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주의 메이의 네 번째 파이는 정말로 바닥이 탔다. 칼을 넣자 바삭, 하고 검은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메이는 그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파이를 여덟 조각으로 잘라 접시마다 올렸다. 손님들이 돌아간 3층 부엌에는 이제 넷만 남아 있었다. 벤과 메이, 피터와 토니. 식탁 한가운데에 놓인 촛불 하나가 탄 설탕 냄새 사이로 가늘게 흔들렸다. 창밖의 가을밤은 고요했다. 피터는 접시 위의 탄 조각을 포크로 떼어 내며, 방금 휴대전화에 떴던 흐릿한 사진을 머릿속에서 다시 펼쳐 보았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금속 날개. "그래서. 그 날개 단 남자. 누군데." 토니가 탄 파이를 한 입 베어 물고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메이가 그 얼굴을 노려보자 토니는 황급히 맛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벤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피터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에이드리언 툼스요. 원래는 철거 업체 사장이었어요. 뉴욕에서 그 일 있고 나서, 외계인 잔해 치우는 일을 따냈대요. 트럭이랑 인부들 다 데리고, 빚까지 내서요. 근데 일 시작한 첫날, 정부에서 사람들이 와서 그 일을 빼앗았어요. 이제부터 이 잔해는 새로 만든 회사가 다 치운다고요." "…새로 만든 회사." "네. 정부랑 같이 만든 회사요. 피해 복구 담당이요." 토니의 포크가 접시 위에서 멈췄다. 피터는 그 손을 보았다. 토니는 그 회사를 알았다. 자기 이름으로 서명해서 세운 회사였으니까. 뉴욕의 하늘이 열리던 그날 이후, 잔해 하나라도 엉뚱한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며 정부와 손잡고 만든 회사. 토니가 천천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 회사네." "…네." "그럼 그 사람, 내 회사 때문에 일을 잃은 거야? 빚까지 내서 시작한 일을." "…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날 빼앗기기 전에 실어 놓은 잔해 한 트럭을 몰래 가져갔어요. 그걸로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외계인 기술로요. 그리고 그 날개도요. 지금까지 4년째 몰래 팔고 있어요. 원래 세계에서는 8년을 그렇게 했고요." 부엌이 조용해졌다. 냉장고가 낮게 웅웅거렸다. 메이가 파이 접시를 내려놓고 토니를 보았다. 벤은 커피잔을 든 채 피터와 토니를 번갈아 보았다. 토니는 식탁 위의 촛불을 보고 있었다. 그 불빛이 토니의 눈 속에서 작게 흔들렸다. "…4년. 그 회사 세운 지 딱 그쯤 됐네. 그동안 나는 그 회사 서류에 서명만 했어. 누가 일을 잃었는지는 한 번도 안 물었고." "……" "원래 세계에서 그 사람이랑 어떻게 됐어." "…제가 혼자 쫓았어요. 열다섯 살 때요. 토니한테 인정받고 싶어서요. 토니는 위험하니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안 들었어요. 그러다 여객선이 두 동강 났고, 토니가 와서 겨우 붙잡았어요. 그리고 토니가 슈트를 뺏어 갔어요. 실망했다고요." 토니가 고개를 들었다. 피터를 보았다. 그 눈에 무언가가 스쳤다. 원래 세계의 자기가 열다섯 살의 피터에게 했다는 말에 대한 무언가. 벤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끼어들었다. "슈트를 뺏어? 열다섯 살짜리한테?" "…위험한 일 하지 말라고요. 그때는 저도 화가 났는데, 나중에 알았어요. 그 사람은 무서웠던 거예요. 제가 다칠까 봐." "그래도 애한테 실망했다고 하는 건 아니지. 그 세계의 스타크 씨는 좀 서툴렀네." 벤의 말에 토니가 헛기침을 했다. 메이가 웃음을 참으며 벤의 팔을 툭 쳤다. 피터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토니는 웃지 않았다. 식탁 너머로 피터를 보며 낮게 말했다. "…이번엔 혼자 쫓지 마. 그리고 나도 슈트 안 뺏어. 대신 같이 가. 처음부터." "…네. 그래서 말씀드린 거예요. 바로요." "그리고 그 툼스라는 사람. 쫓기 전에 내가 먼저 확인할 게 있어." 토니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메이에게 양해를 구하는 눈짓을 하고 부엌 창가로 걸어갔다. 피터는 그 등을 보았다. 토니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고, 페퍼가 받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고, 급한 일이라고. 토니의 목소리가 사업가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피해 복구 회사. 4년 전 뉴욕 일 직후에 정부랑 같이 세운 거. 그때 계약 빼앗긴 민간 업체 목록 있어? 철거 업체. 툼스라는 이름." […잠깐만요. 법무팀 자료에 있을 거예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 사람이 그 일 때문에 뭘 했는지 알게 됐어. 내일 아침까지 그 사람 계약서랑, 그때 회사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다 보내 줘. 보상금 줬는지, 그냥 내쫓았는지." […알겠어요. 내일 아침 8시까지 보낼게요.] "고마워. 늦게 미안." 토니가 전화를 끊고 창밖을 보았다. 맞은편 지붕의 물탱크 그늘이 가로등 불빛에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토니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자에 앉지 않은 채, 의자 등받이를 짚고 섰다. "원래 세계에서 내가 슈트 뺏었다며. 그 사람한테 화났었겠네. 그 툼스한테도." "…네. 그 사람이 나쁜 일을 하는 건 맞았으니까요." "근데 그 나쁜 일, 내 서명에서 시작된 거잖아. 그 세계의 나는 그걸 알았을까." "…모르셨을 거예요. 끝까지요. 저도 나중에야 알았어요. 그 사람 사정을요." 토니가 의자 등받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벤이 그 손을 보았다. 그리고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타크 씨. 나도 철물점 하면서 큰 가게들한테 손님 많이 뺏겼어요. 길 건너에 큰 체인점 생겼을 때, 한 2년은 장사 접어야 하나 생각했어요. 근데 그 체인점 사장을 미워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 사람은 나를 몰랐으니까. 서류에 내 가게 이름이 있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 "근데 만약에 그 사장이 어느 날 우리 가게에 와서, 당신 가게가 있는 줄 몰랐다, 미안하다 했으면. 나는 아마 그 사람을 용서했을 거예요. 나사 하나 팔아 주면서." 토니가 벤을 보았다. 벤은 다시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토니는 그 얼굴을 오래 보다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리고 탄 파이 한 조각을 집어 끝까지 다 먹었다. 이번엔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메이가 그걸 보며 만족한 듯 웃었다. 메이는 설거지를 하겠다며 일어서다가, 개수대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토니를 보았다. 젖은 행주를 손에 쥔 채로. "스타크 씨. 그 사람, 딸 있다고 했죠." "…네. 피터가 그러네요. 고등학생이래요." "그럼 그 아이는 지금쯤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피터도 그랬어요. 처음 이 집 왔을 때 우리가 그 녀석이 밤마다 뭘 하는지 몰랐던 것처럼." "……" "그 사람 잡더라도, 그 아이 앞에서는 잡지 마요. 아빠가 끌려가는 걸 보는 건, 아빠를 잃는 거랑 비슷한 거예요. 내가 알아요." 메이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개수대로 돌아섰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부엌을 채웠다. 토니는 그 등을 오래 보았다. 피터도. 메이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건지 둘 다 알았다. 이 세계의 메이는 다섯 살의 피터를 교차로에서 잃었다. 그 아이가 끌려가는 걸 본 게 아니라, 그 아이가 떠나는 걸 보았다. 피터는 탄 파이 접시를 들고 개수대로 가서 메이 옆에 섰다. 아무 말 없이 메이가 헹군 그릇을 받아 물기를 닦았다. 메이가 피터를 흘끗 보고, 어깨로 피터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그 세계의 나는 어땠어. 네가 밤마다 뭘 하는지 알았어?" "…나중에요. 한참 나중에. 제 방에서 슈트 벗다가 들켰어요. 숙모가 문 앞에 서서 소리를 질렀어요. 진짜 크게요." "그랬겠지. 나라도 질렀겠다." 메이가 웃으며 접시 하나를 피터에게 건넸다. 거품이 접시 가장자리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피터는 행주로 그 접시를 천천히 닦았다. 부엌 창문에 김이 서려 바깥의 가로등 불빛이 번져 보였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물소리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한동안 둘 사이를 채웠다. "그 세계의 숙모는 냉장고에 고지서를 붙여 놨었어요. 피자 가게 자석으로요. 월세 밀린 거, 전기세 밀린 거. 아침마다 그걸 보면서 시리얼 먹었어요. 숙모는 제가 그걸 안 보는 줄 알았대요." "……" "저 그래서 그 툼스라는 사람이 무서워요. 그 사람도 냉장고에 뭔가 붙여 놓고 살았을 것 같아서요. 그 사람 딸도 그걸 보면서 아침 먹었을 것 같아서요." 메이의 손이 개수대 안에서 멈췄다. 물이 계속 흘렀다. 메이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갑자기 조용해진 부엌에서, 메이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고 피터의 볼을 감쌌다. 손바닥이 따뜻하고 축축했다. 세제 냄새가 났다. "그 세계의 나한테 좀 미안하네. 그 애가 그걸 다 보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니." "…숙모 탓 아니었어요." "알아. 그래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 애가 그런 아침을 먹고도 이렇게 착하게 커서." 그날 밤, 피터는 1층 방의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옆방의 벽 너머에서 토니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전과 통화하는 모양이었다. 툼스의 창고 위치, 날개의 설계, 외계 잔해의 거래 경로. 피터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원래 세계의 열다섯 살을 떠올렸다. 그때 피터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토니에게도, 메이에게도. 혼자 알아내고, 혼자 쫓고, 혼자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이만큼 할 수 있다고. 그래서 슈트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그 열다섯 살은 여객선이 두 동강 나던 날, 바닷물 속에서 혼자 거미줄을 붙잡고 울었다. 피터는 원래 세계의 툼스를 떠올렸다. 마지막에, 무너진 날개의 잔해 속에서 피터가 끌어낸 그 남자. 그 남자는 감옥에 갇힌 뒤에도 피터의 정체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 아래층 감방의 누군가가 스파이더맨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모른다고 했다. 피터가 자기 딸이 사는 동네를 지켰고, 자기 목숨을 건졌으니까. 피터는 그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날개 아래에 있던 건 괴물이 아니라, 딸을 둔 한 아버지였다는 걸. 이번엔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그 사람을 잡는 일이, 원래 세계에서보다 훨씬 무거울 것 같아서. 벽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 똑. 피터는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손등으로 벽을 두 번 두드려 답했다. 똑, 똑. 벽 너머에서 토니가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리고 다시 두 번. 피터도 두 번. 메이가 아직 옆방이라고 정해 둔 그 벽을 사이에 두고, 둘은 한동안 그렇게 벽을 두드렸다. 피터는 벽에 이마를 대고 웃었다. 원래 세계의 열다섯 살에게는 이렇게 두드려 줄 벽이 없었다. 자정이 넘어서였다.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피터가 커튼을 걷자, 창밖에 토니가 서 있었다. 1층 창문 앞의 좁은 마당에, 카디건 차림으로. 옆방에서 나와 건물 앞을 한 바퀴 돌아온 모양이었다. 피터가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밤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잠이 안 와서." "…벽 두드리시지 그랬어요." "두드렸잖아. 그걸로 모자라서." 토니가 창틀에 팔꿈치를 괴었다. 피터도 창틀 안쪽에 팔을 얹었다. 둘 사이에 창틀 하나가 있었다. 창틀 위에서 원자로가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아까 벤 아저씨가 그러더라. 그 세계의 나는 좀 서툴렀다고. 애한테 실망했다고 하는 건 아니라고." "…서툴렀던 거 맞아요. 근데 저도 서툴렀어요. 그때는 둘 다 처음이었으니까요." "처음이라." "네. 그 사람도 누굴 지키는 게 처음이었고, 저도 누구한테 인정받고 싶은 게 처음이었어요. 둘 다 방법을 몰랐어요." 토니가 창틀에 턱을 괴고 피터를 보았다. 달빛이 그 얼굴의 반쪽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나머지 반쪽은 어둠에 잠겨, 꼭 두 사람이 한 얼굴을 나눠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피터는 그 얼굴을 보며 원래 세계의 그 사람과 이 사람을 동시에 떠올렸다. 이제는 그게 아프지 않았다. 한때는 아팠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몇 년 동안, 피터는 토니의 얼굴을 볼 때마다 다른 얼굴을 겹쳐 보았다. 마지막 전장에서 재가 내려앉던 그 얼굴. 숨이 가늘어지던 그 얼굴. 이 사람이 웃을 때마다 그 사람의 마지막이 떠올라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두 얼굴이 따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탄 파이를 끝까지 먹는 사람이었고, 벽을 두 번 두드리는 사람이었고, 자정에 남의 창문 앞에 카디건 차림으로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하지 못한 것들을 이 사람은 하나씩 하고 있었다. 피터는 그게 고마웠다. 그리고 그 고마움이 이제는 슬픔보다 컸다. 창틀 위의 원자로가 달빛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빛이 꺼진 지 오래인 그 원자로가, 오늘 밤에는 어쩐지 아주 조금 따뜻해 보였다. 피터는 창틀 위에 얹은 팔에 턱을 괴고 토니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달빛이 그 속눈썹 끝에 걸려 있었다. 토니가 그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피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원래 세계의 그 사람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이 사람 앞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들이 되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럼 이번엔 덜 서툴게 해 보자. 둘 다. 나는 너 안 믿는 척 안 하고, 너는 나한테 증명하려고 혼자 안 뛰고." "…네. 덜 서툴게요." "그리고 그 툼스라는 사람한테도. 그 사람이 서류 한 장 받던 날, 아무도 덜 서툴게 안 해 줬잖아. 이번엔 그거부터 하자." 토니가 손을 뻗어 창틀 너머로 피터의 머리칼을 한 번 헝클어뜨렸다. 손끝에 밤공기의 냉기가 묻어 있었다. 그 손이 피터의 머리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거둬졌다. 그리고 토니는 길게 하품을 했다. "이제야 졸리네. 너랑 얘기하면 꼭 이래." 토니가 옆방 쪽으로 걸어가다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피터는 창문을 닫지 않은 채 그 뒷모습을 보았다. 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계속 들어왔다. 피터는 그 공기를 맞으며 한참 창가에 서 있었다. 새벽 6시, 피터는 셔터 올라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철제 셔터가 드르륵 말려 올라가는 소리는 이 집의 알람 시계 같은 것이었다. 피터는 후드 티셔츠를 걸치고 계단을 내려갔다. 가게 앞 보도 위에서 벤이 빗자루로 밤새 떨어진 낙엽을 쓸고 있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길 건너 빵집 굴뚝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고, 갓 구운 빵 냄새가 골목을 따라 낮게 흘렀다. 벤이 피터를 보고 빗자루를 건넸다. 피터는 말없이 받아 들고 나머지 낙엽을 쓸었다. "…어젯밤에 그 얘기. 체인점 얘기요. 진짜였어요?" "진짜지. 저기 큰길 모퉁이에 생겼었어. 노란 간판 달고. 첫 달에 우리 손님 반이 거기로 갔어. 나사도 거기가 반값이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버티셨어요." "안 버텼어. 그냥 매일 셔터 올렸지. 그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어. 그러다 어느 날 그 체인점 직원이 우리 가게에 왔더라. 자기네 가게엔 없는 규격 나사 찾는다고. 그 뒤로 자주 왔어. 그 사람도 결국 사람이더라고." 벤이 쓰레받기를 내밀었다. 피터가 낙엽을 쓸어 담았다. 마른 잎들이 쓰레받기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벤이 셔터 옆의 녹슨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30년 동안 비바람에 바랜 글씨였다. 그 체인점은 3년 만에 문을 닫았다고 벤이 덧붙였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니라고. 그냥 둘 다 셔터를 올렸고, 한쪽이 먼저 내렸을 뿐이라고. 다음 날 아침 8시 정각, 토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페퍼가 보낸 문서였다. 토니는 3층 부엌의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 문서를 열었다. 피터는 그 옆에 앉아 함께 화면을 보았다. 툼스 철거 회사. 계약 해지 통보. 보상금 없음. 장비 반납 명령. 그리고 맨 아래에 작은 글씨의 서명 하나. 토니 스타크. 대리인 위임. 토니는 그 서명을 오래 보았다. 자기 이름이었다. 직접 쓴 것도 아니고, 누군가 위임을 받아 대신 찍은 서명. 그런데 자기 이름이었다. 토니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곧장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만에 넘어갔다. 아침 8시의 페퍼는 이미 사무실에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받았어. 보상금 없음이라고 돼 있던데." [네. 당시 법무팀 판단이었어요. 정부 계약이라 민간 업체에 보상할 법적 의무는 없다고요.] "의무 말고. 빚진 거. 4년 치 계산해 줘. 그 사람이 그때 받았어야 할 계약금, 그 뒤로 4년 동안 벌었어야 할 거. 이자까지." […회사 돈으로요? 이사회가 물어볼 거예요.] "물어보면 내가 답할게. 내 이름으로 서명된 서류니까. 그리고 그 사람 회사 이름으로 새 계약서도 하나 만들어 줘. 잔해 처리. 정식으로." [알겠어요. 오후까지 초안 보낼게요.] 토니가 전화를 끊었다. 피터는 그 옆얼굴을 보았다. 아침 햇살이 토니의 턱선을 따라 하얗게 번져 있었다. 밤새 잠을 설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눈은 어젯밤보다 맑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의 눈이었다. "…보상금도 없었네. 장비까지 반납하래. 빚내서 산 트럭을." "……" "그 사람 딸 있다며. 그 얘기도 했었지." "…네. 딸이 하나 있어요. 고등학생이요." "그럼 그 사람, 이 서류 받던 날 딸한테 뭐라고 했을까." 토니가 문서를 닫았다. 그리고 커피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창밖으로 퀸즈의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가로수의 노란 잎들이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토니가 창가에 서서 그 금빛을 보며 말했다. "오늘 그 사람 창고 가 보자. 비전이 위치 찾았어. 브루클린 쪽 폐공장. 근데 싸우러 가는 거 아니야. 이번엔 내가 먼저 말 걸 거야. 그 사람 일 빼앗은 회사 대표로서." "…원래 세계에서는 아무도 그 사람한테 말 안 걸었어요. 다들 그 날개만 봤어요." "그러니까 이번엔 그 사람 얼굴부터 보자고. 날개 말고."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니가 피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피터가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계단 아래에서 벤이 철물점 셔터를 올리러 나가며 둘을 올려다보았다. 어디 가냐고 묻는 눈이었다. 토니가 계단 난간 너머로 대답했다. "나사 하나 팔아 주러 가요. 아저씨 말대로." 벤이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계단을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작업복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토니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나사 하나였다. 가게에서 제일 흔한, 제일 싼 나사. "이거 줘요. 그 사람한테. 제일 비싼 거 말고 제일 흔한 거로. 철거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사를 제일 많이 써요. 비싼 거 들고 가면 그 사람, 당신이 또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생각할 거예요." "…돈은요." "외상이요. 그 사람이 다시 일 시작하면 받으러 갈게요." 벤이 그렇게 말하고는 셔터를 올리러 골목 쪽으로 걸어갔다. 토니가 손바닥 위의 나사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작고 평범한, 나사산이 촘촘한 쇳조각. 토니는 그걸 카디건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피터는 그 등을 보다가 토니를 돌아보았다. 토니의 얼굴에 어젯밤의 그늘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그늘 위로 아침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가 혼자 쫓았던 날개를, 이번엔 그 날개를 만들게 한 사람이 먼저 찾아가고 있었다. 싸우러가 아니라, 4년 늦은 사과를 하러. 브루클린의 강변은 녹슨 것들의 동네였다. 문 닫은 공장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깨진 창문마다 비둘기들이 드나들었다. 담벼락에는 몇 겹씩 덧칠된 낙서가 바래 있었다. 강 건너로 맨해튼의 유리 빌딩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이쪽 강변의 녹슨 지붕들과는 다른 세상처럼. 피터는 그중 가장 큰 공장 건물의 맞은편 옥상에 웅크린 채 그 공장을 내려다보았다. 벽돌 굴뚝 하나가 반쯤 무너진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공장 마당에 낡은 트럭 두 대가 서 있었다. 옆구리에 반쯤 벗겨진 페인트 글씨. 툼스 철거. 토니는 아머를 입지 않았다. 카디건 차림 그대로였다. 아머는 강변 어딘가의 하늘에 숨겨 두었다고 했다. 부르면 3초. 토니는 피터 옆에 쪼그려 앉아 그 트럭의 글씨를 오래 보았다. 4년 전 계약 해지 통보서에 적혀 있던 그 이름이었다. "…저 트럭들. 서류엔 반납하라고 돼 있었는데." "…반납 안 했나 봐요. 빚내서 산 거라서요." "그래. 나라도 안 했겠다." 토니가 카디건 주머니 안에서 나사를 굴렸다. 손가락 사이로 나사가 오가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피터는 그 소리를 들으며 토니를 보았다. 토니는 공장 마당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연습하는 사람처럼. 피터가 그 입 모양을 보다가 웃음을 참았다. "…지금 연습하시는 거예요? 사과요?" "연습 안 하면 이상한 말 나올 것 같아서. 나 사과 잘 못 해. 알잖아." "알아요. 근데 연습하면 더 이상해요. 그냥 하세요. 토니가 아까 아침에 서류 보면서 했던 말 그대로요. 빚진 거라고요." "…그 말 들었어?" "옆에 있었잖아요." 토니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 웃음 끝이 금방 꺼졌다. 토니가 공장의 무너진 굴뚝을 올려다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입김이 차가운 강바람에 흩어졌다. "원래 세계에서 그 사람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마지막에." "…세상이 그런 거라고 했어요. 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래를 안 본다고요. 저한테 그랬어요. 넌 아직 어려서 모른다고요. 그때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지금은 반만 틀렸다고 생각해요.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를 보러 내려오는 날도 있으니까요. 오늘처럼요." 토니가 피터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피터의 후드 모자를 머리 위로 씌워 주었다. 강바람이 차다는 듯이. 피터는 모자 아래에서 웃었다. 공장 안에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쇠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낮은 웃음소리와 라디오의 록 음악. 평범한 작업장의 소리였다. 피터는 그 소리를 들으며 숨을 골랐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공장을 처음 찾았을 때 몰래 숨어들었다. 그리고 들켰고, 싸웠고, 일을 키웠다. 이번엔 정문으로 들어갈 것이다. "정말 혼자 들어가실 거예요?" "응. 너는 천장에 있어. 보이지 않게. 내가 손 두 번 흔들면 내려오고, 안 흔들면 끝까지 거기 있어. 그 사람이랑 먼저 얘기해 볼 거야. 아이언맨 말고 회사 대표로." "…그 사람이 총 쏘면요." "그럼 네가 받아 주겠지. 로디처럼." 토니가 웃으며 피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카디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벤이 쥐여 준 그 나사였다. 토니는 그걸 손바닥 안에 꼭 쥔 채 옥상의 비상계단을 내려갔다. 피터는 거미줄을 쏘아 공장의 깨진 창문 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높은 철골 천장 아래, 어둠 속에 거꾸로 매달렸다. 천장에서 내려다본 공장은 생각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벽 한쪽에 금속 사물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사물함 문마다 테이프로 붙인 사진들이 있었다. 아이들 사진, 낚시하는 사진, 생일 케이크 앞에서 웃는 사진. 사물함 위에 보온 도시락 가방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옆 칠판에는 분필로 이번 주 점심 당번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화요일 칸에 누군가 장난스럽게 그려 놓은 독수리 낙서가 있었다. 피터는 그 낙서를 보며 숨을 죽였다. 원래 세계에서 이 공장에 숨어들었을 때, 피터는 무기만 보았다. 사물함도 도시락도 칠판도 보이지 않았다. 열다섯 살의 눈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공장 안은 넓고 어두웠다. 깨진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먼지 속에서 기다란 기둥처럼 비스듬히 서 있었다. 그 빛의 기둥 사이로 작업대들이 늘어서 있었고, 작업대 위에는 이상한 것들이 놓여 있었다. 보랏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금속 조각들. 뉴욕의 하늘에서 떨어진 외계 우주선의 잔해였다. 그 잔해를 쪼개고 깎아 만든 총, 장갑,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장치들. 작업대 앞에서 안경을 쓴 마른 남자 하나가 용접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그 옆에서 덩치 큰 남자 둘이 상자를 나르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한 남자의 팔에는 노란 금속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공장의 가장 안쪽, 거대한 무언가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중년의 남자. 희끗한 머리칼, 작업복, 굵은 팔뚝. 그 남자가 손걸레로 무언가를 닦고 있었다. 피터는 그 무언가를 보는 순간 숨이 걸렸다. 날개였다. 독수리의 날개처럼 펼쳐진, 그러나 독수리보다 몇 배는 거대한 금속 날개. 날개 끝마다 칼날 같은 깃털이 달려 있었다. 그 날개를 닦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오래 아껴 온 물건을 대하는 손이었다. 공장의 철문이 삐걱 열렸다. 공장 안의 모든 소리가 멈췄다. 용접 불꽃이, 망치 소리가, 라디오의 음악이. 문간에 카디건 차림의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두 손을 어깨 높이로 든 채. 덩치 큰 남자 둘이 동시에 총을 집어 들었다. 노란 장갑을 낀 남자가 장갑을 들어 올리자 그 끝에서 푸른 전기가 지직거렸다. 안경 쓴 남자가 용접기를 내려놓고 작업대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날개를 닦던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문간의 남자를 보았다. 그 얼굴이 굳었다. "…이야. 이게 누구야. 토니 스타크가 우리 같은 사람 사는 데까지 다 오시고." "에이드리언 툼스 씨죠. 툼스 철거." "한때는 그랬지. 당신 회사가 그 이름 지우기 전까지." 툼스가 손걸레를 작업대 위에 던졌다. 그리고 문간의 토니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총을 든 남자들에게 손짓했다. 쏘지 말라는 손짓이었다. 아직은. 툼스가 토니 앞 몇 걸음 거리에서 멈춰 섰다. 햇살의 기둥 하나가 둘 사이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먼지가 그 빛 속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 "아이언맨 옷은 어쩌고 그 꼴로 왔어. 우리가 무섭지 않아?" "무서워요. 근데 아이언맨으로 오면, 당신이 또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요." "…또?" "4년 전에 당신 일 빼앗은 회사요. 제 이름으로 세운 거예요. 그날 당신이 받은 통지서, 맨 아래 서명. 그거 제 이름이에요. 제가 직접 쓴 건 아니지만, 제 이름이에요." 툼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장 안이 조용했다. 천장에 매달린 피터의 귓가에 자기 심장 소리만 크게 울렸다. 툼스가 짧게 웃었다. 웃음이 아니었다. 오래 삭혀 온 무언가가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거 확인하러 왔어? 당신 이름 맞다고?" "아니요. 사과하러 왔어요." 툼스의 웃음이 멈췄다. 토니가 든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카디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덩치 큰 남자들이 총구를 들어 올렸다. 노란 장갑의 전기가 커졌다. 피터는 천장에서 손목을 들었다. 토니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그 손바닥 위에 나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작고 평범한, 나사산이 촘촘한 쇳조각. 토니가 그 손바닥을 툼스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나사요. 퀸즈의 철물점에서 왔어요. 그 가게 주인이 그러더라고요. 큰 체인점에 손님 다 뺏겼을 때, 그 사장이 와서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했으면 용서했을 거라고. 나사 하나 팔아 주면서. 그래서 가져왔어요. 제일 흔한 걸로. 철거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쓰는 거라더라고요." "……" "4년 전에 그 서류에 제 이름이 들어갈 때, 저는 누가 일을 잃는지 안 물었어요. 그 잔해가 엉뚱한 손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 엉뚱한 손이 사실 빚내서 트럭 산 사람의 손이라는 건 생각 못 했어요. 미안합니다. 정말로요." 툼스는 그 손바닥 위의 나사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공장 안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햇살의 기둥 속에서 먼지만 천천히 떠다녔다. 툼스의 턱이 굳어 있었다. 그 굳은 턱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러다 툼스가 고개를 들어 토니를 보았다. 그 눈에 무언가가 있었다. 분노였다. 그런데 그 분노 아래에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4년 늦었어." "알아요." "그 4년 동안 내가 뭘 했는지 알아? 인부들 월급 주려고, 대출 갚으려고, 딸 학비 대려고. 당신들이 치워야 한다던 그 쓰레기를 주워서 무기를 만들었어. 그걸 팔았고. 그 돈으로 집 샀고, 딸을 좋은 학교에 보냈어.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그 나사 하나로?" "나사 하나로 끝내자는 거 아니에요. 그 회사 계약, 다시 줄게요. 당신 회사한테. 툼스 철거한테. 잔해 치우는 일. 정식으로. 보상금도요. 4년 치." 공장 안이 술렁였다. 덩치 큰 남자들이 서로를 보았다. 작업대 뒤에 숨은 안경 쓴 남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노란 장갑의 남자가 장갑을 조금 내렸다. 툼스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토니를 보고 있었다. 그 눈에 의심이 차올랐다. 4년 동안 쌓인 의심이었다. "…그 대신 뭘 원하는데. 이거 다 넘기라고? 우리가 만든 거. 그리고 감옥 가라고?" "그 무기들은 넘겨야 해요. 그건 진짜로 위험한 거니까. 근데 감옥은… 그건 제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다만 당신이 먼저 넘기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 변호사도, 증언도." "웃기지 마." 툼스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손이 등 뒤의 작업대를 짚었다. 그 작업대 위에 작은 원격 장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피터의 스파이더 센스가 비명을 질렀다. 천장 위에서 피터는 그 장치를 보았다. 툼스의 손가락이 그 장치 위에 얹혔다. "……" "당신 같은 사람들은 늘 그래.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우리가 무릎 꿇으면 그때 손 내밀어. 4년 전에도 그랬지. 그 서류 들고 온 놈들도 웃으면서 그랬어. 법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미안하다고." "툼스 씨…" "오늘 저녁에 손님이 와. 이거 사러. 그 손님들한테 돈 받으면 딸 대학 등록금이야. 당신 회사 계약서보다 그게 더 확실해.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아이언맨 씨, 나는 당신 나사 안 받아." 툼스가 원격 장치를 눌렀다. 공장 안쪽의 날개가 깨어났다. 금속 깃털들이 쩌렁쩌렁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날개 아래의 엔진이 푸른 불꽃을 토해 냈다. 덩치 큰 남자들이 총을 들어 올렸다. 노란 장갑에서 푸른 전기가 터져 나왔다. 그 전기가 토니를 향해 날아갔다. 피터는 천장을 박차고 떨어졌다. 토니가 손을 흔들지 않았는데도. 거미줄을 쏘아 노란 장갑의 남자 팔을 낚아챘다. 전기가 빗나가 공장 바닥의 쇠기둥을 때렸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피터는 토니 앞에 내려섰다. 빨갛고 파란 슈트로. 토니가 등 뒤에서 혀를 찼다. 손 두 번 흔들면 내려오라고 했잖아, 하는 소리였다. 피터는 대답 대신 손목을 다시 들었다. 덩치 큰 남자들의 총을 거미줄로 낚아채 천장에 붙였다. 툼스가 날개 안으로 들어섰다. 날개의 금속 팔이 툼스의 몸을 감싸며 맞물렸다. 독수리 같은 투구가 그 얼굴을 덮었다. 투구의 눈구멍에서 초록빛이 켜졌다. 날개가 크게 한 번 펄럭였다. 공장 안의 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툼스가 날개를 펼친 채 피터를 내려다보았다. 투구 너머의 목소리가 금속성으로 울렸다. "……" "…스파이더맨. 너구나. 요즘 퀸즈에서 날아다니는 거. 아이언맨이랑 붙어 다니는." "툼스 씨. 그 날개로 오늘 저녁 거래 가지 마세요. 그 손님들이 사는 무기로 누가 죽을 거예요. 그리고 그 손님들도 당신을 배신할 거예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알아요. 그리고 당신 딸 이름도 알아요. 리즈. 그 애가 아빠가 하는 일을 알게 되면, 그 애가 제일 무너질 거라는 것도요." 투구의 초록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날개가 허공에서 멈칫했다. 피터는 그 반 박자를 보았다. 툼스의 손이 날개의 손잡이 위에서 굳어 있었다. 그런데 그 반 박자는 금방 지나갔다. 날개가 다시 크게 펄럭였다. 툼스가 공장의 지붕을 향해 솟구쳤다. 녹슨 철판이 찢어지며 하늘이 열렸다. 쏟아지는 햇살과 철판 조각 사이로 날개가 사라지기 직전, 툼스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이 토니의 발치에 떨어져 굴렀다. 나사였다. 토니가 내밀었던 그 나사. 툼스가 언제 집어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나사가 돌려보내진 거였다. 토니가 발치의 나사를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이 굳었다. 피터는 거미줄로 남은 남자들을 묶으며 그 얼굴을 보았다. 거절당한 사과. 원래 세계에서 아무도 내밀지 않았던 사과가, 이번엔 내밀어졌다가 돌려보내졌다. 공장 안이 조용해졌다. 거미줄에 묶인 남자들이 욕설을 내뱉었다. 안경 쓴 남자는 작업대 뒤에서 두 손을 들고 나왔다. 피터는 그 남자를 알았다. 원래 세계에서 툼스의 기술자였던 사람. 피터는 그 남자의 손목을 가볍게 거미줄로 묶었다. 남자가 안경 너머로 피터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툼스 씨, 잡혀가는 거예요? 우리 다?" "…모르겠어요. 근데 저 사람은 툼스 씨를 잡으러 온 게 아니라, 사과하러 왔어요. 아까 들으셨잖아요." "…들었어요. 근데 그런 거 처음 봐서요. 높은 사람이 우리한테 미안하다고 하는 거. 4년 동안 한 번도 없었어요." "이제 있었네요."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묶인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피터를 올려다보았다. 안경알 너머의 눈이 망설이고 있었다. "…사장님은 날개 손볼 때마다 작업대 위에 사진 한 장 올려놔요. 딸 사진이요. 졸업 앨범에서 오린 거. 그거 보면서 나사 하나하나 조여요. 우리한텐 말 안 하는데, 다 알아요." "……" "그 사진 지금도 저기 있어요. 날개 있던 자리 옆에. 사장님이 급하게 가느라 못 챙겼네요." 피터는 남자가 턱으로 가리킨 곳을 보았다. 날개가 서 있던 자리, 기름 얼룩이 둥글게 번진 바닥 옆의 작업대. 그 위에 손바닥만 한 사진 한 장이 공구들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피터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사진 속에서 긴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웃고 있었다. 졸업 가운을 입고, 모자를 손에 쥔 채. 사진 귀퉁이가 손때로 둥글게 닳아 있었다. 피터는 그 사진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그 사람이 돌아와서 찾을 수 있게. 남자가 피터를 오래 보다가, 묶인 손목을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체념인지 안도인지 모를 웃음이었다. 피터는 그 웃음을 뒤로하고 토니에게 걸어갔다. 토니는 아직 그 나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터가 쪼그려 앉아 그 나사를 주웠다. 손바닥 위에 올려 토니에게 내밀었다. "…돌려보낸 거 아니에요." "……" "던지기 전에 잠깐 쥐고 있었어요. 그 사람이요. 날개 손잡이 위에서요. 제가 천장에서 봤어요. 그 사람 손이 이걸 쥐고 한참 망설였어요. 그리고 던졌어요. 근데 바닥에 던진 게 아니라, 토니 발치에 던졌어요. 정확히요." "……" "그건 거절이 아니라, 아직이라는 거예요. 버키 씨한테 토니가 그랬던 것처럼요. 오늘은 아니라는 거요." 토니가 피터의 손바닥 위의 나사를 보았다. 그리고 피터를 보았다. 굳어 있던 얼굴이 천천히 풀렸다. 토니가 그 나사를 집어 카디건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공장 지붕의 찢어진 구멍을 올려다보았다. 그 너머로 강 건너 맨해튼의 유리 빌딩들이 햇살 속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날개는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공장 지붕이 뚫리는 소리를 듣고 신고한 모양이었다. 거미줄에 묶인 남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노란 장갑의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안경 쓴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토니가 사이렌 소리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묶인 남자들을 하나씩 보았다. 사물함의 사진들을, 도시락 가방들을, 칠판의 독수리 낙서를. 토니가 피터에게 고갯짓을 했다. 피터는 그 뜻을 알아듣고 거미줄을 하나씩 끊었다. "무기는 두고 가요. 전부. 그리고 집에 가요." "…경찰 오는데요." "경찰한텐 내가 말할게요. 폐공장에서 고철 정리하던 사람들이 지붕 무너지는 바람에 놀라서 흩어졌다고. 월요일에 회사로 와요. 툼스 철거 직원이라고 하면 들여보내 줄 거예요. 사장님 오기 전에 미리 일 배워 두면 좋잖아요." 남자들이 서로를 보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안경 쓴 남자가 먼저 일어섰다. 사물함으로 걸어가 자기 도시락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 뒤를 하나씩 따랐다. 노란 장갑의 남자가 마지막으로 장갑을 벗어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장갑을 벗은 맨손이 생각보다 작고 투박했다. 남자가 토니 앞을 지나며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오늘 저녁 거래라고 했지." "…네. 원래 세계에서는 여객선 위에서였어요." "그럼 거기서 다시 내밀어 보자. 이 나사. 이번엔 받을 때까지." 토니가 손목의 칩을 두드렸다. 강변 하늘 어딘가에서 붉은 아머가 날아오는 굉음이 들렸다. 피터는 그 소리를 들으며 공장의 찢어진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날개를 혼자 쫓다가 바닷물에 빠졌다. 이번엔 그 날개에게 나사 하나를 건네러 둘이 쫓아가고 있었다. 오후 3시의 철물점은 한가했다. 가을볕이 진열창을 통과해 나무 바닥 위에 비스듬한 사각형을 그렸고, 그 사각형 안에서 먼지가 천천히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계산대 위의 낡은 라디오에서 야구 중계가 지직거렸다. 9회 말, 투아웃. 벤은 계산대 뒤의 높은 의자에 앉아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채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가끔 연필 끝으로 숫자를 짚으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가슴의 흉터 자리를 무의식중에 손바닥으로 문지르면서. 2시 반쯤 동네 꼬마 하나가 열쇠를 복사하러 왔었다. 앞니가 빠진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였다. 엄마가 출근하면서 쥐여 준 열쇠를 잃어버릴까 봐 하나 더 만들어 두겠다고, 동전 지갑을 탈탈 털어 계산대 위에 쏟았다. 벤은 그 동전을 세는 척하다가 반만 받았다. 열쇠 복사기가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동안 아이는 계산대에 턱을 괴고 진열대의 반짝이는 나사들을 구경했다. 벤이 새 열쇠에 빨간 고무 덮개를 씌워 아이 목에 걸어 주었다. 아이가 고맙다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뛰어나갔다. 문 위의 종이 그 뒷모습을 따라 쨍하고 울렸다. 벤은 그 종소리를 들으며 한참 웃었다. 이 가게에서 30년 동안 들어 온 소리였다. 오늘 오후도 그 소리처럼 평범하게 지나갈 줄 알았다. 문 위의 종이 쨍하고 울렸다. 벤이 고개를 들었다. 손님 둘이 들어서고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덩치 큰 남자, 그리고 그 뒤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마른 남자. 덩치 큰 남자의 오른팔에 노란 금속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공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철물점을 30년 한 벤의 눈에는 그게 공구가 아니라는 게 보였다. 이음새의 모양이, 손등의 둥근 장치가, 무언가를 고치는 물건이 아니라 부수는 물건이었다. "어서 와요. 뭐 찾으시는데." "여기가 그 철물점 맞지. 아이언맨이 나사 사 간다는." "…아이언맨이 손님인 건 맞는데요. 나사 찾으시면 저쪽 진열대예요." 덩치 큰 남자가 웃었다. 그리고 진열대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계산대 앞으로 걸어왔다. 노란 장갑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쿵, 하고 계산대가 울렸다. 라디오의 야구 중계가 그 진동에 지직거렸다. 마른 남자가 문 쪽에 서서 바깥을 살폈다. 망보는 자세였다. 벤은 그 자세를 알았다. 1년 전 식료품점에서 피터가 이야기해 준 그 아이도 그렇게 문가에 서 있었다고 했다. "오늘 아침에 아이언맨이 우리 사장님 찾아왔어. 나사 하나 들고. 미안하다나 뭐라나. 근데 그 나사가 이 가게에서 나왔다면서." "…그 나사, 내가 줬어요. 왜요." "그러니까 전해 달라고. 아이언맨한테. 그 나사로 우리 사장님 마음 떠보지 말라고. 오늘 저녁 일에 끼어들면, 다음엔 이 가게 셔터가 안 올라갈 거라고." 장갑의 손등에서 푸른 전기가 지직거렸다. 계산대 위의 동전 접시가 미세하게 떨렸다. 벤은 그 푸른빛을 보았다. 그리고 돋보기를 천천히 벗어 계산대 위에 내려놓았다. 장부를 덮었다. 의자에서 일어섰다. 가슴의 흉터가 당겨 얼굴이 아주 잠깐 찡그려졌다. 벤은 그걸 감추지 않았다.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덩치 큰 남자와 마주 섰다. "……" "당신들 사장이 뭘 잃었는지는 몰라요. 아침에 그 사람한테 들었어요. 일을 뺏겼다고. 빚내서 산 트럭까지 내놓으라고 했다고. 그건 억울했겠네요. 나도 큰 가게한테 손님 다 뺏겨 봐서 알아요." "그럼 알 거 아냐. 우리가 왜 이러는지." "알죠. 근데 당신들이 잃은 걸 우리 동네에서 찾으면 안 되지. 이 동네 사람들은 당신들 일 안 뺏었어요. 이 가게도 안 뺏었고. 우리는 그냥 나사 팔아요. 30년째." 덩치 큰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갑의 전기가 커졌다. 푸른 불꽃이 계산대 모서리를 핥았다. 나무가 그을리는 냄새가 났다. 문가의 마른 남자가 초조하게 바깥을 보았다. 벤은 물러서지 않았다. 계산대에 두 손을 짚은 채 덩치 큰 남자를 똑바로 보았다. 1년 전 그 골목에서, 소년 하나를 등 뒤에 감추고 총구 앞에 섰던 그 자세로. "그 장갑. 그거 쏘면 이 가게 다 타요. 그럼 당신들 사장 딸은 뉴스에서 아빠 부하가 동네 철물점 태웠다는 거 보겠네요. 그거 원해요?" "…늙은이가 말이 많네." "말 많은 거 맞아요. 근데 이번엔 총 맞아도 안 비킬 거예요. 지난번에 총 맞아 봐서 알아요. 생각보다 안 죽더라고요." 덩치 큰 남자가 잠깐 멈칫했다. 그 반 박자 사이에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하얀 거미줄이었다. 장갑을 낀 팔을 정확히 감아 계산대 위에 단단히 붙였다. 푸른 전기가 거미줄 사이에서 갈 곳을 잃고 지직거리다 꺼졌다. 덩치 큰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팔을 잡아당겼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천장의 환기창 옆에 빨갛고 파란 그림자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피터였다. 마스크 너머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브루클린에서 퀸즈까지 지붕을 미친 듯이 건너온 숨이었다. 비전이 철물점 앞 감지기에 노란 장갑이 잡혔다고 알려 온 순간부터. "…삼촌. 괜찮으세요." "괜찮아. 말만 했어. 근데 너 좀 늦었다. 이 사람이 내 계산대 그을렸어." 문가의 마른 남자가 달아나려 몸을 돌렸다. 그 앞에 붉은 아머 하나가 내려앉았다. 문 위의 종이 그 진동에 미친 듯이 울렸다. 토니였다. 투구를 연 채 마른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마른 남자가 두 손을 들고 뒷걸음질 쳤다. 토니가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계산대 위에 붙은 노란 장갑, 그을린 계산대 모서리, 그리고 그 앞에 두 손을 짚고 선 벤. 토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저씨." "괜찮아요, 괜찮아. 둘 다 그 얼굴 하지 마요. 진짜 말만 했다니까." 피터가 천장에서 내려와 덩치 큰 남자 앞에 섰다. 거미줄로 붙은 팔을 사이에 두고. 덩치 큰 남자가 피터를 노려보았다. 피터는 그 눈을 똑바로 보며 낮게 물었다. "오늘 저녁 거래. 여객선이죠. 스태튼 아일랜드 가는." "…네가 어떻게 알아." "알아요. 그리고 거기 오는 손님들, 툼스 씨한테 돈 안 줄 거라는 것도 알아요. 무기만 받고 쏠 거예요. 툼스 씨를요.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요." "…거짓말." "툼스 씨 딸 대학 등록금 얘기, 아침에 들었어요. 그 사람이 오늘 저녁에 그 배에서 쓰러지면, 그 등록금은 누가 내요." 덩치 큰 남자의 얼굴이 흔들렸다. 문가의 마른 남자가 토니를 피해 숨을 죽이고 있었다. 벤이 계산대 너머에서 덩치 큰 남자를 보다가, 계산대 아래의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나사였다. 아침에 토니에게 쥐여 준 것과 똑같은, 제일 흔한 나사. 벤이 그걸 덩치 큰 남자의 붙들린 손 옆으로 밀었다. "이거 하나 더 가져가요. 당신 사장한테. 아이언맨이 아니라 철물점 주인이 주는 거라고. 외상이라고. 다시 일 시작하면 받으러 간다고." "……" "그리고 오늘 저녁에 그 배 타지 말라고 전해요. 저 녀석 말 맞을 거예요. 저 녀석이 그런 말 할 때는 늘 맞더라고요. 1년 전에 내가 총 맞을 때도 저 녀석이 미리 알았어요." 덩치 큰 남자가 계산대 위의 나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벤을 보았다. 그을린 계산대, 흉터를 문지르는 손, 물러서지 않는 눈. 덩치 큰 남자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피터는 그걸 보고 거미줄을 풀었다. 노란 장갑이 계산대에서 떨어졌다. 덩치 큰 남자는 장갑을 쥔 채 잠깐 서 있다가, 계산대 위의 나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토니가 투구를 연 채 길을 비켜 주었다. 마른 남자가 그 뒤를 허겁지겁 따랐다. 문 위의 종이 다시 쨍하고 울렸다.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라디오에서 9회 말 끝내기 안타 소식이 터져 나왔다. 해설자의 고함이 낡은 스피커를 찢을 듯 울렸다. 벤이 계산대에 짚었던 손을 떼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피터가 마스크를 벗고 계산대를 돌아 벤에게 달려갔다. 토니도 아머를 입은 채 문간에서 계산대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삼촌!" "아이고, 괜찮다니까. 다리만 좀 풀렸어. 저 장갑 지직거리는 소리, 생각보다 무섭더라." "…아저씨. 왜 안 비키셨어요. 비전이 저희한테 알렸을 때부터 계속 계산대 앞에 서 계셨잖아요. 감지기로 다 봤어요." "비키면 뭐 해요. 저 사람들이 가게 부수고 갔겠지. 서 있으니까 말이 통하잖아요. 말이 통하면 안 부숴요. 30년 장사하면서 배운 거예요." 벤이 그렇게 말하며 계산대 밑의 보온병을 꺼냈다. 아침에 메이가 채워 준 커피였다. 뚜껑을 돌려 따르려는데, 보온병 주둥이가 컵 가장자리에 부딪혀 달그락거렸다. 한 번, 두 번. 커피가 컵 밖으로 흘러 장부 위에 갈색 얼룩을 만들었다. 벤이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벤이 보온병을 내려놓고 그 손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피터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말은 통했는데 손은 안 통하네. 이것 봐라. 다 끝나고 나서 떨려." "……" "무서웠어, 피터. 솔직히. 저 장갑 지직거릴 때. 1년 전 그 골목 생각나더라. 근데 비키면 안 될 것 같았어. 내가 비키면 저 사람들이 다음엔 메이 있을 때 올 것 같아서." 피터는 계산대를 돌아 벤 옆에 쪼그려 앉았다. 벤의 떨리는 두 손을 자기 손으로 감쌌다.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 손톱 밑에 낀 쇳가루, 손등의 검버섯. 30년 동안 나사를 세고 열쇠를 깎은 손이었다. 피터는 그 손을 쥔 채 고개를 숙였다. "…원래 세계의 삼촌도 그랬어요. 그 골목에서요. 무서웠을 텐데 앞으로 나왔어요. 저 때문에요. 그리고 저는 반 박자 늦었어요." "이번엔 안 늦었잖아." "늦었어요. 계산대 탔잖아요." "그건 계산대고. 나는 멀쩡해. 네가 왔잖아, 피터. 늦었든 안 늦었든 왔어. 그 세계의 나도 아마 그걸로 됐을 거야. 네가 왔으면." 피터의 목이 메었다. 벤이 떨리는 손을 빼서 피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툴고 투박한 손길이었다. 다섯 살 아이에게 하던 것처럼. 토니가 그 둘을 보며 아머의 장갑을 쥔 채 서 있었다. 그 눈가가 조금 붉었다. 토니가 투구를 완전히 벗었다. 그 얼굴이 아직 하얗게 질려 있었다. 토니는 계산대 위의 그을린 자국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리고 벤을 보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대신 아머의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벤의 어깨를 붙잡았다. 짧고 단단하게. 벤이 그 손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 얼굴. 그 녀석이랑 똑같네. 둘이 얼굴이 닮아 가요." "…닮아 가는 거 말고요. 아저씨가 또 총 앞에 서실까 봐 무서워서 그래요." "총은 아니었잖아요. 장갑이었지." "아저씨." "알았어요, 알았어. 다음엔 셔터 내리고 숨을게요. 약속해요." 토니가 그 웃음을 못 믿겠다는 얼굴로 손목의 칩을 두드렸다. 아머의 가슴판에서 가느다란 푸른빛이 뻗어 나와 벤의 가슴 위를 천천히 훑었다. 벤이 그 빛을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프라이데이. 아저씨 가슴 쪽 좀 봐 줘." [스캔 중입니다. 심박수 분당 112회, 다소 빠르지만 위험 수준은 아닙니다. 지난해 총상 부위의 흉터 조직에 이상은 없습니다. 다만 혈압이 높습니다. 앉아서 물을 드시길 권합니다.] "들었죠. 물 드세요. 지금." "…내 가게에서 나한테 명령하는 기계 목소리는 처음이네." 벤이 투덜거리면서도 계산대 밑의 물병을 꺼내 마셨다. 토니는 그 물병이 비워질 때까지 벤을 지켜보았다. 팔짱을 낀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피터는 그 모습을 보며 알았다. 1년 전 그 총소리 이후로, 토니는 벤의 심장 박동을 아머의 화면 한쪽에 늘 띄워 두었다. 피터는 그걸 알면서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벤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숨을 생각이 하나도 없는 웃음이었다. 피터는 그 웃음을 보며 숨을 내쉬었다. 원래 세계의 벤도 그랬다. 위험한 순간에 늘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버릇 때문에 그 골목에서 떠났다. 이 세계의 벤도 똑같은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버릇이 총 앞이 아니라 말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말이 통했다. 계산대 위의 낡은 전화기가 울렸다. 벤이 수화기를 들었다. 메이였다. 병원 휴게실에서 거는 전화인지, 수화기 너머로 호출 방송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들렸다. [여보, 아까 가게 앞에 무슨 일 있었어? 길 건너 세탁소 아줌마가 문자 보냈던데. 아이언맨이 가게 앞에 내려왔다고.] "아, 그거. 스타크 씨가 나사 사러 왔어. 급하게." […아이언맨 옷 입고?] "급하면 그럴 수도 있지. 걱정 마. 별일 없어. 오늘 저녁 좀 늦게 먹자. 애들이 일이 있대." 벤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피터와 토니를 보고 한쪽 눈을 찡긋했다. 피터와 토니가 서로를 보았다. 토니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거짓말 진짜 못 하신다. 피터는 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는 오늘 밤 다 알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벤에게 한참 잔소리를 할 것이었다. 그 잔소리마저 피터에게는 이 세계가 주는 선물 같았다. 피터는 계산대 위의 그을린 자국을 보았다. 나무가 검게 탄 자리. 손톱만 한 크기였다. 벤이 그 자국을 손가락으로 쓸며 혀를 찼다. "이 계산대, 30년 된 거야.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고." "…제가 다시 칠해 드릴게요. 니스로요." "됐어. 그냥 둬. 오늘 일 기억하라고 남겨 둘 거야. 철물점 주인이 아이언맨이랑 스파이더맨 기다리면서 혼자 버틴 날." "……" "그리고 그 장갑 남자. 나사 가져갔잖아. 그 사람 사장한테 전하겠지. 아이언맨 나사랑 철물점 나사, 두 개 받으면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겠어?" 토니가 그 말에 카디건 주머니가 아닌, 아머의 허리 장치를 더듬었다. 아침의 그 나사가 거기 들어 있었다. 툼스가 발치에 던지고 간 나사. 토니가 그걸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벤이 그 나사를 보았다. 그리고 토니를 보았다. "…그 사람이 돌려보냈어요. 아침에." "그럼 이번엔 두 개 들고 가요. 내 거랑 당신 거. 하나는 사과, 하나는 외상. 받는 사람이 고르게." 벤이 그 나사를 다시 토니 쪽으로 밀었다. 토니는 그 나사를 오래 내려다보다가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머의 허리 장치에 다시 넣었다. 조심스럽게. 피터는 그 손을 보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오후에 혼자 툼스의 부하들을 쫓다가 워싱턴까지 끌려갔다. 이번엔 퀸즈의 작은 철물점 계산대 앞에서, 그을린 나무 자국 하나와 나사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셋이 서 있었다. 그사이 진열창 너머로 얼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가게 앞에 아이언맨이 내려앉았다는 소문이 골목을 한 바퀴 돈 모양이었다. 세탁소 아줌마가 앞치마를 두른 채 진열창에 이마를 붙였고, 그 옆에 피자 가게 청년이 밀가루 묻은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서 있었다. 아까 열쇠를 복사해 간 앞니 빠진 여자아이도 빨간 고무 덮개 열쇠를 목에 건 채 엄마 다리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벤이 그 얼굴들을 보고 계산대 뒤에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별일 없다고, 다들 가던 길 가라고. 그런데 아무도 가지 않았다. 여자아이가 진열창 너머로 피터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스크를 벗은 피터가 아니라, 계산대 옆에 놓인 빨갛고 파란 마스크에게. 피터는 그 마스크를 집어 들어 아이 쪽으로 흔들어 주었다. 아이가 폴짝폴짝 뛰었다. 벤이 그걸 보며 한숨을 쉬고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30년 동안 이 가게 진열창 앞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건 개업식 날 이후 처음이라고. 라디오에서 경기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벤이 라디오의 볼륨을 줄이며 시계를 보았다. 4시 반. 여객선이 떠나기까지 두 시간 남짓. 벤이 피터와 토니를 번갈아 보며 셔터 열쇠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일찍 닫을게요. 메이한테 저녁 늦는다고 전해 놓을 테니까, 갔다 와서 먹어요. 둘 다." "…규칙이니까요." "그래. 규칙이니까. 그리고 그 툼스라는 사람도, 다시 일 시작하면 한번 데려와요. 우리 식탁에. 소금 많이 넣은 수프 먹으면 사람 마음이 좀 풀려요." 피터와 토니가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벤이 셔터를 내리러 가게 밖으로 나섰다. 오후의 햇살이 그 등 뒤에서 금빛으로 기울고 있었다. 피터는 마스크를 다시 쓰며 토니를 보았다. 토니가 투구를 다시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태튼 아일랜드로 가는 여객선이 저녁 바다 위에서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사 두 개를 실은 채로. 스태튼 아일랜드로 가는 여객선은 주황색이었다. 저녁 햇살을 받은 선체가 잘 익은 귤껍질처럼 빛났다. 선착장에는 퇴근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회사원들, 장바구니를 든 노부부, 배낭을 멘 관광객들. 갈매기들이 머리 위를 맴돌며 끼룩거렸고, 바닷바람에 디젤 기름 냄새와 짠 내가 섞여 흘러왔다. 피터는 후드 티셔츠의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그 줄 끝에 서 있었다. 마스크와 슈트는 배낭 안에 있었다. 옆에서 토니가 야구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는 척하고 있었다. 아머는 바다 위 구름 속에 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다니는 거 처음이에요. 토니랑 여객선 타는 거요." "나도 처음이야. 여객선 자체가. 공짜라며. 이거." "네. 뉴욕에서 제일 좋은 공짜예요. 자유의 여신상 보이는 자리는 오른쪽 난간이고요." "…넌 이런 걸 다 알더라." 토니가 선글라스 너머로 피터를 흘끗 보았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피터는 그 얼굴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배를 몇 번이나 탔다. 학교 견학으로 한 번, 메이 숙모와 주말 나들이로 몇 번, 그리고 이 저녁에 한 번. 그때는 혼자였다. 슈트 안에 몰래 심어진 추적 장치도 모른 채, 토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이 배에 올랐다가 반으로 갈라지는 갑판 위에서 거미줄 몇 가닥으로 버텼다. 배가 출렁이기 전, 둘은 잠깐 위층 갑판의 오른쪽 난간에 섰다. 바닷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왔다. 짠 내와 함께 갈매기 울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맨해튼의 빌딩들이 저녁노을을 받아 하나씩 주황색으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 위에 초록빛 여인이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토니가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올리고 그 여인을 오래 보았다. "…가까이서 본 적이 없어. 이렇게 낮은 데서는." "하늘에서만 보셨죠." "응. 날면서 지나가기만 했지. 아버지는 이런 배 안 탔어. 우리 집은 헬기였어. 어릴 때 한 번 타 보고 싶다고 했다가 혼났어. 스타크 집안 애가 공짜 배를 타면 신문에 난다고." "……" "웃기지. 지금 그 신문에 날 짓을 하고 있네." 토니가 웃었다. 바람에 머리칼이 헝클어졌다. 피터는 그 옆얼굴을 보며 난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원래 세계에서 메이와 함께 이 난간에 서서 핫도그를 나눠 먹던 주말이 떠올랐다. 메이는 늘 여신상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했고, 피터는 늘 귀찮아했다. 그 사진들은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의 어느 서랍 속에 있었다. "…다음에 또 타요. 일 없을 때요. 핫도그 사 들고요. 여신상 앞에서 사진도 찍고요." "사진은 왜." "그냥요. 찍고 싶어서요. 토니랑." 토니가 피터를 보았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카메라를 뒤집어 둘을 비추었다. 화면 속에서 야구 모자와 후드 모자를 쓴 두 남자가 어색하게 붙어 섰다. 그 뒤로 초록빛 여인이 노을 속에 작게 걸렸다. 찰칵. 토니가 화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일 없을 때 말고 지금 찍자고. 배가 출렁이며 선착장을 떠났다. 엔진이 낮게 울리며 발바닥까지 떨림을 전했다. 피터와 토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아래층 차량 갑판으로 내려갔다.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배기가스 냄새와 쇠 냄새가 엉겨 있었다. 갑판 끝, 화물 트럭 두 대 사이에 몇몇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한 남자가 피터의 눈에 들어왔다. 목덜미에 전갈 문신을 한 남자. 원래 세계에서 피터를 오래 미워하게 될 사람이었다. 그 맞은편에 툼스의 부하가 서 있었다. 철물점에서 망을 보던 그 남자였다. 피터는 기둥 뒤에 몸을 숨기며 배낭을 열었다. "…저 문신 남자예요. 거래가 끝나기 전에 총을 꺼낼 거예요. 물건만 챙기고 돈은 안 줄 생각이에요." "툼스는." "위에 있어요. 날개 달고 굴뚝 옆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거예요. 부하들이 배신당하는 걸 보면 내려올 거고요." "…그럼 그 전에 막자. 누구 하나 다치기 전에." 피터는 기둥 뒤에서 슈트를 갈아입었다. 소매에 팔을 넣는 동안 엔진의 진동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마스크를 쓰자 세상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스파이더 센스가 목덜미를 가볍게 간질였다. 아직은 경고가 아니었다.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토니는 화물 트럭 그늘에서 손목의 칩을 두드렸다. 바다 위 하늘에서 아머가 소리 없이 내려오는 기척이 났다. 붉은 판들이 토니의 몸에 하나씩 맞물리는 소리가 엔진 소리에 묻혔다. 트럭 사이에서 가방 하나가 열렸다. 그 안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외계 금속으로 만든 총들이 스펀지 칸 안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문신 남자가 그중 하나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총신 끝에서 보랏빛 불꽃이 가늘게 튀었다. 툼스의 부하가 손을 내밀었다. "…값은 전화로 얘기한 대로요. 반은 지금, 반은 다음 주." "그래. 근데 사정이 좀 바뀌었어. 너희 사장, 요즘 소문이 안 좋더라. 아이언맨이 너희 창고를 들쑤셨다며. 쫓기는 놈들한테 돈 줘 봐야 다음 주에 살아 있을지 누가 알아." "…무슨 소리예요." "공짜로 가져간다는 소리지." 문신 남자가 총구를 툼스의 부하 쪽으로 돌렸다. 그 순간 스파이더 센스가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피터는 기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손목에서 거미줄이 뻗어 나가 그 총신을 감쌌다. 피터가 손목을 위로 꺾었다. 총구가 하늘로 들렸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보랏빛 광선이 차량 갑판의 천장을 뚫고, 위층 갑판을 뚫고, 저녁 하늘로 솟구쳤다. 배가 크게 흔들렸다. 위층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터는 그 광선이 뚫고 간 구멍을 올려다보았다. 원래 세계에서 이 광선은 옆으로 날아가 배를 반으로 갈랐다. 이번에는 위로 갔다. 천장에 동전만 한 구멍 두 개. 그 너머로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이 보였다. 피터는 숨을 들이켜며 다시 손목을 들어 총을 통째로 끌어당겼다. 총이 문신 남자의 손에서 빠져나와 피터의 손에 들어왔다. 뜨거웠다. 장갑 너머로도 손바닥이 데일 것 같았다. 천장의 구멍 너머로 얼굴 몇 개가 내려다보았다. 위층 갑판의 승객들이었다. 놀란 얼굴, 겁먹은 얼굴, 휴대전화를 들이민 얼굴. 그 사이에 노란 비옷을 입은 여자아이 하나가 구멍에 바짝 얼굴을 대고 있었다. 아이가 피터의 슈트를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작은 손을 구멍 사이로 흔들었다. 피터는 뜨거운 총을 한 손에 쥔 채 다른 손을 들어 마주 흔들었다. 아이가 꺄르르 웃는 소리가 구멍을 타고 내려왔다. 그 웃음소리 하나에 피터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배는 멀쩡했다. 저 아이도 멀쩡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요. 진짜로요." 문신 남자의 일행 둘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피터는 그 손들을 거미줄로 차례로 붙였다. 하나는 트럭 문짝에, 하나는 갑판 기둥에. 그때 트럭 뒤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토니의 아머가 문신 남자 앞에 내려섰다. 손바닥의 추진기가 그 남자의 가슴 높이에서 낮게 웅웅거렸다. 문신 남자가 두 손을 들며 이를 드러냈다. "…아이언맨이 이런 배에도 타나." "공짜라길래. 너도 공짜 좋아한다며. 그럼 공짜로 하룻밤 재워 줄 데 알아. 경찰서라고." 토니가 그 남자의 손목을 아머의 손으로 붙들어 트럭 손잡이에 고정했다. 문신 남자가 욕을 내뱉었다. 툼스의 부하는 그 자리에 굳어 선 채 피터를 보고 있었다. 철물점에서 벤 삼촌 맞은편에 서 있던, 그 앳된 얼굴이었다. 피터가 그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데 없죠." "…없어요. 그 사람이 날 쏘려고 했어요. 진짜로." "알아요. 그래서 말해 드리러 철물점까지 간 거예요." 그때 위에서 바람이 쏟아졌다. 차량 갑판 끝, 바다를 향해 뚫린 뒷문 쪽으로 거대한 날개가 내려앉았다. 쇳조각 몇백 개가 겹쳐진 날개가 저녁 햇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번들거렸다. 날개 끝의 추진기들이 갑판 위의 먼지와 종잇조각을 휘감아 올렸다. 그 날개 한가운데 툼스가 서 있었다. 초록빛 고글 너머의 눈이 갑판 위를 천천히 훑었다. 묶인 문신 남자를, 트럭 문짝에 붙은 일행을, 멀쩡히 서 있는 자기 부하를, 그리고 하늘로 뚫린 천장의 구멍 두 개를. "…너희가 막았나." "네. 그 총, 옆으로 쐈으면 이 배가 반으로 갈라졌을 거예요. 위층에 사람이 300명쯤 있어요." "……" "그리고 저 사람이 제일 먼저 맞았을 거고요." 피터가 툼스의 부하를 가리켰다. 툼스의 고글이 그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부하가 고개를 숙였다. 툼스는 한참 그 부하를 보았다. 날개가 조금 접혔다. 추진기 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툼스의 시선이 다시 피터에게로 돌아왔다. 그 눈에는 고마움보다 다른 것이 먼저 고여 있었다. 피곤함 같은 것. 오래 버틴 사람의, 이제 와서 누가 손을 내미는 게 더 아픈 사람의 눈이었다. 토니가 아머의 투구를 열었다. 바닷바람이 토니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흔들었다. 토니가 아머의 허리 장치를 열어 나사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아침에 툼스가 던지고 간 것, 하나는 벤 삼촌이 계산대 위로 밀어 준 것. 토니가 그 두 개를 아머의 손바닥 위에 올려 툼스 쪽으로 내밀었다. "…철물점 아저씨가 보낸 거예요. 하나는 내 사과고, 하나는 그 아저씨 외상이에요. 받는 사람이 고르래요." "……" "계약서도 다시 만들어 놨어요. 4년 전 거 그대로, 거기에 4년 치 이자까지. 당신 트럭들도 반납 안 해도 되고요. 다시 일 시작하면, 이 동네에서 하면 돼요." 툼스가 그 나사 두 개를 내려다보았다. 날개의 쇳조각들이 바람에 덜그럭거렸다. 툼스가 천천히 고글을 벗었다. 맨눈이 드러났다. 눈가에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툼스는 토니를 보지 않았다. 피터를 보았다. 빨갛고 파란 슈트를, 커다란 하얀 눈을, 그리고 그 옆에 바짝 붙어 선 붉은 아머를. "…넌 착한 아이 같다. 오늘 내 사람 하나를 살렸고. 고맙다는 말은 해야겠지." "……" "근데 하나만 말해 주마. 아이언맨 옆에 붙어 다니는 너는 우리 같은 사람을 몰라. 너한테 이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와서 사과도 하고 계약서도 내미는 사람이겠지. 우리한텐 4년 동안 문 한 번 안 열어 준 사람이었어. 그 4년 동안 나는 딸 학비 고지서를 냉장고에 붙여 놓고 매일 아침 그걸 보면서 일어났다. 넌 그런 아침을 몰라." 피터는 그 말을 들으며 마스크를 벗었다. 바닷바람이 땀에 젖은 머리칼을 차갑게 훑었다. 토니가 옆에서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툼스의 눈이 피터의 맨얼굴 위에서 멈췄다. 아직 앳된, 스물을 겨우 넘긴 얼굴이었다. 피터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알아요. 그런 아침." "……" "저 퀸즈에서 자랐어요. 숙모랑 둘이서요. 숙모가 가게 두 군데 일하면서 밀린 월세 고지서를 냉장고에 붙여 놨었어요. 자석으로요. 피자 가게 자석이었어요. 저 그거 보면서 아침 먹었어요. 몇 년 동안요. 제 삼촌은 철물점을 했었는데, 그 가게도 은행 빚이 있었고요." "……" "그리고 이 사람 옆에 처음 섰을 때, 저도 이 사람이 미웠던 날이 있어요. 하늘 위에 사는 사람이라서, 제 동네의 작은 일들은 안 보일 거라고 생각했던 날이요. 근데 이 사람은 오늘 아침에 당신 공장까지 직접 걸어갔어요. 아머도 안 입고요. 그리고 오늘 오후엔 제 삼촌 가게 계산대 앞에 서 있었어요. 당신 부하들이 태운 자국 옆에서요." 툼스의 눈이 토니에게로 옮겨 갔다. 토니는 아무 말 없이 나사 두 개를 든 손을 내민 채 서 있었다. 그 손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갑판 위로 엔진의 진동이 길게 흘렀다. 배 위층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내려왔다.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저녁 하늘 아래 초록빛 실루엣으로 서 있었다. 툼스가 그 실루엣을 잠깐 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사를 보았다. "…태운 자국이라고." "계산대요. 30년 된 거래요. 삼촌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고요. 삼촌은 그 자국을 안 지운대요. 철물점 주인이 혼자 버틴 날이라서 남겨 둔대요. 그리고 당신을 저녁에 초대하래요. 소금 많이 넣은 수프 먹으면 사람 마음이 좀 풀린다고요." 툼스의 입가가 아주 조금 비틀렸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았다. 툼스가 아머의 손바닥 위로 손을 뻗었다. 날개의 쇠 장갑을 낀 손가락이 나사 하나를 집었다. 하나만. 벤 삼촌의 나사였다. 아침에 툼스가 던진 나사는 아머의 손바닥 위에 그대로 남았다. 툼스가 그 나사를 날개 손잡이 옆의 작은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고글을 다시 썼다. "…외상은 갚아야지. 사과는, 아직이다." "……" "저놈들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 내 사람은 데려간다." 툼스가 부하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부하가 머뭇거리며 피터를 한 번 보고 툼스의 날개 아래로 걸어갔다. 툼스가 그 부하의 허리를 날개의 갈고리로 감쌌다. 추진기가 다시 울부짖었다. 날개가 펼쳐지며 차량 갑판의 뒷문 밖으로 솟구쳤다. 바닷물이 하얗게 부서지며 튀어 올랐다. 피터는 갑판 끝 난간까지 달려가 그 날개를 올려다보았다. 날개는 저녁 하늘 위로 낮게 선회하다가, 브루클린 쪽이 아니라 퀸즈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토니가 피터 옆으로 다가와 섰다. 아머의 손바닥 위에 남은 나사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토니의 얼굴에 서운함이 얹혀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로, 무언가 다른 것이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피터가 그 손바닥 위의 나사를 집어 토니의 아머 허리 장치에 다시 넣어 주었다. "…사과는 아직이래요." "들었어. 근데 외상은 받았네. 그 아저씨 거." "네. 벤 삼촌 나사요. 그거 받은 거면, 언젠가 그 식탁에 앉겠다는 거예요." "……" "그리고 퀸즈 쪽으로 갔어요. 집이 퀸즈거든요. 원래 세계에서 저 그 집 문 앞에 섰던 적 있어요. 그 사람 딸 데리러요." 토니가 고개를 돌려 피터를 보았다. 투구를 연 아머 위로 바닷바람이 스쳐 갔다. 피터는 그 눈을 보며 조금 웃었다. 그 웃음 끝이 쓸쓸하게 내려앉았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그 집 문 앞에서, 꽃다발을 들고, 문을 연 사람의 얼굴을 보고 얼어붙었다. 그날 밤 그 사람의 차 안에서, 피터는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비밀을 알면서도 지켜 주는 걸 겪었다. 툼스는 감옥에 가서도 끝내 피터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다음에 얘기해 줄게요. 그 집 얘기요. 오늘은 벤 삼촌이 저녁 기다려요." "그래. 규칙이니까." 토니가 피터의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장갑의 손바닥 부분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아까 그 뜨거운 총을 낚아챈 손이었다. 토니가 아머의 손가락으로 장갑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손바닥 한가운데가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토니의 턱이 굳었다. "…이거 왜 말 안 했어." "괜찮아요. 금방 나아요. 저 원래 빨리 나아요." "빨리 낫는 거랑 안 아픈 건 다른 거야." 토니가 아머의 허리 장치에서 작은 은빛 통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차가운 냄새가 났다. 토니가 그 안의 연고를 손가락 끝으로 떠서 피터의 손바닥에 펴 발랐다. 차가웠다. 화끈거리던 열이 그 차가움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아머의 쇠 손가락이 아니라, 한쪽 장갑을 벗어 낸 맨손가락이었다. 피터는 그 손가락이 손금을 따라 움직이는 걸 내려다보았다. 엔진의 진동이 발밑에서 낮게 이어졌다. 해안 경비대의 배가 여객선 옆에 바짝 붙었다. 주황색 구명조끼를 입은 대원들이 줄사다리를 타고 차량 갑판으로 넘어왔다. 대원들은 트럭 손잡이에 묶인 문신 남자와 기둥에 붙은 일행, 그리고 하늘로 뚫린 천장 구멍을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붉은 아머를. 대장으로 보이는 대원이 무전기를 쥔 채 머뭇거렸다. 토니가 투구를 연 채 외계 무기가 든 가방을 발끝으로 밀어 주었다. "불법 무기 거래 현장이에요. 저 셋이 구매자. 가방 안에 증거 있고. 판매자는 없었어요. 오늘 밤엔 아무도 안 팔았거든요." "…판매자가 없다고요? 그럼 저 사람들은 누구한테 사려고…" "그건 저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근데 대답 안 할 거예요. 하면 자기들 죄만 늘어나니까." 대원이 문신 남자를 보았다. 문신 남자가 침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대원이 한숨을 쉬며 무전기에 대고 무언가를 보고했다. 피터는 토니의 옆얼굴을 보았다. 토니는 툼스의 이름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원래 세계에서 툼스가 피터의 이름을 지켰던 것처럼. 토니가 아머의 손을 들어 피터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쇠의 무게가 슈트 위로 따뜻하게 얹혔다. 갑판 위의 문신 남자가 다시 욕을 내뱉었다. 멀리서 해안 경비대의 배가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천장의 구멍 두 개 너머로 저녁 하늘이 보랏빛으로 저물어 갔다. 피터는 그 구멍을 올려다보며 토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원래 세계에서 이 배는 반으로 갈라졌고, 피터는 그 갑판 위에서 토니에게 슈트를 빼앗겼다. 이번엔 배가 멀쩡했고, 토니가 피터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퀸즈의 어느 집 문 앞으로 나사 하나가 날아가고 있었다. 툼스의 집은 퀸즈 북쪽의 조용한 주택가 끝에 있었다. 하얀 판자벽에 짙은 초록색 덧문을 단 2층집이었다. 앞마당의 단풍나무가 붉은 잎을 반쯤 떨군 채 서 있었고, 떨어진 잎들이 잔디 위에 젖은 채 겹겹이 깔려 있었다. 현관 계단 옆에는 주황색 호박 두 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웃는 얼굴로, 하나는 화난 얼굴로 서툴게 파여 있었다. 차고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피터는 그 집을 길 건너편 인도에 서서 오래 바라보았다. 여객선 일이 있고 사흘이 지난 저녁이었다. 해는 벌써 지붕들 너머로 넘어갔고, 하늘에는 보랏빛이 엷게 번져 있었다. 집집마다 부엌 창문에 불이 들어왔다.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와 젖은 낙엽 냄새가 섞여 흘러왔다. 피터는 슈트를 입지 않았다. 청바지에 낡은 갈색 재킷, 그리고 손에는 종이봉투 하나. 봉투 안에는 메이가 구운 사과 파이가 들어 있었다. 이번엔 바닥이 타지 않았다. 길모퉁이에 토니의 차가 서 있었다. 시동을 끈 채, 가로등 그늘 아래에. 토니는 같이 가겠다고 했다. 피터가 고개를 저었다. 툼스는 토니의 얼굴을 보면 4년 치의 아침부터 떠올릴 거라고. 피터 혼자 가야 문이 열릴 거라고. 토니는 한참 운전대를 쥐고 있다가 손을 놓았다. 대신 피터의 손목시계에 작은 신호기를 붙여 주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3초. 피터는 길을 건넜다. 젖은 낙엽이 운동화 밑에서 미끄러졌다. 현관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조금 무거웠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계단을 한 번 올랐다. 열다섯 살의 가을, 메이 숙모가 다려 준 셔츠에, 매는 법을 가르쳐 줄 삼촌이 없어 영상을 보며 서툴게 맨 넥타이를 하고, 손에는 코사지 상자를 들고. 문이 열리고 그 문 안에서 독수리 날개를 단 사람의 얼굴이 웃으며 나왔을 때, 피터는 이 계단 위에서 얼어붙었다. 그날 밤 피터는 그 사람의 차 뒷좌석에 앉아 무도회장으로 갔다. 리즈가 조수석에서 라디오를 만지작거렸고, 운전석의 남자는 백미러로 피터를 몇 번이고 쳐다보았다. 그리고 무도회장 앞에서 리즈가 먼저 내린 뒤, 남자는 차 문 잠금장치를 눌렀다. 딸깍. 그 소리를 피터는 오래 잊지 못했다. 남자는 피터를 돌아보지도 않고 앞 유리를 보며 말했다. 네가 내 딸 목숨을 구했다고. 그러니 이번 한 번은 봐주겠다고. 대신 다시는 끼어들지 말라고. 끼어들면 너와 네가 아끼는 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그 목소리는 조용하고 다정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열다섯 살의 피터는 그 차에서 내려 무도회장 계단을 올라가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초인종을 눌렀다. 집 안에서 발소리가 났다. 가볍고 빠른 발소리. 문이 열렸다. 리즈였다. 피터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 커다란 눈, 회색 학교 후드 티셔츠의 소매를 손등까지 끌어내린 손. 그 손에 연필 한 자루가 쥐여 있었다. 숙제를 하다 나온 모양이었다. 리즈가 피터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안녕하세요. 누구 찾으세요?" "아, 저… 툼스 씨요. 아버님이요. 일 때문에요." "아빠 일이요? 아빠 요즘 일 없는데." 리즈가 그렇게 말하고는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볼이 조금 붉어졌다. 피터는 그 얼굴을 보며 가슴 한쪽이 묘하게 저렸다. 원래 세계에서 이 아이는 피터가 무도회장을 뛰쳐나간 뒤 혼자 남았다. 그리고 아빠가 감옥에 가는 걸 보고, 엄마와 함께 오리건으로 떠났다. 피터는 그 아이에게 끝내 제대로 된 설명 한 마디 하지 못했다. 이번엔 이 아이의 아빠를 감옥에 보내지 않으려고 이 계단에 서 있었다. "…다시 일 시작하실 거예요. 그 얘기 하러 왔어요." "진짜요?" 리즈의 눈이 커졌다. 그 눈에 반가움이 먼저 번졌고, 그 뒤로 조심스러운 의심이 따라왔다. 아빠 일로 찾아온 사람들이 그동안 어떤 얼굴이었는지, 피터는 그 눈빛만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피터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리즈가 봉투 안을 들여다보고는 작게 웃었다. "…파이네요." "숙모가 구운 거예요. 이번엔 안 탔어요. 지난번엔 탔거든요." 리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집 안쪽 부엌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리즈.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행주로 손을 닦으며 복도 끝에 나타났다. 체크무늬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날개도, 고글도 없었다. 그저 저녁을 짓다 나온, 머리가 희끗한 동네 아저씨였다. 툼스가 피터를 보았다. 행주를 쥔 손이 멈췄다. "…리즈. 엄마 좀 도와 드려라. 감자 껍질 남았다." "아빠, 이분 아빠 일 때문에 왔대요. 다시 일 시작하신다고…" "알아. 들어가 있어." 리즈가 피터와 아빠를 번갈아 보더니 파이 봉투를 품에 안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툼스는 행주를 어깨에 걸치며 현관으로 걸어 나왔다. 문을 등 뒤로 닫았다. 현관 계단 위에 둘만 남았다. 툼스가 차고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피터는 그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차고 안은 쇠 냄새와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벽에 공구들이 크기 순서대로 걸려 있었다. 렌치, 망치, 드라이버. 바닥에는 낡은 작업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쇳조각 몇 개와 용접 마스크가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작업대 한쪽 끝, 작은 유리병 안에 나사 하나가 들어 있었다. 벤 삼촌의 나사였다. 툼스가 작업대에 엉덩이를 걸치며 팔짱을 꼈다. "…집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죄송해요. 근데 여기가 제일 나을 것 같았어요. 창고보다는요." "내 딸 앞에서 할 얘기는 아니라는 건 알지." "알아요. 그래서 일 얘기라고만 했어요." 툼스가 고개를 돌려 차고 한쪽 벽을 보았다. 공구들 위쪽, 천장 가까이에 낡은 설계도 한 장이 압정으로 꽂혀 있었다. 누렇게 바랜 모눈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날개. 지금의 날개보다 훨씬 작고 단순했다. 깃털도 칼날도 없었다. 그저 등에 메는 받침대와 양쪽으로 뻗은 팔 두 개. 그 옆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메모가 적혀 있었다. 고층 잔해 수거용. 크레인 없이. "…처음엔 저거였다. 뉴욕 그 일 있고 나서, 높은 빌딩 꼭대기에 외계인 고철이 걸려 있었어. 크레인 빌리려면 하루에 몇천 달러야. 그래서 내가 그렸다. 사람이 직접 날아 올라가서 걷어 오면 되겠다고. 리즈가 옆에서 날개 끝에 깃털도 그려 달라고 해서 웃었지." "……" "그 설계도로 일 따냈다. 그리고 첫날 다 뺏겼고. 그다음부터 날개에 칼을 달았다. 저 종이는 못 버렸어. 리즈가 그린 깃털이 저 구석에 있거든." 피터는 설계도의 구석을 보았다. 날개 끝에 아이 손으로 그린 동그란 깃털 세 개가 연필로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피터는 그 깃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가 싸운 그 칼날 날개의 시작이 저 동그란 깃털 세 개였다. 아무도 그걸 묻지 않았다. 피터도 묻지 않았다. 툼스가 피터를 오래 보았다. 형광등이 지직거리며 한 번 깜빡였다. 툼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가 걷혔다. 피터는 그 눈빛이 무엇을 재고 있는지 알았다. 여객선 위에서 마스크를 벗은 순간부터 툼스는 피터의 얼굴을 알았다. 그 얼굴 하나만 있으면, 툼스가 아는 사람들 중 누구에게든 팔 수 있었다. 원래 세계의 그 전갈 문신 남자 같은 사람들에게. 피터는 그걸 알면서 마스크를 벗었다. "…너 바보냐. 그날 왜 마스크 벗었냐." "당신이 우리 같은 사람을 모른다고 해서요. 마스크 쓴 채로 그 말에 대답하면, 그건 대답이 아닐 것 같았어요." "……" "그리고 당신은 안 팔 거예요. 제 얼굴이요." "뭘 믿고." 피터는 작업대 위의 유리병을 보았다. 그 안의 나사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작게 반짝였다. 피터는 그 나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다른 시간에서, 당신은 제 이름을 알았어요. 제 얼굴도, 제가 사는 곳도요. 저 때문에 감옥에 갔어요. 거기서 어떤 사람이 저를 찾으려고 당신한테 물었어요. 스파이더맨이 누구냐고요. 당신은 모른다고 했어요. 끝까지요." "……" "그날 밤에 당신은 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었어요. 근데 그 전에 당신 차 안에서, 제가 당신 딸 목숨을 살렸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 이름을 안 판 거예요. 빚이라서요." 툼스의 팔짱이 천천히 풀렸다. 툼스가 작업대 위의 용접 마스크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마스크가 작업대 위에서 반 바퀴 돌았다. 툼스는 그 마스크를 내려다보며 오래 말이 없었다. 차고 밖에서 바람이 불어 젖은 낙엽이 차고 문 앞으로 쓸려 들어왔다. 집 안에서 리즈와 엄마가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른 시간이라. 그 얘기, 미친 소리라고 하기엔 넌 너무 많이 안다." "……" "그 시간의 나는 감옥에 갔고. 리즈는." "…엄마랑 오리건으로 이사 갔어요. 학교도 옮기고요. 저한테 작별 인사도 못 하고요." 툼스가 눈을 감았다. 그 눈가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피터는 그 얼굴을 보며 숨을 골랐다. 이건 협박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어떤 협박보다 무거운 말일 것이었다. 툼스가 눈을 뜨며 작업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벽에 걸린 공구들 쪽으로 걸어가 렌치 하나를 내려 손바닥 위에서 무게를 재듯 흔들었다. "…일이 하나 남았다. 마지막 거." "알아요. 이사하는 비행기요. 어벤져스 건물에서 북쪽 기지로 짐 옮기는 비행기요." "…그것도 아는구나." "하지 마세요. 그 비행기 떨어지면 당신 죽어요. 원래 그랬어요. 저 아니었으면요." 툼스가 렌치를 벽에 다시 걸었다. 정확히 원래 있던 자리에. 그리고 피터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 웃음 비슷한 것이 스쳤다. 지치고, 조금은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내 밑에 있는 놈들이 여섯이다. 걔들도 다 빚이 있어. 내가 4년 동안 그놈들 월급을 줬는데, 그 돈이 다 그 쇳조각에서 나왔다. 이제 와서 아이언맨이 계약서를 내밀면, 그 계약서로 그놈들 빚까지 갚아 주나." "…갚아 줄 거예요. 물어보면요." "그게 문제다. 물어봐야 한다는 거. 4년 동안 내가 그 사람한테 물어볼 수 있는 문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 툼스가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병 안의 나사가 달그락거렸다. 툼스가 그 병을 형광등 불빛에 비춰 보았다. 나사의 홈마다 빛이 걸렸다. "…이건 철물점 아저씨 거다. 외상은 갚는다고 했지. 근데 갚는 건 내 방식으로 한다. 내 손으로 번 돈으로. 그 사람 사과로 갚는 게 아니라." "……" "그 비행기, 내 마지막 일이다. 그거 하나만 하면 놈들 빚이 끝나. 그다음에 그 식탁에 가마. 소금 많이 넣은 수프." "…그 비행기에 손대면, 그 식탁에 못 와요." 피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툼스가 피터를 보았다. 둘 사이에 형광등이 다시 한 번 지직거렸다. 툼스가 유리병을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차고 문 쪽으로 걸어가 셔터를 반쯤 더 올렸다. 저녁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길 건너 가로등 아래, 시동을 끈 검은 차 한 대가 보였다. 툼스가 그 차를 한참 보았다. "…저기 있는 거 그 사람이지." "…네." "혼자 보낸 거냐. 아니면 네가 혼자 오겠다고 한 거냐." "제가 그랬어요. 같이 오겠다는 걸 말렸어요." 툼스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 뭔가 다른 것이 섞였다. 툼스가 셔터 손잡이를 쥔 채 피터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이 4년 전에도 저렇게 길 건너에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우리 얘기가 좀 달랐겠지." "……" "가라. 저녁 식는다. 그리고 파이 고맙다고 숙모한테 전해라." 차고 옆문이 삐걱 열렸다. 앞치마를 두른 여자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지친 듯하면서도 다정한 눈매. 리즈와 꼭 닮은 눈이었다. 여자가 피터를 보더니 놀란 얼굴로 웃었다. "어머, 손님이 계셨네. 여보, 저녁 다 됐어요. 손님도 같이 드시고 가요. 파이 가져오신 분이죠?" "아, 아니에요. 저는 가 봐야 해서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요? 아쉽네. 다음엔 꼭 먹고 가요. 이 사람이 손님 집에 데려온 거, 진짜 오랜만이거든요." 여자가 툼스를 보며 눈을 흘겼다. 툼스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여자가 다시 집 안으로 사라졌다. 옆문이 닫히기 직전, 부엌의 따뜻한 불빛과 감자 굽는 냄새가 차고 안으로 한꺼번에 밀려들었다가 사라졌다. 툼스가 그 문을 오래 보았다. 그리고 피터를 보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4년 동안 내가 밤마다 어디 가는지 한 번도 안 물었다고. 그게 믿어서인지 무서워서인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피터는 차고를 나왔다. 현관 옆을 지나는데 부엌 창문 너머로 리즈가 보였다. 식탁 위에 파이를 올려놓고, 엄마와 함께 칼을 넣고 있었다. 냉장고 문에 종이 몇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맨 위에 대학 합격 통지서가 있었다. 그 아래로 노란 고지서 한 장이 반쯤 가려진 채 비죽 나와 있었다. 리즈가 창밖의 피터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피터도 손을 들어 흔들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리즈가 슬리퍼를 신은 채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은박지에 싼 파이 한 조각이었다. 리즈가 젖은 낙엽 위를 종종걸음으로 건너와 피터 앞에 섰다. 숨이 조금 차 있었다. 차가운 저녁 공기 속에서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엄마가 이거 다시 드리래요. 가져온 사람도 한 조각은 먹어야 한다고요." "아, 감사해요." "그리고요. 아까 차고에서 아빠 웃는 소리 들었어요. 진짜 오랜만에요. 아빠가 다시 일 하시는 거 맞죠? 진짜로요?" "…네. 곧이요. 진짜로요." 리즈가 피터를 오래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빛이 있었다. 그러다 리즈가 작게 웃었다. 피터가 원래 세계의 체육관 계단에서 처음 봤던 그 웃음이었다. "고마워요.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피터예요. 피터 파커." "피터. 기억할게요." 리즈가 손을 흔들고 다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현관문이 닫혔다. 피터는 은박지에 싼 파이를 손에 쥔 채 그 문을 오래 보았다. 기억할게요. 원래 세계에서 그 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 세계의 이 아이는 그 말을 지킬 것이었다. 피터는 은박지 위로 전해지는 미지근한 온기를 손바닥에 느끼며 길을 건넜다. 길을 건너 차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토니가 운전석에서 피터를 돌아보았다. 피터가 조수석에 앉아 문을 닫았다.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앞 유리 너머로 툼스의 집 부엌 창문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피터가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았다. "…비행기 할 거래요. 마지막 일이래요. 부하들 빚 갚으려고요." "그래. 그럼 그날 그 비행기 위에서 다시 만나야겠네." "…그리고 그 문 연 애요. 리즈요." "그 애가 왜." "원래 세계에서 저 그 애랑 무도회 가기로 했었어요. 열다섯 살 때요. 코사지 들고 저 계단 올라갔었어요. 근데 문 연 사람이 그 아빠였어요." 토니가 피터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창밖의 노란 부엌 창문을 보았다. 토니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토니가 운전대 위에 손목을 걸치며 시선을 앞으로 둔 채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까 그 계단 위에서 그렇게 오래 서 있었구나. 3분 12초." "재셨어요?" "재고 있었지. 신호기 붙여 놨잖아. 심장 박동도 나와." "……" "무도회는. 갔어?" "아뇨. 중간에 뛰쳐나갔어요. 그 애 아빠 잡으러요. 그 애는 혼자 남았고요." 토니가 아무 말 없이 피터의 손을 잡았다. 무릎 위에 모아 둔 두 손 중 하나를, 운전대에서 내린 손으로 덮듯이. 손바닥이 따뜻했다. 피터는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토니의 귀 끝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차 안의 히터가 낮게 웅웅거렸고, 창밖에서 젖은 단풍잎 하나가 앞 유리 위로 떨어져 미끄러졌다. "…질투하시는 거예요?" "열다섯 살짜리 무도회한테? 내가?" "……" "좀. 아주 좀." 피터가 토니의 손을 마주 쥐었다. 토니가 시동을 걸었다. 차가 천천히 주택가를 빠져나갔다. 백미러 속에서 툼스의 집이 작아졌다. 차고 문이 아직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의 형광등 아래에 누군가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피터는 그 작은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백미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집을 떠나는 차 안에서 목숨을 위협받았다. 이번엔 토니의 손을 잡은 채 이 집을 떠나고 있었고, 그 집의 차고 작업대 위에는 벤 삼촌의 나사가 유리병 안에 담겨 있었다. 이삿날 밤의 하늘은 맑고 차가웠다. 맨해튼의 불빛이 발아래에서 별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깔려 있었고, 그 위로 진짜 별들은 희미하게만 떠 있었다. 어벤져스 타워의 꼭대기 착륙장에서 커다란 화물기 한 대가 엔진을 데우고 있었다. 회색 동체가 착륙장의 조명을 받아 고래의 배처럼 번들거렸다. 화물칸 안에는 북쪽 새 기지로 옮길 짐들이 실려 있었다. 낡은 방패 시제품, 아머의 부품 상자들, 토르의 방에서 나온 정체 모를 유물 몇 점. 해피가 서류철을 든 채 화물칸 문 앞을 서성이며 상자 하나하나에 붙은 번호를 확인하고 있었다. 피터는 그 착륙장의 맞은편 건물 옥상, 물탱크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바람이 슈트의 이음새로 파고들어 등줄기가 서늘했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밤 자기 학교 무도회장을 뛰쳐나와 혼자 이 비행기를 쫓았다. 슈트도 없이, 집에서 만든 후드 티셔츠와 고글 차림으로. 이번엔 귓가에 토니의 목소리가 있었다. 원래 세계의 그 밤, 피터는 무도회장의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 리즈를 두고 나왔다. 리즈는 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체육관 천장에 매달린 은박 장식들이 빙글빙글 돌았고, 스피커에서 느린 노래가 흘렀다. 피터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뒷문으로 뛰쳐나갔다. 리즈가 그 등 뒤에서 피터의 이름을 불렀다. 피터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피터가 돌아보지 않은 사람이 그 아이 하나만은 아니었다. 이번 밤에는 무도회도, 두고 온 사람도 없었다. 리즈는 지금쯤 퀸즈의 하얀 2층집 부엌에서 숙제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아이의 아빠가 오늘 밤 살아서 돌아오기만 하면 되었다. [위치 잡았어. 구름 위 300미터. 비행기 뜨면 뒤에 붙을게.] "…해피 아저씨한텐 말했어요?" [말했지. 오늘 밤 누가 비행기를 노린다고. 그래도 비행기는 띄우래. 안 띄우면 다음에 노린다고. 그 사람 말이 맞아.] "……" [그리고 피터. 오늘 밤 목표는 하나야. 툼스가 살아서 땅에 내려오는 거. 짐은 다 떨어져도 돼.] "…네. 알아요." 피터는 손목의 거미줄 발사기를 한 번씩 눌러 보았다. 카트리지가 가득 차 있었다. 양쪽 다. 오늘 밤을 위해 어젯밤 토니의 작업실에서 같이 채운 것이었다. 토니가 카트리지 하나하나를 불빛에 비춰 보며 기포가 없는지 확인했었다. 그 손길이 너무 꼼꼼해서 피터는 웃었고, 토니는 웃지 않았다. 귓가의 통신기에서 지직 소리와 함께 해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토니, 화물칸 문 닫습니다. 목록 마지막 상자까지 확인했어요. 그리고 피터,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감기 걸리지 마라. 오늘 밤 바람 차다.] "…네, 해피 아저씨. 고마워요." [고맙긴. 다치지만 마. 그 상자 목록 다시 만들기 싫으니까.] 해피의 통신이 끊겼다. 피터는 물탱크 위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웃었다. 원래 세계에서 해피는 이 밤 피터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피터가 수십 통을 걸었는데도. 이번엔 해피가 먼저 감기 걱정을 했다. 화물기가 굉음을 내며 착륙장을 박차고 떠올랐다. 동체가 천천히 기울며 북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동체가 물결치듯 일렁이다가 밤하늘 속으로 녹아들었다. 보이지 않는 비행기. 엔진 소리만 남아 하늘을 긁고 지나갔다. 피터는 물탱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손목에서 거미줄이 뻗어 나가 보이지 않는 동체의 꼬리 날개에 달라붙었다. 몸이 허공으로 확 끌려 올라갔다. 바람이 귓가에서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비행기 꼬리에 매달린 채 피터는 이를 악물었다. 손가락 끝으로 동체의 이음새를 더듬으며 한 칸씩 기어올랐다. 동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손바닥 아래에서 차갑고 단단했다. 발아래로 맨해튼의 불빛이 빠르게 흘러갔다. 이스트 강의 검은 물결, 다리들의 불빛 목걸이, 그리고 그 너머로 퀸즈의 낮은 지붕들. 저 어딘가에 벤 삼촌의 철물점이 있었다. 피터는 숨을 고르며 동체 꼭대기에 납작 엎드렸다. 그때 스파이더 센스가 뒷덜미를 할퀴었다. 위에서 바람이 쏟아졌다. 날개였다. 툼스의 날개가 밤하늘을 가르며 내려와 동체 위에 내려앉았다. 쇳조각 몇백 개가 겹쳐진 날개가 별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툼스의 고글이 피터를 향했다. 그리고 그 뒤로 날개 하나가 더 내려앉았다. 작고 서툰 날개였다. 툼스의 부하, 여객선에서 피터가 살린 그 앳된 남자였다. 그 남자가 피터를 보며 움찔했다. "…올 줄 알았다." "말했잖아요. 하지 말라고요." "나도 말했지. 마지막 일이라고." 툼스가 날개의 갈고리를 동체에 박아 넣었다. 쇠가 찢어지는 소리가 바람을 뚫고 울렸다. 동체의 위장막이 툼스가 뚫은 자리에서부터 지직거리며 벗겨졌다. 회색 동체가 밤하늘 속에서 조각조각 모습을 드러냈다. 화물칸 지붕이 뜯겨 나갔다. 그 안에서 상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툼스의 부하가 날개를 펄럭이며 그 상자들 쪽으로 내려갔다. 피터는 거미줄을 쏘아 그 부하의 날개 끝을 동체에 붙였다. "거기 가지 마요! 그 날개, 그 무게 못 버텨요!" 부하가 허둥대며 날개를 뜯어내려 했다. 그 순간 비행기가 크게 기울었다. 툼스가 뚫은 구멍으로 바람이 쏟아져 들어가며 기체가 균형을 잃었다. 조종석의 자동 조종 장치가 경고음을 울렸다. 기수가 아래로 꺾였다. 맨해튼의 불빛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피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귓가에서 토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피터! 기체가 떨어지고 있어. 기수 각도 마이너스 15도. 프라이데이, 자동 조종 넘겨받아.] [권한이 막혀 있습니다. 외부 침입으로 조종 장치가 손상되었습니다.] [그럼 손으로 해야지.] 구름 사이로 붉은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토니의 아머가 기수 쪽으로 곧장 내리꽂혔다. 아머가 비행기 코 아래로 파고들어 두 손바닥으로 동체를 받쳤다. 추진기가 하얗게 달아올랐다. 기수가 아주 조금, 아주 천천히 들렸다. 피터는 동체 위에서 거미줄을 사방으로 쏘았다. 뜯긴 지붕의 가장자리를, 흔들리는 날개 뿌리를, 쏟아질 듯한 상자들을. 거미줄이 바람에 팽팽하게 떨리며 기체를 꿰매듯 붙들었다. 그때 툼스의 날개에서 불꽃이 튀었다. 여객선에서 그 문신 남자가 쏜 광선이 스쳐 간 자리였다. 날개 뿌리의 추진기 하나가 기침하듯 덜컥거리다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툼스가 그걸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원래 세계의 이 밤에도 그 날개는 터졌다. 툼스가 피터를 끌어내리려다 무리하게 날개를 돌렸고, 날개가 불길에 휩싸였고, 피터는 그 불길 속에서 툼스를 끌어냈다. 이번엔 툼스가 아무것도 돌리지 않았는데도 날개가 먼저 타오르고 있었다. "툼스 씨! 날개 벗어요! 지금요!" "이거 벗으면 떨어진다!" "제가 잡아요! 믿어요!" 툼스가 피터를 보았다. 고글 너머의 눈이 흔들렸다. 날개의 불꽃이 커졌다. 쇳조각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 밤하늘 속으로 불티처럼 흩어졌다. 비행기는 이제 맨해튼을 벗어나 바다 쪽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저 멀리 코니아일랜드의 대관람차가 불빛 바퀴처럼 천천히 돌고 있었다. 토니의 목소리가 거칠게 끊겨 들어왔다. [해변으로 내릴게. 모래사장. 30초. 피터, 툼스 잡아.] 툼스가 날개의 버클에 손을 가져갔다. 그 손이 망설였다. 그리고 버클을 풀었다. 날개가 툼스의 등에서 떨어져 나가며 불덩이가 되어 뒤로 날아갔다. 툼스의 몸이 동체 위에서 미끄러졌다. 피터는 몸을 날렸다. 거미줄 한 가닥이 툼스의 허리를 감았다. 다른 한 가닥이 동체의 뜯긴 지붕에 박혔다. 피터의 팔이 두 방향으로 찢어질 듯 당겨졌다. 어깨에서 뚝, 소리가 났다. 피터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비행기가 해변에 닿았다. 동체 배가 모래를 갈아엎으며 길게 미끄러졌다. 모래가 파도처럼 솟구쳤다. 쇠가 비명을 질렀다. 상자들이 화물칸에서 튕겨 나와 모래 위를 굴렀다. 피터는 툼스를 품에 끌어안은 채 동체에서 굴러떨어졌다. 모래 위로 몇 바퀴를 굴렀다. 입 안에 모래가 씹혔다. 하늘이 몇 번 뒤집혔다가 멈췄다. 머리 위로 별이 보였다. 그리고 파도 소리. 조금 떨어진 곳에서 툼스의 날개가 혼자 불타고 있었다. 쇳조각들이 녹아내리며 모래 위에 검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기름 타는 냄새와 바다 냄새가 뒤섞였다. 피터는 모래 위에 누운 채 툼스를 보았다. 툼스는 옆으로 쓰러져 기침을 하고 있었다. 고글이 깨져 있었다. 이마에서 피가 조금 흘렀다. 그런데 살아 있었다. 숨을 쉬고 있었다. "…살았어요. 살았어요, 툼스 씨." 피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툼스가 기침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려 하늘을 보고 누웠다. 그 옆으로 붉은 아머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머의 손바닥이 아직 하얗게 달아 있었다. 토니가 투구를 열었다. 땀에 젖은 얼굴이 별빛 아래 드러났다. 토니는 툼스를 보지 않았다. 피터를 먼저 보았다. 모래투성이 슈트를, 축 늘어진 왼쪽 팔을. "…어깨." "빠졌어요. 괜찮아요. 넣으면 돼요." "넣는 거 쉬운 거 아니야. 이리 와." 토니가 아머의 장갑을 벗었다. 맨손으로 피터의 팔을 잡았다. 다른 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피터가 숨을 들이켰다. 토니가 피터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뚝. 피터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깨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토니가 피터의 이마를 자기 어깨에 끌어당겼다. 아머의 차가운 쇠 위로 토니의 손이 따뜻하게 피터의 뒷머리를 감쌌다. 툼스는 모래 위에 누운 채 그 둘을 보고 있었다. 별빛 아래, 붉은 아머를 반쯤 벗은 남자와 그 어깨에 이마를 묻은 스파이더맨 슈트의 청년. 툼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모래가 셔츠 위에서 흘러내렸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해변 끝에서 손전등 불빛 몇 개가 흔들렸다. 툼스가 그 불빛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감옥 가겠군. 네가 말한 그 시간처럼." "아뇨." 토니가 피터를 놓고 일어섰다. 아머의 남은 부분이 모래 위에서 덜그럭거렸다. 토니가 툼스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눈높이가 맞았다. 토니가 아머의 허리 장치를 열었다. 나사 하나를 꺼냈다. 여객선에서 툼스가 집지 않고 남겨 둔 그 나사였다. 토니가 그 나사를 툼스의 모래 묻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이 비행기 내 거예요. 짐도 내 거고. 나는 신고 안 해요. 오늘 밤 일은 새 화물기 시험 비행 사고예요. 조종 장치 결함으로 해변에 비상 착륙했고,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 하나가 구조를 도왔다고 할 거예요." "……" "그리고 물어볼게요. 4년 전에 안 물어봤던 거. 당신 사람들 빚, 다 합쳐서 얼마예요." 툼스가 손바닥 위의 나사를 내려다보았다. 별빛이 그 나사의 홈에 걸려 작게 반짝였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물러갔다. 툼스의 어깨가 아주 조금 떨렸다. 툼스가 그 나사를 천천히 쥐었다. 주먹이 하얘질 만큼 세게.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깨진 고글이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40만 달러쯤 된다. 여섯 놈 다 합쳐서." "계약금으로 처리할게요. 월요일에 사무실로 와요. 정문으로요. 이번엔 문 열어 둘게요." "……" "그리고 그 날개, 다시 만들지 마요. 대신 우리 회사 폐기물 처리 부서에 쇳조각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요. 외계 금속이요. 당신만큼 아는 사람 없을 거예요." 툼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모래 바람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툼스가 토니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피터를 보았다. 피터는 어깨를 문지르며 모래 위에 앉아 있었다. 마스크를 벗은 맨얼굴이었다. 툼스가 그 얼굴을 보며 작게 웃었다. "…사과는 받으마. 이번엔." "……" "그리고 꼬마. 그 다른 시간의 나는 감옥 안에서 네 이름을 지켰다고 했지. 이번엔 밖에서 지키마. 내 사람들 입까지 다." 피터의 목이 메었다.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툼스의 부하가 해변 저편에서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작은 날개가 등에 반쯤 매달린 채였다. 피터의 거미줄이 아직 그 날개 끝에 붙어 있었다. 손전등 불빛들이 가까워졌다. 해피가 맨 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서류철을 아직도 손에 쥔 채였다. 툼스의 부하가 절뚝거리며 모래밭을 가로질러 왔다. 등에 매달린 작은 날개가 모래 위에 질질 끌렸다. 젊은 남자는 툼스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툼스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툼스가 그 남자의 머리를 투박한 손으로 툭 쳤다. "…사장님, 살았어요?" "보면 몰라. 살았다." "저 그 거미줄 때문에 날개가 안 떨어져서, 기체 꼬리에 계속 매달려 있었어요. 떨어질 줄 알았는데 안 떨어졌어요. 그 거미줄이 끝까지 안 끊어졌어요." 젊은 남자가 피터를 돌아보았다. 피터는 모래 위에 주저앉은 채 어깨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날개 끝에 거미줄을 붙인 건 그 남자가 상자 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막으려던 것이었다. 그 거미줄이 그 남자를 끝까지 붙잡고 있었다. 젊은 남자가 피터에게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이고. 피터는 손을 저으며 웃었다. 툼스가 그 둘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붉어진 눈가를 감추려는 듯이. 해피가 셋 앞에 멈춰 서서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넥타이가 한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구두 안에 모래가 가득 들어찬 모양이었다. 해피가 고개를 들어 반쯤 뜯겨 나간 화물기를 보았다. 그리고 모래 위에 흩어진 상자들을, 불타는 날개를, 나사를 쥔 채 앉아 있는 낯선 남자를 차례로 보았다. 해피의 입이 몇 번 열렸다가 닫혔다. "…토니. 제가 오늘 이 짐들 목록 만드는 데 사흘 걸렸어요." "알아. 고생했어. 다시 만들어." "……" "농담이야. 상자는 거의 멀쩡해. 해피, 이분은 툼스 씨. 월요일부터 우리랑 일하실 분이야. 오늘 밤 비상 착륙 때 구조를 도와주셨고." 해피가 툼스를 보았다. 툼스가 해피를 보았다. 해피의 눈이 툼스의 이마에 흐르는 피와, 모래 위에서 녹아내리는 날개의 잔해 사이를 오갔다. 해피는 오래 말이 없다가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툼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툼스가 그 손을 보다가, 나사를 쥐지 않은 쪽 손으로 마주 잡았다. "…해피 호건입니다. 보안 담당이요. 월요일에 정문에서 기다릴게요. 출입증 만들어 놓고요." "…고맙소. 아니, 고맙습니다." 피터는 그 악수를 보며 모래 위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어깨가 욱신거렸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슈트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에 벤 삼촌의 이름이 떠 있었다. 피터가 전화를 받자 철물점 라디오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터. 수프 다 졸아 간다. 언제 와.] "…지금 가요, 벤 삼촌. 근데 한 사람 더 데려가도 돼요?" [툼스 그 사람?] "네." [소금 더 넣어 놓을게. 빨리 와.] 피터는 모래 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조금 더 많아져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해변에서 툼스를 불길에서 끌어낸 뒤 거미줄로 묶어 경찰에게 남겼다. 그리고 그다음 날 리즈가 오리건으로 떠났다. 이번엔 툼스가 나사를 쥐고 앉아 있었고, 그 옆에 토니가 쪼그려 앉아 있었고, 피터의 어깨 위에는 토니의 맨손이 남긴 온기가 아직 식지 않고 있었다. 그날 밤 11시가 넘어서야 3층 부엌에 불이 켜졌다. 수프는 정말로 졸아 있었다. 냄비 바닥에 눌어붙은 걸 메이가 물을 부어 다시 끓였다. 소금을 한 줌 더 넣었다. 식탁에 넷이 앉았다. 벤과 메이, 피터와 토니. 그리고 다섯 번째 의자에 툼스가 앉아 있었다.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모래가 아직 털리지 않은 셔츠를 입은 채. 피터의 왼쪽 어깨에는 메이가 감아 준 붕대가 둘려 있었다. 툼스는 수프 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한동안 먹지 않았다. 김이 그 얼굴 위로 피어올랐다. 부엌 창밖으로 퀸즈의 밤이 조용했다. 냉장고가 웅웅거렸고, 벽시계가 똑딱거렸다. 메이가 빵 바구니를 툼스 앞으로 밀어 주었다. 툼스가 그 바구니를 보다가, 마침내 숟가락을 들었다. 한 숟가락. 툼스의 눈썹이 움찔했다. "…짜네요." "짜게 끓였어요. 그래야 마음이 풀려요. 우리 집 규칙이에요." "……" "그 규칙 만든 사람이 저 녀석이에요. 저 녀석이 짠 걸 좋아해서." 벤이 피터를 턱으로 가리켰다. 툼스가 피터를 보았다. 피터는 붕대 감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툼스가 다시 수프를 떠먹었다. 두 숟가락, 세 숟가락. 그리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떨렸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메이가 조용히 일어나 툼스의 그릇에 수프를 한 국자 더 떠 주었다. 벤이 툼스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토니는 식탁 아래에서 피터의 손을 찾아 쥐었다. "…4년 동안 집에서 밥 먹을 때마다 체한 것 같았습니다. 딸 앞에서 웃으면서도 목에 뭐가 걸려 있었어요. 오늘은 안 걸리네요." "그럼 됐네요. 월요일부터 출근하면, 금요일마다 와요. 수프 끓여 놓을게요." "…외상은 갚고 오겠습니다. 그 나사 값." "그건 천천히 갚아요. 외상이 있어야 사람이 또 오거든요." 벤의 말에 툼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짧고 젖은 웃음이었다. 피터는 그 웃음을 보며 토니의 손을 마주 쥐었다. 원래 세계에서 이 밤, 툼스는 경찰서의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번엔 소금을 너무 많이 넣은 수프 앞에 앉아 있었고, 그 식탁의 다섯 번째 의자는 앞으로 금요일마다 그 사람의 자리가 될 것이었다. 비는 저녁 7시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앞 유리에 몇 방울 떨어지는 정도였는데, 허드슨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빗줄기가 굵어졌다. 강변 절벽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 위로 가로등이 띄엄띄엄 서 있었고, 그 불빛 아래에서 빗줄기가 은빛 바늘처럼 쏟아졌다. 길가의 나무들은 거의 잎을 떨군 채 검게 젖어 있었다. 아스팔트는 기름처럼 번들거렸다. 피터는 조수석에 앉아 창밖의 어둠을 보고 있었다. 와이퍼가 규칙적으로 앞 유리를 쓸었다. 그 소리 사이로 피터의 숨소리가 조금씩 빨라졌다. 토니는 피터가 왜 이 길로 가자고 했는지 묻지 않았다. 툼스가 처음 출근한 월요일 저녁이었다. 회사 정문에서 해피가 출입증을 건넸고, 툼스는 그 출입증을 한참 내려다보다 목에 걸었다. 그날 저녁 철물점에서 축하 저녁을 먹은 뒤, 피터가 토니에게 차 열쇠를 달라고 했다. 아니, 토니에게 운전을 부탁했다. 강변 도로로. 북쪽으로. 그리고 내내 말이 없었다. 그날 아침의 회사 정문을 피터는 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 툼스는 약속보다 30분 일찍 와 있었다. 다림질한 작업복을 입고, 낡은 도시락 가방을 든 채, 정문 앞 보도블록 위에 서서 유리문 너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4년 전 계약 해지 통보서를 받으러 왔던 바로 그 건물이었다. 해피가 유리문을 밀고 나와 출입증을 건넸다. 플라스틱 카드에 툼스의 사진과 이름이 박혀 있었다. 폐기물 관리부. 수석 기술 고문. "…수석은 좀 과한데." "사장님이 그렇게 박으래요. 이의 있으면 직접 올라가서 말하라고 하시던데요. 18층이요. 문 열려 있어요." 툼스는 그 출입증을 한참 내려다보다 목에 걸었다. 그리고 유리문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를 쥔 손등에 핏줄이 섰다. 문이 열렸다. 툼스가 안으로 들어갔다. 길 건너 카페 창가에서 그 모습을 보던 토니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숨을 내쉬었다. 피터는 그 숨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그날 아침의 토니는 자기가 출근하는 것보다 더 긴장해 있었다. 그 하루가 그렇게 좋게 끝났는데, 강변 도로를 달리는 차 안의 피터는 무릎을 쉬지 않고 떨었다. 운동화 밑창이 차 바닥 매트를 툭툭 두드렸다. 토니가 운전대를 한 손으로 쥐고, 다른 손을 피터의 무릎 위에 얹었다. 떨림이 그 손바닥 아래에서 천천히 잦아들었다. "…어디까지 가는지만 말해 줘. 이유는 나중에 들을게." "조금만 더 가요. 전망대 있는 데까지요." "알았어." 토니는 더 묻지 않았다.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계속 운전했다. 와이퍼가 앞 유리를 쓸었다. 그 손의 온기가 청바지 너머로 전해졌다. 피터는 그 온기를 붙잡고 창밖의 검은 강을 보았다. "…여기 세워 주세요." 절벽 위의 작은 전망대였다. 토니가 차를 갓길에 세웠다. 엔진을 끄자 빗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 앞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 저 아래 절벽 밑에서 강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 피터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빗줄기가 순식간에 머리칼을 적셨다. 토니가 우산을 챙겨 뒤따라 내렸다. 피터는 전망대 난간 앞에 서서 도로가 꺾이는 모퉁이를 내려다보았다. 가드레일이 한 군데 낮게 꺼져 있는 모퉁이였다. "…피터. 이제 말해 줄래. 여기 왜 왔는지." "……" "사람 구하러 온 거면 아머 부를게. 3초면 와." "…구하러 온 거 아니에요." 토니가 피터 옆에 서서 우산을 기울였다. 빗방울이 우산 위에서 둔하게 튀었다. 피터는 우산 아래로 들어오지 않았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터가 시계를 보았다. 8시 41분. 도로 저편, 강 남쪽에서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가 굽이를 돌아 다가오고 있었다. 빠르게. 너무 빠르게. 낮고 납작한 은빛 차였다. 엔진 소리가 빗소리를 찢으며 절벽을 타고 올라왔다. "…저 차에 탄 사람, 의사예요. 신경외과 의사요. 이 도시에서 손이 제일 좋은 의사예요. 지금 운전하면서 전화로 엑스레이 사진 보고 있어요. 다음 수술할 환자 고르느라고요." "……" "3분 뒤에 저 모퉁이에서 미끄러져요. 가드레일 넘어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요. 죽지는 않아요. 근데 두 손이 부서져요. 다시는 수술 못 하게요." 토니가 피터를 보았다. 우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피터는 토니를 보지 않았다. 다가오는 헤드라이트만 보고 있었다. 은빛 차가 첫 번째 굽이를 돌았다. 바퀴가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가 다시 붙잡았다. 운전석 안에서 휴대전화 화면의 푸른빛이 깜빡였다. "…알면서 안 막아?" "네." "피터. 너 백 번도 넘게 나를 구했잖아. 동굴에서, 그 박람회장에서, 뉴욕 하늘에서. 근데 저 사람은 왜." "저 사람 손이 부서져야, 저 사람이 그 손을 고치러 먼 데로 가요. 거기서 다른 걸 배워요. 시간을 다루는 법이요." 토니의 입이 다물어졌다. 은빛 차가 두 번째 굽이를 돌았다. 엔진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피터의 주먹이 난간 위에서 하얗게 쥐어졌다. 빗물이 손등을 타고 흘렀다. 피터의 목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낮게 이어졌다. "…그 사람이 언젠가 시간을 쥐는 돌을 지켜요. 그리고 그 돌로 1400만 개가 넘는 미래를 봐요. 그중에 이기는 미래가 딱 하나 있어요. 원래 세계에서 그 사람은 그 하나를 보고, 그 하나를 위해서 그 돌을 내줬어요. 그 미래로 가는 길에서 토니가 죽었어요." "……" "이번엔 그 사람이 그 미래들을 볼 때, 토니가 사는 길도 같이 봐야 해요. 그러려면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해요. 그 손으로요. 저 모퉁이에서 저 차가 미끄러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계속 이 도시에서 수술만 하다가 늙을 거예요. 그것도 좋은 삶이에요. 근데 그럼 아무도 그 미래를 못 봐요." 은빛 차가 마지막 직선 구간에 들어섰다. 피터의 스파이더 센스가 목덜미에서 비명을 질렀다. 몸이 저절로 앞으로 쏠렸다. 손목이 들렸다. 거미줄을 쏘면 됐다. 저 차의 앞 범퍼에 거미줄 두 가닥, 그리고 가드레일에 한 가닥. 그거면 차는 모퉁이 앞에서 멈춘다. 피터는 그걸 알았다. 손목이 떨렸다. 피터가 다른 손으로 그 손목을 붙잡았다. 자기 손목을. 세게. 차가 모퉁이에 닿았다. 브레이크 등이 빗속에서 붉게 터졌다. 바퀴가 미끄러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절벽을 긁었다. 은빛 차가 빙글 돌았다. 한 바퀴, 반 바퀴. 가드레일이 꺼진 자리로 미끄러졌다. 쇠가 찢어지는 소리. 그리고 차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빗줄기를 가르며 하늘을 향했다가, 아래로 꺾였다. 절벽을 따라 몇 번 부딪히는 둔한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물소리. 피터는 난간을 넘었다. 토니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피터는 젖은 절벽을 거미처럼 타고 내려갔다. 바위가 손바닥 아래에서 미끄러웠다. 이끼와 흙탕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절벽 아래, 강가의 얕은 물속에 은빛 차가 뒤집힌 채 박혀 있었다. 차체가 짓눌려 있었다. 헤드라이트 하나가 아직 켜진 채 물속을 노랗게 비추고 있었다. 강물이 차 안으로 천천히 차오르고 있었다. 피터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차가웠다. 뼈까지 얼어붙는 차가움이었다. 피터는 거미줄을 쏘아 차의 지붕을 절벽 위의 큰 바위에 붙였다. 두 가닥, 세 가닥. 차가 더 깊이 가라앉지 못하게. 그리고 운전석 쪽으로 헤엄쳐 갔다. 깨진 창문 너머로 남자가 보였다. 피에 젖은 얼굴, 반쯤 감긴 눈. 그리고 핸들과 계기판 사이에 끼인 두 손. 피터는 그 손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보였다. 손가락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피터는 물 위로 고개를 내밀어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위에서 붉은 빛이 쏟아졌다. 토니의 아머가 빗속을 뚫고 내려와 물가에 내려섰다. 토니가 아무 말 없이 뒤집힌 차의 문짝을 두 손으로 쥐었다. 쇠가 비명을 지르며 뜯겨 나갔다. 피터가 남자의 안전띠를 거미줄로 감아 끊었다. 둘이 함께 남자를 차에서 끌어냈다. 남자의 두 손이 피터의 팔에 닿았다. 남자가 신음했다. 피터는 그 신음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강가의 자갈밭에 남자를 눕혔다. 토니가 아머의 손바닥 빛으로 남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남자는 의식이 반쯤 돌아와 있었다. 빗물이 그 얼굴 위로 쏟아졌다. 남자가 흐릿한 눈으로 붉은 아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옆의, 물에 젖은 빨갛고 파란 슈트를. "…아이언맨…?" "말하지 마요. 구급차 오고 있어요." "…내 손. 내 손 어떻게 됐어…" 피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토니가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움직이지 말라고.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빗속을 뚫고 다가왔다. 피터가 미리 걸어 둔 신고였다. 8시 30분, 강변 도로 북쪽 전망대 근처에서 사고가 날 것 같다고. 원래 세계에서 이 남자는 이 물가에서 한참을 혼자 누워 있었다. 이번엔 구급차가 11분 일찍 오고 있었다. 피터가 이 밤에 이 남자에게 줄 수 있는 건 그 11분뿐이었다.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절벽 아래 길로 내려왔다. 남자가 들것에 실려 올라갔다. 피터는 자갈밭에 무릎을 꿇은 채 그 들것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빗물이 슈트를 타고 흘렀다. 몸이 덜덜 떨렸다. 추워서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피터가 마스크를 벗었다. 얼굴 위로 빗물과 다른 것이 섞여 흘렀다. 토니가 아머를 열고 걸어 나왔다. 셔츠 차림 그대로 빗속에 섰다. 순식간에 젖었다. 토니가 피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갈이 무릎 아래에서 서걱거렸다. 토니가 두 손으로 피터의 얼굴을 감쌌다. 차가운 뺨 위로 토니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처음이에요. 알면서 안 막은 거." "알아." "손목이 저절로 올라갔어요. 제가 잡았어요. 제 손으로요. 저 사람 손 부서지는 거 보면서요." "봤어. 다 봤어." "……" "원래 세계에서 저 사람한테 부탁한 적 있어요. 모든 사람이 저를 잊게 해 달라고요. 저 사람이 그 주문을 걸어 줬어요. 그래서 토니가 없는 세계에서, 저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됐어요. 그 주문을 걸어 준 손이 저 손이에요. 그 손을 제가 오늘 부쉈어요." 토니가 피터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댔다. 빗물이 둘 사이로 흘러내렸다. 토니의 숨이 피터의 입술에 닿았다. 따뜻했다. 강물 소리가 등 뒤에서 낮게 이어졌다. 토니의 목소리가 그 물소리 아래로 가라앉듯 흘러나왔다. "…네가 부순 거 아니야. 비가 부쉈고, 저 사람 휴대전화가 부쉈고, 저 사람 과속이 부쉈어. 넌 그 사람을 물에서 꺼냈어. 구급차를 11분 일찍 불렀고. 그게 네가 한 거야." "……" "그리고 피터. 다음부턴 이런 거 혼자 정하지 마. 차 안에서 말없이 앉아 있지 말고. 나한테 먼저 말해. 같이 정하자. 막을지, 둘지. 같이 들고 가자. 그 무게." 피터가 토니의 셔츠 앞자락을 움켜쥐었다. 젖은 천이 손안에서 구겨졌다.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토니가 피터를 끌어안았다. 젖은 셔츠와 젖은 슈트가 맞닿았다. 그 사이로 체온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피터는 토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빗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빗소리 너머로 아주 작게, 토니의 목소리가 하나 더 들려왔다. "…하나만 물어보자." "……" "언젠가 나도, 저렇게 안 구하기로 하는 날이 와?" 피터가 토니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토니의 눈을 보았다. 빗물에 젖은 속눈썹 아래, 그 갈색 눈동자 안에 두려움이 아주 작게 고여 있었다. 피터는 그 눈을 보며 두 손으로 토니의 얼굴을 감쌌다. 토니가 피터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 날은 없어요." "……" "저 사람 손은 부숴도 돼요. 시간이 그걸 필요로 하니까요. 근데 토니는 아니에요. 시간이 토니를 필요로 한다고 해도, 저는 안 줘요. 1400만 개 미래를 다 뒤져서라도, 토니가 사는 길로 갈 거예요. 그러려고 여기 온 거예요." 토니가 피터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젖은 얼굴로, 빗속에서, 조금 울 것 같은 얼굴로. 토니가 피터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빗물 맛이 났다. 그 뒤로 강물 소리와 멀어지는 사이렌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피터는 토니의 손을 잡고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가드레일이 꺼진 모퉁이에 경찰차의 불빛이 붉고 파랗게 번갈아 번졌다. 원래 세계에서 이 밤은 피터가 알지 못하는 어느 의사의 불운한 사고였다. 이번엔 피터가 처음으로 일부러 지나 보낸 밤이었고, 그 밤의 무게를 토니가 반으로 나눠 들고 있었다. 퀸즈의 집에 도착한 건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철물점 셔터 옆의 작은 문으로 들어서자, 계단 위에서 불빛이 내려왔다. 벤이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친 채 계단 꼭대기에 서 있었다. 둘의 몰골을 보고 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흠뻑 젖은 머리칼, 진흙투성이 운동화, 그리고 토니의 젖은 셔츠에 아직 남아 있는 강물 냄새. 벤은 말없이 내려와 욕실에서 수건 두 장을 꺼내 왔다. 하나는 피터의 머리 위에, 하나는 토니의 어깨 위에 던졌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서 우유를 데웠다. 냄비 바닥에 코코아 가루가 눌어붙는 냄새가 났다. 벤이 머그잔 두 개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피터와 토니는 수건을 뒤집어쓴 채 식탁 앞에 나란히 앉아 그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김이 얼굴 위로 피어올랐다. 벤이 맞은편에 앉아 둘을 번갈아 보았다. 한참 그렇게 보다가, 일어서며 피터의 젖은 머리를 수건 너머로 한 번 툭 쳤다. "뭔지 몰라도, 둘이 같이 했으면 됐다. 마시고 자." 벤이 계단을 올라갔다. 피터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달고 뜨거웠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온기가 얼어붙은 가슴 한가운데에서 천천히 풀렸다. 토니가 수건 아래에서 피터를 보며 작게 웃었다. 피터는 그 웃음을 보며 머그잔을 내려놓고, 토니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다음 날 아침, 부엌의 작은 텔레비전에서 그 사고가 짧게 보도되었다. 강변 도로 절벽 아래로 추락한 고급 승용차. 운전자는 맨해튼의 유명 신경외과 의사.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음. 화면에 강가에 뒤집힌 은빛 차의 모습이 잠깐 비쳤다. 짓눌린 차체, 뜯겨 나간 문짝. 피터는 시리얼을 뜨던 숟가락을 멈췄다. 우유가 숟가락에서 그릇 안으로 똑똑 떨어졌다. 벤이 신문을 내리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리고 피터를 보았다.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껐다. 화면이 까맣게 꺼지며 작은 소리를 냈다. 벤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신문을 들었다. 메이가 피터의 그릇 옆에 토스트 한 장을 더 올려놓았다. 버터를 두껍게 바른. 토니가 맞은편에서 커피잔 너머로 피터를 보았다. 피터는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시리얼이 우유에 불어 눅눅했다. 그래도 끝까지 다 먹었다. 이틀 뒤 아침, 둘은 맨해튼의 대학 병원 7층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감돌았고, 창밖으로 회색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복도 끝 병실의 유리창 너머로 그 의사가 보였다. 두 손이 쇠막대와 붕대로 감겨 침대 위 받침대에 얹혀 있었다. 손가락마다 가느다란 쇠핀이 박혀 있었다. 침대 옆 의자에는 녹색 수술복을 입은 여자 의사가 앉아 있었다. 피곤한 얼굴로, 남자가 잠든 얼굴을 오래 내려다보며. 피터는 그 유리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 사람, 앞으로 가진 돈을 다 써요. 수술에요. 일곱 번, 여덟 번. 전부 실패해요.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요. 아주 먼 데로요." "…내가 돈을 보내면." "그럼 안 떠나요. 돈이 남아 있으면 계속 이 도시에서 수술을 기다릴 거예요. 다 잃어야 떠나요.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에요." 토니가 유리창 너머를 보았다. 턱이 굳어 있었다. 토니는 남을 도울 돈이 언제나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 돈을 쓰지 말라는 말이 토니에게 얼마나 무거운지, 피터는 알았다. 토니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냈다가, 한참 내려다보다가, 다시 넣었다. 그리고 대신 간호사실에 들러 꽃 한 다발을 주문했다. 보낸 사람 이름 없이. 카드에는 한 줄만. [손 말고 다른 게 당신을 고칠 수도 있어요.] 피터는 그 카드를 보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원래 세계의 그 의사는 이 병실에서 아무에게도 꽃을 받지 못했다. 이번엔 이름 없는 꽃 한 다발이 그 침대 옆에 놓일 것이었다. 둘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토니의 손이 피터의 손을 찾아 쥐었다. 피터는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생각했다. 몇 달 뒤 그 남자는 세상 끝의 산으로 간다. 그리고 그 산에는, 피터가 이 세계에 온 이유를 꿰뚫어 볼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트만두의 골목은 좁고 굽어 있었다. 흙먼지가 낮게 깔린 길 위로 오색 깃발들이 줄줄이 매달려 바람에 펄럭였다. 파랑, 하양, 빨강, 초록, 노랑. 깃발마다 빽빽하게 적힌 글씨들이 햇빛에 바래 있었다. 길 양옆으로 낡은 벽돌집들이 서로 기대듯 붙어 서 있었고, 나무로 깎은 창틀마다 검게 그을린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디선가 향 냄새가 흘러왔다. 그 사이로 버터 등잔이 타는 고소하고 느끼한 냄새, 길가 화덕에서 구워지는 빵 냄새, 그리고 소똥과 먼지 냄새가 뒤섞였다. 멀리 사원에서 종소리가 낮게 울렸다. 찻집에 들어오기 전, 골목 입구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둘을 붙잡았었다. 열 살쯤 되었을까. 볼이 바람에 터서 빨갰고, 두 팔 가득 오색 깃발 묶음을 안고 있었다. 아이가 서툰 영어 몇 마디와 손짓으로 깃발을 내밀었다. 토니가 그 깃발을 받아 들고 들여다보았다. 다섯 가지 색의 천 조각마다 빽빽하게 글씨가 찍혀 있었다. 피터가 옆에서 설명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깃발에 적힌 기도가 멀리 날아간다고. 그래서 높은 데 매단다고. 토니는 지갑을 열어 아이가 부른 값의 열 배를 쥐여 주었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돈을 내려다보더니, 깃발 묶음 하나를 더 토니의 품에 안겨 주었다. 그리고 웃으며 골목 저편으로 뛰어갔다. 토니는 깃발 두 묶음을 외투 안에 쑤셔 넣으며 중얼거렸다. 하나는 철물점 거, 하나는 우리 옥상 거. 피터는 낡은 회색 외투에 털모자를 눌러쓴 채 그 골목 한쪽의 찻집 창가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토니가 앉아 있었다. 토니도 비슷한 차림이었다. 등산객처럼 보이는 두꺼운 외투, 두툼한 털모자,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 선글라스를 벗은 토니의 얼굴은 낯설게 평범해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오르는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버터와 소금을 넣고 끓인 차였다. 토니가 한 모금 마시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걸 사람들이 매일 마신다고." "추운 데서는 이게 맛있어요. 몸이 데워진대요." "나는 그냥 커피가 좋은데. 몸이 데워지는 커피." 피터는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병원에서 그 꽃을 보낸 지 넉 달이 지났다. 그 의사는 피터가 말한 그대로 했다. 수술을 일곱 번 받았고, 일곱 번 실패했다. 집을 팔았고, 차를 팔았고, 시계 몇 개를 남기고 다 팔았다. 그리고 지난주, 편도 비행기표 한 장을 샀다. 피터는 그 소식을 듣던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토니가 새벽에 일어나 피터의 등을 오래 쓸어 주었다. 그리고 아침에 말했다. 같이 가자고. 끝까지 보자고. 그게 같이 드는 거라고. 비행기는 히말라야 위를 지났다. 피터는 창에 이마를 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봉우리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봉우리 사이사이로 푸른 그림자가 깊게 패어 있었다. 구름이 그 봉우리들의 허리에 걸려 천천히 흘렀다. 피터는 숨을 죽였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우주에도 가 봤는데, 지구의 이 높은 곳은 처음이었다. 토니가 피터의 어깨 너머로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피터의 귓가에 낮게 말했다. 저 위 어딘가에 그 의사가 찾아가는 데가 있겠지. 사람이 다 잃고 나서야 올라가는 데.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기도 다 잃고 나서야 이 세계로 왔다고.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하나씩 가지게 되었다고. 찻집 안은 좁고 따뜻했다. 낮은 천장에 그을린 나무 들보가 가로질렀고, 벽에는 빛바랜 산 사진들이 비뚤게 걸려 있었다. 구석의 작은 화덕 위에서 주전자가 쉬지 않고 김을 뿜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 하나가 화덕 앞에 앉아 묵주를 굴리며 낮게 무언가를 읊조렸다. 그 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노래와 섞여 방 안을 웅웅 채웠다. 창유리에 김이 서려 바깥 골목이 뿌옇게 번져 보였다. 피터는 소매 끝으로 창유리를 닦았다. 동그랗게 닦인 자리 너머로 골목의 오색 깃발들이 다시 또렷해졌다. 토니가 그 동그란 창 너머를 피터와 같이 들여다보았다. 턱수염이 피터의 귓가에 스칠 만큼 가까이서. 창밖의 골목 저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마른 남자였다. 수염이 덥수룩했고, 머리칼은 어깨 근처까지 자라 있었다. 낡은 외투 소매 끝으로 붕대 감은 두 손이 비죽 나와 있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손에 쥔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보며 골목의 문패들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었다. 피터의 숨이 조금 얕아졌다. "…저 사람이에요." "……" "저 손. 아직도 떨려요." 토니가 창밖을 보았다. 남자가 찻집 앞을 지나쳤다. 피터와 토니가 앉은 창가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을. 남자의 얼굴은 넉 달 전 병실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 광대뼈가 도드라졌고, 눈 밑이 검게 꺼져 있었다. 그런데 그 눈 안쪽에서 무언가가 아직 꺼지지 않고 타고 있었다. 오기 같은 것. 혹은 마지막 남은 희망 같은 것. 토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찻잔 손잡이 위에서 하얗게 굳어 있었다. "…돈 안 보낸 거, 아직도 잘한 건지 모르겠다." "잘하신 거예요. 저 눈 보세요. 저 사람 지금 처음으로 진짜 뭔가를 찾고 있어요." 남자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그 뒤를 대머리에 짙은 갈색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조용히 따라갔다. 피터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이제 저 의사는 골목 깊은 곳에서 강도들을 만나고, 저 갈색 옷의 남자가 그를 구하고, 그리고 낡은 나무 문 하나를 지나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피터는 그 문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가 아는 건 그 남자의 이야기뿐이었다. "…이제 됐어요. 들어갔을 거예요. 돌아가요, 토니." "벌써? 우리 여기까지 왔는데." "네. 우리가 할 일은 여기까지예요. 더 가까이 가면…" 피터의 말이 끊겼다. 찻집의 공기가 바뀌었다. 향 냄새가 갑자기 짙어졌다. 창밖 골목의 소음이 한 겹 먼 곳으로 물러났다. 펄럭이던 깃발들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바람이 멈춘 것이 아니었다. 깃발이 펄럭이는 도중에 멈춰 있었다. 허공에 반쯤 접힌 채로. 찻잔에서 오르던 김도 멈춰 있었다. 피터의 스파이더 센스가 울리지 않았다. 대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토니가 몸을 굳혔다. 손목의 칩에 손을 가져갔다. 그 손이 칩 위에서 멈췄다. 찻집 안쪽, 어두운 구석 자리에 언제부터인지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둥근 머리, 투명할 만큼 하얀 피부, 그리고 아주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젊은 눈. 그 사람의 앞에도 찻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찻잔의 김만은 멈추지 않고 천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앉아 있어요. 일어나지 않아도 돼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찻잔을 들고 일어나 피터와 토니의 테이블로 걸어왔다. 맨발이었다. 흙바닥 위에서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빈 의자 하나를 당겨 앉았다. 피터와 토니 사이에, 테이블의 세 번째 자리에. 그리고 피터를 보았다. 오래. 아주 오래. "…당신이군요. 8년 동안 내 명상을 흐트러뜨린 사람." "……" "2008년 겨울이었어요. 아침 명상 중이었는데, 시간의 결이 갑자기 한 군데에서 뭉쳤어요. 매듭처럼요. 아주 작고 단단한 매듭. 처음엔 사고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매듭이 풀리지 않고 8년 동안 그대로 있었어요. 오히려 해마다 조금씩 더 단단해졌어요." 그 사람의 시선이 피터에게서 토니에게로 옮겨 갔다. 토니가 그 시선을 받으며 턱을 들었다. 피터는 테이블 아래에서 토니의 손을 찾았다. 토니의 손이 차가웠다. 그 사람의 눈이 테이블 아래의 그 두 손을 보는 것 같았다. 보지 않아도 다 아는 눈이었다. "…그 매듭이 단단해진 이유를 이제 알겠네요. 당신이 이 사람을 붙잡고 있어서였어요. 매일, 조금씩 더." "…당신 누구예요." "이 산의 오래된 선생이에요, 스타크 씨. 사람들은 나를 그냥 선생이라고 불러요. 이름은 오래전에 내려놓았어요." 토니가 그 사람을 보았다. 피터는 숨을 들이켰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이 사람은 피터가 아는 시간 안에서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 의사가 이 사람에 대해 단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자기가 아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그리고 자기가 그 사람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고. "…저 때문에 시간이 망가졌어요?" "망가진 건 아니에요. 휘었어요. 강물에 큰 돌 하나가 떨어진 것처럼. 물은 그 돌을 돌아서 계속 흘러요. 그런데 물길이 조금씩 달라지죠. 당신이 이 사람을 구할 때마다, 그 물길이 조금씩 더 크게 휘었어요." "……" "그리고 넉 달 전, 당신은 처음으로 돌을 치우지 않았어요. 그 의사의 손이요. 그 비 오는 밤에요. 그날 매듭이 처음으로 조금 느슨해졌어요. 그래서 당신을 찾아낼 수 있었어요." 피터의 손이 토니의 손안에서 떨렸다. 토니가 그 손을 꽉 쥐었다. 그 사람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멈춘 시간 속에서 그 사람의 목울대만 천천히 움직였다.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아주 작게 났다. "…저 의사가 이제 저 문 안으로 들어갈 거예요. 나는 그 사람에게 많은 걸 가르칠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남겨야 할 것이 있어요. 내가 떠나기 전에." "떠나요?" 토니가 물었다. 그 사람이 토니를 보며 아주 엷게 웃었다. 오래 살아온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슬픔과 평온이 한데 섞인 웃음이었다. 피터는 그 웃음을 보며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 사람은 알고 있었다. 자기가 언제, 어떻게 죽는지. "내가 떠나는 날을 나는 이미 여러 번 봤어요. 그 날짜도, 그 장소도, 그 순간의 하늘 색깔도요. 당신은 그날을 바꾸려고 하겠죠, 피터 파커." "…바꾸게 해 주세요. 제가 그날 거기 있을게요. 막을 수 있어요." "아니요." 그 사람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런데 그 안에 단단한 것이 있었다. 거절이었다. 그 사람이 손을 뻗어 피터의 손등에 자기 손을 얹었다. 토니의 손을 쥐고 있는 피터의 손 위에. 차가울 줄 알았는데 따뜻했다. 오래 데운 돌처럼. "내 죽음은 당신이 고칠 일이 아니에요. 그 의사가 내 죽음을 지켜봐야 해요. 그래야 그 사람이 자기 차례가 왔을 때, 내려놓는 법을 알아요. 당신이 그 의사의 손을 내버려 둔 것처럼, 내 죽음도 내버려 두세요." "……" "대신 약속할게요. 그날, 내가 떠나기 전에 당신에게 남길 말이 있어요. 이 매듭에 대해서요. 이 매듭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지금은 그 말을 할 수 없어요. 아직 매듭이 다 보이지 않으니까요." 토니가 그 사람을 똑바로 보았다. 찻집의 멈춘 공기 속에서 토니의 목소리가 낮고 또렷하게 울렸다. 피터가 지금껏 들어 본 중 가장 고집스러운 목소리였다. "…하나만 확실히 해 두죠. 이 애가 날 붙잡아서 시간이 휜다고 했잖아요." "네." "그럼 계속 휘라고 해요. 강물이든 매듭이든. 이 애가 날 놓아야 시간이 바로 선다면, 시간이 좀 비뚤어져 있어도 난 상관없어요." 그 사람이 토니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이번엔 진짜로, 소리 내어. 짧고 맑은 웃음이었다. 멈춘 깃발들이 그 웃음에 맞춰 아주 조금 흔들린 것 같았다. 그 사람이 피터의 손등에서 손을 거두며 일어섰다. 찻잔을 들고, 맨발로, 다시 찻집 안쪽의 어둠을 향해 걸어갔다. "…그 말을 듣고 싶었어요, 스타크 씨. 매듭은 혼자서는 단단해지지 않아요. 양쪽에서 같이 당겨야 해요. 이제야 알겠네요. 왜 8년 동안 풀리지 않았는지." 그 사람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세상이 다시 움직였다. 깃발들이 펄럭였다. 찻잔의 김이 다시 피어올랐다. 골목의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종소리, 개 짖는 소리, 상인들의 외침. 찻집 안쪽 구석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테이블 위에 찻잔 하나만 남아 있었다. 아직 김이 오르는. 피터는 한참 동안 그 빈 자리를 보았다. 토니의 손이 아직 피터의 손을 쥐고 있었다. 이제 그 손이 조금 따뜻해져 있었다. 토니가 남은 버터 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피터는 그 얼굴을 보며 웃음이 터졌다. 웃음 끝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맛없어요?" "맛없어. 근데 몸은 좀 데워지네." "……" "가자, 피터. 집에 가자. 벤 아저씨가 커피 끓여 놓고 기다릴 거야. 진짜 커피." 둘은 찻집을 나섰다. 골목 위로 오색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였다. 피터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 깊은 곳, 그 의사가 사라진 모퉁이 너머로 낡은 나무 문 하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산의 선생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 이번엔 그 선생이 피터와 토니가 맞잡은 손을 보고 웃었고, 그 웃음 끝에 언젠가 남길 말 하나를 약속처럼 걸어 두고 갔다. 그날 밤 둘은 공항 근처의 작은 여관에 묵었다. 벽이 얇아 옆방의 기침 소리까지 들리는 방이었다. 창문 틈으로 산바람이 새어 들어와 커튼 끝을 흔들었다. 방 한쪽의 작은 난로 안에서 장작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탔고, 그 불빛이 낮은 천장 위로 주황색 그림자를 일렁이게 했다. 피터는 두꺼운 이불을 어깨까지 덮은 채 누워 그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옆에서 토니가 팔베개를 하고 피터를 보고 있었다. "…그 선생. 어떻게 떠나는데." "…다른 시간에서는, 이 도시가 아니라 뉴욕에서요. 병원 응급실에서요. 싸우다가 다쳐서요. 그 의사가 마지막까지 옆에 있었어요. 그 의사 손으로 수술하려고 했는데, 손이 떨려서 못 했대요." "……" "그 의사가 그 얘길 저한테 딱 한 번 했어요. 그날 병원 창밖에 눈이 내렸대요. 선생이 그 눈을 보면서, 자기는 수백 년을 살았는데도 눈 내리는 걸 볼 시간이 늘 모자랐다고 했대요." 토니가 아무 말 없이 피터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난로의 장작이 한 번 크게 튀었다. 피터는 눈을 감았다. 오늘 그 사람이 손등에 얹었던 따뜻한 손이 아직 피부 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막지 말라던 그 목소리도. "…그날 거기 가는 건 괜찮지? 막지는 않더라도. 옆에 있는 건." "…네. 그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가자. 같이. 그 의사 혼자 그 눈 보게 두지 말고." 피터가 눈을 뜨고 토니를 보았다. 토니가 웃고 있었다. 난로 불빛이 그 웃는 얼굴의 반쪽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피터는 이불 속에서 토니의 손을 찾아 쥐었다. 오늘 하루 몇 번이고 잡았던 손이었다. 그런데 잡을 때마다 처음처럼 따뜻했다. 피터가 잠든 줄 알았는지, 한참 뒤 토니가 조용히 이불을 빠져나갔다. 피터는 눈을 감은 채 그 기척을 들었다. 외투를 뒤적이는 소리, 창문의 걸쇠를 푸는 소리. 찬 바람이 한 줄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피터가 실눈을 떴다. 토니가 창가에 서서 오색 깃발 한 줄을 창틀 바깥의 쇠고리에 묶고 있었다. 서툰 손놀림이었다. 매듭이 자꾸 풀렸다. 토니가 낮게 투덜거리며 다시 묶었다. 세 번째 만에 매듭이 단단히 조여졌다. 깃발이 밤바람에 펄럭였다. 창밖의 산등성이 위로 별이 쏟아질 듯 떠 있었다. 토니가 그 깃발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피터는 그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애가 오래 여기 있게 해 달라고. 토니는 기도라는 걸 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남의 나라 바람에 처음으로 무언가를 맡기고 있었다. 토니가 창문을 닫고 돌아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차가워진 몸이 피터의 등에 닿았다. 피터는 몸을 돌려 그 차가운 몸을 끌어안았다. 토니가 흠칫 놀랐다. "…깼어?" "매듭 세 번 묶으시는 거 봤어요." "……" "단단하게 묶으셨어요. 안 풀릴 거예요." 토니가 피터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웃었다. 창밖에서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의 이름은 누구의 기도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모두가 피터를 잊었으니까. 이번엔 창밖의 쇠고리에 토니가 세 번 만에 묶은 매듭 하나가 걸려 있었고, 그 매듭 끝에서 오색 깃발이 밤새 기도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그날 뉴욕에는 첫눈이 내렸다. 저녁 무렵부터 하늘이 낮게 내려앉더니, 해가 지자 굵은 눈송이가 소리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병원 앞 도로 위로 눈이 쌓였다가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회색 진창으로 뭉개졌다. 응급실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송이 몇 개가 안으로 날아 들어와 바닥 타일 위에서 녹았다. 소독약 냄새와 젖은 외투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지나치게 하얬다. 피터와 토니는 응급실 복도 끝 창가의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 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아무도 둘을 보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바쁘게 오갔고, 들것이 덜컹거리며 지나갔고, 어딘가에서 아이가 울었다. 복도 저편 수술실의 문 위에서 붉은 불빛이 켜져 있었다. 그 안에 선생이 있었다. 그리고 녹색 수술복의 그 여자 의사가 있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그 남자가 있을 것이었다. 피터는 창밖을 보았다. 눈송이가 가로등 불빛을 지나며 잠깐씩 금빛으로 빛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저 눈을 선생도 보고 있을 것이었다. 몸을 떠난 채로, 어느 창가에 서서. 그 남자와 나란히. 수백 년을 살았는데도 눈 내리는 걸 볼 시간이 늘 모자랐다고 말하면서. "…지금이에요." 피터가 작게 말했다. 수술실 문 위의 붉은 불빛은 아직 켜져 있었다. 그런데 피터는 알았다. 무언가가 지나갔다. 공기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향 냄새 같은 것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카트만두의 그 찻집에서 맡았던 냄새였다. 피터의 손목에서 맥박이 한 번 크게 뛰었다. 토니가 피터의 손을 잡았다. 장갑을 벗은 맨손이었다. 몇 분 뒤 수술실 문이 열렸다. 그 남자가 걸어 나왔다. 붕대를 감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로, 이상한 옷차림 그대로. 붉은 망토 하나가 어깨에서 늘어져 있었다. 남자는 복도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간호사 하나가 그 옆을 지나가며 남자의 어깨를 피했다. 남자는 그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그리고 그 창가의 두 사람을 보았다. 모자를 눌러쓴 젊은 남자와, 그 손을 잡은 턱수염의 남자. 남자의 눈이 잠깐 토니의 얼굴 위에서 멈췄다. 알아본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복도 끝 비상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망토 자락이 바닥 위를 스쳤다. 피터는 그 등이 비상구 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원래 세계에서 그 남자는 이 복도를 혼자 걸어 나갔다. 이번에도 혼자였다. 그러나 이번엔 창가에서 누군가가 그 등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혼자 두지 말자고 했는데. 결국 혼자 보냈네." "아니에요. 저 사람 지금 혼자 있고 싶을 거예요. 근데 여기 누가 있었다는 건, 나중에 알 거예요." 그때 복도 저편에서 녹색 수술복의 여자 의사가 걸어 나왔다.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린 채, 손에 종이컵 하나를 들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가가 붉었다. 여자는 창가의 빈 의자 하나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터와 토니의 바로 옆자리였다. 여자는 둘을 쳐다보지 않았다. 종이컵의 커피를 내려다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에서 눈송이가 쉬지 않고 떨어졌다. "…가족분 기다리세요?" 여자가 물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피터가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토니가 모자챙을 조금 들어 올리며 대신 입을 열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아는 사람이요. 오늘 떠난 사람이요." "…저도요. 아는 사람이 오늘 많이 잃었어요. 그 사람 옆에 있어 주고 싶은데, 그 사람은 늘 혼자 있고 싶어 해요." "그래도 옆에 있어 줘요.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일수록 나중에 알아요. 누가 옆에 있었는지." 여자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토니를 보았다. 모자 아래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종이컵을 쥔 채 그 남자가 사라진 비상구 쪽으로 걸어갔다. 피터는 그 등을 보며 토니의 손을 꼭 쥐었다. 토니가 방금 한 말이 누구에게서 배운 말인지, 피터는 알았다. 둘은 응급실 자동문을 나섰다.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병원 앞 계단 위로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었다. 피터는 계단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추고 장갑을 벗었다. 맨손바닥을 하늘로 내밀었다. 눈송이 하나가 그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여섯 갈래로 뻗은 작은 결정이 체온에 닿자마자 가장자리부터 녹아 물방울이 되었다. 피터는 그 물방울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토니가 옆에 서서 자기 목도리를 풀어 피터의 목에 둘러 주었다. 목도리 안에 토니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었다. "…선생이 이 눈 봤을까요." "봤을 거야.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그 의사랑 나란히 서서 봤다고. 이번에도 그랬을 거야. 그건 네가 안 바꿨으니까." 그로부터 열흘 뒤, 홍콩의 하늘이 갈라졌다. 피터는 그 거리를 원래 세계의 뉴스 화면으로만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직접 서 보니 화면과는 전혀 달랐다. 하늘이 보라색이었다. 아니, 보라색이 아니었다. 어떤 색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색이 하늘 한가운데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 안쪽에서 빛도 어둠도 아닌 것이 꿈틀거렸다. 거리의 건물들이 무너져 있었다. 간판들이 부서진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 위로 비가 내렸다. 그런데 그 비가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빗방울들이 바닥에서 튀어 올라 하늘로. 토니의 아머가 피터의 머리 위에서 낮게 날고 있었다. 둘은 거리 끝의 낡은 건물에서 사람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무너진 계단 아래에 갇힌 노인 하나, 차 안에 갇힌 아이 둘, 가게 셔터 뒤에 숨어 있던 상인 가족. 피터는 거미줄로 무너진 콘크리트 덩어리를 붙잡아 들어 올렸고, 토니는 그 아래에서 사람들을 하나씩 꺼내 안전한 골목으로 날랐다. 비명과 사이렌과 건물이 갈라지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했다. 무너진 국숫집 안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났다. 피터는 깨진 유리문을 넘어 들어갔다. 쓰러진 의자들과 깨진 사발들 사이로 국물 냄새와 간장 냄새가 진하게 고여 있었다. 천장의 붉은 종이 등이 반쯤 찢어진 채 흔들렸다. 카운터 아래에 다섯 살쯤 된 남자아이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두 손으로 비닐봉지 하나를 꼭 쥐고 있었다. 봉지 안에서 작은 금붕어 한 마리가 물과 함께 출렁였다. 아이는 피터의 마스크를 보더니 울음을 뚝 그쳤다. 그리고 금붕어 봉지를 피터 쪽으로 내밀었다. 자기보다 이걸 먼저 구해 달라는 것처럼. 피터는 그 봉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아이를 한쪽 팔로 안아 올렸다. 아이의 몸이 가볍고 따뜻했다. 피터의 목을 감은 작은 팔이 떨렸다. 피터는 거미줄을 쏘아 무너진 천장 틈으로 빠져나갔다. 골목 끝에서 아이의 엄마가 맨발로 달려오고 있었다. 피터는 아이를 그 품에 넘겨주고, 금붕어 봉지도 아이 손에 다시 쥐여 주었다. 아이가 엄마 어깨 너머로 피터를 보며 봉지를 흔들었다. 금붕어가 그 안에서 주황색으로 반짝였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도 어린 날, 무너지는 박람회장 한가운데에서 쇠로 된 손에 구해진 적이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이 지금 피터의 머리 위를 날고 있었다. 거리 한가운데, 무너진 성소 건물 앞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붉은 망토가 위로 떨어지는 빗속에서 펄럭였다. 남자의 맞은편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눈가가 갈라진 도자기처럼 검붉게 금이 간 사람들이었다. 그 남자 옆에 쓰러진 사람이 하나 있었다. 성소를 지키던 사람이었다. 피터는 그 쓰러진 사람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늦었다. 이번에도. "피터! 왼쪽!" 토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터졌다. 피터는 몸을 날렸다. 방금 서 있던 자리로 건물 외벽 한 조각이 무너져 내렸다. 먼지가 솟구쳤다. 피터는 먼지 속에서 기침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거리 한가운데의 그 남자가 가슴 앞의 둥근 장신구를 열었다. 그 안에서 초록빛이 흘러나왔다. 남자의 손이 떨렸다. 붕대를 감은 그 손이. 그런데 그 손가락들이 허공에 어떤 모양을 그렸다. 초록빛 고리들이 남자의 팔목을 감싸며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이 거꾸로 흘렀다. 무너진 외벽 조각이 바닥에서 떠올라 건물 위의 원래 자리로 날아가 붙었다. 깨진 유리창들이 조각조각 모여 다시 창틀 안에 맞물렸다.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들이 이제 정상적으로, 아니 정상의 반대로, 하늘에서 바닥으로 되돌아갔다. 무너진 간판들이 일어섰다. 불길이 꺼진 자리에서 연기가 거꾸로 빨려 들어가며 불씨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뒷걸음질 쳤다. 피터가 방금 꺼낸 노인이 뒷걸음으로 무너진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 둘이 뒷걸음으로 차 안으로 들어갔다. 입이 뒤로 움직이며 비명을 거꾸로 삼켰다. 피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였다. 앞으로. 피터의 숨은 앞으로 쉬어졌고, 피터의 심장은 앞으로 뛰었다. 세상 전체가 뒤로 흐르는 가운데 피터 혼자만 원래 방향으로 서 있었다. 강물 한가운데 박힌 돌처럼. 물이 피터를 돌아서 거꾸로 흘러갔다. 그리고 피터는 보았다. 머리 위의 붉은 아머가 뒤로 날아가고 있었다. 방금 피터에게 왼쪽이라고 외쳤던 그 아머가. 토니가 피터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뒤로, 뒤로. 피터를 처음 발견하기 전의 자리로. 아머의 손바닥 추진기 불빛이 거꾸로 꺼졌다가 켜졌다. 토니의 목소리가 귓가의 통신기에서 거꾸로 흘러나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피터의 이름을 거꾸로 부르는 소리. "…토니." 피터의 목소리가 떨렸다. 피터는 손을 뻗었다. 손이 허공을 가르며 앞으로 나갔다. 그 손이 닿을 곳이 없었다. 토니는 뒤로 멀어지고 있었다. 피터가 이 세계에 처음 떨어진 그 겨울 이후로, 토니가 피터에게서 멀어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늘 피터가 다가갔고, 토니가 다가왔다. 그런데 지금 토니는 피터를 모르는 시간 쪽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 아머 안의 토니는 피터가 거기 서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었다. 피터는 그 감각을 알았다. 원래 세계의 그 붉은 행성 위에서, 피터는 토니의 품 안에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그때 토니가 무엇을 보았는지, 피터는 나중에야 알았다. 손안에서 사라지는 사람을 붙잡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그 손에 남은 재를 오래 내려다보았다고. 지금 피터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지는 사람을 보는 자리에. 그때의 토니가 이랬구나. 이렇게 아팠구나. 피터는 뻗은 손을 거두지 못했다. 거꾸로 흐르는 빗속에서, 그 손끝이 하얗게 떨렸다. 그때 시선이 느껴졌다. 거리 한가운데, 초록빛 고리를 팔에 두른 그 남자가 피터를 보고 있었다. 세상이 거꾸로 흐르는 가운데, 그 남자만이 피터처럼 앞으로 서 있었다. 그 남자의 눈이 좁아졌다. 거꾸로 흐르는 군중 사이에서 혼자 멈춰 선 빨갛고 파란 슈트를, 그 남자는 똑바로 보고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꾸로 흐르는 소음 사이로 그 목소리만이 똑바로 들렸다. "…넌 누구지." "……" "이 시간에 속하지 않는 사람. 내 주문 안에 들어와 있는데 주문이 너를 잡지 못해. 넌 누구야." 피터는 그 남자를 보았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그 남자의 이름을 입 밖에 냈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가 셀 수 없이 불렀던 이름이었다. 모든 사람에게서 자기를 지워 달라고 부탁하던 그 밤에도 불렀던 이름. "…스트레인지 박사님. 나중에 다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가세요. 저 하늘 위로요. 거기서 거래하셔야 해요. 몇 번이고요." "…거래?" "네. 이길 때까지 지는 거래요. 박사님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하나만 기억해 주세요. 박사님이 몇 번을 지든, 저는 그 횟수를 셀 수 있어요. 혼자 세는 거 아니에요." 스트레인지가 피터를 오래 보았다. 그 눈에 의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어떤 알 수 없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의 눈빛이 번졌다. 스트레인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의 소용돌이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피터를 보았다. 그 입가에 아주 짧게, 오만하고 피곤한 웃음이 스쳤다. 그리고 남자의 몸이 초록빛 속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소용돌이 안으로. 어떤 색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세상이 멈췄다. 거꾸로 흐르던 것들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피터는 그 얼어붙은 거리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느꼈다. 시간이 한 바퀴 돌았다. 아주 짧게, 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또 한 바퀴. 또 한 바퀴. 피터는 그 횟수를 셌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피터의 손가락이 다 접혔다가 다시 펴졌다. 마흔 번. 쉰 번. 매듭이 된 피터만이 그 둥근 시간의 고리를 바깥에서 세고 있었다. 저 위에서 한 남자가 몇 번이고 죽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예순일곱 번째에서, 하늘의 소용돌이가 멈췄다. 어둠이 걷혔다. 하늘이 회색으로, 그리고 다시 평범한 비구름의 색으로 돌아왔다. 얼어붙었던 것들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앞으로. 노인이 무너지지 않은 계단 위를 걸어 내려왔다. 아이 둘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빗방울이 하늘에서 바닥으로, 똑바로 떨어졌다. 그리고 피터의 머리 위에서, 붉은 아머가 앞으로 날아왔다. 토니의 목소리가 귓가의 통신기에서 똑바로 흘러나왔다. [피터! 왼쪽! …어? 왼쪽에 아무것도 없네. 방금 뭐가 무너질 것 같았는데.] 피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미줄을 쏘아 아머의 팔에 붙였다. 그리고 그 팔을 타고 단숨에 날아올라 아머의 가슴에 매달렸다. 두 팔로 아머의 목을 감았다. 꽉. 쇠가 차가웠다. 그 차가운 쇠 너머로, 아머 안의 심장 박동이 미세하게 전해졌다. 앞으로 뛰는 심장이었다. […피터? 왜 그래. 다쳤어?] "…아니요." [근데 왜 떨어. 너 지금 떨고 있잖아.] "…토니가 거꾸로 갔어요. 저한테서 멀어졌어요. 저를 모르는 시간 쪽으로요. 근데 저는 안 갔어요. 저만 여기 남았어요." [……] "67번이요. 시간이 67번 돌았어요. 저 혼자 셌어요." 아머가 공중에서 멈췄다. 투구가 열렸다. 비에 젖은 토니의 얼굴이 드러났다. 토니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피터의 얼굴을 보자 그 얼굴이 천천히 무너졌다. 토니가 아머의 한쪽 팔로 피터의 허리를 감쌌다. 두 사람이 비 내리는 홍콩의 하늘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빗줄기가 둘의 어깨 위로 똑바로 떨어졌다. 토니가 피터의 젖은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며 입을 열었다. "…난 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 "근데 네가 셌다면, 67번 다 내가 옆에 있었던 거야. 거꾸로든 똑바로든. 그러니까 이제 그만 떨어." 피터가 토니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젖은 머리칼에서 쇠 냄새와 비 냄새가 났다. 토니의 손이 피터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저 아래 거리에서 스트레인지가 하늘에서 내려와 젖은 아스팔트 위에 발을 디뎠다. 망토 자락이 빗물 위로 내려앉았다. 스트레인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두 사람을 한참 올려다보다가 성소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스트레인지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거리에 없었다. 이번엔 이 거리에서 시간이 67번 도는 동안 그 횟수를 센 사람이 하나 있었고, 그 사람을 알아본 사람이 하나 있었고, 그 사람을 끌어안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홍콩의 밤이 내려앉을 무렵, 토니는 피터를 안은 채 바다 위를 낮게 날았다. 아래로 빅토리아 항구의 검은 물결이 펼쳐졌다. 양쪽 해안의 빌딩들이 하나둘 불을 켰고, 그 불빛이 물 위에 길게 번져 흔들렸다. 낮의 일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도시는 평범한 밤을 맞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거꾸로 걸었던 일도, 하늘이 갈라졌던 일도. 그 거리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피터는 그중 하나였다. 바람이 차가웠다. 아머의 가슴판이 피터의 뺨 아래에서 따뜻하게 웅웅거렸다. 토니가 아머의 온도를 올려 둔 모양이었다. 피터는 그 가슴판에 귀를 대고 있었다. 원자로가 돌아가는 낮은 소리 사이로 토니의 심장 박동이 희미하게 섞여 들렸다. 피터는 그 박동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앞으로 뛰는 심장. 아까는 거꾸로 뛰던 심장. "…또 세고 있지." "…어떻게 아셨어요." "입술 움직이는 거 느껴져. 가슴판 너머로도." "……" "세도 돼. 실컷 세. 근데 이번엔 끝까지 세려면 오래 걸릴 거야. 나 오래 살 거니까." 피터가 웃었다. 웃다가 하품이 나왔다. 하루 종일 버틴 몸이 그제야 무거워졌다.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앉았다. 토니가 피터를 고쳐 안았다. 아머의 팔이 피터의 등과 무릎 아래를 단단히 받쳤다. 항구의 불빛이 피터의 감긴 눈꺼풀 위로 따뜻하게 어른거렸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혼자 시간을 세다가 혼자 잠들었다. 이번엔 누군가의 가슴판 위에서, 앞으로 뛰는 심장 소리를 세다가 잠이 들었다. 그 숫자는 예순일곱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블리커 거리의 그 건물은 겉으로 보기엔 그저 오래된 벽돌집이었다. 3층짜리 갈색 벽돌 건물, 꼭대기 층에 둥근 창 하나. 그 창의 격자무늬가 묘하게 눈에 걸렸다. 네 갈래로 뻗은 선들이 원 안에서 서로를 감싸 안은 모양이었다. 길 건너편 빵집에서 갓 구운 빵 냄새가 흘러왔고, 인도 위로 지난밤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회색으로 굳어 있었다. 피터는 그 건물 현관 계단 아래에 서서 둥근 창을 올려다보았다. 토니가 옆에서 코트 깃을 세우며 입김을 내뱉었다. 초대장은 이틀 전 아침에 왔다. 피터가 철물점 계산대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을 때, 계산대 위 허공에 불꽃이 원을 그리며 열리더니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벤 삼촌은 돋보기 너머로 그 원이 닫히는 걸 보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제 우리 가게에 마법사도 오냐고 중얼거렸다. 종이에는 주소 하나와 시간, 그리고 서명 대신 이렇게 적혀 있었다. 67번을 센 사람에게. 현관문은 피터가 손을 대기도 전에 저절로 열렸다. 안에서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오래된 나무와 먼지, 그리고 희미하게 향 냄새. 카트만두의 그 찻집에서 맡았던 냄새였다. 피터는 숨을 들이켰다. 현관 안쪽은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높은 천장까지 이어진 나무 계단이 원을 그리며 위로 감겨 올라갔고, 벽마다 낯선 유물들이 유리장 안에 놓여 있었다. 뿔이 달린 투구, 금이 간 거울, 손바닥만 한 석판. 계단 난간을 쥐자 나무가 손바닥 아래에서 매끄럽게 닳아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손이 쥐었다 놓은 결이었다. 계단 꼭대기에서 무언가가 날아 내려왔다. 붉은 천이었다. 망토. 그 망토가 피터의 머리 위에서 한 바퀴 돌더니, 피터의 어깨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깃이 피터의 뺨을 간질였다. 피터가 깜짝 놀라 굳었다. 망토가 피터의 어깨를 한 번 감싸 안듯 조였다가 풀더니, 이번엔 토니 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토니의 턱수염을 깃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토니가 질색하며 고개를 젖혔다. "…이거 뭐야. 왜 내 수염을 만져." "얘가 손님을 좋아해. 특히 처음 보는 손님은." 위층 난간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스트레인지가 난간에 팔을 기댄 채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짙은 남색 옷에 허리띠를 맨 차림이었다. 붕대는 풀려 있었다. 대신 두 손에 가느다란 흉터들이 은빛으로 가늘게 금 간 것처럼 남아 있었다. 그 손이 아직 조금 떨렸다. 스트레인지가 손가락을 튕기자 망토가 마지못해 토니에게서 떨어져 스트레인지의 어깨로 날아갔다. "올라와. 차 끓여 놨다. 웡이 끓였지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으로 긴 복도가 이어졌다. 복도 양쪽에 문이 줄지어 있었다. 나무문, 쇠문, 유리문. 문마다 낯선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피터가 걸음을 멈추고 한 문을 보았다. 문틈으로 짠 바닷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 옆 문틈에서는 사막의 뜨거운 모래 냄새가 났다. 피터가 신기해서 손을 뻗자, 뒤에서 웡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문은 열지 말라고. 열면 남극으로 간다고. 지난주에 새로 온 견습생 하나가 열었다가 사흘 동안 펭귄들 사이에서 떨었다고. 토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웡은 웃지 않았다. 진지한 얼굴로 다음 문을 가리켰다. 그 문은 더 열지 말라고. 그건 어디로 가는지 자기도 모른다고. 2층 서재는 둥근 창이 있는 방이었다. 바깥에서 올려다본 그 창이었다. 창의 격자무늬 사이로 겨울 햇살이 들어와 바닥 위에 네 갈래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벽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가득했다. 가죽 표지가 갈라진 책, 금박이 다 벗겨진 책, 글자가 아니라 그림으로만 된 책. 방 한가운데 낮은 탁자 위에 찻주전자가 김을 뿜고 있었다. 그 옆에 덩치 큰 남자 하나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남자가 피터를 보더니 아주 조금, 정말로 아주 조금 고개를 숙였다. "…웡이다. 홍콩에서 죽었었다고 들었다. 기억은 없지만. 고맙다."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셌어요."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앉아라. 차 식는다." 피터와 토니는 탁자 앞에 나란히 앉았다. 웡이 찻잔 두 개를 내밀었다. 맑은 금빛 차에서 꽃향기가 났다. 토니가 한 모금 마시더니 눈썹을 올렸다. 버터 차보다 훨씬 나은 모양이었다. 스트레인지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자기 찻잔을 들었다가, 찻잔이 받침에 부딪혀 달그락거리자 다시 내려놓았다. 그 손을 무릎 위로 감추며 스트레인지가 토니를 보았다. 토니가 찻잔 너머로 스트레인지의 손을 흘끗 보았다. 공학자의 눈이었다. 손가락 관절의 각도, 흉터가 지나간 자리, 떨림의 주기. 피터는 그 눈빛이 무엇을 계산하는지 알았다. 토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손. 신경 신호 읽어서 떨림 잡아 주는 장갑, 만들 수 있어요. 한 달이면 시제품 나와요. 수술할 정도는 아니어도, 찻잔 정도는 안 흔들리게." "……" "돈 얘기 아니에요. 그냥, 만들 수 있어서요." 스트레인지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처음으로 오만함이 빠진 웃음이었다. 스트레인지가 손가락을 천천히 펼쳤다가 오므렸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스타크 씨. 근데 이 손은 이대로 둘 거예요. 떨려야 기억하거든요. 내가 뭘 잃었고, 그 대신 뭘 얻었는지.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이 떨림이 내 오만을 붙잡아 두는 닻이라고." "…닻이라." "그래도 찻잔은 좀 아쉽네요. 웡이 끓인 차는 맛있는데 반은 흘려요." 웡이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쳤다. 토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피터도 웃었다. 그 웃음 사이로 피터는 스트레인지의 떨리는 손을 다시 보았다. 비 오는 밤 핸들과 계기판 사이에 끼어 있던 손. 그 손이 지금은 찻잔 옆에서, 닻처럼 무겁게, 그러나 평온하게 놓여 있었다. "…스타크 씨. 병원에 꽃 보낸 사람, 당신이죠." "……" "카드 글씨체가 너무 공학자 같았어요. 대문자가 다 직각이에요. 그리고 그 문장. 손 말고 다른 게 당신을 고칠 수도 있다. 그때는 그 카드를 쓰레기통에 던졌어요. 화가 나서요. 카트만두에 가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생각났어요." 토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스트레인지가 그 얼굴을 보며 아주 짧게 웃었다. 오만하고, 그런데 어딘가 쓸쓸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스트레인지의 시선이 피터에게로 옮겨 갔다. 웃음이 사라졌다. "…본론으로 가자. 선생님이 떠나기 전에 나한테 말을 남기셨다. 그날 밤, 병원 창가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지. 그분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 말을 전해야 할 사람이 곧 내 앞에 나타날 거라고. 시간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 "홍콩에서 너를 봤을 때, 그게 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불렀다." "……" "그 전에. 홍콩에서 못 들은 대답부터 듣자. 넌 누구지." 피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있었다. 토니가 탁자 아래에서 피터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말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피터는 숨을 한 번 고르고 스트레인지를 똑바로 보았다. 원래 세계에서 이 사람 앞에 앉았던 날이 몇 번이었는지 피터는 다 기억했다. 그 마지막 밤, 눈 덮인 성소 지붕 위에서 이 사람이 손을 들어 주문을 그리던 모습까지. "…피터 파커예요. 앞으로 올 시간에서 왔어요. 거기서 저는 박사님을 알았어요. 같이 싸웠고, 같이 잃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엔 제가 부탁했어요. 세상 모든 사람이 저를 잊게 해 달라고요. 박사님이 그 주문을 걸어 주셨어요. 박사님 자신까지 저를 잊는 주문을요." "……" "그래서 박사님은 거기서도 저를 몰라요. 여기서도 모르시고요. 근데 저는 박사님을 두 번 다 알아요." 스트레인지가 오래 말이 없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천천히 오므려졌다. 웡이 찻주전자를 든 채 피터를 보았다. 창밖에서 눈 녹은 물이 처마 끝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스트레인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었다. "…모두에게서 자기를 지우는 주문이라. 그걸 내가 걸었다고. 너한테." "네. 제가 원해서요. 박사님 탓 아니에요." "그런 주문을 원하게 만든 세상이라면, 그 세상의 나도 꽤 많이 실패했겠군." 스트레인지가 쓴웃음을 지으며 탁자 옆으로 손을 뻗었다. 작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낡은 종이였다. 그 위에 단정한 글씨가 몇 줄 적혀 있었다. 스트레인지는 그 종이를 펼쳐 들었다가, 떨리는 손 때문에 종이가 흔들리자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종이를 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미 외우고 있었다. "…그 아이는 강물에 떨어진 돌이다. 그 돌을 억지로 들어내려 하지 마라. 매듭을 억지로 끊거나 억지로 당기면, 매듭은 풀리는 대신 시간을 찢는다. 그러니 누구도 그 아이를 억지로 제자리로 돌려보내려 해서는 안 된다." "……" "그러나 기억해라. 매듭은 언젠가 스스로 돌아갈 길을 찾는다. 강물이 돌 하나를 영원히 품고 흐르지는 않으니까. 그날이 오면 문이 열릴 것이다. 그 문을 지날지 말지는 그 아이가 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 혼자 정해서는 안 된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찻주전자의 김만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둥근 창 너머로 블리커 거리의 자동차 소리가 멀게 들렸다. 피터는 탁자 위의 종이를 보았다. 단정한 글씨였다. 오래 쓴 붓으로 쓴 것 같은. 피터의 귓가에서 피가 웅웅거렸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옆에서 토니가 움직이지 않았다. 피터는 고개를 돌려 토니를 보았다. 토니는 그 종이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하얬다. 찻잔을 쥐었던 손이 무릎 위에서 주먹으로 굳어 있었다. 피터는 그 얼굴을 알았다. 시베리아에서, 그 영상을 보던 얼굴이었다. 무언가를 잃게 될 걸 미리 아는 사람의 얼굴. "…언제요." 토니가 물었다. 목소리가 낮고 거칠었다. 스트레인지가 토니를 보았다. 그 눈에 연민 비슷한 것이 스쳤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모릅니다. 선생님도 그건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몇 달 뒤일 수도 있고, 몇 년 뒤일 수도 있어요. 다만 한 가지는 압니다. 그 문을 여는 건 아마 저일 거예요. 이 성소에서, 이 손으로. 이 떨리는 손으로요." 스트레인지가 무릎 위에 감췄던 손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은빛 흉터들이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스트레인지가 그 손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손을 부순 게 너였지. 홍콩에서 네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알았다. 넌 그날 밤 그 도로를 알고 있었어. 막을 수 있었고. 안 막았지." "……" "원망하려는 거 아니다. 선생님이 그러셨어. 그 아이가 내 손을 내버려 둔 건, 그 아이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내린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그리고 그 결정 덕분에 매듭이 처음으로 보였다고. 그러니까 이 손으로 언젠가 너한테 문을 열어 주는 게, 맞는 순서인 것 같다." 피터는 그 손을 보았다. 빗속에서 핸들과 계기판 사이에 끼어 있던 그 손. 피터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피터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토니의 주먹 쥔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토니의 주먹이 차가웠다. 피터는 그 주먹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토니가 피터를 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문이 열리면. 네가 원래 있던 데로 가는 문이 열리면." "안 가요." "……" "안 가요, 토니. 제가 돌아갈 데는 없어요. 거기엔 저를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토니도 없어요. 제 시간은 여기예요." 토니가 고개를 돌려 피터를 보았다. 그 눈이 젖어 있었다. 토니가 주먹을 풀었다. 그 손이 피터의 손을 뒤집어 마주 잡았다. 손가락이 하나씩 피터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단단하게. 토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그 떨림 아래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있었다. "…그건 그날 정해." "……" "지금 정하지 마. 선생이 그랬잖아. 혼자 정해선 안 된다고. 그날 문 앞에서 같이 정하자. 네가 거기 남겨 두고 온 게 뭔지, 여기서 가진 게 뭔지, 다 꺼내 놓고. 그리고 그날 네가 남겠다고 하면, 그때 그 말을 들을게. 지금 말고." 피터는 토니를 보았다. 둥근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토니의 젖은 눈가를 비추었다.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웡이 헛기침을 하더니 찻주전자를 들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망토가 스트레인지의 어깨에서 슬그머니 미끄러져 내려와 피터와 토니의 맞잡은 손 위로 날아가더니, 그 두 손을 깃 끝으로 한 번 감쌌다가 다시 날아올랐다. 스트레인지가 그걸 보며 눈을 굴렸다. "…쟤가 원래 저렇게 감상적이지 않은데." "감상적인 건 박사님 같은데요." "닥쳐라, 꼬마." 피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섞인 웃음이었다. 토니도 따라 웃었다. 스트레인지는 웃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스트레인지가 탁자 위의 종이를 접어 피터에게 내밀었다. 피터가 그 종이를 받았다. 단정한 글씨가 손바닥 안에서 따뜻했다. "가져가라. 그건 네 거다. 나는 다 외웠으니까." "…감사해요, 박사님." "그리고 하나 더. 선생님이 마지막에 덧붙이신 말이 있다. 종이엔 없는 거다. 그 아이에게 전해라. 매듭을 단단하게 만든 건 그 아이 혼자가 아니었다고. 그러니 언젠가 그 문 앞에 섰을 때, 그 아이가 붙잡은 손을 먼저 보라고." 피터는 토니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둥근 창의 격자무늬 그림자가 그 두 손 위에 걸쳐 있었다. 네 갈래로 뻗은 선들이 원 안에서 서로를 감싸 안은 모양. 피터는 종이를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심장 바로 위에.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성소의 문을 두드려 모든 사람에게서 자기를 지워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엔 이 성소에서, 언젠가 열릴 문 앞에 혼자 서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을 받아 들고 있었다. 현관까지 배웅을 나온 스트레인지가 문간에서 피터를 불러 세웠다. 토니가 먼저 계단을 내려간 뒤였다. 스트레인지가 떨리는 손을 문틀에 짚은 채 피터를 내려다보았다. 망토가 그 어깨 위에서 조용히 늘어져 있었다. "…그 꽃. 스타크 씨한테 고마웠다고 전해라. 내가 직접 말하면 저 사람이 또 수표책 꺼낼 것 같으니까." "직접 말씀하셔도 돼요. 이제 안 꺼내실 거예요." "그래도. 네가 전해라. 그리고 하나 더. 그 문이 열리는 날까지, 매주 한 번은 여기 와서 차 마시고 가라. 매듭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도 좀 알아야 할 것 같다. 웡이 손님 오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복도 안쪽에서 웡이 좋아한 적 없다고 낮게 받아쳤다. 스트레인지가 눈을 굴렸다. 피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기 직전, 망토가 문틈으로 깃 끝을 내밀어 피터의 손등을 한 번 쓸고 들어갔다. 성소를 나오자 블리커 거리에는 해가 기울고 있었다. 녹다 만 눈이 인도 가장자리에서 회색으로 질척였고, 처마 끝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길모퉁이의 군밤 수레에서 단내 섞인 연기가 피어올랐다. 토니는 성소 계단을 내려온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앞만 보고 걸었다. 피터는 그 반 걸음 뒤에서 따라 걸었다. 외투 안주머니의 종이가 걸음마다 가슴께에서 바스락거렸다. 군밤 수레 앞에서 토니가 멈춰 섰다. 군밤 한 봉지를 샀다. 종이봉투가 손바닥 위에서 따뜻했다. 토니가 그 봉투를 피터에게 내밀었다. 피터가 받아 들자, 토니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군밤 연기 사이로 낮게 흘러나왔다. "…무서워." "……" "그 문. 언젠가 열린다는 거. 아까는 그날 정하자고 멋있게 말했는데, 사실 지금 다리가 후들거려. 네가 그 문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는 얼굴을 상상했어. 그 얼굴이 미안한 얼굴이면 어떡하지. 그 생각만 났어." 피터는 군밤 봉지를 쥔 채 토니를 보았다. 토니는 피터를 보지 않았다. 질척한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얼굴이 해 질 녘 빛 속에서 지쳐 보였다. 오래 혼자 무서워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피터는 봉투에서 군밤 하나를 꺼내 껍질을 깠다. 뜨거워서 손끝이 따끔했다. 노랗게 익은 속살을 토니의 입 앞에 내밀었다. "…드세요." "지금 그게…" "드세요. 뜨거울 때." 토니가 마지못해 그 군밤을 받아먹었다. 뜨거워서 입을 벌리고 후후 불었다. 피터는 그 얼굴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토니의 코트 소매를 붙잡았다. "그날 제가 뒤돌아보면, 미안한 얼굴 아닐 거예요. 이 얼굴일 거예요. 지금 이 얼굴요. 군밤 먹고 입 데인 사람 보는 얼굴이요." "……" "그러니까 무서우시면, 그날까지 군밤 많이 사 주세요. 제가 그 얼굴 잊어버리지 않게요." 토니가 피터를 보았다. 입안의 군밤을 삼키고, 한참 피터를 보았다. 그러다 웃음이 터졌다. 코트 소매를 쥔 피터의 손을 끌어당겨 자기 주머니 안에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두 손이 맞잡혔다. 군밤 봉지의 온기가 둘 사이에서 천천히 식어 갔다. 블리커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씩 켜졌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거리를 혼자 걸어 나왔다.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사람이 되어서. 이번엔 언젠가 열릴 문에 대한 약속을 안주머니에 넣고, 토니의 코트 주머니 속에서 손을 맞잡은 채 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퀸즈에 봄이 왔다. 철물점 앞 가로수에 연두색 잎이 돋았고, 길 건너 세탁소 화단에서는 노란 수선화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침마다 셔터를 올리면 진열창 너머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이 겨울보다 한 뼘쯤 길어져 있었다. 벤은 그 햇살 아래에서 계산대의 그을린 자국을 마른 천으로 문지르곤 했다. 지우려는 게 아니었다. 먼지가 앉지 않게. 그 자국 위로 손때가 조금씩 덧입혀지면서, 검게 탔던 나무가 이제는 짙은 갈색으로 반들거리기 시작했다. 그 토요일 아침, 피터와 토니는 철물점 간판 위에 오색 깃발을 걸었다. 카트만두의 골목에서 여자아이가 안겨 준 그 깃발이었다. 피터가 사다리 위에 올라가 깃발 한쪽 끝을 간판의 쇠고리에 묶었고, 토니가 아래에서 다른 쪽 끝을 들고 길 건너 가로등까지 걸어갔다. 행인들이 신기하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세탁소 아줌마가 문간에 서서 무슨 축제냐고 물었다. 벤이 계산대 뒤에서 나와 팔짱을 끼고 그 깃발을 올려다보았다. 파랑, 하양, 빨강, 초록, 노랑. 봄바람에 깃발이 일제히 펄럭였다. 벤이 한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 불 때마다 기도가 날아간다니, 우리 가게 나사 잘 팔리게 해 달라고 하나 적어 넣을걸 그랬다고. 토니가 가로등에 매듭을 묶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한 번 만에 단단히 묶였다. 그 토요일 저녁, 3층 부엌의 식탁은 다시 길어져 있었다. 메이가 창고에서 접이식 탁자를 꺼내 식탁 끝에 이어 붙였고, 그 위로 꽃무늬 식탁보 두 장을 겹쳐 덮었다. 의자가 모자라 피터가 철물점에서 작업용 둥근 의자 두 개를 들고 올라왔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바깥의 봄바람이 커튼을 부풀리며 들어왔고, 그 바람에 실려 아래층 빵집의 계피 냄새와 어디선가 피어난 라일락 향이 섞여 흘렀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커다란 냄비가 보글보글 끓었다. 소금을 많이 넣은 수프였다. 툼스가 제일 먼저 왔다. 다림질한 셔츠를 입고, 손에 작은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넉 달 동안 금요일마다 이 계단을 올라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현관에서 벤과 마주 서서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툼스가 그 손을 잡았다. 투박한 손 두 개가 오래 맞잡혀 있었다. 그리고 툼스가 종이봉투를 벤에게 내밀었다. 벤이 봉투를 열었다. 안에 나사 하나와 반듯하게 접힌 지폐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외상값이요. 늦어서 미안합니다. 내 손으로 번 돈이에요. 넉 달 치 월급에서 조금씩 뗐어요." "나사 하나에 이렇게 많이 받으면 내가 강도지." "이자예요. 30년 된 계산대 태운 값까지." 벤이 웃음을 터뜨렸다. 툼스도 따라 웃었다. 금요일 저녁 식탁에서 몇 번 본 웃음보다 한결 환한 웃음이었다. 눈가의 주름이 깊게 접히는, 생각보다 순한 웃음. 벤이 지폐를 다시 봉투에 넣어 툼스의 셔츠 주머니에 꽂아 주었다. 나사만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리고 피터를 돌아보았다. "이건 네 상자에 넣어. 그 크레파스 글씨 상자. 이 나사가 두 번 돌아왔으니까, 이제 주인이 생긴 거야." 해피와 메이가 접시를 나르는 사이 토니가 왔다. 꽃다발을 안고. 메이에게 주는 노란 튤립이었다. 메이가 꽃을 받아 들며 토니의 볼에 입을 맞췄고, 토니는 매번 그렇듯 귀 끝이 붉어졌다. 그 뒤로 로디가 왔고, 와인 두 병을 든 스티브가 왔다. 스티브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지 말지 망설이다가 메이에게 등을 떠밀려 그냥 들어왔다. 툼스가 스티브를 보고 잠깐 굳었다. 스티브가 툼스에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그 사이 해피가 툼스에게 맥주 한 병을 건넸다. 회사 정문에서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다. 스티브는 툼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둘은 처음 한동안 어색하게 수프만 떠먹었다. 그러다 스티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날개를 직접 만들었다고 들었다고. 자기는 평생 남이 만들어 준 방패만 들었다고. 툼스가 숟가락을 멈추고 스티브를 보았다. 그리고 냅킨 위에 볼펜으로 날개의 관절 구조를 쓱쓱 그려 보이기 시작했다. 스티브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로디가 옆에서 끼어들어 추진기 각도가 틀렸다고 했고, 툼스가 틀린 게 아니라 일부러 그런 거라고 받아쳤다. 셋의 머리가 냅킨 한 장 위로 모였다. 토니가 그 광경을 보며 피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러다 저 사람 우리 회사 말고 군대에 뺏기겠다고. 모두가 자리에 앉았을 때, 부엌 한쪽 벽에서 불꽃이 튀었다. 주황색 불꽃이 원을 그리며 벽 위에 열렸다. 메이가 국자를 든 채 비명을 질렀다. 그 원 안에서 스트레인지가 걸어 나왔다. 붉은 망토를 두르고, 손에 제과점 상자 하나를 든 채. 원이 등 뒤에서 닫혔다. 벽지에 그을린 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스트레인지가 메이에게 상자를 내밀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관이 좀 멀어서요." "…다음엔 현관으로 와요, 박사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벤이 그 광경을 보며 돋보기를 고쳐 썼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더 끌어다 놓았다. 망토가 스트레인지의 어깨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가 창가의 해바라기 화분 옆으로 날아가더니, 그 위에 걸려 커튼처럼 늘어졌다. 메이가 그걸 보며 한참 입을 벌리고 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토니가 피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망토, 우리 집에 하나 들여도 되냐고. 피터는 수프 접시에 얼굴을 묻으며 웃었다. 식탁은 길고 시끄러웠다. 로디가 군대 시절 이야기를 하다 스티브와 숫자를 두고 다퉜고, 해피는 툼스에게 외계 금속 폐기물 창고의 보안 문제를 한참 늘어놓았다. 툼스는 그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딸 이야기를 꺼냈다. 리즈가 대학에 붙었다고. 멀리 가지 않고 뉴욕에 있는 학교로. 학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처음으로 딸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고. 툼스가 그 말을 하며 맥주병을 내려다보았다. 벤이 툼스의 잔에 수프를 한 국자 더 떠 주었다. 아무 말 없이. 수프 그릇이 다 비었을 때 벤이 숟가락으로 물컵을 두드렸다. 땡, 땡. 맑은 소리에 식탁이 조용해졌다. 벤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돋보기를 벗어 셔츠 주머니에 꽂고, 식탁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았다. 접이식 탁자까지 이어 붙인 긴 식탁, 짝이 맞지 않는 의자들, 철물점에서 올라온 둥근 작업 의자 두 개, 그리고 그 위에 앉은 얼굴들. 창밖의 봄바람이 벤의 희끗한 머리칼을 흔들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식탁엔 의자가 셋이었어요. 나, 메이, 그리고 비어 있는 거 하나. 그 빈 의자 치우자고 메이가 몇 번 그랬는데, 내가 못 치웠어요." "……" "근데 오늘은 의자가 모자라서 가게에서 올려 왔네. 마법사도 오고, 하늘 나는 양반들도 오고, 우리 계산대 태운 사람 사장님도 오고. 내 평생 이렇게 시끄러운 저녁은 처음이에요. 좋네요. 진짜 좋아요." 벤이 물컵을 들었다. 식탁의 모두가 따라 들었다. 맥주병, 와인 잔, 커피잔, 우유가 든 컵. 툼스가 맥주병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토니는 물컵을 든 손을 내리지 못하고 벤을 보고 있었다. 벤이 그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피터를 보았다. 오래. "그 빈 의자에 앉아 준 우리 피터한테. 그리고 그 애가 데려온 사람들한테. 짠." "짠." 여러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겹쳤다. 컵과 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부엌 가득 울렸다. 피터는 컵을 입에 댄 채 고개를 숙였다. 목이 메어 물이 넘어가지 않았다. 식탁 아래에서 토니의 무릎이 피터의 무릎에 와서 닿았다. 그대로 머물렀다. 창가의 망토가 바람도 없는데 한 번 크게 펄럭였다. 설거지가 시작될 무렵, 피터는 부엌 뒷문의 비상계단에서 낮은 목소리를 들었다. 창문 틈으로 내다보니 토니와 툼스가 철제 계단 난간에 나란히 기대 서 있었다. 툼스의 손에 맥주병이, 토니의 손에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아래 골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통 뚜껑 위로 뛰어올랐다. 봄밤의 공기가 부드러웠다. "…리즈 학비 말인데요. 회사 장학 재단에 그런 거 있어요. 직원 자녀 대상으로. 서류 하나만 내면 돼요." "압니다. 해피 씨가 그 서류 벌써 세 번 갖다줬어요." "그럼 왜 안 냈어요." "내 딸 학비는 내가 냅니다. 내 월급으로. 넉 달 일해 보니까 낼 수 있겠더라고요. 그게 내가 이 일 다시 하는 이유예요, 스타크 씨. 당신 돈 말고 내 돈으로 그 애 앞에 서고 싶어서." 토니가 툼스를 보았다. 한참 말이 없다가, 커피잔을 들어 툼스의 맥주병에 가볍게 부딪쳤다. 쨍, 하고 작은 소리가 봄밤에 울렸다. 툼스가 그 소리에 피식 웃었다. "…알았어요. 대신 리즈 졸업식엔 저도 초대해 줘요. 맨 뒷줄이라도." "맨 뒷줄은 무슨. 그 꼬마랑 같이 와요. 그 꼬마가 내 딸한테 이름 알려 줬다면서요. 리즈가 아직도 그 이름 얘기합니다. 피터라던가." 피터는 창문 안쪽에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비상계단 위의 토니가 창문 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토니가 커피잔 너머로 눈썹을 올렸다. 아주 좀, 이라고 말하는 눈썹이었다. 피터는 행주를 쥔 채 창문에서 황급히 물러났다. 등 뒤에서 메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메이가 개수대 앞에서 피터를 불렀다. 거품 묻은 손으로 찬장 위를 가리켰다. 거기에 그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크레파스로 피터의 공구라고 적힌. 피터가 저녁 전에 방에서 꺼내 와 찬장 위에 올려 두었던 것이었다. 메이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고 그 상자를 내려 피터에게 건넸다. "옥상 가는 거지. 이것도 데려가. 오늘 같은 날엔 얘도 바람 쐬고 싶을 거야." "…얘요?" "그래. 얘. 이 상자 안에 우리 피터가 둘이나 들어 있잖아. 다섯 살짜리랑, 지금 이 녀석이랑." 메이가 피터의 볼을 젖은 손으로 한 번 쓰다듬었다. 세제 냄새가 났다. 피터는 그 상자를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나무 상자 하나의 무게가 아니었다. 그 안에 든 시간들의 무게였다. 피터는 메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을 나섰다. 저녁이 끝나 갈 무렵 피터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손에 그 나무 상자를 들고. 뚜껑에 크레파스로 서툴게 적힌 피터의 공구라는 글씨가 저녁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옥상 난간 너머로 퀸즈의 낮은 지붕들이 봄 저녁의 보랏빛 안개 속에 겹겹이 펼쳐졌다. 멀리 맨해튼의 빌딩들에 하나둘 불이 켜졌다. 바람이 따뜻했다. 피터는 난간에 기대어 그 상자를 열었다. 장난감 드라이버 몇 개, 작은 나사들, 벤이 깎아 준 나무 라디오 모형. 그리고 그 옆에 눕혀 놓은, 가장자리가 녹아내린 붉은 아머 파편. 원래 세계의 토니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아머의 한 조각이었다. 피터는 그 파편 옆에 오늘 받은 나사를 조심스럽게 넣었다. 두 번 돌아온 나사. 철물점 계산대에서 툼스의 날개로, 툼스의 차고 유리병으로, 그리고 이 상자 안으로. "…그게 네 시간이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스트레인지가 옥상 문 앞에 서 있었다. 망토 없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손에 메이가 들려 준 커피잔을 쥐고 있었다. 그 손이 조금 떨렸다. 커피 표면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스트레인지가 피터 옆의 난간에 와서 기댔다. "…네. 이게 다 제 시간이에요." "……" "이건 이 세계의 피터 거예요. 다섯 살에 떠난 애요. 벤 삼촌이 그 애 방 치울 때 이것만은 못 버렸대요. 이건 원래 세계의 토니 거고요. 저 혼자 남은 4년 동안 창틀에 두고 매일 봤어요. 그리고 이건 오늘 받은 나사예요. 툼스 씨가 외상값이랑 같이 돌려준 거요." 피터는 상자 안을 손끝으로 쓸었다. 장난감 드라이버의 매끄러운 손잡이, 아머 파편의 거친 가장자리, 아직 새것처럼 반짝이는 나사. 서로 다른 시간에서 온 것들이 한 상자 안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피터의 목소리가 봄바람 속으로 낮게 흘러나왔다. "원래 세계에서 저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저를 기억하는 사람도, 제 물건을 간직해 줄 사람도요. 근데 여기선 이 상자가 생겼어요. 매번 하나씩 늘어나요. 그래서 문이 열려도, 저는 이 상자를 두고 갈 수가 없어요. 제 시간은 여기예요." 스트레인지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상자 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커피잔을 난간 위에 내려놓았다. 셔츠 깃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둥근 금빛 장신구였다. 홍콩에서 초록빛이 흘러나오던 그것. 스트레인지가 그 장신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피터를 보았다. "…어젯밤에 이걸로 앞을 봤다. 아주 잠깐. 선생님이 금지하신 일이지만. 매듭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서." "……" "앞으로 큰 싸움이 온다. 하늘 저편에서. 나는 그 싸움에서 이걸 들고 미래를 셀 거다. 어젯밤에 그 미래들의 가장자리만 봤어. 1400만 605개. 대부분은 지는 미래였다. 스타크가 죽는 미래도 셀 수 없이 많았고." 피터의 숨이 멎을 듯 얕아졌다. 난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트레인지가 그 손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상자를 보았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상자 안의 나사를 가리켰다. "근데 그중에 하나. 네가 있는 길이 있었다. 너만 있는 게 아니라. 네가 스타크 옆에 서 있는 길. 그 길에서 스타크는 손가락을 튕기고도 쓰러지지 않았어. 네가 붙잡고 있었으니까." "……" "하나뿐이다. 1400만 개 중에. 근데 그 하나가 확실히 있었다. 그러니까 그 상자, 단단히 들고 있어라. 그 길로 가려면 네가 이 시간에 있어야 하니까." 옥상 문이 다시 열렸다. 토니가 커피잔 두 개를 들고 올라왔다. 스트레인지가 장신구를 셔츠 깃 안으로 집어넣으며 난간에서 몸을 뗐다. 토니와 스쳐 지나가며 그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아무 설명 없이. 토니가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옥상 문이 닫히고, 아래층에서 메이의 웃음소리와 벤의 라디오 소리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토니가 피터 옆에 와서 섰다. 커피잔 하나를 내밀었다. 피터가 그 잔을 받으며 상자를 닫았다. 토니의 시선이 상자 뚜껑의 크레파스 글씨에 머물렀다. 그리고 피터의 젖은 눈가에. "…저 마법사가 뭐래." "1400만 605개 중에 하나요. 토니가 사는 길이 딱 하나 있대요. 거기에 제가 있대요. 토니 옆에요." 토니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한참 퀸즈의 지붕들을 내려다보았다. 노을이 다 저물고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첫 별 하나가 맨해튼의 빌딩들 위로 떠올랐다. 토니가 커피잔을 난간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피터의 손에서 상자를 받아 들어 두 사람 사이의 난간 위에 올려놓았다. 크레파스 글씨가 위로 오게. "하나면 충분해." "……" "넌 백 가지 방법으로 나를 구했잖아. 그중에 하나만 맞으면 됐어. 이번에도 하나면 돼. 같이 들고 가자. 그 하나." 아래층 창문이 드르륵 열렸다. 벤의 목소리가 계단통을 타고 옥상까지 올라왔다. 디저트 먹을 사람은 빨리 내려오라고. 박사님이 사 온 케이크, 로디가 반 먹었다고. 로디의 억울한 항의가 그 뒤를 따랐고, 메이의 웃음소리가 그 위로 겹쳤다. 피터와 토니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토니가 난간에서 몸을 떼며 피터의 손을 끌었다. 피터는 그 손에 끌려가다 말고 멈춰 섰다. 토니가 돌아보았다. 피터가 발끝을 들어 토니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커피 맛이 났다. 토니가 눈을 깜빡이다가, 귀 끝이 붉어진 채 피식 웃었다. "…케이크 다 먹히겠다." "조금만 더 있다 가요. 하나만 더 보고요." "뭘." 피터는 대답 대신 하늘을 가리켰다. 맨해튼의 빌딩들 위로 떠오른 첫 별 옆에, 언제부터인지 별 하나가 더 떠 있었다. 작고 희미했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토니가 그 별을 올려다보다가, 말없이 다시 난간 앞으로 돌아왔다. 피터는 토니의 손을 잡았다. 난간 위의 상자 옆에서, 두 손이 겹쳐졌다. 봄바람이 둘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아래층 창문에서 수프 냄새와 웃음소리가 흘러 올라왔다. 원래 세계에서 피터는 이 봄을 혼자 맞았다. 텅 빈 방에서, 창틀 위의 아머 파편 하나를 보며. 이번엔 그 파편이 다섯 살 피터의 장난감과 두 번 돌아온 나사 사이에 누워 있었고, 그 상자를 사이에 두고 토니가 피터의 손을 잡고 있었다. 1400만 605개의 미래 중 단 하나를 향해서. - 토니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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