나타샤가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장례식은 런던의 오래된 성당에서 열렸다. 하얀 돌로 쌓아 올린, 천장이 아득하게 높은 성당이었다. 흐린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하며 색색의 조각으로 부서져 돌바닥 위에 흩어졌다. 오르간 소리가 그 높은 천장까지 차올랐다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성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쉴드의 옛 요원들, 훈장을 단 영국의 노병들, 페기가 평생 만나 온 사람들. 스티브는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검은 정장에, 꼿꼿하게 편 등으로. 그 옆에 나타샤와 샘이 앉았고, 그 뒷줄에 토니와 피터가 나란히 앉았다. 연단에 금발의 젊은 여자가 올라섰다. 단정한 검은 원피스. 피터는 그 얼굴을 알았다. 워싱턴에서 스티브의 옆집에 살며 간호사인 척하던 쉴드의 요원. 여자는 자기를 페기 카터의 조카, 샤론이라고 소개했다. 맨 앞줄에서 스티브의 등이 굳었다. 샤론은 어릴 때 이모 무릎에 앉아 들었다던 이야기를 꺼냈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끝까지 또렷했다. "이모는 늘 그랬어요. 타협할 수 있을 때는 타협하라고. 하지만 타협할 수 없을 때는, 옳은 자리에 나무처럼 뿌리를 박고 서라고. 그리고 세상이 너한테 비키라고 하면, 그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하라고. 아니, 네가 비켜." 그 목소리가 성당의 높은 천장에 울렸다. 스티브의 어깨가 아주 조금 떨렸다. 피터 옆에서 토니가 숨을 멈추는 게 느껴졌다. 샤론이 연단에서 내려와 맨 앞줄을 지나갈 때, 스티브가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워싱턴의 아파트 복도에서 옆집 간호사와 이웃이 마주치던 그 눈이, 이제는 같은 사람을 잃은 두 사람의 눈이 되어 있었다. 샤론이 스티브 앞에 잠깐 멈춰 섰다. "이모가 당신 얘기를 많이 했어요. 마지막까지요. 어떤 날은 당신이 아직 전쟁에 나가 있는 줄 알았고, 어떤 날은 당신이 방금 문 앞에 왔다 간 줄 알았어요." "…거짓말을 해서 미안했습니다. 워싱턴에서." "저도 했잖아요. 간호사라고." 샤론이 아주 작게 웃고 지나갔다. 스티브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관이 놓였던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피터는 뒷줄에서 그 짧은 대화를 들으며 숨을 내쉬었다. 원래 세계에서 이 둘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 피터는 알았다. 그리고 그게 끝내 어디로도 가지 못했다는 것도. 이번엔 어떻게 될지, 그건 스티브가 고를 일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성당을 빠져나갔다. 스티브는 맨 앞줄에 그대로 앉아 관이 놓였던 자리를 보고 있었다. 나타샤가 스티브의 어깨를 한 번 쥐고 나갔고, 샘이 그 뒤를 따랐다. 토니가 일어서며 피터에게 눈짓했다. 둘은 통로를 걸어 스티브 곁으로 갔다. 토니가 스티브 옆자리에 앉았고, 피터는 그 뒷줄에 앉았다. 스티브는 돌아보지 않았다. "…와 줘서 고맙네, 스타크." "이모 장례식인데 안 올 수 있나. 어릴 때 우리 집에 오면 나한테 초콜릿을 몰래 줬어. 아버지가 단 거 못 먹게 했거든." "…페기가 자네 얘기를 했었어. 몇 년 전에. 아직 기억이 괜찮았을 때. 하워드의 아들이 아이언맨이 됐다고. 하워드가 봤으면 좋아했을 거라고." "…아버지가 좋아했을까. 모르겠다. 나한테 잘했다는 말 한 번도 안 한 사람이야." "하워드는 원래 그랬어. 나한테도 그랬지. 근데 등 뒤에서는 자네 자랑을 했대. 술만 마시면 자네 얘기를 했다고, 페기가 그랬어." 토니의 숨이 멈췄다. 뒷줄에서 피터는 그 옆얼굴을 보았다. 토니의 눈가가 젖어 들고 있었다. 하워드 스타크. 그리고 마리아 스타크. 1991년 12월의 밤, 눈 내리는 도로. 그 밤은 사고가 아니었다. 피터는 그걸 알고 있었고, 그걸 안다는 사실이 이 성당의 차가운 공기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붕 위에서 하나도 안 빼고 다 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밤만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가 없었다. 스티브가 관이 놓였던 자리를 보며 낮게 말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그 얼굴 위에 색색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70년을 건너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페기는 나를 기다리지 않았어. 내가 얼음 속에 있는 동안. 결혼했고, 아이들 낳았고, 쉴드를 세웠어. 좋은 삶을 살았지. 나는 그게 고마워. 진심으로. 근데 가끔은… 그 춤 한 번만 췄으면 하고 생각해. 약속했거든. 토요일 밤 8시, 스토크 클럽. 나는 그 약속을 못 지켰어." "……" "요양원에 갈 때마다 페기가 나를 처음 보는 것처럼 반가워했어. 스티브, 살아 있었구나, 하고. 그때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했어. 늦어서 미안하다고. 근데 이제 그 말을 할 사람이 없네." 토니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성당 어딘가에서 촛불 하나가 꺼지는 냄새가 났다. 그러다 토니가 스티브를 보지 않은 채 아주 낮게 입을 열었다. "캡. 이모는 기다리지 않고 자기 시간을 살았다며. 너도 그래야 해. 그 춤 생각하는 거 말리진 않을게. 근데 그 춤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을 놓치진 마. 이모가 그걸 바랄 것 같지 않아."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네." "요즘 많이 배웠어. 지나간 사람한테 붙잡혀 사는 게 어떤 건지. 아주 가까이서 봤거든." 토니가 그렇게 말하며 뒷줄의 피터를 흘끗 보았다. 스티브도 그 시선을 따라 피터를 보았다. 스티브는 1년 전에 다 들었다. 피터가 어디서 왔는지, 그 세계에서 누구를 잃었는지. 스티브는 피터를 오래 보다가 다시 관이 놓였던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젖은 웃음이 그 입가에 걸렸다. "…그 녀석은 자기 시간을 살기로 했나." "응. 1년 전에. 퀸즈 지붕 위에서. 그 사람 말고 나를 보기로 했어. 아니, 원래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걸 인정하기로 했어." "그럼 나도 노력해 보지. 자기 시간 사는 거." 피터는 무릎 위의 두 손을 쥐었다. 원래 세계의 스티브는 결국 그 춤을 추러 갔다. 시간을 거슬러서. 그리고 늙은 모습으로 호숫가의 벤치에 앉아 샘에게 방패를 건넸다. 피터는 그 장면을 멀리서 보았다. 그때 그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자기 시간이 아니라 페기의 시간을 살았는데도. 피터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캡틴. 하나만 말씀드려도 돼요." "…해." "원래 세계에서 캡틴은 그 춤을 추러 가요. 아주 나중에요. 시간을 거슬러서요. 그리고 거기 남아요. 페기 씨랑요. 늙어서 돌아왔을 때 행복해 보였어요." "……" "그러니까 토니 말이 다 맞는 건 아니에요. 자기 시간을 사는 것도, 그 춤을 추러 가는 것도, 다 캡틴이 고르시는 거예요. 저도 시간을 거슬러 여기 왔어요. 그리고 여기 남기로 했어요. 그게 제 시간이 됐고요. 캡틴도 언젠가 그 앞에 서시면 그때 고르시면 돼요. 지금은 그냥 슬퍼하셔도 돼요." 스티브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피터를 보았다. 그 눈이 붉게 젖어 있었다. 토니도 놀란 얼굴로 피터를 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한참 피터를 보다가 짧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뒷줄에 앉은 피터의 어깨를 쥐었다. "…스토크 클럽. 토요일 밤 8시. 그 약속, 언젠가 지킬 수도 있다는 거군." "…네.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럼 그때까지는 여기서 살아야겠네. 지킬 약속이 하나 더 생겼으니까. 자네랑 스타크랑 그 수정안 들고 빈에 가는 거." 스티브가 피터의 어깨를 놓고 일어섰다. 관이 놓였던 자리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통로를 걸어 나갔다. 꼿꼿한 등으로. 피터와 토니만 남았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돌바닥 위에 색색으로 번져 있었다. 토니가 앞줄에서 몸을 돌려 피터를 보았다. "…원래 세계에서 캡이 그 춤 추러 갔다는 거. 그것도 처음 들었어." "…목록에 안 넣었어요. 그건 바꿔야 할 게 아니라서요. 캡틴이 고를 거라서요." "……" "토니?" "…아니야. 네 말이 맞아. 그건 캡 거야. 근데 피터." "네." "그 목록에 안 넣은 거. 그런 거 또 있어?" 토니의 얼굴에는 별 뜻이 없었다. 그냥 묻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질문이 피터의 가슴 한가운데를 정확히 찔렀다. 1991년 12월. 눈 내리는 도로. 술만 마시면 아들 자랑을 했다던 그 아버지. 피터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었다. 하나도 안 빼겠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이 성당에서, 페기의 장례식이 막 끝난 이 자리에서, 아버지가 등 뒤에서 자기 자랑을 했다는 말을 방금 들은 이 사람에게. "…있어요.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여기서는 아니에요." "…큰 거야?" "…네. 커요. 토니한테 제일 아플 거예요." 토니가 피터를 오래 보았다. 그 눈에 무언가가 스쳤다. 불안이었다. 1년 동안 사라졌던 그것. 피터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 때마다 떠오르던 그것. 그런데 토니는 그 불안을 꾹 눌러 삼켰다. 피터는 그걸 보았다. 토니가 의자 등받이를 짚고 일어섰다. "알았어. 여기서는 아니라며. 그럼 다른 데서. 빈 끝나고. 대신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1년 전에 약속했잖아." "…네. 빈 끝나고요. 꼭요." 성당을 나서기 전, 토니는 통로 옆에 놓인 조문록 앞에 멈춰 섰다. 두꺼운 가죽 표지의 책이 펼쳐져 있었고, 수많은 이름과 짧은 문장들이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토니는 만년필을 집어 들고 한참 망설이다가 짧게 적었다. 피터는 어깨 너머로 그 글씨를 보았다. 초콜릿 고마웠어요. 아버지 얘기도요. 토니 스타크. 토니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그 이름 위를 엄지로 한 번 쓸었다. 마치 오래 미뤄 둔 인사를 이제야 건넨 사람처럼. 토니가 손을 내밀었다. 피터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둘은 성당의 통로를 나란히 걸어 나갔다. 무거운 나무 문을 밀자 런던의 흐린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계단 아래에서 나타샤가 피터를 붙잡았다. 토니가 스티브와 함께 차 쪽으로 걸어간 사이였다. 나타샤는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너 또 그 얼굴이다. 비행기 안에서부터. 토니 아버지 얘기 나왔을 때." "……" "말 안 해도 돼. 근데 하나만. 그거, 토니한테 할 거지. 오래 안 기다리게." "…네. 빈 끝나고요." "좋아. 워싱턴에서 나한테 했던 거 기억나지. 믿어 달라던 거. 그거 토니한테도 해. 무거운 거 꺼낼 때는 그 말부터 하는 거야. 그래야 듣는 사람이 덜 무너져." 나타샤는 피터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믿어 달라는 말. 수술실 앞 복도에서 나타샤에게 입 모양으로만 건넸던 그 말. 피터는 그 말을 가슴에 품고 계단을 내려갔다. 토니가 차 문을 열어 둔 채 피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런던의 흐린 하늘 아래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웃으며. 그 손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막 들은 손이라는 걸, 그리고 곧 그 아버지가 어떻게 떠났는지를 들어야 할 손이라는 걸 피터는 알았다. 피터는 그 손을 놓지 않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날에도. 차는 템스강을 따라 천천히 달렸다. 회색 강물 위로 낡은 다리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강변의 가로수들이 젖은 잎을 떨구고 있었다. 신호에 걸린 사이, 토니가 창밖의 노점 수레를 보더니 차를 세우라고 했다. 핫초코를 파는 수레였다. 토니는 차에서 내려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를 피터의 손에 쥐여 주며 뒷좌석에 다시 앉았다. "런던 핫초코는 맛없대. 근데 장례식 끝나고 마시는 건 원래 맛없는 거야. 그러니까 상관없어." "…마시멜로 없네요." "그러게. 영국 사람들은 이걸 모르네. 다음엔 내가 주머니에 넣어 다닐게." 피터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뜨거웠다. 정말로 맛은 없었다. 묽고, 너무 달고, 어딘가 가루 맛이 났다. 그런데 피터는 그걸 끝까지 다 마셨다. 토니도. 창밖으로 시계탑이 흐린 하늘을 찌르며 지나갔다. 토니가 빈 종이컵을 손에서 굴리며 불쑥 말했다. "페기 이모가 그랬어. 어릴 때 나 울면 이걸 사 줬어. 우리 집 근처 노점에서. 아버지한텐 비밀로 하자면서." "……" "오늘 이모 장례식 끝나고 이걸 마시니까, 이모가 그 비밀을 끝까지 지켜 준 게 생각나네. 아버지한테 한 번도 안 일렀어. 내가 운 거." 피터는 빈 종이컵을 쥔 채 토니를 보았다. 그리고 그 비밀 이야기 속에 숨은 다른 비밀을 생각했다. 피터가 아직 지키고 있는 비밀. 이 사람의 아버지에 대한. 피터는 종이컵을 천천히 구기며 창밖의 회색 강물을 보았다. 빈이 끝나면. 그 약속을, 손바닥 안에서 구겨지는 종이컵처럼 꽉 쥐었다. 빈의 국제회의장은 유리와 강철로 지은 거대한 건물이었다. 도나우강을 등지고 서서, 정문 앞에 수십 개 나라의 깃발을 줄지어 나부끼게 하고 있었다. 이른 오후의 햇살이 유리벽에 부딪혀 광장 바닥에 날카로운 빛 조각을 흩뿌렸다. 광장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방송국 중계차들이 길게 늘어섰고, 경찰들이 철제 바리케이드를 치며 사람들을 밀어냈다. 피터는 회의장 맞은편 건물의 옥상에 엎드려 그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달궈진 옥상 자갈이 슈트 너머로 배를 데웠다. 이어폰 너머에서 토니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회의장 안이었다. 정장 차림으로, 붉은 글씨투성이의 수정안을 든 채. [국무장관 표정 봤어야 했는데. 거부권 조항 보더니 얼굴이 시금치처럼 변하더라. 근데 와칸다 왕이 수정안 읽더니 고개를 끄덕였어. 72시간 조항 좋대. 자기 나라도 그런 식으로 일한대.] "…그분 이름이 티차카예요. 아드님은 티찰라고요." [알아. 방금 인사했어. 아들도 왔더라. 그리고 피터. 그 왕이 나한테 따로 와서 그러더라. 라고스에서 자기 나라 사람 열한 명 살려 줘서 고맙다고. 노란 건물 3층의 그 구호 요원들, 다 와칸다 사람들이었대. 그 사람들이 돌아와서 그랬대. 스파이더맨이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를 꺼냈다고. 스파이더맨한테 꼭 고맙다고 전해 달래.] "……" [듣고 있어?] "…네. 듣고 있어요. 고맙다고 전해 주세요. 아니, 이따 제가 직접 할게요." [그래. 이따 직접 해. 그 왕, 너 보고 싶어 하더라. 근데 피터. 지금 광장 어때. 네가 말한 그거 보여?] 광장 한쪽으로 검은 세단 몇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경호원들이 먼저 내려 주위를 살폈고, 이어 하얀 정장을 입은 노인이 내렸다. 은빛 수염, 느리지만 흔들림 없는 걸음. 그 뒤로 검은 정장의 젊은 남자가 따라 내렸다. 노인이 광장의 깃발들을 올려다보다가 젊은 남자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젊은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웃음이었다. 피터는 옥상 끝에서 그 웃음을 오래 보았다. 저 노인이 라고스의 열한 명을 위해 피터에게 고맙다고 하러 온 사람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옥상 자갈 위에 짚은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들었다. 피터는 광장의 중계차들을 하나씩 짚어 나갔다. 방송국 이름이 찍힌 하얀 승합차들. 지붕마다 접시 모양의 위성 안테나. 하나, 둘, 셋, 열둘. 열두 대가 똑같은 차체에 똑같은 안테나를 달고 있었다. 원래 세계의 이야기는 폭탄이 그 중계차 중 하나에 실려 있었다는 것까지만 알려 주었다. 어느 차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피터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열두 대예요. 중계차가. 어느 건지 모르겠어요." [비전한테 열 감지 돌리라고 할게. 폭탄이면 뭔가 다르겠지.] [이미 돌리고 있습니다. 열두 대 모두 전자 장비로 가득해서 구별이 어렵습니다. 다만 한 대가 다른 것들보다 무겁습니다. 바퀴가 눌린 정도가 다릅니다. 정문에서 세 번째 차입니다.] 정문에서 세 번째. 다른 차들과 똑같아 보였다. 그런데 정말로 바퀴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낮게 주저앉아 있었다. 피터는 옥상을 박찼다. 광장의 가로등에 거미줄을 걸고 기자들의 머리 위를 가로질러 그 승합차의 지붕에 내려앉았다. 아래에서 비명과 셔터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카메라 수십 대가 빨갛고 파란 마스크를 향해 돌아갔다. 피터는 그 시선들을 등지고 승합차의 뒷문을 뜯어냈다. 안은 장비로 빼곡했다. 모니터, 뒤엉킨 케이블, 위성 송신기. 그리고 그 사이에 커다란 금속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 위의 작은 화면에서 붉은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00:00:47. 46. 45. 피터의 등줄기를 찬물이 훑고 지나갔다. "찾았어요! 세 번째 차예요! 45초 남았어요! 광장이랑 건물 앞쪽 사람들 빼 주세요!" [비전! 광장! 캡, 나타샤! 정문 쪽으로!] 피터는 운전석으로 뛰어들었다. 열쇠가 없었다. 운전대 아래의 덮개를 뜯어내고 전선 다발을 움켜쥐었다. 철물점 계산대 뒤에서 벤이 가르쳐 준 대로. 새끼손가락이 저절로 들렸다. 두 가닥을 맞붙이자 불꽃이 튀며 엔진이 걸렸다. 피터는 기어를 넣고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승합차가 바리케이드를 들이받고 광장을 빠져나갔다. 기자들과 경찰들이 비명을 지르며 양옆으로 흩어졌다. 피터는 운전대를 꺾었다. 회의장 뒤편의 강둑으로. 사람이 없는 쪽으로. 30초. 20초. 강둑의 철제 난간이 앞유리 가득 다가왔다. 피터는 문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잔디밭을 구르며 몸을 일으키는 사이, 승합차가 난간을 뚫고 강물 위로 날아올랐다. 하얀 물보라가 솟구쳤다. 그리고 물속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거대한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굉음과 함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강둑의 잔디가 젖고, 피터의 마스크 위로 강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피터는 젖은 잔디밭에 엎드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물기둥이 무너져 내리고, 강물이 출렁이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아무도. 해냈다고 말하려고 이어폰을 누르는 순간, 회의장 쪽에서 두 번째 폭발음이 울렸다. 고개를 들었다. 회의장 건물 한쪽, 대회의실의 유리벽이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가고 있었다. 깨진 유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쏟아졌고, 그 너머에서 검은 연기와 불길이 솟구쳤다. 두 번째였다. 원래 세계의 이야기에서 폭탄이 하나였는지 둘이었는지 피터는 몰랐다. 하나가 터졌으니까 하나인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를 치우자 다른 하나가 남아 있었다. 건물 안에. 처음부터 두 개였다. 제모는 실패할 경우까지 계산해 두었던 것이다. [피터! 건물 안이야! 대회의실! 서명식 시작하려고 다 들어와 있었어! 와칸다 왕이… 왕이 연단 앞에…] 이어폰 너머에서 토니의 목소리가 기침과 함께 터져 나왔다. 피터는 강둑을 박차고 회의장으로 몸을 날렸다. 거미줄을 쏘고, 놓고, 다시 쏘며 깨진 유리벽 안으로 뛰어들었다. 연기가 폐를 할퀴었다. 대회의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의자들이 뒤집혀 있었고, 천장의 조명이 매달린 전선째 떨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연기 속에서 기침을 하며 출구를 더듬었다. 피터는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켜 출구 쪽으로 밀었다. 연기 너머로 붉은 아머의 빛이 보였다. 반쯤 아머를 입은 토니가 쓰러진 사람들 위로 떨어진 철골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회의실의 연단 앞에, 한 젊은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검은 정장. 품에 한 노인을 안은 채였다. 하얀 수염, 하얀 정장. 와칸다의 왕 티차카. 노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젊은 남자가 노인을 부르고 있었다. 와칸다의 말로, 몇 번이고. 피터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게 어떤 단어인지는 알았다. 아버지. 피터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원래 세계의 이야기대로였다. 티차카는 이 자리에서 쓰러졌다. 피터가 폭탄 하나를 치웠는데도. 두 번째 폭탄이 기어이 그 자리를 찾아왔다. 콜슨처럼. 원래대로 쓰러지는 사람. 이번엔 반 박자 늦은 것도 아니었다. 정확한 차를 찾았고, 정확한 강으로 몰았다. 그런데도. 피터는 연기 속에서 무릎을 꿇었다. 손이 떨려 멈추지 않았다. 토니가 연기를 헤치고 피터 옆으로 왔다. 아머의 투구를 벗은, 그을린 얼굴이었다. 토니는 피터의 어깨를 붙잡고 연단 앞의 두 사람을 보았다. 무릎 꿇은 아들과, 움직이지 않는 아버지. 토니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토니가 피터를 일으켜 세우며 낮게 말했다. "…피터. 일어나. 아직 사람들 있어. 이 방에. 저 왕 말고도." "…제가 하나 치웠어요. 제대로 치웠어요. 근데 두 개였어요. 원래 세계에서는 하나인 줄 알았는데…" "알아. 봤어. 강에서 물기둥 솟는 거. 그거 아니었으면 광장의 기자들 다 죽었어. 수십 명. 네가 그 수십 명 살렸어. 이 방 사람들도 아직 살릴 수 있어. 저 왕은… 저 왕은 못 살렸지만." "…그 왕이요. 아까 저한테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이따 제가 직접 하겠다고 했는데." "……" "직접 못 했어요. 이제 못 해요." 토니가 피터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피터는 연단 앞을 보았다. 하얀 정장의 노인. 라고스의 열한 명을 위해 고맙다는 말을 직접 하고 싶어 했던 사람. 원래 세계에서 이 사람은 라고스의 일로 협정을 지지했다. 자기 나라 사람들이 죽었으니까. 이 세계에서 이 사람은 자기 나라 사람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피터에게 고맙다고 하러 왔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쓰러졌다. 피터는 그 사실 앞에서 숨이 막혔다. 토니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피터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피터는 그 손에 기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다시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토니가 철골을 들어 올리면 피터가 그 아래의 사람을 끌어냈다. 나타샤와 스티브가 반대편에서 사람들을 출구로 이끌었다. 비전이 천장에서 무너지려는 철골을 두 손으로 붙들고 있었다. 연기가 조금씩 걷혔다. 대회의실이 비어 갔다. 연단 아래의 깨진 유리 사이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피터는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검은 구슬을 꿴 팔찌였다. 구슬 하나하나에 아주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끝이 끊어져 구슬 몇 개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피터는 무릎을 꿇고 흩어진 구슬을 하나씩 주웠다. 아홉 번째 구슬은 뒤집힌 의자 다리 밑에 끼어 있었다. 피터는 그것까지 빼내 손바닥에 모았다. 그 팔찌가 누구의 것인지 피터는 알았다. 광장에서 깃발을 올려다보던 그 하얀 정장의 손목에 감겨 있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피터는 연단 앞으로 갔다. 의료진이 들것을 들고 달려와 있었다. 젊은 남자가 노인을 들것 위에 조심스럽게 눕히고 일어섰다. 뺨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눈은 이미 울고 있지 않았다. 무언가를 겨누는 눈이었다. 남자가 대회의실 벽의 커다란 화면을 보았다. 뉴스였다. 폭발 직전의 감시 카메라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회의장 뒷문 근처, 정비공 작업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상자를 들고 지나가는 장면. 그 얼굴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짙은 머리칼, 날카로운 턱. 그리고 자막. 용의자 제임스 뷰캐넌 반스. 버키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피터는 알았다. 저건 버키가 아니었다. 제모가 씌운 가면이었다. 화면 앞에서 젊은 남자가 그 얼굴을 노려보며 와칸다의 말로 낮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피터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눈은 알았다. 원래 세계에서 이 남자는 그 얼굴의 주인을 끝까지 쫓았다. 검은 옷을 입고, 손끝의 발톱을 세운 채. 피터는 마스크를 쓴 채 그 남자 앞으로 걸어갔다. "…저 사람 아니에요." "……" "화면 속의 저 사람, 범인 아니에요. 누군가 저 사람인 것처럼 꾸몄어요. 아버님을 해친 사람은 따로 있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스파이더맨." "…알아요. 그냥 알아요. 증거는 아직 없어요. 근데 믿어 주세요. 저 사람을 쫓기 전에 진짜를 찾으셔야 해요." 젊은 남자는 피터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차갑게 웃었다. 슬픔으로 가득 찬 웃음이었다. 남자가 피터를 지나쳐 걸어가며 낮게 말했다. "내 아버지가 방금 죽었다. 내 품에서. 증거 없는 믿음으로 그 얼굴의 주인을 놓아줄 수는 없어. 네가 옳다면, 그 증거는 내가 그를 찾은 뒤에 보여 줘라." 그 등이 멀어지기 직전, 피터는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끊어진 팔찌와 아홉 개의 구슬. 젊은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피터의 손바닥 위를 보는 그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 구슬들을 하나씩 집어 자기 손바닥에 옮겨 담았다. 마지막 하나까지. 그리고 피터를 보았다. 여전히 차가운 눈이었다. 그러나 그 차가움 아래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금 녹아 있었다. "…고맙다. 스파이더맨." 남자는 다시 돌아섰다. 구슬을 쥔 주먹을 가슴에 댄 채로, 연기가 걷혀 가는 대회의실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깨진 유리를 밟는 발소리가 한 걸음마다 또렷하게 울렸다. 왕이 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사람의 걸음이었다. 피터는 그 등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토니가 피터 옆에 와서 섰다. 그 등을 함께 보다가 낮게 물었다. "…저 사람이 그 버키라는 사람이야?" "…네. 얼굴은요. 근데 버키 씨가 한 게 아니에요. 제모예요. 작업실에서 말씀드렸던 그 사람이요. 소코비아에서 가족 잃은 사람이요." "알아. 믿어. 근데 세상은 안 믿겠지. 저 화면을 봤으니까." 나타샤가 연기 속에서 걸어 나와 피터 옆에 섰다. 재킷 소매가 그을려 있었고 뺨에 가는 상처가 나 있었다. 나타샤는 화면 속의 버키 얼굴을 한 번 보고, 피터를 보았다. "저거 아니지. 네 얼굴 보니까." "…네. 아니에요." "그럼 됐어. 증거는 찾으면 돼. 근데 피터, 아까 그 왕 앞에서 네 얼굴. 네 탓이라고 생각하는 얼굴이었어." "…하나는 막았는데, 하나를 못 막았어요." "하나를 막았잖아. 그걸 먼저 세. 못 막은 걸 먼저 세기 시작하면, 넌 평생 그것만 세게 될 거야. 나는 오래 그랬어." 나타샤는 피터의 어깨를 한 번 쥐고 다친 사람들 쪽으로 걸어갔다. 피터는 그 등을 보며 숨을 골랐다. 하나를 막았다. 강물 속에서 솟구친 물기둥. 광장의 기자들. 피터는 그것부터 세기로 했다. 그래도 하얀 정장의 노인은 그 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대회의실 입구에서 스티브가 화면을 보고 있었다. 버키의 얼굴을. 방패를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피터가 다가가자 스티브가 피터를 보았다. 라고스의 퀸젯 안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누군가 버키를 이용할 거라던. "…이거였군. 자네가 말한 게." "…네. 버키 씨가 안 한 일이에요. 그리고 이제 전 세계가 버키 씨를 쫓을 거예요. 쏘라는 명령도 떨어질 거고요." "그럼 그 전에 내가 먼저 찾아야지." "…캡틴. 혼자 가지 마세요. 토니한테 먼저 말하고 가세요. 약속했잖아요. 따로 정하지 않기로." 스티브가 피터를 보고, 피터 너머의 토니를 보았다. 토니가 그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티브의 어깨에서 아주 조금 힘이 빠졌다. 스티브가 토니에게로 걸어갔다. 연기가 가라앉은 대회의실 한가운데에서 둘이 마주 섰다. 깨진 유리벽 너머로 사이렌 소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이 순간 스티브는 혼자 떠났다. 버키를 찾으러.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이번엔 스티브가 떠나기 전에, 토니 앞에 서 있었다. 연기가 가라앉은 대회의실 한가운데에서, 토니와 스티브는 한참 서로를 보기만 했다. 둘 다 그을린 얼굴이었다. 토니의 셔츠 소매는 찢어져 있었고, 스티브의 정장 어깨에는 유리 조각 몇 개가 박혀 반짝였다. 피터는 둘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깨진 유리벽 너머로 사이렌이 몰려들고 있었다. 스티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버키를 찾으러 가야겠어, 스타크. 저 화면 봤지. 이제 전 세계가 버키를 쫓을 거야. 쏘라는 명령도 떨어질 거고. 그 전에 내가 먼저 찾아야 해." "알아. 근데 지금 가면 너도 수배자야. 국무장관이 30분 안에 특수 부대 풀 거야. 너랑 버키 둘 다 체포하라고." "그럼 30분 안에 가야지." "캡. 1년 전에 약속했잖아. 따로 정하지 말자고. 지금 네가 따로 정하고 있어." 스티브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토니가 그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원래 세계의 이 순간에는 이 대화가 없었다. 스티브는 이미 떠난 뒤였고, 토니는 그걸 뉴스로 알았다. 토니가 스티브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 "그러니까 같이 정하자. 지금. 72시간. 수정안에 넣은 그거. 아직 서명은 안 됐지만 국무장관한테 들이밀 거야. 72시간만 달라고. 우리가 먼저 버키를 찾아서 살려서 데려오겠다고. 그동안 진짜 범인 찾겠다고. 그동안 특수 부대는 대기." "…국무장관이 그걸 들어줄까." "안 들어주면 나도 서명 안 한다고 할 거야. 117개 나라가 아이언맨 없는 협정을 원하진 않을걸. 그리고 캡. 혼자 가지 마. 피터 데려가." 스티브가 피터를 돌아보았다. 피터도 놀라 토니를 보았다. 스티브와 둘이서 그 사람을 찾으러 가라는 말이,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토니가 피터를 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 녀석이 그 버키라는 사람을 알아. 다리 위에서 이름 불러 줬다며. 그 사람이 범인 아니라는 것도 알고. 너 혼자 가면 버키도 너도 흥분할 거야. 이 녀석이 그 사이에 서 있으면 좀 나을 거야. 늘 그랬듯이." "…스타크. 자네는." "나는 여기서 국무장관이랑 싸울게. 72시간 따낼 때까지. 그리고 그 제모라는 놈 뒷조사. 피터가 말해 준 게 있으니까 비전이랑 같이 파 볼게." 토니가 피터 앞에 와서 섰다. 그을음이 묻은 손가락이 피터의 귀로 다가왔다. 그리고 거기 끼워진 이어폰을, 위성 세 개를 거쳐 목소리를 실어 나르는 그 작은 것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 "이거 빼지 마. 72시간 내내. 그리고 그 버키라는 사람, 살려서 데려와. 캡도. 너도." "…네. 셋 다요." "그리고 피터." "네." "빈 끝나고 하기로 한 그 얘기. 이것도 끝나고 해. 미뤄지는 거 아는데, 이번엔 내가 미루는 거야. 지금 그거 들으면 나 여기서 국무장관이랑 못 싸울 것 같아서." 피터의 숨이 걸렸다. 토니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지금 이 일과 어딘가에서 이어져 있다는 걸. 런던의 성당에서 피터가 토니에게 제일 아플 거라고 했으니까. 토니가 피터의 머리칼을 한 번 헝클어뜨리고 스티브에게 손을 내밀었다. 스티브가 그 손을 짧고 단단하게 잡았다. 스티브와 피터가 깨진 유리벽을 넘어 나가기 직전, 피터는 돌아보았다. 토니가 연기 속에 서서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있었다. 국무장관에게. 그 등이 굳게 펴져 있었다. 그날 밤 늦게, 빈의 호텔 옥상에서 피터는 혼자 도나우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물 위로 도시의 불빛이 길게 늘어져 흔들렸다. 낮에 승합차를 빠뜨린 자리 근처에는 아직 경찰선이 쳐져 있었다. 옥상 문이 열리고 토니가 올라왔다. 국무장관과의 긴 통화를 막 끝낸 얼굴이었다. 토니는 아무 말 없이 피터 옆의 난간에 기댔다. "…스티브랑 얘기 끝났어요?" "응. 72시간 받아 냈어. 국무장관이 이를 갈더라. 내일 아침에 캡이랑 너는 루마니아로 가. 버키가 거기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대." "…네." "근데 피터. 아까 그 왕. 너 혼자 그 얼굴 들고 있지 마. 그 팔찌 구슬 주울 때, 네 얼굴 봤어." 피터는 강물을 보았다. 아홉 개의 구슬. 손바닥 위에서 따뜻했던 그 무게. 피터가 강물을 본 채 낮게 말했다. "…원래대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콜슨 씨처럼. 아무리 해도요. 그게 제일 무서워요. 토니도 그중 하나일까 봐요." "……" "그 장갑이요. 아무리 해도 결국 원래대로 갈까 봐요." 토니가 난간에서 손을 떼고 피터를 보았다. 강 쪽에서 불어온 밤바람이 둘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토니는 피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강물만 보고 있던 그 얼굴을 천천히 자기 쪽으로 돌렸다. "콜슨은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퓨리가 살렸다며. 원래대로 쓰러졌는데, 원래대로 끝나진 않았어. 그 왕도 쓰러졌지만, 그 아들이 네 손에서 구슬 받아 갔어. 원래 세계에서는 그 아들이 버키를 죽이려고 쫓았다며. 이번엔 구슬 받아 갔어. 다른 거야." "……" "나도 그래. 원래대로 쓰러지는 날이 와도, 원래대로 끝나진 않게 할 거야. 너랑 같이. 그러니까 그 얼굴은 반만 해. 나머지 반은 내가 할게." 피터는 토니의 손바닥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나우강 위로 유람선 한 척이 불을 밝힌 채 천천히 지나갔다. 그 불빛이 물결 위에서 부서지며 둘의 얼굴까지 희미하게 닿았다. 루마니아로 가는 퀸젯 안에서, 스티브는 오래 창밖만 보았다. 구름 아래로 동유럽의 들판이 갈색과 초록의 조각보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러다 스티브가 창밖을 본 채 낮게 물었다. "그 세계에서. 버키는 어떻게 됐나. 끝까지." "…돌아와요. 캡틴 곁으로요. 머릿속의 주문을 지우고, 와칸다에서 한동안 지내요. 거기서 사람들이 화이트 울프라고 불렀어요. 농장에서 염소를 키우면서요." "…염소." "네. 염소요. 근데 그 뒤로도 끝까지 캡틴 옆에 있었어요. 마지막 싸움에서도요. 그리고 캡틴이 그 춤 추러 갈 때, 버키 씨는 알고 있었어요. 캡틴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거. 그래서 그냥 웃으면서 보내 줬어요." 스티브가 그제야 피터를 돌아보았다. 눈가가 붉었다. 70년 전의 친구가 어딘가의 들판에서 염소를 쫓는 모습을 떠올리는지, 스티브는 소리 없이 웃었다. "염소라니. 70년 전 그 녀석은 시골 냄새만 맡아도 재채기를 했는데." "…거기선 염소들이 버키 씨를 엄청 좋아했대요." "그럼 이번에도 데려와야겠군. 염소 키우는 데까지." 퀸젯의 엔진이 낮게 울렸다. 스티브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구름 아래로 루마니아의 붉은 지붕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 입가에 아직 웃음이 남아 있었다. 부쿠레슈티의 아침은 잿빛이었다. 오래된 아파트들이 좁은 골목을 따라 서로 어깨를 맞댄 채 늘어서 있었다. 발코니마다 빨래가 축 늘어져 있었고, 회색 벽에는 빛바랜 광고 전단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 시장 입구에서 상인들이 과일 상자를 펼치고 있었다. 자두, 사과, 덜 익은 복숭아. 피터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사과 노점 앞에서 사과를 고르는 척했다. 이어폰 너머에서 스티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은편 아파트의 꼭대기 층, 창문에 신문지가 덕지덕지 붙은 방이라고. 피터는 고개를 들지 않고 곁눈으로 그 창문을 보았다. 신문지 너머에서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다. 사과 노점의 주인은 주름이 깊은 할머니였다. 피터가 사과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기만 하자, 할머니가 루마니아 말로 무언가를 투덜거리더니 가장 빨갛고 단단한 사과 하나를 골라 피터의 손에 쥐여 주었다. 돈을 내밀자 손사래를 쳤다. 피터는 그 사과를 손에 든 채 어색하게 웃었다. 철물점 계산대 뒤에서 벤이 던져 주던 메이의 도시락 사과가 떠올랐다. 어느 세계에서나 이 사과는 네 몫이라던 말도. 피터는 그 사과를 주머니에 넣었다. 루마니아의 잿빛 시장 한가운데에서, 주머니 속의 그 무게가 이상하게 든든했다. 그리고 시장의 다른 쪽 끝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야구 모자, 낡은 점퍼, 장갑을 낀 왼손. 남자가 자두 노점 앞에 멈춰 섰다. 자두 하나를 집어 들고 노점 주인과 짧게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 눈이 피터에게서 멈췄다. 모자 그늘 아래의 맨얼굴에서. 무언가가 그 눈을 스쳤다. 알아본 것이었다. 남자는 자두를 내려놓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아파트 쪽으로. [피터. 방금 그 사람이야. 봤어?] "…네. 저를 봤어요. 알아본 것 같아요." [마스크도 안 썼는데?] "…다리 위에서 목소리를 들었잖아요. 은행 금고에서도요. 제가 환기구에서 이름 불렀을 때 위를 봤어요. 그때 뭔가 남았나 봐요." [올라가지. 내가 먼저. 자네는 창문 쪽.] 피터는 시장을 빠져나와 아파트 뒤편으로 돌았다. 마스크를 꺼내 쓰고 벽을 타고 꼭대기 층으로 기어올랐다. 벽돌 틈으로 빗물에 젖은 이끼 냄새가 났다. 신문지가 붙은 창문 옆에 거꾸로 매달려 창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좁고 어두운 방이었다.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 하나, 버너 위의 찌그러진 냄비 하나, 벽에 압정으로 꽂아 둔 사진과 메모들. 그리고 탁자 위의 낡은 공책 한 권. 방 안의 벽을 따라 압정으로 꽂힌 메모들이 창틈의 바람에 팔랑거렸다. 피터는 거꾸로 매달린 채 그 글씨들을 읽었다. 서툴고 꾹꾹 눌러 쓴 영어 글씨들. 브루클린. 사라 로저스. 1943년 겨울. 열차. 그리고 메모 하나에는 날짜 없이 짧은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다리 위의 거미. 빨갛고 파란. 내 이름을 말해 줌. 피터는 그 메모 앞에서 숨이 걸렸다. 지워지고 또 지워진 머릿속에서, 이 사람은 피터를 붙잡아 종이 위에 적어 두었다.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방문이 열리며 방패를 등에 멘 스티브가 들어섰다. 스티브는 방을 둘러보다가 탁자 위의 공책을 펼쳤다. 빼곡한 글씨와 서툰 그림들. 스티브의 얼굴이 굳었다. 버키가 되찾은 기억을 하나씩 적어 둔 공책이었다. 그리고 그 한 페이지에, 70년 전의 스티브 얼굴이 연필로 그려져 있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스티브가 공책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문간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가 스티브를 보고,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짙은 머리칼, 날카로운 턱, 그리고 아주 지친 눈. "…너 나 아는 거 같은데." "…버키. 빈에서 폭탄 터진 거 알아." "나 빈에 없었어. 이제 그런 일 안 해." 피터는 창문을 밀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 버키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빨갛고 파란 마스크를 보았다. 버키의 몸이 굳었다. 그리고 그 눈에 무언가가 일렁였다. 다리 위의 바람, 등에 매달린 무게, 귓가에 떨어지던 목소리. "…너. 그 거미구나. 다리 위에서. 내 이름 말해 준." "…네. 저예요. 기억하시네요." "기억해. 그 뒤로 그 사람들이 또 지웠는데, 그건 남았어. 제임스 뷰캐넌 반스. 브루클린 출신. 저 사람 친구. 골목에서 맞고 있으면 끌어내 줬다는 거. 그게 계속 남아 있었어.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 내 이름이 진짜 그건지 확인하려고." 버키의 목소리가 끝에서 갈라졌다. 스티브가 숨을 멈췄다. 피터는 천장에서 내려와 버키 앞에 서서 마스크를 벗었다. 시장에서 버키가 본 그 얼굴이었다. 버키는 그 얼굴을 오래 보다가 아주 지친 웃음을 지었다. "…시장에서 너 봤을 때 이상하게 안 무섭더라. 다들 나를 쫓는데. 너는 쫓는 얼굴이 아니었어." "…안 쫓아요. 데리러 왔어요. 캡틴이랑 같이요. 버키 씨가 빈에 없었다는 거 알아요. 누가 그렇게 꾸몄는지도요. 근데 지금 밖에 특수 부대가 오고 있어요. 72시간을 약속받았는데, 이쪽 부대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 그 순간 피터의 뒷목에서 스파이더 센스가 비명을 질렀다. 창밖에서, 지붕 위에서, 복도에서. 사방에서 무언가가 조여 오고 있었다. 피터가 창가로 달려가자 맞은편 건물 옥상에 저격수들이 엎드려 있는 게 보였다. 골목에는 검은 승합차들이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이어폰 너머에서 토니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터! 국무장관이 72시간 줬어! 근데 루마니아 쪽 특수 부대한테 연락이 안 갔대! 아니, 누가 연락을 막았대! 지금 그 건물 포위하고 있어! 사살 명령까지 떨어졌다고!] "…알아요. 지금 보여요. 누가 막았는지도 알 것 같아요." [제모야?] "…네. 아마요. 버키 씨가 체포되는 게 아니라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요." 복도에서 섬광탄이 터졌다. 하얀 빛과 함께 방문이 부서지며 연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버키가 반사적으로 탁자를 뒤집어 방패처럼 세웠다. 스티브가 방패를 들었다. 피터는 마스크를 다시 쓰며 천장으로 뛰어올랐다. 총탄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회벽이 부서지며 하얀 가루가 날렸다. 피터는 창문으로 날아드는 최루탄을 거미줄로 낚아채 밖으로 되던졌다. 버키가 금속 팔로 문을 박차고 들어온 대원 하나를 벽에 밀어붙였다. 죽이지 않았다. 총만 빼앗아 던지고 다음 대원에게로. 스티브가 그 옆에서 방패로 총탄을 막으며 외쳤다. "버키! 죽이지 마!" "안 죽여! 이제 안 죽인다고!" 이제 안 죽인다고. 버키는 그 말을 외치며 복도의 대원들을 하나씩 쓰러뜨렸다. 기절시키기만. 피터는 천장에서 뛰어내려 버키 옆에 섰다. 대원들의 총을 거미줄로 낚아채 벽에 붙였다. 버키가 피터를 흘끗 보고 짧게 웃었다. "다리 위에서처럼 등에 매달리지는 마라. 그때 목 졸려 죽는 줄 알았어."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셋은 복도를 뚫고 계단으로 나갔다. 아래층에서 대원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버키가 계단 난간을 넘어 아래층으로 몸을 던졌고, 스티브가 그 뒤를 따랐다. 피터는 거미줄을 쏘아 둘의 낙하를 받쳤다. 그렇게 건물을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섰을 때, 피터는 옥상 반대편 끝에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걸 보았다. 검은 형체였다. 사람의 모양인데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고양이처럼 낮게, 소리 없이. 검은 옷감이 햇빛을 받아 은은한 보랏빛으로 번뜩였다. 손끝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빛났다. 그 형체가 버키를 향해 몸을 날렸다. 피터는 그 형체를 알았다. 원래 세계의 공항에서, 그리고 마지막 싸움의 와칸다 들판에서 본 적이 있었다. 같은 편으로. 와칸다의 새 왕, 티찰라였다. 검은 형체가 버키를 덮쳤다. 버키가 금속 팔로 그 발톱을 막았다. 불꽃이 튀었다. 저 발톱은 비브라늄이었다. 버키의 금속 팔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검은 형체가 버키를 옥상 끝으로 몰아붙였다. 스티브가 방패를 들고 달려들었지만, 검은 형체가 발로 방패를 차 냈다. 비브라늄과 비브라늄이 부딪히는 낮은 울림이 옥상을 흔들었다. 피터는 옥상을 가로질러 몸을 날리며 거미줄로 검은 형체의 두 손목을 묶었다. 검은 형체가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가면 너머의 눈이 피터를 보았다. 빈의 대회의실에서 증거를 가져오라던 그 눈이었다. "…스파이더맨. 또 너구나." "그 사람 아니에요. 빈에서 폭탄 놓은 사람. 증거 찾는 중이에요. 72시간만 기다려 주세요. 아버님을 해친 진짜를 찾아 드릴게요." "72시간. 내 아버지는 72초도 없었다." 검은 형체가 손목을 비틀었다. 거미줄이 발톱에 찢겨 흩어졌다. 검은 형체가 다시 버키를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하늘에서 은빛 아머 하나가 내리꽂혔다. 옥상 한가운데에 내려앉으며 콘크리트가 갈라졌다. 로디였다. "다 멈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전부 체포다! 국무장관 명령이야!" 로디가 투구를 열고 피터를 보았다. 땀에 젖은 얼굴이 아주 잠깐 웃었다. 그리고 피터에게만 들리게 낮게 덧붙였다. "토니가 보냈어. 다들 죽기 전에 체포라도 하래. 체포는 살아 있어야 할 수 있으니까." 검은 형체가 멈췄다. 스티브가 방패를 내렸다. 버키가 옥상 끝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하늘에서 헬리콥터들의 굉음이 몰려왔다. 독일 정부의 헬리콥터들이었다. 피터는 옥상 한가운데에 서서 그것들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모두 베를린으로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제모가 버키의 머릿속을 다시 깨울 것이다. 이번엔 그 자리에 피터가 있을 것이다. 토니와 함께. 피터는 이어폰을 눌렀다. "토니. 다 살았어요. 버키 씨도, 캡틴도, 와칸다의 새 왕도. 지금 다 같이 베를린으로 가요." […살았으면 됐어. 베를린에서 보자. 나도 그리로 갈게. 그리고 피터. 그 제모라는 놈, 베를린에 오지. 지금 네 얼굴은 안 보이는데,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네. 와요. 버키 씨 머릿속을 깨우러요." [그럼 이번엔 그놈이 깨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잡자. 같이.] 헬리콥터의 바람이 옥상을 휩쓸었다. 버키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저항하지 않았다. 스티브가 그 옆에 서서 방패를 내려놓았다. 검은 형체도 가면을 벗었다. 티찰라였다. 젖지 않은 눈으로, 그러나 지친 얼굴로 버키를 내려다보며. 원래 세계에서 이 옥상은 분노로만 가득했다. 이번엔 그 분노 사이에 72시간이라는 아주 작은 틈이 벌어져 있었다. 피터는 그 틈을 손으로 붙잡듯 주먹을 쥐었다. 베를린으로 향하는 헬리콥터 안에서 버키는 피터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금속 팔이 무거운 강철 족쇄에 묶인 채였다. 회전 날개의 굉음이 모든 말소리를 삼켰지만, 버키는 피터를 보며 입을 열었다. 피터는 그 입 모양을 읽었다. "…넌 어디서 왔어. 거미." "…퀸즈요." "그거 말고. 다리 위에서도 그렇고, 시장에서도 그렇고. 넌 날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어. 오래 알던 사람을 보는 얼굴이었지." "……" "말 안 해도 돼. 근데 하나만. 그 오래 알던 데서, 너한테 나는 어떤 사람이었어." 피터는 족쇄에 묶인 금속 팔을 보았다. 그리고 그 위의 지친 얼굴을. 원래 세계의 마지막 싸움의 들판에서, 이 사람은 피터를 보며 웃었다. 아무 말도 없이, 살아 돌아온 동료를 반기는 얼굴로. 피터는 굉음 사이로 또박또박 입 모양을 만들었다. "…좋은 사람이요. 캡틴 옆에 끝까지 있던 사람이요." 버키가 피터를 오래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족쇄에 묶인 손이 무릎 위에서 아주 조금 펴졌다. 헬리콥터는 구름을 뚫고 북쪽으로 날았다. 창밖으로 루마니아의 붉은 지붕들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베를린의 대테러 본부는 회색 유리와 노출 콘크리트로 지은 차가운 건물이었다. 복도마다 천장 모서리의 감시 카메라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고, 문마다 지문 인식기가 푸른 불빛을 깜빡였다. 공기에서 새 카펫과 금속 냄새가 났다. 피터는 중앙 관제실의 유리벽 앞에 서서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 유리로 사방이 막힌 작은 방 하나. 그 한가운데에 버키가 앉아 있었다. 금속 팔이 통째로 강철 틀에 물린 채, 고개를 숙이고, 꼼짝도 하지 않고. 방 앞 복도에는 무장한 경비원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베를린에 내리자마자 토니는 피터를 본부 건물의 의무실로 끌고 갔다. 루마니아의 옥상에서 비브라늄 발톱에 스친 피터의 팔뚝을 보고서였다. 상처는 이미 아물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토니는 간호사가 소독약을 바르는 내내 그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이미 다 나았어요." "알아. 그래도 봐야겠어. 그 왕 발톱이 비브라늄이라며. 내 아머도 긁히는 거야." "…토니가 더 다쳐 보여요. 얼굴이요." "빈에서 연기 좀 마셨어. 괜찮아." 간호사가 붕대를 감고 나가자 토니가 피터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붕대 위를,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낮게 투덜거렸다. "혼자 가지 말라고 했더니, 캡이랑 가서 그 왕이랑 싸우고 왔네." 피터는 그 투덜거림에 웃었다. 토니도 지친 얼굴로 웃었다. 의무실 창밖으로 베를린의 회색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관제실 안쪽에서는 토니와 국무장관이 마주 서 있었다. 날 선 목소리가 오갔다. 72시간을 준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런데 왜 루마니아에서 사살 명령이 떨어졌냐고. 국무장관은 그 명령은 자기가 내린 게 아니라고, 누군가 통신을 가로챘고 지금 조사 중이라고 했다. 토니가 코웃음을 쳤다. "조사는 우리가 해요. 그리고 그 72시간, 아직 남아 있습니다." 국무장관은 토니를 오래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스티브와 샘은 관제실 구석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체포된 몸이었지만 수갑은 차지 않았다. 토니가 우겨서였다. 티찰라는 맞은편 창가에 서서 아래층의 버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은 채, 아직 차가운 눈으로. 토니가 국무장관을 떼어 내고 피터 옆으로 왔다. 유리벽 앞에 나란히 서서 아래층의 버키를 함께 내려다보았다. 토니의 정장 재킷에서 아직 빈의 연기 냄새가 났다. 토니가 유리벽을 본 채로 낮게 말했다. "빈 끝나고라고 했잖아. 그 얘기. 이제 빈은 끝났어." "…아직이요. 이 일이 아직 안 끝났어요. 그 얘기, 이 일이랑 이어져 있어요." "…그럴 것 같았어. 네 얼굴 보니까." "토니. 그 얘기 할 때요. 제가 먼저 부탁할게요. 믿어 주세요. 다 듣고 나서도요." 토니가 고개를 돌려 피터를 보았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그리고 그 눈이 천천히 풀렸다. 토니는 유리벽에 기댄 피터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한 번 톡 두드렸다. "7년을 믿었어. 며칠 더 못 믿을까." 피터는 그 셋을 차례로 보다가 다시 아래층 복도로 시선을 내렸다. 경비원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단정한 정장, 빗어 넘긴 머리, 손에 든 서류철. 목에 걸린 출입증에는 심리 상담사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버키를 면담하러 가는 길이었다. 피터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피가 식는 걸 느꼈다. 원래 세계의 이야기 속에서 저 남자는 상담사가 아니었다. 피터는 유리벽에 손바닥을 붙이고 이어폰을 눌렀다. "토니. 아래층. 지금 버키 씨 방으로 들어가는 남자. 상담사 출입증 건 사람. 저 사람이에요. 제모요." 관제실 안쪽의 토니가 국무장관과의 말을 끊고 돌아보았다. 유리벽 너머의 아래층을 보았다. 그 남자가 버키의 방 앞에서 경비원에게 출입증을 내밀고 있었다. 경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토니가 관제실의 경비 책임자에게 소리쳤다. "저 방 문 닫아요! 지금! 저 상담사 붙잡아요!" 경비 책임자가 당황한 얼굴로 무전기를 집어 드는 순간, 건물 전체의 불이 꺼졌다. 관제실의 화면들이 일제히 검게 죽었다. 비상등이 붉게 켜지며 사람들의 얼굴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웅성거림 사이로 피터의 스파이더 센스가 비명을 질렀다. 아래층이었다. 붉은 비상등 아래, 버키의 방 안에서 그 남자가 버키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손에 작고 빨간 공책 하나를 펼친 채. 피터는 그 공책을 알았다. 그 안에 적힌 러시아어 단어들이 버키를 다시 기계로 만든다는 것도. "안 돼요!" 피터는 관제실의 유리벽을 걷어찼다. 유리가 산산이 깨져 쏟아졌다. 그 틈으로 몸을 던지며 천장의 철골에 거미줄을 걸었다. 붉은 비상등 아래를 가로질렀다. 버키의 방까지 50미터. 경비원들이 놀라 올려다보는 머리 위를 날았다. 방의 유리벽이 다가왔다. 그 안에서 남자가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낮고 또박또박한 러시아어. 한 단어, 또 한 단어. 버키의 몸이 의자 위에서 경련했다. 강철 틀 안에서 금속 팔이 몸부림쳤다. 피터는 두 발로 유리벽을 걷어찼다. 금이 갔다. 다시. 깨졌다. 유리 조각과 함께 피터가 방 안으로 뛰어든 순간, 남자가 마지막 단어를 읽었다. 그리고 버키의 경련이 뚝 멈췄다.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 눈이 비어 있었다. 다리 위에서처럼. 은행 금고의 의자 위에서처럼. 남자가 공책을 덮으며 러시아어로 짧게 물었다. 버키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됐다고. 반 박자. 또. 남자가 고개를 돌려 피터를 보았다. 빨갛고 파란 마스크를. 그리고 피터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는 듯 아주 조금 놀란 얼굴로 웃었다. 남자가 버키에게 짧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버키가 금속 팔에 힘을 주자 강철 틀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다. 버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피터를 보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남자는 그 틈에 방을 빠져나갔다. 피터가 거미줄을 쏘려 하자 버키가 그 앞을 막아섰다. 금속 손이 거미줄을 낚아채 끊어 냈다. 그리고 그 손이 피터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피터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금속 주먹이 등 뒤의 콘크리트 벽을 뚫었다. 회색 가루가 폭발하듯 흩날렸다. 피터는 천장으로 뛰어올랐다. 버키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버키 씨! 저예요! 다리 위의 거미요! 시장에서 저 보고 안 무섭다고 했잖아요!" 손은 멈추지 않았다. 금속 손가락이 피터의 발목을 낚아채 천장에서 끌어내렸다. 등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숨이 터져 나가고 등뼈가 비명을 질렀다. 버키가 피터 위에 올라서서 금속 주먹을 들어 올렸다. 피터는 그 주먹을 두 손으로 받아 냈다. 다리 위에서처럼. 그런데 이번엔 다리 위보다 더 셌다. 머릿속의 주문이 막 깨어난 힘이었다. 피터의 팔이 떨렸다. 금속 주먹이 마스크 바로 앞까지 밀고 내려왔다. 금속의 냉기가 마스크 천을 뚫고 느껴졌다. 그 순간 피터는 손에 힘을 주는 대신 입을 열었다. 버키의 비어 있는 눈을 똑바로 보며, 다리 위에서 그랬듯 그 귓가에 이름을 하나씩 다시 적어 넣듯이. "제임스 뷰캐넌 반스! 브루클린 출신! 캡틴 친구! 골목에서 맞던 애를 끌어내 주던 사람! 강물에서 캡틴을 끌어낸 사람! 루마니아에서 공책에 기억 하나씩 적던 사람! 시장에서 자두 사던 사람! 이제 안 죽인다고 했던 사람!" 금속 주먹이 마스크 앞에서 멈췄다. 1센티미터. 버키의 눈이 흔들렸다. 비어 있던 그 바닥에서 무언가가 수면 위로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머릿속의 주문이 그걸 다시 끌어내리고 있었다. 버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금속 주먹이 떨렸다. 내려오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로. 깨진 유리벽 너머에서 방패가 날아들었다. 버키의 등을 정확히 때렸다. 버키가 비틀거리며 피터 위에서 밀려났다. 관제실에서 뛰어내려 온 스티브였다. 스티브가 방패를 받아 들고 버키 앞에 섰다. 버키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은 다시 비어 있었다. 둘이 맞붙었다. 방패와 금속 팔이 부딪힐 때마다 둔한 쇳소리가 방을 울렸다. 스티브는 버키를 쓰러뜨리지 않았다. 막기만 했다. 피터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어폰을 눌렀다. "토니! 제모가 빠져나갔어요! 건물 뒤편이요! 지하 주차장 쪽이요!" [알아! 비전이 쫓고 있어! 근데 정전 때문에 카메라가 다 죽었어! 너는 버키 잡아! 캡이랑!] 버키가 스티브를 밀쳐 내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앞을 막는 경비원들을 금속 팔로 휩쓸며. 피터와 스티브가 그 뒤를 쫓았다. 복도, 비상계단, 그리고 건물의 옥상. 버키가 헬기 착륙장에서 막 이륙하려는 헬리콥터의 다리를 금속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회전 날개가 일으킨 바람이 옥상의 자갈을 쓸어 날렸다. 스티브가 달려들어 반대편 다리를 붙잡았다. 헬리콥터가 두 사람 사이에서 기우뚱 흔들렸다. 피터는 옥상을 가로지르며 거미줄을 쏘았다. 헬리콥터의 꼬리에, 그리고 옥상의 철골에. 헬리콥터가 허공에서 멈췄다. 세 방향에서 붙들린 채, 엔진만 비명을 질렀다. 결국 헬리콥터는 옥상 너머로 기울어 아래의 강물로 떨어졌다. 버키와 함께. 스티브가 망설임 없이 강물로 몸을 던졌고, 피터가 그 뒤를 따랐다. 차가운 강물이 슈트 안으로 스며들었다. 탁한 물속에서 버키의 몸이 가라앉고 있었다. 스티브가 그 몸을 붙잡았다. 피터가 거미줄로 둘을 강둑으로 끌어당겼다. 진흙투성이의 강둑 위로 버키가 쓰러졌다. 의식이 없었다. 스티브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쉬었다. 워싱턴의 강가에서와 꼭 반대였다. 이번엔 스티브가 버키를 끌어냈다. 강둑의 진흙 위에서 피터는 버키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맥을 짚었다. 느렸지만 분명했다. 스티브가 버키의 젖은 머리칼을 이마에서 걷어 내며 숨을 몰아쉬었다. 멀리서 헬리콥터와 사이렌이 몰려오고 있었다. 샘이 하늘에서 내려와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여기 있으면 다 잡힌다고, 외곽에 숨을 데가 있다고. 스티브가 버키를 어깨에 들쳐 멨다. 피터는 그 반대편에서 버키의 금속 팔을 붙잡아 무게를 나눴다. 차갑고 무거운 팔이었다. 1센티미터 앞에서 멈췄던 그 주먹이 지금은 힘없이 늘어져 피터의 어깨에 기대 있었다. 창고에 도착한 뒤, 피터는 바이스에 물린 버키의 금속 팔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버키는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피터는 주머니에서 마른 손수건을 꺼내 그 이마의 물기를 닦았다. 스티브가 맞은편에서 그걸 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다리 위에서도 그랬나. 이렇게." "…아뇨. 다리 위에서는 등에 매달려 있느라 닦아 드리지 못했어요. 목 조르는 줄 알았대요." 스티브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버키의 다른 손을 붙잡았다. 금속이 아닌 손을. 70년 전 브루클린의 병실에서 열병을 앓던 자기 손을 이 사람이 붙잡아 주었던 것처럼. 버키가 눈을 뜬 건 베를린 외곽의 버려진 창고 안이었다. 깨진 창문으로 오후의 빛이 먼지와 함께 비스듬히 들어왔다. 버키의 금속 팔은 녹슨 바이스에 물려 있었다. 혹시 몰라서. 버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스티브를 보았다. 그 눈은 비어 있지 않았다. 지쳐 있었고,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버키?" "…너희 엄마 이름 사라였지. 신발 안에 신문지 넣고 다녔고." "…신문지 얘기는 책에 안 나와." 스티브의 목소리가 떨렸다. 웃음이 섞여 있었다. 피터는 창고의 녹슨 기둥에 기대 둘을 보았다. 돌아왔다. 숨이 길게 빠져나갔다. 버키가 고개를 돌려 피터를 보았다. 젖은 머리칼 아래의 지친 눈으로. "…거미. 아까 내 이름 불렀지. 다 기억나. 주먹 바로 앞에서 그거 들었어. 근데 못 멈췄어. 미안하다." "…멈추셨어요. 1센티미터 앞에서요. 그거면 충분해요." 버키가 그 말에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스티브를 보며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상담사가 머릿속에서 무엇을 물었는지. 시베리아의 기지, 그 안에 잠들어 있는 다른 병사들. 자기와 같은 실험을 받은 이들. 그 남자가 그들을 깨우려 한다고. 스티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샘이 욕설을 내뱉었다. 피터는 기둥에 기댄 채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원래 세계의 이야기 속에서 그 병사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제모가 먼저 가서 모두 죽였다. 제모가 시베리아에서 원한 건 병사들이 아니었다. 영상 하나였다. 1991년 12월의 밤, 눈 내리는 도로. 그리고 그걸 토니에게 보여 주는 것. 피터는 그걸 알았다. 그리고 아직 토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런던에서 미뤘고, 빈에서 미뤘고, 이번엔 토니가 직접 미뤘다. 이 일 끝나고. 그런데 이 일의 끝이 바로 그 영상이었다. 창고의 깨진 창가에서 샘이 피터를 손짓해 불렀다. 피터가 다가가자 샘은 날개 장비의 끈을 고쳐 매며 버키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쟤가 너 덕분에 돌아왔다며. 다리 위에서부터." "…다들 같이 한 거예요." "겸손 떨지 마. 워싱턴 재향군인 센터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나? 그림자 말고 그 사람을 보라고. 라일리 얘기 하면서." "…기억해요." "넌 저 사람을 처음부터 그렇게 봤더라. 다들 겨울 군인이라는 그림자만 볼 때. 그게 제일 어려운 거야. 솔직히 난 아직도 저 녀석이 좀 무서워." 샘이 그렇게 말하며 버키를 흘끗 보았다. 버키가 그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샘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버키도. 피터는 그 둘을 보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원래 세계에서 이 둘은 나중에 서로 투덜거리며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시작이 지금 이 어색한 헛기침이라는 걸 피터는 알았다. 스티브가 일어서며 말했다. 시베리아로 가야 한다고. 지금, 그 병사들이 깨어나기 전에. 샘이 고개를 끄덕였다. 버키도 바이스에 물린 팔을 비틀며 일어서려 했다. 스티브가 피터를 돌아보았다. "…피터. 시베리아에 뭐가 있지. 자네 얼굴 보니까 병사들 얘기가 다가 아닌 것 같은데." "…병사들은 이미 죽어 있어요. 그 사람이 먼저 가서요. 그 사람이 시베리아에서 원하는 건 다른 거예요." "다른 거." "…토니한테 제일 아픈 거요. 토니가 꼭 먼저 알아야 하는 거요. 캡틴보다, 버키 씨보다 먼저요." 스티브가 피터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버키를 보았다. 버키가 그 시선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고개를 숙였다. 버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언가가 떠오른 얼굴이었다. 1991년의 무언가가. 스티브는 버키와 피터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꺼내 토니의 이름을 눌렀다. "스타크. 시베리아로 가야 해. 근데 그 전에. 피터가 자네한테 할 말이 있대. 우리가 떠나기 전에 들어야 하는 거래. 약속대로, 따로 정하기 전에." 수화기 너머가 한참 조용했다. 피터는 그 침묵을 들으며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리고 토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낮고, 이상하리만큼 차분한 목소리였다. […알았어. 근데 지금은 안 돼, 캡. 국무장관이 방금 너희 전부 체포하래. 36시간 안에. 안 그러면 나도 체포래. 너희 지금 공항으로 가는 거 알아. 거기서 보자. 그리고 피터. 거기서 들을게. 그 얘기.] 전화가 끊겼다. 피터는 녹슨 기둥을 붙잡은 채 서 있었다. 깨진 창으로 들어온 빛 속에서 먼지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공항. 원래 세계의 그 활주로. 두 편이 서로를 향해 날아들던. 그리고 그 하늘에서 로디가 떨어지던. 이번엔 그 활주로에서 들려줘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1991년 12월의 밤. 그리고 지켜야 할 하늘이 있었다. 피터는 숨을 들이켰다. 둘 다였다. 이번엔 둘 다. 라이프치히의 공항은 텅 비어 있었다. 정부가 반나절 동안 모든 항공편을 막아 둔 탓이었다. 끝없이 이어진 회색 활주로 위로 오후의 햇살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지평선을 물결처럼 일그러뜨렸다. 관제탑의 유리창은 텅 빈 채 하늘만 비추고 있었다. 격납고 앞에는 퀸젯 한 대가 날개를 접고 웅크려 있었다. 바람이 활주로를 가로지르며 아스팔트 틈새의 마른 풀을 흔들었다. 피터는 격납고 지붕 위에 웅크린 채 그 퀸젯을 내려다보았다. 원래 세계의 이야기 속에서, 이 활주로는 두 편이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전장이 되었다. 새벽에 토니가 피터를 작업실로 불렀다. 베를린의 임시 숙소, 창밖이 아직 남색이던 시간이었다. 토니는 작업대에 걸터앉아 커피잔을 쥔 채 피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 밑이 검게 꺼져 있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않은 얼굴이었다. "국무장관이 36시간 줬어. 그 안에 캡이랑 버키 잡아 오래. 안 그러면 나도 같이 감옥이래. 그리고 와칸다 왕은 국무장관 말 안 들어. 버키 잡을 때까지 혼자서라도 쫓을 거래." "…알아요." "원래 세계에서는 이 공항에서 다 같이 싸웠다며. 우리 편이랑 캡 편이랑 갈라져서." "…네. 진짜로요. 다들 다쳤어요. 로디 씨는… 로디 씨는 하늘에서 떨어져서 다시는 걷지 못했어요." 토니의 손에서 커피잔이 멈췄다. 토니는 한참 그 잔 속을 내려다보았다. 식은 커피의 표면에 작업실의 형광등이 하얗게 떠 있었다. "…로디가. 걷지 못해." "네. 비전의 빛줄기가 빗나가서요. 샘 씨를 노린 건데 로디 씨 아머를 맞혔어요. 아머가 꺼졌고, 그대로 떨어졌어요. 토니가 쫓아갔는데 늦었어요." "……" "그 얘기도 목록에 넣으려다 못 넣었어요. 토니가 그날 로디 씨 옆에 무릎 꿇고 있던 얼굴이, 너무 생생해서요." 토니는 커피잔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피터를 보았다. 그 눈에 무언가가 단단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진짜로 싸우지 말자. 캡이랑 얘기 끝냈어. 어젯밤에. 우리 편은 싸우는 척만 해. 캡이랑 버키가 퀸젯 타고 빠져나갈 시간만 벌어 주는 거야. 국무장관 눈앞에서 최선을 다했는데 놓친 걸로. 그리고 시베리아에는 내가 따로 간다. 캡이 먼저 가 있고, 나는 국무장관 따돌리고 뒤따라가고." "…로디 씨는요?" "로디는 몰라. 알면 안 돼. 로디는 군인이야. 명령 받으면 진짜로 막으려고 할 거야. 그래서 네가 필요해. 로디 옆에 붙어 있어. 그 빛줄기가 오면, 그 하늘에서 로디를 받아."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가 작업대에서 내려와 피터 앞에 섰다. 그리고 피터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을음이 다 씻기지 않은 손이었다. "그리고 그 얘기. 공항에서 들을게. 아니, 공항 끝나고. 캡 떠나고, 시베리아 가기 전에. 거기서 다 들을게. 그게 시베리아랑 이어져 있다며." "…네. 시베리아랑 이어져 있어요. 그래서 토니가 거기 가기 전에 꼭 들으셔야 해요." "그럼 그때. 이번엔 진짜 안 미뤄." 활주로 끝에서 바람이 방향을 바꿨다. 피터는 격납고 지붕 위에서 이어폰을 눌렀다. 토니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이미 하늘 위였다. [다들 위치. 로디는 관제탑 위. 나타샤는 격납고 앞. 비전은 상공. 와칸다 왕은… 와칸다 왕은 아무 데나 있어. 저 사람 말 안 들어. 피터, 너는 로디 옆.] "…네. 관제탑으로 갈게요." 피터는 격납고 지붕을 박차고 관제탑 쪽으로 거미줄을 쏘았다. 활주로 위의 뜨거운 공기를 가로질러 관제탑의 유리벽에 달라붙었다. 탑의 꼭대기에 은빛 아머가 서 있었다. 로디가 투구를 열고 피터를 내려다보았다. "꼬마. 너 왜 여기 있어. 토니가 너는 뒤에 있으라고 했을 텐데." "…토니가 로디 씨 옆에 있으래요." "내 옆에? 왜." "…오늘 하늘이 좀 위험할 것 같아서요." 로디가 피터를 오래 보았다. 열린 투구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어이없다는 듯 일그러지더니, 이내 웃음으로 풀렸다. 로디는 웃으며 투구를 다시 닫았다. "토니 녀석은 너만 보면 과잉보호야. 알지?" 피터는 그 말에 웃지 않았다. 대신 관제탑 꼭대기의 철골을 붙잡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었다. 원래 세계의 그 하늘도 이렇게 맑았다. 활주로 반대편 끝에서 승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씩 내렸다. 스티브. 버키. 샘. 활을 멘 클린트. 붉은빛을 손끝에 감은 완다. 그리고 바람처럼 그 옆에 멈춰 선 피에트로. 마지막으로 낯선 남자 하나가 쭈뼛거리며 내렸다. 헐렁한 점퍼에, 헬멧을 옆구리에 낀. 피터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숨이 걸렸다. 원래 세계에서 이 남자는 이 활주로에서 빌딩만큼 커졌다. 그리고 토니의 동료들을 한 번에 쓰러뜨렸다. [저거 누구야. 헬멧 든 사람.] "…스콧 랭이요. 몸을 작게, 아니 크게 만들 수 있어요. 아주 크게요. 오늘 그거 할 거예요." [얼마나 크게.] "…관제탑만 하게요." […좋은 거 하나 배웠다. 캡이 친구를 잘 데려왔네.] 활주로 한가운데에서 두 편이 마주 섰다. 원래 세계와 똑같은 거리를 두고. 토니가 하늘에서 내려와 스티브 앞에 섰다. 투구를 열었다. 국무장관이 어딘가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을 것이다. 위성으로, 관제탑의 카메라로. 토니는 그걸 알고, 원래 세계의 그날처럼 날 선 목소리로 외쳤다. "캡! 그만해! 버키 넘기고 같이 돌아가자! 아직 늦지 않았어!" "미안하네, 스타크. 이번엔 못 해." 둘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런데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토니의 숨은 차분했다. 연기였다. 피터는 그걸 알았다. 그리고 활주로의 다른 누구도 그걸 모른다는 것도. 스티브가 방패를 들었다. 토니가 투구를 닫았다. 그리고 두 편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싸움은 요란했다. 방패가 날아가고, 화살이 꽂히고, 붉은빛이 터졌다. 그런데 피터는 관제탑 위에서 그 싸움을 내려다보며 알아차렸다. 토니의 빔은 매번 스티브의 발끝 한 뼘 앞에서 터졌다. 스티브의 방패는 매번 토니의 아머가 아니라 그 옆의 빈 공간을 갈랐다. 나타샤는 클린트와 맞붙으며 일부러 한 걸음씩 늦게 움직였다.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싸움. 피에트로가 바람처럼 활주로를 가로지르며 피터 쪽을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흔들었다. 다음 판, 이라는 입 모양과 함께. 싸움이 한창일 때 피에트로가 바람처럼 관제탑 아래를 스쳐 지나가다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관제탑 위의 피터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스파이더맨! 너 진짜 안 내려올 거야? 이거 싸우는 척하는 거라며! 나 심심해!" "…피에트로 씨, 지금 국무장관이 위성으로 보고 있어요!" "그러니까 더 그럴듯하게 해야지! 내려와서 나 한 번만 잡아 봐! 시합이라고 치고!" 피에트로가 그렇게 외치며 피터의 발밑에서 원을 그리며 달렸다. 은빛 바람이 관제탑 주위를 세 바퀴 돌았다. 로디가 투구 너머로 그걸 내려다보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녀석은 전쟁을 운동회로 아나 보다." 피터는 웃음을 참으며 거미줄 한 가닥을 피에트로의 발치에 쏘았다. 피에트로가 그걸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1점! 내가 1점!" 그리고 다시 은빛 바람이 되어 활주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마른 풀잎들이 한꺼번에 눕혔다 일어섰다. 피터는 그 풀잎들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삼켰다. 그런데 그 연극 속에 연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둘 있었다. 하나는 검은 옷의 왕이었다. 티찰라는 처음부터 버키만 노렸다. 발톱이 버키의 금속 팔에 불꽃을 튀기며 부딪혔다. 버키는 피하기만 했다. 반격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로디였다. 로디는 명령대로, 진짜로 스티브 편을 막고 있었다. 퀸젯 쪽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은빛 아머가 내려앉았다. 샘이 하늘에서 로디를 막아섰고, 공군과 공군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리고 활주로 한가운데에서 헐렁한 점퍼의 남자가 헬멧을 썼다. 버튼 하나를 눌렀다. 남자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순식간에. 관제탑만 하게. 거대한 그림자가 활주로를 덮었다. 피터는 그 그림자 아래에서 고개를 들었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저 거인의 다리에 거미줄을 감아 쓰러뜨렸다. 열다섯 살의 피터가, 영화에서 본 방법이라며 신이 나서.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거인이 일으킨 혼란이 스티브와 버키를 퀸젯으로 보낼 틈이 되어야 했으니까. 거대한 발이 활주로를 짓밟으며 격납고 쪽으로 걸어갔다. 그 그림자 아래로 스티브와 버키가 퀸젯을 향해 달렸다. 티찰라가 그 뒤를 쫓았다. 피터는 관제탑에서 거미줄을 쏘아 티찰라의 앞길에 그물을 엮었다. 티찰라가 그물에 걸려 멈칫했다. 가면 너머의 눈이 관제탑의 피터를 노려보았다. 그 반 박자 사이에 스티브와 버키가 퀸젯의 해치 안으로 뛰어들었다. 퀸젯의 엔진이 깨어나며 낮게 포효했다. [로디! 퀸젯 막아! 저거 놓치면 끝이야!] 이어폰 너머에서 누군가 외쳤다. 국무장관 쪽의 지휘관 목소리였다. 로디가 하늘에서 몸을 틀어 퀸젯 쪽으로 날았다. 샘이 그 뒤를 쫓았다. 은빛 아머와 은빛 날개가 활주로 위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피터는 관제탑의 철골을 박차고 그 둘을 따라 몸을 날렸다. 거미줄을 쏘고, 놓고, 다시 쏘았다. 활주로의 열기가 마스크 안으로 차올랐다. 저 하늘이었다. 지금이었다. [비전! 샘 막아! 퀸젯 엔진 쏴!] 하늘 높은 곳에서 비전이 이마의 보석에 손을 댔다. 노란 빛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샘을 향해. 샘이 날개를 접으며 급강하했다. 빛줄기가 샘이 있던 자리를 지나, 그 뒤의 은빛 아머를 정확히 꿰뚫었다. 로디의 가슴판이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아머의 불꽃이 꺼졌다. 추진기가, 손바닥의 빛이, 투구의 눈구멍이 한꺼번에. 은빛 아머가 하늘 한가운데에서 멈췄다. 그리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토니의 비명이 이어폰을 찢었다. 피터는 그 비명을 들으며 이미 공중에 있었다. 떨어지는 은빛 아머와 피터 사이의 거리. 바람이 귓가에서 울부짖었다. 피터는 손목을 뻗어 활주로 옆 관제 철탑에 거미줄을 걸었다. 그 반동으로 몸을 던졌다. 아래로. 은빛 아머보다 더 빨리. 원래 세계에서 토니는 이 하늘에서 늦었다. 손이 닿기 직전에 아머가 땅에 부딪혔다. 피터는 그 소리를 기억했다. 금속이 아스팔트를 찢는, 둔하고 끔찍한 소리. 피터는 은빛 아머의 아래로 파고들었다. 두 손목에서 동시에 거미줄을 쏘았다. 하나는 은빛 아머의 가슴판에, 하나는 관제 철탑의 꼭대기에. 거미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피터의 두 팔이 뽑혀 나갈 것 같았다. 수백 킬로그램의 아머가 피터의 팔에 매달려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낙하가 늦춰졌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활주로가 무섭게 다가왔다. 피터는 이를 악물고 세 번째 거미줄을 쏘았다. 격납고의 지붕에. 네 번째. 퀸젯이 떠난 자리의 견인차에. 거미줄 넷이 허공에서 그물처럼 은빛 아머를 받아 냈다. 아머가 활주로 바로 위, 피터의 키 두 배쯤 되는 높이에서 흔들리며 멈췄다. 피터는 그 아래에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두 팔이 덜덜 떨렸다. 머리 위에서 은빛 아머가 거미줄에 매달려 천천히 흔들렸다. 그 안에서 신음 소리가 났다. 살아 있는 사람의 신음이었다. 하늘에서 붉은 아머가 내리꽂혔다. 토니였다. 토니가 피터 옆에 내려서자마자 투구를 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미줄에 매달린 은빛 아머를. 그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로디. 로디!" […토니. 나 괜찮아. 아니, 갈비뼈 몇 개는 안 괜찮은 것 같은데. 근데 다리는 움직여. 발가락도. 꼬마가 받았어. 꼬마가.] 토니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머째로. 피터 옆에. 그리고 피터를 돌아보았다. 젖은 눈으로. 토니가 피터의 떨리는 팔을 붙잡았다. 아머의 장갑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받았네. 네가." "…네. 받았어요. 원래 세계에서는 토니가 늦었어요. 이번엔 제가 먼저 가 있었어요. 토니가 저한테 반 박자 먼저 가 있겠다고 했던 것처럼요." "……" "로디 씨 걸을 수 있어요. 발가락 움직인대요." 토니가 피터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머째로. 차가운 판금이 피터의 볼에 닿았다. 그런데 그 너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토니가 피터의 머리 위에 뺨을 얹은 채 아주 작게 말했다. "목록에 없던 거였어. 네가 혼자 기억하고 있던 거. 그걸 혼자 지켰네." "…혼자 아니었어요. 토니가 시간 벌어 줬고, 스콧 씨가 하늘을 어지럽혔고, 샘 씨가 날개를 접었어요. 다 같이 한 거예요." 하늘 높은 곳에서 비전이 천천히 내려왔다. 활주로 위에 착지해, 거미줄에 매달린 은빛 아머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처음 보는 표정이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비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실수입니다. 샘 씨를 노렸는데. 계산이… 계산이 틀렸습니다. 피터 씨가 아니었으면 저는 로디 씨를…" "비전. 괜찮아요. 아무도 안 다쳤어요. 갈비뼈만요." "…피터 씨는 알고 계셨습니까. 제가 빗나갈 거라는 걸." "…네. 그래서 로디 씨 옆에 있었어요." 비전이 피터를 오래 보았다. 이마의 노란 보석이 활주로의 햇살 속에서 희미하게 떨렸다. 그리고 비전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개인적인 소견을 덧붙이자면, 저는 오늘 처음으로 무언가를 잃을 뻔하다는 게 어떤 건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막아 주신 분께 어떻게 고마워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피터는 그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토니도 피터를 안은 채 젖은 웃음을 터뜨렸다. 7년 동안 천장에서 개인적인 소견을 덧붙이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배운 날이었다. 활주로 저편에서 퀸젯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엔진의 불꽃이 길게 꼬리를 그리며 북동쪽으로. 시베리아로. 그 해치가 닫히기 직전, 스티브가 활주로를 내려다보며 손을 들어 보이는 게 보였다. 그 옆에서 버키가 고개를 숙였다. 피터를 향해. 퀸젯이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활주로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거인이 다시 작아져 헬멧을 벗고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았다. 클린트가 활을 내려놓았다. 완다가 피에트로의 어깨에 기댔다. 나타샤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티찰라만이 퀸젯이 사라진 하늘을 오래 노려보고 있었다. 버키를 놓친 분노가 그 등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터는 그 등을 보았다. 시베리아에서, 저 사람에게 증거를 보여 줘야 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토니에게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토니가 피터를 품에서 놓았다. 그리고 거미줄에 매달린 로디를 비전과 함께 조심스럽게 내렸다. 로디가 활주로 위에 누운 채 투구를 열고 피터를 올려다보았다. 땀에 젖은 얼굴이 아프게 웃고 있었다. "…꼬마. 너 오늘 하늘이 위험할 것 같다고 했지." "…네." "다음에 그런 말 하면 이유도 같이 말해. 갈비뼈 부러지고 나서 이유 듣는 건 좀 억울하다." 피터는 그 말에 웃었다. 로디도 웃다가 갈비뼈를 움켜쥐었다. 의료진이 달려왔다. 토니가 로디의 손을 한 번 꽉 쥐고 의료진에게 넘겼다. 그리고 피터를 돌아보았다. 활주로의 열기 속에서, 토니의 얼굴이 이상하게 차분했다. "…캡 떠났어. 시베리아로. 이제 내 차례야. 근데 그 전에." "…네." "그 얘기. 지금 해. 여기서. 이번엔 진짜 안 미뤄." 피터는 숨을 들이켰다. 활주로의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아스팔트 틈새의 마른 풀이 흔들렸다. 런던의 성당에서, 빈의 연기 속에서, 베를린의 유리벽 앞에서 미뤄 온 이야기. 1991년 12월의 밤. 피터는 토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타샤가 일러 준 대로, 그 이야기의 첫마디를 꺼내기 전에 먼저 부탁했다. "…믿어 주세요. 다 듣고 나서도요." 격납고 안은 서늘했다. 바깥 활주로의 열기가 거짓말처럼, 높은 철골 천장 아래의 그늘은 기름 냄새와 금속 냄새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빈 정비대 위에 공구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고, 열린 대형 문 너머로 오후의 햇살이 활주로를 하얗게 태우고 있었다. 의료진이 로디를 들것에 싣고 떠난 뒤였다. 다른 사람들은 활주로 저편의 승합차 근처에 모여 있었다. 피터와 토니만 격납고 안에 남았다. 격납고로 들어서기 직전, 나타샤가 활주로 끝에서 피터를 흘끗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입 모양만 만들었다. 믿어 달라는 말부터. 피터는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나타샤는 그걸 확인하고는 다른 사람들을 승합차 쪽으로 몰고 갔다. 격납고 근처에 아무도 오지 않도록. 피터는 그 등을 보며 숨을 골랐다. 런던의 성당 계단에서 건네받은 그 조언이, 지금 이 격납고 앞까지 피터를 데려다준 것 같았다. 토니는 아머를 벗어 정비대 옆에 세워 두었다. 땀에 젖은 셔츠 차림이었다. 정비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피터를 보고 있었다. 피터는 그 앞에 서 있었다. 토니의 손은 아직 피터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활주로에서부터 놓지 않은 손이었다. 믿어 주세요. 다 듣고 나서도요. 그 말에 토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피터의 손을 쥔 손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1991년 12월 16일이요." 피터의 첫마디가 격납고의 높은 천장으로 흩어졌다. 토니의 손이 피터의 손 안에서 굳었다. 그 날짜를 토니는 알았다. 세상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해마다 그날이면 작업실에 틀어박혀 아무도 들이지 않던 날. 피터는 그 손이 굳는 걸 느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다시는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날 밤, 토니 부모님 차가 롱아일랜드의 도로에서 사고가 났다고 알고 계시잖아요. 아버님이 술 마시고 운전하셨다고. 근데 아니었어요. 사고가 아니었어요. 그 차 트렁크에 아버님이 만드신 게 있었어요. 슈퍼 솔저 혈청이요. 캡틴을 만들었던 그거요. 하이드라가 그걸 원했어요. 그래서 사람을 보냈어요. 그 차를 멈추게 하고, 혈청을 가져오라고." "……" "그 사람이요. 하이드라가 보낸 그 사람이… 버키 씨였어요. 머릿속을 지우고 주문을 걸어서 보낸 버키 씨요. 겨울 군인이라고 불리던 시절의 버키 씨요." 토니의 손이 피터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천천히. 피터는 그 손이 빠져나가는 걸 막지 못했다. 토니가 정비대 모서리에서 일어섰다. 피터를 보지 않았다. 격납고의 열린 문 너머, 퀸젯이 사라진 하늘을 보았다. 시베리아 쪽 하늘을. "…버키가." "네." "우리 아버지를. 우리 엄마를." "…네. 아버님은 차에서 끌려 나와서요. 어머님은… 어머님은 차 안에서 아버님 이름을 부르고 계셨어요. 그 사람이 어머님한테도 갔어요. 그리고 사고처럼 보이게 만들었어요. 차를 나무에 박아 놓고, 혈청을 들고 떠났어요." 격납고 안이 조용해졌다. 바깥에서 바람이 활주로를 쓸고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토니는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땀에 젖은 셔츠가 등에 들러붙어 있었다. 그 등이 아주 조금 떨렸다. 피터는 그 등을 보며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모라는 그 사람이 시베리아에서 원하는 게 그거예요. 그날 밤의 영상이요. 하이드라 기지에 그 영상이 남아 있어요. 그 사람은 그 영상을 토니한테 보여 주려고 해요. 캡틴이랑 버키 씨가 있는 자리에서요. 그 세계에서 토니는 그 영상을 봤어요. 그리고… 그리고 무너졌어요. 버키 씨한테 달려들었어요. 캡틴이 버키 씨를 지켰고요. 둘이 싸웠어요. 마지막에 캡틴이 방패로 토니 가슴의 원자로를 내리찍었어요. 그리고 버키 씨를 데리고 떠났어요. 토니 혼자 시베리아의 얼음 위에 남겨 두고요." "……" "그 뒤로 둘은 몇 년 동안 말을 안 했어요. 타노스가 올 때까지요. 그때 둘이 갈라져 있어서 막지 못했어요. 그 모든 게, 그 영상 하나에서 시작됐어요." 토니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피터의 숨이 걸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하얀 얼굴 위에서 두 눈만 붉게 타고 있었다. 분노였다. 피터가 7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토니가 피터를 보았다. 그 눈이 피터를 꿰뚫었다. "…그것도 알았어? 처음부터?" "…네." "7년 동안. 동굴에서도. 사막에서도. 우리 집에서 아버지 필름 볼 때도. 페기 이모 장례식 가는 비행기에서 내가 엄마 피아노 얘기 할 때도. 알았어?" "…네. 알았어요." "하나도 안 빼고 다 말한다며. 지붕 위에서. 그 사람 5년이랑 사진이랑, 나타샤랑 비전이랑 캡의 춤까지 다 말하면서. 이건 왜 뺐어." 토니의 목소리가 격납고의 철골 천장에 부딪혀 울렸다. 높지 않았다. 오히려 낮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피터는 그 눈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박람회장의 지붕에서 외벽을 타고 도망쳤던 것처럼. 그런데 벤의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무슨 얼굴을 하든 도망치지 마. 피터는 발바닥에 힘을 주고 그 자리에 섰다. "…버키 씨를 미워하게 될까 봐요." "……" "토니가 그 얘기 들으면, 버키 씨를 미워할 거잖아요. 당연히요. 근데 버키 씨는 그때 자기가 아니었어요. 머릿속을 지우고 주문을 걸어 놓은 기계였어요. 저는 그걸 다리 위에서 봤어요. 은행 금고의 그 의자에서요. 그 사람들이 버키 씨 머릿속을 지우는 걸 천장에서 봤어요. 비명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토니가 버키 씨를 미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 세계처럼요." "…그래서 나한테 숨겼어. 버키 지키려고." "아니에요. 토니를 지키려고요." 피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격납고의 철골들이 물속처럼 일렁였다. 피터는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앞에서 피터는 다시 입을 열었다. "……" "그 세계에서 토니가 그 영상 보고 어땠는지 알아요. 시베리아에서 돌아오고 나서요. 저는 그때 퀸즈에 있었는데, 나중에 알았어요. 토니가 몇 달 동안 아무도 안 만났다는 거. 작업실에서 안 나왔다는 거. 부모님을 두 번 잃은 거라고요. 한 번은 1991년에, 한 번은 그 영상에서. 그리고 그 영상 속에서 어머님 목소리를 들었대요. 아버님 이름 부르는. 그게 평생 귀에서 안 떠났대요." "……" "그래서 언제 말해야 할지 몰랐어요. 7년 동안 매번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토니가 행복해 보일 때는 그 얼굴을 깨고 싶지 않았고, 토니가 힘들어 보일 때는 더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7년이 지났어요. 미안해요. 이건 제가 숨기면 안 되는 거였어요. 토니 부모님 얘기니까요. 제가 정할 게 아니었어요." 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터를 오래 보았다. 그 눈의 붉은빛이 천천히 젖어 들었다. 그리고 토니가 정비대를 짚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 손 아래에서 숨이 걸리기 시작했다. 피터가 다가가려 하자 토니가 한 손을 들어 막았다. 베를린의 그 하얀 복도에서처럼. 피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잠깐만. 잠깐만 있어 줘. 거기서." "……" "25년이야. 25년 동안 아버지를 미워했어. 술 마시고 운전대 잡은 사람이라고. 엄마를 죽인 게 아버지라고. 장례식에서도 안 울었어. 화가 나서. 그 사람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근데 아니었어. 아버지는 그 차에서 끌려 나와서 죽은 거야. 엄마는 아버지 이름을 부르면서 죽은 거고. 나는 25년 동안 엉뚱한 사람을 미워했어." 토니의 목소리가 손바닥 아래에서 부서졌다. 피터는 그 자리에 선 채로 토니를 보았다. 다가가지 못했다. 토니가 막았으니까. 그런데 멀어질 수도 없었다. 피터는 그 거리에 선 채 숨을 쉬지 못했다. 원래 세계의 토니는 이 사실을 시베리아의 얼음 위에서, 영상 한 편으로, 버키의 얼굴 앞에서 한꺼번에 알았다. 이 세계의 토니는 격납고의 차가운 바닥 위에서, 피터의 목소리로 알았다. 어느 쪽이 덜 아픈지 피터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번엔, 그 자리에 버키도 스티브도 없었다. 방패도 없었다. 토니가 무너져도 아무도 다치지 않을 자리였다. 한참 뒤 토니가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젖은 얼굴이었다. 격납고의 열린 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그 얼굴의 반쪽만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토니가 바닥에 앉은 채, 그 빛 속에서 피터를 올려다보았다. "…페기 이모가 그랬다며.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내 자랑을 했다고." "…네. 캡틴이 그러셨어요." "그 술. 아버지가 그날 밤에도 마셨을까. 내 자랑 하면서." "…모르겠어요. 근데 그날 밤 그 차 안에서, 어머님이 아버님한테 그러셨대요. 토니가 크리스마스에 집에 오면 잘해 주라고. 그 애는 당신을 닮아서 표현을 못 하는 거라고." 토니의 숨이 멎었다. 피터는 그 말을 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 세계에서 토니가 그 영상을 보기 전, 오래전에 지나가듯 들려준 이야기였다. 부모님의 마지막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피터는 그 말을 7년 동안 품고 있었다. 이 사람에게 언젠가 돌려줘야 할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토니가 바닥에 앉은 채 웃었다. 울면서. 그 웃음이 격납고의 철골 천장에 부딪혀 흩어졌다. 토니가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표현을 못 해. 그래. 이 집 남자들은 다 그래. 나도 25년 동안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 못 한 거 후회했는데. 아버지도 나한테 못 한 거였네." "……" "피터. 이리 와." 피터는 그 말에 다가갔다. 토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토니가 피터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아까보다 세게.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화났어. 진짜로. 네가 7년 동안 이걸 혼자 들고 있었다는 게. 나한테 말 안 했다는 게. 페기 이모 장례식 가는 비행기에서 내가 엄마 피아노 얘기 할 때, 네가 그 얼굴로 내 손 잡았던 거.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근데 화가 나는 게 너한테인지, 그 놈들한테인지, 나한테인지 모르겠어. 아마 다일 거야." "…네." "그리고 하나 더. 네 말이 맞아. 이건 네가 정할 게 아니었어. 근데 네가 혼자 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도 나야. 7년 동안 너한테 안 물었으니까. 기다린다면서, 네가 혼자 무거운 거 들고 있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으니까." 피터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토니가 피터의 손을 쥔 손에 힘을 주어 그 말을 막았다. "그러니까 반반이야. 화난 것도. 미안한 것도. 지금 당장은 너 얼굴 똑바로 보기 좀 힘들어. 솔직히 말하면. 근데 피터." "…네." "시베리아에는 같이 가. 그 영상, 볼 거야. 끝까지. 25년 동안 잘못 미워한 거, 제대로 보고 끝낼 거야. 근데 혼자 보면 나 그 세계의 나처럼 될 것 같아. 그러니까 네가 옆에 있어. 내 손 잡고. 내가 버키한테 달려들려고 하면, 그때 날 붙잡아. 네 거미줄로든, 네 손으로든." "…붙잡을게요. 꼭요." "그리고 그 영상 다 보고 나서. 그때 화낼게. 너한테. 제대로. 지금 낼 화는 시베리아까지 아껴 둘게." 토니가 웃었다. 젖은 얼굴로, 아주 작게. 웃음이라기보다 숨에 가까운. 피터는 그 웃음 앞에서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데 무너지지 않았다. 토니가 손을 놓지 않았으니까. 화가 나서 피터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면서도, 그 손만은 놓지 않았으니까. 격납고의 열린 문 너머에서 비전이 걸어 들어왔다. 둘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바닥에 앉은 토니와, 그 앞에 무릎 꿇은 피터와, 맞잡은 두 손을. 비전은 한참 둘을 보다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와칸다의 왕께서 퀸젯의 항로를 추적하고 계십니다. 시베리아로 가실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국무장관께서 스타크 씨를 찾으십니다. 36시간 중에 30시간이 남았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와칸다 왕이 시베리아에." "네. 혼자 가실 모양입니다. 버키 씨를 쫓아서요." 토니가 피터를 보았다.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왕도 그 영상을 봐야 했다. 아버지를 죽인 진짜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일을 꾸몄는지. 빈에서 증거를 가져오라던 그 눈이 시베리아에서 그 증거를 보게 될 것이다. 비전이 돌아간 뒤에도 토니는 한동안 바닥에 앉아 있었다. 격납고의 열린 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정비대 위의 공구들을 달그락거리게 했다. 토니는 그 소리를 듣다가, 피터를 보지 않은 채 물었다. "…버키는. 그 사람은 기억해? 그날 밤을." "…네. 기억해요. 주문이 풀리고 나서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해요. 자기가 한 일을요. 그 세계에서 버키 씨는 그 기억 때문에 오랫동안 스스로를 얼음 속에 가뒀어요. 다시 누군가를 해칠까 봐요." "……" "원래 세계에서 버키 씨는 그 일을 토니한테 사과하지 못했어요. 시베리아에서 그럴 틈이 없었거든요. 아마 이번엔, 그 사람이 먼저 무릎 꿇을 거예요." 토니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무릎에 손을 짚은 채 오래 숨을 골랐다.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피터가 세어 주지 않아도, 토니는 혼자서 그 숫자를 세고 있었다. 토니가 정비대를 짚고 일어섰다. 피터를 끌어 일으켰다. 그리고 정비대 옆의 아머를 향해 손목을 들었다. 판금들이 하나씩 날아와 토니의 몸에 맞물렸다. 마지막으로 투구가 닫히기 직전, 토니가 피터를 보았다. 아직 붉은 눈이었다. 그런데 그 눈이 피터를 피하지 않고 있었다. "가자. 시베리아. 거기서 그 영상 보고, 그 놈 잡고, 그 왕한테 증거 보여 주고. 그리고 돌아와서 퀸즈에서 저녁 먹자. 그게 우리 규칙이잖아." "…네. 그리고 그때 화내세요. 저한테. 제대로요." "그래. 메이 씨 수프 먹으면서 낼게. 짜게." 투구가 닫혔다. 붉은 아머의 눈구멍에 푸른빛이 켜졌다. 피터는 그 빛을 보며 숨을 내쉬었다. 7년 동안 품고 있던 마지막 하나를 내려놓았다.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게가 이제 둘의 손 사이에 놓여 있었다. 반반씩. 화도, 미안함도. 피터는 그 무게가 반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붙든 채, 붉은 아머를 따라 격납고 밖의 하얀 햇살 속으로 걸어 나갔다. 북동쪽 하늘이 아득하게 푸르렀다. 그 끝에 얼음과 눈의 땅이 있었다. 시베리아로 가는 하늘은 길었다. 토니는 피터를 품에 안은 채 구름 위를 날았다. 아래로 끝없는 회색 구름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투구 안에서 토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피터도 묻지 않았다. 다만 아머의 가슴판에 귀를 대고 있었다. 판금 너머에서 토니의 심장이 뛰었다. 처음엔 빨랐다. 격납고에서부터 계속. 피터는 그 박동을 들으며 아주 작게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토니가 들을 수 있을 만큼만.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투구 안에서 토니의 숨이 그 숫자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판금 너머의 박동이 조금씩 느려졌다. 구름이 끝나고 아래로 하얀 설원이 나타날 때까지, 피터는 그 숫자를 멈추지 않았다. 토니도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화가 나 있어도, 피터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힘들어도, 그 숫자만은 받아 주었다. 설원의 끝에서 녹슨 강철 문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베리아는 하얗고 조용했다. 끝없는 설원 위로 낮게 깔린 회색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눈가루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소리라는 것이 모두 눈 속에 파묻힌 것 같은 땅이었다. 그 한가운데, 얼어붙은 산비탈에 거대한 강철 문 하나가 박혀 있었다. 녹이 슬어 붉게 부식된, 오래전 하이드라가 파묻어 둔 기지의 입구였다. 문 앞의 눈밭에 퀸젯 한 대가 비스듬히 내려앉아 있었다. 스티브와 버키가 먼저 와 있었다. 토니는 그 퀸젯 옆에 내려섰다. 피터를 품에 안은 채. 아머의 발이 눈을 밟자 뽀드득, 하고 마른 소리가 났다. 피터는 토니의 품에서 내려와 눈밭에 섰다. 슈트 너머로 냉기가 바늘처럼 파고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마스크 안쪽에 하얀 김이 서렸다가 금세 얼었다. 토니가 투구를 연 채 강철 문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격납고를 떠난 뒤로 토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날아오는 내내 피터를 안은 팔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강철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 틈으로 어둠이 새어 나왔다. 토니가 피터를 보았다.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콘크리트 복도가 산 깊은 곳으로 길게 이어졌다. 천장의 조명들이 깨져 있었고, 벽을 따라 성에가 하얗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발소리가 복도 끝까지 메아리쳤다가 되돌아왔다. 피터는 그 메아리를 들으며 숨을 골랐다. 원래 세계의 토니도 이 복도를 걸었다. 혼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복도 끝의 넓은 방에서 스티브와 버키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패를 든 스티브와, 금속 팔을 늘어뜨린 버키. 버키는 토니를 보는 순간 고개를 숙였다. 피터는 그걸 보았다. 버키의 얼굴이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억이 하나씩 되살아난 얼굴이었다. 스티브가 토니에게 다가와 낮게 말했다. "스타크. 와 줘서 고맙네. 그리고 피터가 자네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거. 들었나." "…들었어. 격납고에서. 다." 스티브의 얼굴이 굳었다. 스티브가 피터를 보았다. 그리고 버키를 보았다. 버키는 고개를 숙인 채였다. 스티브가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숨을 들이켰다. "…그럼 자네도 알겠군. 여기 뭐가 있는지." "알아. 근데 직접 볼 거야. 그 놈이 보여 주는 대로. 끝까지." 방 한가운데에 원통형의 유리관 다섯 개가 둥글게 서 있었다. 얼음에 덮인 채. 그 안에 사람들이 하나씩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들어 있지 않았다. 다섯 모두 이마 한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이미 죽어 있었다. 피터의 말대로였다. 스티브가 그 유리관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버키가 떨리는 손으로 유리관 하나의 성에를 문질렀다. 그 안의 얼굴을 보았다. 자기와 같은 실험을 받았던 사람. "너희가 여기까지 올 줄은 알았어." 방 저편, 두꺼운 유리벽 너머의 작은 통제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베를린의 상담사 출입증을 건 그 남자. 제모였다. 제모가 유리벽 너머에서 셋을 보며 차분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피터에게서 멈췄다. "……" "근데 스파이더맨까지 올 줄은 몰랐네. 베를린에서도 그렇고, 빈에서도 그렇고. 너는 늘 내가 가려는 곳에 먼저 와 있더군.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왜 그러는지도요. 소코비아에서 가족을 잃었잖아요. 아내랑 아이를요." 제모의 웃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유리벽 너머의 눈이 피터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이번엔 쓰라린 웃음이었다. "…그래. 그럼 내가 지금 뭘 보여 주려는지도 알겠네." "알아요. 그리고 토니도 알아요. 제가 말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는 안 될 거예요." "그래도 보는 건 다르지. 듣는 것과 보는 건 달라. 특히 자기 엄마가 죽는 장면은." 제모가 통제실의 버튼 하나를 눌렀다. 방의 한쪽 벽에 걸린 낡은 화면이 깜빡이며 켜졌다. 잡음 섞인 흑백 영상. 화면 구석에 날짜가 찍혀 있었다. 1991년 12월 16일. 눈 내리는 밤의 도로.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둠 속을 검은 세단 한 대가 달리고 있었다. 토니가 피터의 손을 찾았다. 보지도 않고. 아머의 장갑을 벗은 맨손이었다. 피터는 그 손을 꽉 쥐었다. 토니의 손이 차가웠다. 시베리아의 냉기보다 더. 화면 속에서 무언가가 세단을 들이받았다. 오토바이였다. 세단이 미끄러지며 길가의 나무에 처박혔다. 앞유리가 거미줄처럼 금 갔다. 오토바이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검은 옷, 긴 머리칼, 그리고 가로등 없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금속 팔. 그 사람이 세단 쪽으로 걸어갔다.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하워드 스타크였다. 하워드가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며 무언가를 외쳤다. 도와 달라는. 그리고 그 그림자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이름 하나를 불렀다. 버키, 하고. 토니의 손이 피터의 손 안에서 떨렸다. 피터는 손을 놓지 않았다. 화면 속에서 금속 주먹이 하워드의 얼굴로 날아갔다. 한 번. 두 번. 하워드가 쓰러졌다. 그리고 차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흑백 화면 너머에서, 잡음 사이로. 하워드, 하고. 하워드를 부르는 목소리. 마리아 스타크였다. 금속 팔의 그림자가 조수석으로 걸어갔다. 토니가 화면을 보며 숨을 멈췄다. 그리고 그 숨이 걸리기 시작했다. 피터는 토니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토니가 피터의 손을 으스러질 만큼 쥐었다. 화면 속에서 그림자가 조수석의 여자 목을 붙잡았다. 여자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림자가 차 트렁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은빛 가방. 그리고 가로등 없는 도로 위의 감시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 그 얼굴이 화면 가득 잡혔다. 비어 있는 눈. 그리고 그림자가 카메라를 향해 총을 들었다. 화면이 하얗게 끊겼다.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꺼진 화면의 잡음만 지지직거렸다. 토니는 그 화면을 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숨이 걸린 채, 피터의 손을 으스러지게 쥔 채. 그리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방 한가운데의 버키를 향해. 버키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 고개를 숙인 채. 금속 팔이 바닥을 짚고 있었다. 그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버키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나. 하나도 빠짐없이. 그 남자가 내 이름 불렀어. 하워드. 전쟁 때 같이 있었던. 그 사람이 날 알아봤는데 나는 몰랐어. 그리고 그 여자. 그 여자가 마지막에 남편 이름 불렀어. 나는 그 목소리 듣고도 멈추지 않았어. 멈출 수가 없었어. 근데 그건 핑계야. 그 손은 내 손이었어." "……" "미안하다는 말로는 안 되는 거 알아. 그래도 해야겠어. 미안하다. 당신 부모님한테. 당신한테. 70년 동안 내가 한 것 중에 이게 제일 무거워." 토니가 버키를 보았다. 그 눈이 다시 붉게 타올랐다. 격납고에서 본 그 분노보다 더 깊고 날카롭게. 토니가 피터의 손을 놓았다. 피터의 숨이 멎었다. 토니가 한 걸음, 버키를 향해 걸어갔다. 손목의 칩이 푸르게 빛났다. 아머의 장갑이 날아와 토니의 오른손에 맞물렸다. 손바닥의 빔이 하얗게 차올랐다. 스티브가 방패를 들며 버키 앞으로 나섰다. 원래 세계의 그 순간이었다. 바로 여기서 모든 게 갈라졌다. 피터는 생각하지 않았다. 손목에서 거미줄을 쏘았다. 토니의 오른손 손목에. 그리고 그 거미줄을 붙잡은 채 토니의 등 뒤로 달려가, 그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등 뒤에서. 꽉. 토니의 몸이 멈췄다. 빔이 차오른 손바닥이 버키를 향한 채 허공에서 떨렸다. 피터는 토니의 등에 이마를 묻고 말했다. "토니. 저예요. 붙잡으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붙잡았어요. 그 손, 그 사람 거 아니에요. 그 손이 쏘고 싶은 사람은 저기 유리벽 뒤에 있어요. 버키 씨가 아니라요." "……" "그리고 토니. 들이쉬고. 하나, 둘, 셋, 넷. 참고. 하나, 둘. 내쉬고." 토니의 숨이 피터의 숫자에 걸렸다가, 아주 천천히 따라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손바닥의 빔이 조금씩 흐려졌다. 스티브가 방패를 든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버키는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피하지도 않았다. 그 빔이 자기에게 오면 받겠다는 듯이. 피터는 숫자를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고. 토니의 등이 피터의 이마 아래에서 오르내렸다. 그러다 마침내, 빔의 하얀빛이 꺼졌다. 토니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토니가 아머의 장갑을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토니는 피터의 팔을 허리에 두른 채로 버키를 내려다보았다. 무릎 꿇은 남자. 70년 동안 지워지고 또 지워진 남자. 토니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지며 흘러나왔다. "…당신이 아니었다는 거 알아. 머릿속 지워진 기계였다는 거. 저 녀석이 다리 위에서, 은행 금고에서 다 봤대. 그래서 알아." "……" "근데 지금은 용서한다는 말 못 해. 거짓말이 될 거니까. 우리 엄마가 마지막에 우리 아버지 이름 부르는 거, 방금 처음 들었어. 25년 만에. 그 목소리가 아직 귀에서 안 떠나. 그러니까 오늘은 아니야. 언젠가 할게. 그 말. 오늘은 아니고." 버키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젖은 눈이었다. 토니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다는 듯이. 아니, 그것조차 과분하다는 듯이. 스티브가 방패를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토니를 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토니에게 다가와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짧게. 피터는 토니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 손을 보았다. 원래 세계에서 이 자리에 떨어진 건 방패였다. 이번엔 손이었다. 유리벽 너머의 통제실에서 제모가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자기가 기다렸던 장면이 오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린 얼굴이었다. 제모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통제실의 뒷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손에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권총이었다. 피터의 스파이더 센스가 비명을 질렀다. 제모가 총구를 자기 턱 아래에 댔다. 그 순간 통제실의 뒷문이 터지듯 열렸다. 검은 형체가 바람처럼 뛰어들어 제모의 손목을 붙잡았다. 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티찰라였다. 언제부터 그 뒤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티찰라가 제모를 벽에 밀어붙였다. 가면을 벗었다. 그 얼굴이 젖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쳐 있었다. "…다 들었다. 너였구나. 빈에서. 내 아버지를." "…그래. 나였어. 어벤져스를 무너뜨리려면 안에서부터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근데 실패했네. 저 벌레 자식 때문에." "죽음으로 도망치게 두지 않겠다. 살아서 갚아라. 내 아버지 몫까지." 티찰라가 제모를 붙잡은 채 유리벽 너머의 방을 보았다. 무릎 꿇은 버키를. 그리고 피터를. 피터는 토니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 눈을 마주 보았다. 빈의 대회의실에서 증거를 가져오라던 그 눈. 티찰라가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피터에게. 그 증거를 보았다는 듯이. 그리고 버키를 향해서도. 짧게. 방 안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섯 개의 얼어붙은 유리관 사이에서, 넷이 서 있었다. 아니, 셋은 서 있고 하나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버키가 천천히 일어섰다. 스티브가 그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토니는 피터의 팔을 허리에 두른 채 그 둘을 보았다. 그리고 피터의 손등에 자기 손을 얹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그런데 아까보다 덜 떨렸다. "…붙잡았네. 네가." "…네. 약속했으니까요." "그 세계의 나는 여기서 아무도 안 붙잡아 줬지." "…네. 아무도요. 캡틴이 버키 씨를 지켰고, 토니는 혼자였어요." "이번엔 아니었네." 토니가 피터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그리고 피터의 팔을 허리에서 풀어 돌아섰다. 피터를 정면으로 보았다. 붉은 눈이었다. 격납고에서부터 피터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던 눈. 그 눈이 이제 피터를 피하지 않았다. 토니가 피터의 마스크를 걷어 올렸다. 시베리아의 냉기가 피터의 맨얼굴을 할퀴었다. 토니가 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직 화났어. 너한테. 퀸즈 가서 낼 거야. 메이 씨 수프 먹으면서." "…네." "근데 고마워. 붙잡아 줘서. 숫자 세 줘서. 그 세계의 나는 여기서 혼자 무너졌다며. 나는 안 무너졌어. 네가 등 뒤에 있어서." 피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막혔다. 토니가 피터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댔다. 시베리아의 얼음 같은 공기 속에서, 둘의 이마만 따뜻했다. 버키와 스티브가 그 둘을 보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티찰라가 제모를 끌고 복도로 나섰다. 다섯 개의 유리관 위로 성에가 천천히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이 방은 끝의 시작이었다. 이 세계에서 이 방은, 한 사람이 25년 만에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도 무너지지 않은 곳이 되었다. 복도를 걸어 나오는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다섯 개의 유리관이 있는 방이 등 뒤로 멀어졌다. 성에가 핀 벽을 따라 발소리만 메아리쳤다. 토니는 피터의 손을 쥔 채 걸었다. 그 손이 이제 떨리지 않았다. 강철 문 앞에서 토니가 문득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복도 끝의 어둠을. 그 어둠 너머에서 꺼진 화면이 아직 지지직거리고 있을 것이다. "…다시는 안 볼 거야. 그 영상." "…네." "근데 엄마 목소리는 기억할 거야. 하워드, 하고 부르던 거. 무서운 목소리가 아니었어. 그냥 아버지를 부르는 목소리였어. 평소처럼. 그걸로 기억할 거야." 피터는 토니의 손을 꽉 쥐었다. 둘은 강철 문을 지나 설원으로 나섰다. 바람이 눈가루를 실어 와 둘의 얼굴에 흩뿌렸다. 강철 문 밖의 설원에서 스티브가 토니 옆으로 와 섰다. 둘은 한동안 나란히 서서 끝없는 하얀 땅을 보았다. 바람이 둘의 어깨에 눈가루를 얹었다. 스티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얀 입김이 말과 함께 흩어졌다. "하워드는… 그날 밤에도 자네 얘기를 했을 거야. 내가 아는 하워드라면." "…피터가 그러더라. 엄마가 차 안에서 아버지한테, 나 크리스마스에 오면 잘해 주라고 했대." "그럼 하워드는 아마 그러겠다고 대답했겠지. 투덜거리면서." "…응. 그랬을 것 같아. 투덜거리면서." 토니가 짧게 웃었다. 스티브도. 두 사람의 웃음이 설원의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원래 세계에서 이 두 사람이 이 설원에 함께 서 있던 마지막 순간은 방패와 아머가 부딪히는 소리로 끝났다. 이번엔 한 사람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기지를 나서자 시베리아의 해가 설원 끝에서 낮게 기울고 있었다. 눈밭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퀸젯 옆에서 버키가 피터를 불러 세웠다. 스티브와 토니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와칸다로 가는 항로를 맞추는 사이였다. 버키가 눈밭에 선 채 피터를 내려다보았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거미. 아까 그 사람 등 뒤에서 붙잡은 거." "……" "그게 아니었으면, 나는 그 빛 받았을 거야. 피할 생각 없었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알아요. 그래서 붙잡았어요. 버키 씨가 피하지 않을 거라는 거 알아서요." "…넌 진짜 다 아는구나." "다는 몰라요. 근데 버키 씨가 그날 밤의 일 때문에 얼마나 오래 스스로를 미워할지는 알아요. 그러니까 이번엔 너무 오래 미워하지 마세요. 토니가 언젠가라고 했잖아요. 그 언젠가를 기다려 주세요." 버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밭 너머의 토니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피터를 보며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티찰라가 제모를 퀸젯 안으로 끌고 가다 멈춰 섰다. 피터를 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증거는 봤다. 네 말대로였다. 와칸다는 빚을 잊지 않는다, 스파이더맨." 티찰라가 그렇게 말하고 퀸젯 안으로 사라졌다. 피터는 분홍빛 눈밭 위에 서서 그 해치를 보았다. 라고스의 하얀 조끼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은혜를 잊지 않는 왕. 그 왕은 빈에서 쓰러졌지만, 그 아들이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와칸다의 하늘은 피터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푸르렀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가 이 나라를 본 건 단 한 번, 마지막 싸움의 날이었다. 그때 이 하늘은 연기와 불꽃으로 뒤덮여 있었고, 들판은 쓰러진 사람들과 부서진 우주선의 잔해로 가득했다. 그런데 지금 퀸젯의 창밖으로 펼쳐진 와칸다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 안개 낀 폭포가 절벽을 따라 하얗게 쏟아져 내렸고, 그 아래로 끝없는 초록의 숲이 물결쳤다. 숲 너머 산맥 사이에 도시 하나가 숨어 있었다. 유리와 나무와 흙으로 지은 높은 탑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 사이로 투명한 기차가 소리 없이 미끄러져 갔다. 퀸젯 안에는 다섯이 타고 있었다. 조종석의 티찰라, 그 뒤의 스티브와 버키, 그리고 피터와 토니. 시베리아를 떠난 뒤로 아무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버키는 창가에 앉아 금속 팔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창밖만 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그 옆에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다만 스티브의 어깨가 버키의 어깨에 닿아 있었다. 70년 전 브루클린의 골목에서 그랬던 것처럼. 토니는 피터 옆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시베리아 이후로 토니는 피터의 손을 놓지 않았다. 격납고에서처럼 피터의 얼굴을 피하지도 않았다. 다만 말이 적었다. 무언가를 오래 곱씹는 얼굴이었다. 피터는 그 옆얼굴을 보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퀸즈에 가서 화를 내겠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7년 동안 토니가 피터를 기다려 준 것처럼. 착륙하기 직전, 스티브가 자리에서 일어나 토니 옆으로 와 앉았다. 버키는 창가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스티브는 한참 망설이다가 낮게 입을 열었다. "스타크. 시베리아에서. 고맙네." "…뭐가." "그 빔. 꺼 줘서. 그리고 버키한테 언젠가라고 해 줘서. 오늘은 아니어도." "내가 끈 거 아니야. 이 녀석이 등 뒤에서 숫자 셌어." "알아. 봤어. 그래도 마지막에 손 내린 건 자네야." 토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피터의 손을 쥔 손에 아주 조금 힘을 주었다. 스티브는 그 손을 보고, 피터를 보고, 다시 토니를 보았다. 그리고 짧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 세계에서 우리 둘은 몇 년이나 말을 안 했다며. 이번엔 그러지 말지. 서명식 끝나면 퀸즈에 소금 많이 들어간 수프 먹으러 가자고 했잖나. 그거 아직 유효한가." "유효해. 메이 씨한테 소금 한 통 더 사 놓으라고 할게." 퀸젯이 도시 외곽의 넓은 착륙장에 내려앉았다. 해치가 열리자 뜨겁고 습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흙과 꽃과 강물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착륙장 끝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열여섯쯤 되었을까. 하얀 옷에 머리를 짧게 땋아 올리고, 손목에 구슬 팔찌를 여러 개 겹쳐 찬. 소녀는 퀸젯에서 내리는 티찰라를 보자마자 달려와 그 품에 안겼다. 그리고 티찰라의 어깨 너머로 버키를 보았다.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사람이야? 오빠가 시베리아까지 쫓아간 사람." "그래, 슈리. 근데 쫓아간 이유가 바뀌었다. 이 사람을 고쳐 줘야 해. 머릿속에 있는 걸." 소녀가 버키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그 금속 팔을 보았다. 소녀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소녀가 버키에게 다가가 그 금속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거 진짜 원시적이네. 70년 된 기술이야? 이걸로 어떻게 살았어?" "…그럭저럭." "그럭저럭은 무슨. 내가 새로 만들어 줄게. 머릿속 고치는 동안. 깨어나면 깜짝 놀랄 거야." 버키가 그 말에 당황한 듯 스티브를 보았다. 스티브가 웃었다. 피터도 웃었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소녀를 마지막 싸움의 들판에서 멀리서 보았다. 이름도 모른 채. 이 세계에서 이 소녀는 버키의 금속 팔을 원시적이라고 놀리며 웃고 있었다. 토니가 피터 옆에서 그 소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 꼬마, 나랑 말 잘 통하겠다." 착륙장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슈리는 피터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그리고 피터의 손목을 대놓고 빤히 보았다. "너 거미줄 손목에서 나온다며. 장치 없이. 진짜야?" "…네. 몸에서요." "말도 안 돼. 단백질 구조가 어떻게 돼 있길래. 압력은? 인장 강도는? 한 번 쏴 봐. 저기 저 기둥에." 피터가 망설이다 착륙장 끝의 기둥에 거미줄을 쏘았다. 하얀 거미줄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기둥에 들러붙었다. 슈리가 달려가 그 거미줄을 손가락으로 잡아당겨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손목의 구슬 팔찌 하나를 두드려 허공에 작은 화면을 띄우고 무언가를 미친 듯이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거 비브라늄 섬유보다 탄성이 좋은데? 너 나중에 내 연구실 와. 피 조금만 뽑자. 아주 조금만." "…네?" 토니가 뒤에서 그 광경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시베리아 이후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는 웃음이었다. "거봐. 저 꼬마, 진짜 나랑 말 잘 통한다니까." 피터는 슈리의 반짝이는 눈 앞에서 손목을 등 뒤로 감췄다. 원래 세계의 마지막 싸움에서 피터는 이 소녀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이 세계의 이 소녀는 피터의 피를 뽑겠다며 쫓아오고 있었다. 버키가 잠들 곳은 도시의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하얀 벽과 푸른 빛으로 둘러싸인 넓은 방. 그 한가운데에 투명한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김이 그 안에서 피어올랐다. 시베리아의 유리관과 닮았지만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가두기 위한 게 아니라, 고치기 위한 것. 슈리가 그 관 옆의 화면을 두드리며 설명했다. 머릿속의 주문을 하나씩 찾아서 지우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몇 달, 어쩌면 몇 년. 그동안 버키는 이 안에서 잠들어 있어야 한다고. 깨어날 때마다 위험하니까. 버키가 그 관 앞에 섰다. 한참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스티브가 버키 앞에 섰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버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다시 얼음 속에 들어가는 거네." "이번엔 다르잖아. 깨어나면 네가 너일 거야. 온전히." "…깨어나면 또 몇 년 지나 있겠지. 너 또 늙어 있을 거고." "늙어 있어도 여기 있을게. 이번엔 안 놓쳐. 열차에서도, 강물에서도 못 붙잡았는데. 이번엔 기다릴게. 네가 깨어날 때까지." 버키가 스티브를 보다가 짧게 웃었다. 그리고 스티브를 끌어안았다. 금속 팔과 맨팔로. 짧고 단단하게. 70년 동안 하지 못한 포옹이었다. 피터는 방의 입구에서 그 포옹을 보며 목이 메었다. 원래 세계에서도 이 둘은 이 방에서 이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 들판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엔 그 들판이 오기 전에 만나게 될 것이다. 버키가 스티브를 놓고 피터를 보았다. 그리고 피터에게 걸어왔다. 피터 앞에 섰다. 지친 눈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 눈이 비어 있지 않았다. 버키가 피터를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거미. 다리 위에서 내 이름 처음 말해 준 거. 베를린에서 1센티미터 앞에서 내 이름 불러 준 거. 시베리아에서 저 사람 붙잡아 준 거. 다 기억할게.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깨어나시면 염소 키우세요. 여기 들판에서요. 그 세계에서는 그러셨어요." "…염소?" "네. 염소들이 엄청 좋아했대요. 버키 씨를." 버키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피터의 머리를 금속이 아닌 손으로 한 번 헝클어뜨렸다. 스티브가 하던 것처럼. 토니가 하던 것처럼. 그리고 버키가 피터 너머의 토니를 보았다. 토니는 방의 벽에 기대 서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버키와 토니의 눈이 마주쳤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버키가 토니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채로, 아주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베리아에서 할 말은 다 했으니까. 토니는 그 숙인 고개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벽에서 등을 떼고, 버키를 향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는 아니었다. 아직은. 그러나 미움도 아니었다. 그 사이 어딘가의, 언젠가를 위한 끄덕임이었다. 버키가 투명한 관 안에 누웠다. 슈리가 화면을 두드리자 관의 뚜껑이 천천히 닫혔다. 차가운 김이 버키의 얼굴을 덮었다. 버키가 마지막으로 스티브를 보며 눈을 감았다. 관 안에 하얀 성에가 피어올랐다. 스티브가 그 관의 유리에 손바닥을 댔다. 오래. 피터는 그 손을 보며 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얼음이 버키를 가두는 게 아니었다. 지키는 것이었다. 오후에는 스티브가 왕궁의 높은 발코니에서 토니를 불렀다. 피터는 그 둘이 나란히 난간에 기대 선 모습을 아래 정원에서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발코니의 하얀 천막을 부풀렸다. 둘의 목소리가 정원까지 희미하게 흘러내렸다. "버키 깨어나면, 이 근처에 남을 것 같네. 여기 사람들이 받아 준다면." "염소 키우면서?" "…피터가 그 얘기 자네한테도 했나." "했지. 근데 캡. 너는. 버키 깨어날 때까지 여기 있을 거야?" "아니. 돌아가서 서명해야지. 자네랑 같이. 그리고 기다려야지. 70년도 기다렸는데 몇 달 못 기다리겠나." 토니가 웃었다. 그리고 난간에 팔꿈치를 괸 채 아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피터와 눈이 마주쳤다. 토니가 손을 들어 보였다. 스티브도 따라 내려다보더니, 피터를 향해 짧게 손을 흔들었다. 원래 세계에서 이 두 사람은 이렇게 나란히 난간에 기대 선 적이 없었다. 적어도 시베리아 이후로는. 피터는 정원의 꽃 사이에 선 채 그 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날 저녁, 피터와 토니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가에 앉아 있었다. 넓고 느린 강이었다. 해가 산맥 너머로 지면서 강물이 금빛으로, 다시 붉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강 건너편의 숲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올랐다. 강둑의 풀에서 풀벌레가 울기 시작했다. 둘은 나란히 앉아 그 강을 보았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토니가 강을 본 채 입을 열었다. "…국무장관한테서 연락 왔어. 와칸다 왕이 수정안 지지하겠대. 공식적으로. 72시간 조항이랑 거부권이랑 명단 공개. 와칸다가 지지하면 아프리카 쪽 나라들이 따라올 거래. 국무장관이 결국 받았어. 수정안으로 다시 서명식 연대." "…캡틴은요?" "캡도 서명한대. 수정안이면. 버키 일 끝나고 돌아가서. 우리 둘이 같이.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피터는 그 말에 숨을 멈췄다. 원래 세계에서 스티브는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도망자가 되어 몇 년을 떠돌았다. 토니는 그 서명 때문에 친구들을 잃었다. 이번엔 둘이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서명할 것이다. 피터가 강물을 보며 낮게 말했다. "…목록에서 하나 더 지웠네요." "응. 하나 더." 토니가 강물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돌멩이가 금빛 수면 위로 동그란 물결을 그리며 가라앉았다. 토니가 그 물결이 사라질 때까지 보다가, 피터를 돌아보았다. "피터. 퀸즈 가서 화낸다고 했잖아." "…네." "근데 지금 할게. 여기서. 퀸즈까지 가지고 가면 메이 씨 수프 맛이 없을 것 같아서."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둑의 풀을 손으로 쥐었다. 토니가 피터를 똑바로 보았다. 시베리아 이후 처음으로, 그 눈에 분노가 아니라 다른 것이 있었다. "화났었어. 진짜로. 네가 7년 동안 그걸 혼자 들고 있었다는 게. 격납고에서 처음 들었을 때는 너한테 화가 났어. 왜 이제야 말하냐고. 시베리아에서 영상 볼 때는 그 놈들한테 화가 났고. 근데 오늘 버키가 그 관에 들어가는 거 보면서 알았어." "……" "내가 화난 건 너 때문이 아니라, 그걸 너 혼자 7년 동안 들고 있게 만든 세상 때문이었어. 그 세계에서 네가 그걸 보고 혼자 퀸즈에 돌아갔다며. 그 세계의 내가 시베리아에서 무너졌다는 얘기를 나중에 혼자 들었다며. 그리고 여기 와서, 그걸 7년 동안 혼자 품고 있었고. 아무한테도 못 말하고. 그게 화가 났어. 너한테 그런 무게를 지운 그 모든 게." 피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강둑의 풀을 쥔 손이 떨렸다. 풀잎이 손가락 사이에서 짓이겨지며 풋내가 올라왔다. 토니가 그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 이제 너한테 화 안 낼 거야. 대신 약속 하나만 해. 앞으로 무거운 거 생기면, 그게 아무리 나한테 아픈 거라도, 7년 기다리지 마. 하루도 기다리지 마. 바로 말해. 아프면 같이 아프면 돼. 그게 너 혼자 들고 있는 것보다 덜 아파." "…네. 약속해요. 이제 하나도 안 남았어요. 진짜로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진짜?" "진짜요. 목록에 있는 거 말고는, 숨긴 거 하나도 없어요." 토니가 피터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시베리아 이후 처음 보는, 진짜 웃음이었다. 토니가 피터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다시 강을 보았다. 강물이 이제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첫 별 하나가 산맥 위에 떴다. "…엄마 피아노. 아까 슈리라는 꼬마한테 물어봤어. 와칸다에 피아노 있냐고. 있대. 내일 쳐 봐도 된대." "…피아노 치세요?" "엄마한테 조금 배웠어. 일곱 살 때까지. 그 뒤로는 안 쳤어. 아버지가 그런 거 하지 말고 공부나 하래서. 근데 오늘 그 영상에서 엄마 목소리 듣고 나니까, 그 곡이 생각나. 엄마가 나 잠 못 잘 때 쳐 주던 거. 손이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저 들어도 돼요?" "너 들으라고 치는 거야. 그리고 엄마한테. 25년 만에." 피터는 토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강둑의 풀벌레 소리가 점점 커졌다. 와칸다의 밤이 둘을 감싸며 내려앉았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가 본 와칸다는 불타는 들판뿐이었다. 이 세계의 와칸다에는 금빛 강이 있었고, 원시적인 금속 팔을 놀리는 소녀가 있었고, 얼음이 아니라 치료를 위한 관이 있었다. 그리고 내일, 25년 만에 엄마의 곡을 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피터는 그 사람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화는 강물에 가라앉은 돌멩이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동그란 물결 하나만 남아 천천히 퍼져 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왕궁 한쪽의 넓은 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엔 서툴렀다. 건반 몇 개를 짚다 멈추고, 다시 짚다 틀리고. 피터는 방의 문틀에 기대 그 소리를 들었다. 창으로 쏟아진 아침 햇살이 검은 피아노의 뚜껑 위에서 하얗게 미끄러졌다. 토니는 그 앞에 앉아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린 채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첫 소절을 다시 짚었다. 이번엔 틀리지 않았다. 느리고 조용한 곡이었다. 잠 못 드는 아이를 위한 곡. 둘째 소절에서 한 번 손가락이 멈칫했다. 셋째 소절에서 다시 이어졌다.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일곱 살의 손이, 마흔이 넘은 손 안에서. 피터는 문틀에 기댄 채 숨을 죽였다. 슈리가 복도 끝에서 그 소리를 듣고 걸어오다 피터 옆에 멈춰 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티브도 왔다. 아무도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곡이 끝났다. 마지막 음이 방의 높은 천장으로 천천히 흩어졌다. 토니는 건반 위에 손을 얹은 채 오래 앉아 있었다. 등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은 채, 문틀의 피터에게 들리게 낮게 말했다. "…엄마가 이 곡 끝나면 늘 그랬어. 이제 자자, 우리 토니. 그 말 들으면 진짜 잠이 왔어." "……" "25년 만이야. 이 곡 끝까지 친 거. 손이 기억하더라." 피터는 문틀에서 몸을 떼고 피아노 쪽으로 걸어갔다. 토니 옆의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건반 위에 얹힌 토니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쳤다. 토니가 그 손을 보다가, 피터를 돌아보았다. 젖은 눈이 웃고 있었다. 창밖에서 와칸다의 아침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퀸즈에는 가을이 와 있었다. 와칸다로 떠날 때만 해도 초록이던 가로수가 그새 노랗게 물들어, 붉은 벽돌 건물 앞의 인도 위로 잎을 한 장씩 떨구고 있었다. 철물점의 셔터 위에는 누군가 끼워 둔 낙엽 한 장이 바람에 팔랑거렸다. 저녁 6시, 동네는 빵 굽는 냄새와 낙엽 타는 냄새, 그리고 어느 집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야구 중계 소리로 느긋하게 차 있었다. 피터는 철물점 앞에 서서 셔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1년 전, 매일 저녁 그랬던 것처럼. 셔터가 덜컹거리며 반쯤 내려오다 멈췄다. 그 아래로 벤이 허리를 숙이고 나왔다. 가슴의 흉터는 셔츠 아래에 감춘 채였다. 벤이 열쇠를 돌리다 말고 가게 앞의 피터를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선 사람을 보았다. 피 묻은 셔츠도, 아머도 아닌, 낡은 가디건 차림의 토니였다. 손에 종이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 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둘 다 왔네. 와칸다인가 어딘가 간다더니." "오늘 왔어요. 금요일이니까요. 다녀와서 저녁은 여기서 먹으라면서요." "그건 그랬지. 근데 봉투에 든 건 뭐예요." "소금이요. 한 통. 메이 씨가 오늘은 특별히 짜게 한대서요. 손님이 더 온다고." 벤이 손님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피터와 토니가 눈을 마주쳤다. 셋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벤이 가운데, 피터가 골목 쪽, 토니가 차도 쪽. 그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이번엔 아무도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피터는 골목 안을 흘끗 보았다. 쓰레기통 두 개, 흘러내린 웃는 얼굴. 그리고 쓰레기통 위에서 하품을 하는 생선 도둑. 배수관 위의 감지기가 초록빛으로 깜빡였다. 피터는 그 골목을 지나치며 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 골목은 그냥 골목이었다. 평범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3층 부엌에 들어서자 김이 얼굴을 덮쳤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냄비 세 개가 끓고 있었다. 메이가 그 사이를 오가며 국자를 휘둘렀다. 식탁에는 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 벤이 그 의자들을 세어 보다가 메이를 보았다. "여섯? 누가 오는데." "스타크 씨 친구분들이래. 캡틴 아메리카랑, 그 은색 아머 입는 군인 아저씨. 해피 씨도 오고." "…캡틴 아메리카가 우리 집에?" "응. 소금 엄청 들어간 수프 먹으러 온대. 스타크 씨가 약속했대." 벤이 토니를 돌아보았다. 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벤이 혀를 차며 식탁 위의 의자 하나를 바로 놓았다. 그런데 그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피터는 그걸 보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철물점 주인이 캡틴 아메리카를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메이가 문을 열자 문간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맨 앞에 해피, 그 뒤에 목발을 짚은 로디, 그리고 그 뒤에 꽃다발을 든 스티브. 하얀 국화였다. 스티브가 쑥스러운 얼굴로 그 꽃다발을 메이에게 내밀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빈손으로 오기가 뭐해서." "어머, 세상에. 캡틴 아메리카가 우리 집에 꽃을. 들어와요, 들어와. 소금 한 통 넣었어요. 각오하세요." 로디가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들어섰다. 갈비뼈 세 개에 금이 갔다고 했다. 그런데 다리는 멀쩡했다. 로디는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피터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목발 하나를 들어 피터를 가리켰다. "이 꼬마가 하늘에서 나 받아 줬어요. 거미줄 네 가닥으로. 안 그랬으면 지금 휠체어 타고 왔을 거예요." "…그 얘기 또 하세요?" "평생 할 거다. 갈비뼈 부러진 값이야." 벤이 그 말에 피터를 보았다. 그리고 로디를 보았다. 피터가 또 누군가를 받아 냈다는 걸 알아챈 얼굴이었다. 벤이 로디에게 다가가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앉아요. 갈비뼈 다쳤으면 서 있지 마요. 나도 몇 달 전에 가슴에 총 맞아서 알아요. 숨 쉴 때마다 아프죠." "…아저씨가 그 철물점 사장님이세요? 토니가 나사 제일 비싼 거 다 사 갔다는." "그래요. 남은 거 있으니까 나중에 와요. 제일 쓸데없는 걸로 싸게 줄게요." 로디가 웃음을 터뜨리다 갈비뼈를 움켜쥐었다. 벤도 웃다가 가슴의 흉터를 손으로 눌렀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동시에 신음했다. 메이가 개수대 앞에서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해피가 그 옆에서 메이를 도와 그릇을 꺼냈다.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피터는 그 광경을 보며 숨을 내쉬었다. 이 부엌이 이렇게 북적거리는 건 처음이었다. 여섯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아니, 해피까지 일곱이었다. 메이가 의자 하나를 더 끌어왔다. 식탁이 좁았다. 어깨와 어깨가 닿았다. 스티브가 벤의 옆에, 로디가 메이의 옆에, 해피가 그 끝에. 그리고 피터와 토니가 나란히. 메이가 수프를 한 국자씩 떠 주었다. 짠 냄새가 김과 함께 식탁 위로 피어올랐다. 스티브가 첫 숟가락을 떠먹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눈을 크게 뜬 채. "…부인. 이거." "짜죠? 진정제예요. 무거운 얘기 할 때 먹는." "…70년 전 군대 식당보다 짜네요." "칭찬이죠?" "…칭찬입니다." 식탁이 웃음으로 터졌다. 벤이 숟가락을 든 채 껄껄 웃었다. 로디가 갈비뼈를 움켜쥐고 웃었다. 해피가 수프를 떠먹다 사레들려 기침했다. 토니가 피터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피터도 웃었다. 원래 세계에서 이 사람들이 한 식탁에 앉은 적은 없었다. 퀸즈의 작은 부엌에서, 소금 한 통이 들어간 수프 앞에서.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과 워 머신과 철물점 주인이 같은 냄비의 수프를 떠먹고 있었다. 웃음이 가라앉자 스티브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등을 곧게 펴고 벤을 보았다. 70년 전 장교 식당에서 몸에 밴 예의가 그 자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파커 씨. 피터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 골목 일도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비 오는 날 좀 쑤시는 거 말고는. 근데 캡틴. 그 파커 씨는 좀 그만해요. 벤이라고 불러요. 캡틴한테 파커 씨 소리 들으니까 내가 무슨 훈장 받는 사람 같네." "…그럼 저도 스티브라고 불러 주시죠." "그건 못 하겠어요. 나 어릴 때 캡틴 아메리카 만화책 보고 자랐다고요. 브루클린 출신이라면서요. 우리 아버지가 그러더라고요. 캡틴이 퀸즈가 아니라 브루클린 출신인 게 평생 아쉽다고." 스티브가 소리 내어 웃었다. 70년을 건너온 사람이 철물점 주인의 아버지 이야기에 웃고 있었다. 벤이 그 웃음을 보며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피터를 흘끗 보더니, 스티브에게 낮게 덧붙였다. "우리 애 잘 부탁해요. 그 녀석, 남 지키는 데만 정신 팔려서 자기 몸은 안 챙겨요." "…알고 있습니다. 근데 벤 씨, 요즘은 그 녀석을 챙기는 사람이 따로 있던데요." 스티브가 그렇게 말하며 피터 옆의 토니를 보았다. 토니가 수프를 떠먹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벤이 혀를 찼다. "그래요, 그건 그렇네요." 식탁에 또 한 번 웃음이 번졌다. 로디가 목발로 바닥을 두드리며 웃었고, 해피는 메이에게 무언가를 귓속말로 일러바쳤다. 피터는 귀 끝까지 빨개진 채 짠 수프만 떠먹었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메이가 거실의 텔레비전을 켰다. 저녁 뉴스였다. 화면 속에 빈의 국제회의장이 비치고 있었다. 이번엔 무너지지 않은. 긴 탁자 앞에 117개 나라의 대표들이 서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정장 차림의 토니와 스티브. 둘이 같은 펜을 차례로 들어 같은 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이 화면 가득 잡혔다. 자막이 흘렀다. 수정된 소코비아 협정, 어벤져스 전원 서명. 와칸다의 새 왕이 그 옆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식탁의 모두가 그 화면을 보았다. 화면 속의 토니와 스티브가 서명을 마치고 악수를 했다. 짧고 단단하게. 식탁의 진짜 토니와 스티브가 그 화면을 보다가 서로를 흘끗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수프를 떠먹었다. 쑥스러운 듯이. 벤이 그 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텔레비전에서는 엄청 멋있게 나오네. 우리 집 식탁에서는 둘 다 수프 짜다고 얼굴 찡그리면서." "…그게 진짜 얼굴이에요, 아저씨." "그래. 그게 좋네." 설거지는 스티브와 해피가 했다. 스티브가 우겼다. 손님이 설거지를 하는 게 70년 전 브루클린의 예의라고. 메이는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 졌다. 거실에서는 로디와 벤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상처를 비교하고 있었다. 갈비뼈 세 개 대 총알 한 발. 어느 쪽이 더 아팠는지를 두고 진지하게. 피터는 그 소란을 뒤로하고 토니와 함께 현관 밖 계단으로 나왔다. 가을밤의 공기가 서늘했다. 골목 너머로 낙엽 타는 냄새가 희미하게 흘러왔다. 둘은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1년 전, 벤과 토니가 이 계단에 앉아 렌치 얘기를 했던 자리였다. 토니가 가디건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퀸즈의 가을 하늘에 별 몇 개가 떠 있었다. 토니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폈다. "목록. 와칸다 가기 전에 하나 접었고, 오늘 하나 더 접었어. 공항에서 로디. 그리고 캡이랑 같이 서명한 거. 시베리아는… 시베리아도 하나로 쳐도 되나. 아무도 안 갈라졌으니까." "…네. 쳐도 돼요. 그 세계에서 제일 큰 균열이었어요. 그게 안 생겼어요." "그럼 셋. 근데 아직 남은 게 있지. 비전. 나타샤. 캡의 춤은 캡이 고를 거고. 그리고 이거." 토니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별빛 아래에서. 장갑을 낄지도 모르는 그 손. 피터는 그 손을 보며 숨을 골랐다. 토니가 그 손을 내리고 피터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런데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피터. 그 목록에, 아직 나한테 말 안 한 거 또 있어?" 피터는 토니를 보았다. 그 질문이 런던의 성당에서와 똑같았다. 그때는 피터의 가슴 한가운데를 찔렀다. 그런데 지금은 찌르지 않았다. 피터는 그 눈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없어요. 진짜로요. 이제 하나도요. 제가 아는 건 다 토니도 알아요." "…그래." 토니가 피터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의심하지 않는 웃음이었다. 7년 동안 피터의 얼굴을 읽으며 무언가 숨겨진 걸 찾던 그 눈이, 이제 아무것도 찾지 않았다. 그냥 피터를 보고 있었다. 토니가 피터의 손을 찾아 손가락 사이로 자기 손가락을 엮었다. "믿을게. 아니, 그냥 믿어. 묻는 것도 이제 그만할게." "…네." "대신 앞으로 새로 생기는 건 바로 말해. 하루도 안 기다리고. 와칸다에서 약속했잖아." "…네. 바로요." 현관 안쪽에서 메이가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앞치마에 밀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메이가 계단의 둘을 향해 외쳤다. "둘 다 들어와! 디저트! 파이 네 번째로 구웠는데 이번엔 진짜 완벽해!" "바닥 탔어! 냄새 나는데!" 뒤의 외침은 벤이었다. 메이가 벤의 어깨를 치는 소리, 로디와 스티브가 웃는 소리. 피터와 토니가 계단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피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뉴스 알림이었다. 피터는 무심코 화면을 보았다. [퀸즈 상공에 정체불명의 비행체. 거대한 날개를 단 남자, 은행 금고 털이 의심.] 피터의 손이 멈췄다. 화면 속에 흐릿한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금속 날개. 독수리처럼, 아니 독수리보다 훨씬 날카롭게. 그 날개 아래에 한 남자가 매달려 있었다. 피터는 그 날개를 알았다. 원래 세계에서 열다섯 살의 피터가 처음으로 혼자 상대했던 사람. 토니가 준 슈트를 입고, 토니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몸이 부서져라 쫓았던 사람. 무너진 창고의 잔해 아래에서 피터를 깔아뭉갰던 그 날개. 토니가 피터의 얼굴을 보았다. 무언가를 아는 얼굴을. 그리고 피터의 손에 든 화면을 보았다. 토니가 피터를 다시 보며 물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그런데 다정하게. "…이것도 네가 아는 거야? 새로 생긴 거?" "…네. 방금 생겼어요. 그래서 바로 말할게요." 토니가 웃었다. 와칸다의 강가에서 한 약속을, 피터가 1분도 안 돼서 지키고 있었다. 토니가 피터의 머리칼을 한 번 헝클어뜨리고 현관문을 열었다. 안에서 짠 수프 냄새와 탄 파이 냄새와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럼 디저트 먹으면서 들어. 메이 씨 파이 먹으면서. 바닥 탔다는데." "…네. 탄 데부터 먹을게요." 피터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토니를 따라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퀸즈의 밤하늘 어딘가에서 금속 날개 하나가 바람을 가르고 있을 것이다. 원래 세계의 열다섯 살은 그 날개를 혼자 쫓았다. 토니에게 말하지 않고, 증명하고 싶어서. 이번엔 탄 파이가 놓인 식탁에서, 일곱 사람이 둘러앉은 그 자리에서 먼저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엔 혼자 쫓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늦게,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였다. 메이는 부엌에서 마지막 그릇을 닦고 있었고, 피터는 그 옆에서 행주로 그릇의 물기를 훔치고 있었다. 탄 파이의 냄새가 아직 부엌에 남아 있었다. 메이가 그릇을 피터에게 건네며 무심한 척 물었다. "그 날개 단 남자. 너 또 쫓아갈 거지." "…네. 근데 이번엔 혼자 안 가요. 토니한테 먼저 말했어요." "그래. 그럼 됐어." 메이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리고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피터를 보았다. 부엌의 노란 불빛 아래에서 그 얼굴이 이상하게 편안해 보였다. "오늘 식탁. 일곱 명이었어. 우리 집 식탁에 일곱 명 앉은 거 처음이야. 너 처음 이 집 왔을 때는 셋이었는데." "…네." "그 세계에서는 몇 명이었어. 마지막에." "…혼자였어요. 4년 동안요." 메이가 피터를 오래 보았다. 부엌의 낡은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만 한동안 둘 사이를 채웠다. 그리고 메이가 젖은 손으로 피터의 뺨을 감쌌다. 따뜻하고 축축한, 주방 세제 냄새가 나는 손이었다. "이제 일곱이야. 그리고 늘어날 거야. 그 사람이 친구들 데리고 오고, 그 친구들이 또 누구 데려오고. 소금이 모자라겠네." "…한 통 더 사 놓을게요." "두 통 사." 피터는 웃었다. 메이도 웃었다. 창밖으로 맞은편 지붕의 물탱크 그늘이 보였다. 비어 있었다. 피터는 그 빈자리를 보며 행주를 접었다. 일곱 명의 식탁. 그리고 늘어날 의자들. 원래 세계의 혼자였던 4년이, 이 부엌의 노란 불빛 아래에서 아주 멀게 느껴졌다. 메이가 3층으로 올라간 뒤, 피터는 현관 계단에 혼자 앉아 있었다. 아니, 혼자가 아니었다. 계단 위의 문이 열리고 벤이 내려왔다. 가디건을 걸치고, 손에 맥주병 두 개를 든 채. 벤은 피터 옆에 천천히 걸터앉으며 병 하나를 건넸다. 가슴의 흉터가 당기는지 앉을 때 잠깐 얼굴을 찡그렸다. "그 양반은." "옆방이요. 내일 아침에 그 날개 남자 얘기 같이 하기로 했어요." "그래. 잘했어. 혼자 안 가는 거." 둘은 한동안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골목 어귀의 배수관 위에서 감지기가 초록빛으로 깜빡였다. 그 아래 쓰레기통 위에서 생선 도둑이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벤이 그 고양이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놈. 요즘 우리 가게 앞에 와. 내가 생선 대가리 남겨 두거든. 메이한테는 비밀이야." "…삼촌도 비밀 있으시네요." "사람이면 다 하나씩 있지. 근데 너처럼 7년씩 들고 있으면 안 돼. 그건 비밀이 아니라 짐이야." "…이제 없어요. 다 내려놨어요." "알아. 오늘 네 얼굴 보니까 알겠더라. 가벼워 보여." 벤이 맥주병을 피터의 병에 가볍게 부딪쳤다. 쨍, 하는 소리가 가을밤의 골목에 작게 울렸다. 피터는 그 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계단에 벤과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열다섯 살에 끝났으니까. 이 세계의 벤은 가슴에 흉터를 안고, 고양이에게 생선 대가리를 몰래 남겨 주며, 피터 옆에서 맥주병을 부딪치고 있었다. - 토니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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