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소처럼 일요일 저녁에 밥이 차려주는 밥까지 염치없이 얻어먹고 자정 다 되어서야 집으로 기어들어간 행맨은 씻고 침대에 누워서 흐뭇하게 주말내내 찍은 강아지 사진 넘겨보고 있었음 밥네 집에서도 행맨이 사준 강쥐옷을 입혀보며 사진 몇장 더 찍었는데 구석에 조금씩 걸려있는 전남편의 뒤통수, 무릎, 손 이런 곳에 자꾸 시선이 가겠지 한때 결혼반지가 끼워져있던 왼손 네번째 손가락도.. 그러느라 새벽 늦게 잠드려는 찰나 갑자기 폰이 찢어질 듯이 울림 발신자는 [로버트 플로이드] 이 시간에 사적인 연락 안 하기로 한 룰 깨고 전화가 왔다? 본능적으로 비상 상황이 발생한걸 직감한 행맨은 벨소리가 세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통화버튼을 누르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음 그리고 수화기 넘어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거의 울기 직전인 밥의 목소리가 들리겠지 "제,제이크.. 애가... 애가 갑자기 거품 토하고 숨을 이상하게 쉬어... 움직이지도 않고..." 원래 냉정할만큼 침착한 밥이 평정을 잃고 덜덜 떨며 말하는걸 듣자마자 행맨은 잠이고 뭐고 스프링처럼 튕겨 나감 자다 깨서 머리는 까치집에 잠옷바람으로 차키만 챙겨서 미친듯이 밟아서 십분만에 밥의 집앞에 도착함 문 열고 들어가니까 밥은 거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강아지 안고 눈물 뚝뚝 흘리고 있고, 강아지는 끙끙거리면서 축 늘어져 있음 행맨이 바로 강아지 번쩍 들고 밥 손 잡아서 일으키며 말하겠지 "베이비, 울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당장 브리스킷 안고 내 차에 타. 근처 24시 동물의료센터 전화해뒀어." 하고.. 이혼한 후에 한번도 부르지 않던 그 애칭이 나와버림 차 타고 가는 내내 밥은 조수석에서 강아지 꼭 안고 "내가 좀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새로 바꾼 사료가 문제였을까.. 미안해..." 하면서 자책만 할듯 그럼 행맨이 운전대 한 손으로 꽉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밥 떨리는 손 덮어쥐면서 네 잘못 아니라고 괜찮을테니까 너도 숨 좀 제대로 쉬라고 그러다 너까지 쓰러지면 나 병원 두 탕 뛰어야한다고 농담섞인 위로도 건냄 병원 도착해서 급히 처치실로 강쥐 들여보내고 밥은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기 시작함 행맨이 옆에 붙어 앉아서 밥 어깨 감싸 안아주고 밥도 평소 같았으면 이거 치우라고 할텐데 너무 무섭고 정신없으니까 행맨 가슴팍에 이마 묻고 엉엉 울겠지 행맨은 밥 머리 쓸어 넘겨주면서 "괜찮아, 우리 애 강하잖아. 아무 일 없을 거야" 하고 계속 달래주는데 정작 본인 손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 같이 키운 세월이 얼마인데 아픈 강쥐때문에 심장 철렁하는 건 둘 다 똑같으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응급진료를 마친 수의사가 나와서 다행히 수술까지 갈 상황은 아니라고 급하게 삼킨 뼈 조각이 위장에 남는 바람에 점막을 자극해서 그런거라고 뼈 조각은 위세척으로 안전하게 빼냈고, 소화기 보호제랑 수액 맞으면서 경과 지켜보면 금방 기운 차릴 거라고 말해주고 감 한마디로 행맨이 전날 챙겨준 고급 수제 간식이 문제를 일으킨거였음 아.. 행맨은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히거나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밥을 쳐다봤음 그리고 행맨 눈에 보인건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머리만 쓸어넘기며 대기의자에 다시 주저앉는 밥이겠지 사실 밥도 이 상황이 행맨이 준 간식때문인거 알고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한데 일단 강아지가 무사하다니까 긴장이 탁 풀리기도 했고 이 상황에서 또 싸우고 싶지 않았음 어차피 추궁해봤자 인정할 행맨도 아니고 그런데 그때 행맨이 밥 앞에 엉거주춤 무릎을 굽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말함 "...미안하다, 로버트." 라고.. 밥이 고개 들어서 쳐다보는데 진짜 여태껏 같이 살면서도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한 행맨이 이젠 거의 무릎을 꿇고 있음 이제야 늘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머리가 다 흐트러져 있고 신발은 짝짝이에 눈엔 핏발이 서 있는 행맨의 모습이 보이겠지 자기 자존심 세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해서 이혼할 때조차 완벽한 수트 차림으로 나타나 사과 한 마디 안하던 놈이었는데.. "솔직히... 너보란 듯이 일부러 더 비싼 거, 더 좋은 거 먹이고 입히겠다고 헛짓거리했어. 우리 애를 위한 게 아니라 내 자존심 세우려고... 나 그냥 자격도 없다. 미안해, 진짜." 진심으로 풀 죽어서 자기 탓으로 돌리는 행맨을 보는데 밥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은 채 눈만 꿈뻑거리겠지 같이 사는 동안 그 미친 자존심 때문에 얼마나 싸웠는데 이혼하고 남남이 되어서야 전남편놈이 처음으로 꼬리를 내리고 사과를 한다는 게 허탈하기도 하고 얘도 변할 수 있네 싶어서 묘한 기분도 들거고 아무튼 수의사가 마취 깨고 수액 다 맞을 때까지 몇 시간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날 밝으면 다시 오라고 하는데 차마 강쥐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둘은 나란히 대기실 작은 쇼파에 앉아 기다리기로 함 어느덧 시계는 새벽 4시를 넘고 졸음이 몰려온 밥의 고개가 꾸벅꾸벅 넘어가니까 행맨이 가만히 자기 어깨를 내어줌 밥도 거부하지 않고 그 단단하고 익숙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겠지 행맨은 밥이 깰까 봐 숨도 크게 못 쉬고 밥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면서 멍하니 병원 천장만 바라봄 어깨에 닿아오는 감촉, 체온, 샴푸 향까지 전부 너무 그립고 익숙해서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죄어오는걸 느끼면서 아침 7시, 처치실 문이 열리고 강아지가 살짝 비틀거리지만 말짱해진 모습으로 꼬리 치며 걸어 나옴 그대로 강쥐가 품에 안기는 순간 밥은 또 울어버리겠지 입은 환하게 웃으면서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뚝뚝 흐르는데 행맨은 차마 그 사이에 끼지도 못하고 한 걸음 뒤에 서서 다행이라는 듯 한숨만 푹 쉬고 있을듯 카운터로 가서 군말 없이 몇백 불짜리 응급 진료비를 일시불로 결제하고 온 행맨은 아직도 풀 죽은 얼굴로 강아지 머리만 살짝 쓸어내림 "...앞으로는 지갑으로만 지원할게. 주말 면접교섭권도... 네가 원하면 줄이고."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행맨의 말을 듣자 강아지 안고 있던 밥이 휙 노려보며 따져물음 "너 지금 누구 마음대로 발을 빼? 그게 공동양육자의 태도야? 얘 봐. 애가 아빠 보자마자 꼬리 프로펠러처럼 돌리는 거 안 보여?" "..." "그리고 네가 새벽에 빨리 달려와서 정신없는 나랑 브리스킷 태우고 병원으로 안 왔으면 어떻게 됐을지도 몰라. 네가 살린 거야. 정말 고마워." 그 말에 행맨 눈동자가 흔들리겠지 밥이 나한테 원망대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이혼 후에 '아빠'라는 말도 입에 담지 않던 애가? 행맨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밥 옆에 나란히 앉아 다시 건강해진 강쥐를 껴안아줌 둘 사이에 흐르던 차갑고 날카로운 벽이 아주 살짝 무너지는 순간, 누구보다 먼저 눈치 챈 강쥐가 헥헥 웃으며 아빠 뺨 한번 엄마 입술 한번 핥아주겠지 자기때문에 난리가 나긴 제대로 났던거 같은데 아무튼 둘이 같이 눈 앞에 있으니까 행복하거든요 셋이서 행맨 차를 타고 밥의 집앞에 도착했음 행맨이 강쥐를 밥한테 넘겨주고 주말에 보자며 돌아서려는데 처음으로 밥이 먼저 행맨을 붙잡겠지 너 밤새 한 숨도 못 잤을텐데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라고.. 베이비, 너 커피 안 마시잖아 하고 되묻는 행맨에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진 밥이 아 싫으면 그냥 가든가! 하고 혼자 들어서려는데 이 기회를 놓칠리 없지 이혼 후 처음으로 아무런 핑계 없이, 순수한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밥의 집 현관을 넘어들어가는 행맨이었음 보고 싶은게 더 생각나서 뇌절해봄.. 행맨이 말한대로 밥은 커피 안 마시는데 결혼생활동안 커피를 좋아하는 행맨때문에 드립백 쟁여두는게 버릇이 되기도 했고 혹시 토요일 아침에 행맨이 강쥐 데리러 올때도 집에 들리는 일이 있을까봐 늘 준비해뒀던거면 좋겠다 파월풀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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