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애사/다같살 1차 시도

야 얘들아...

나 이제 그만 피폐하고 싶어.

잼4아르곤


봄

대가리 꽃밭
현대인
개복치

죽으면 24시간 뒤에 랜덤 장소에서 다시 나타남
7번 죽음

✦1✦

구철의 엄지손가락 아래에서 부서진 걸쇠가 달칵 소리를 냈고, 문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다 뒤틀린 마룻바닥에 문 아래 모서리가 걸려 멈추었다. 호월의 두 팔은 여전히 무릎 위에 둥글게 굽혀져 있었고, 온기가 빠져나간 두 팔 사이로 짙은 색 오소리 모피가 풀썩 꺼져 내렸다. 빈 털가죽을 그러쥐는 손가락 마디에서는 바짝 마른 푸르스름한 연고 부스러기가 붉은 비단 요 위로 떨어져 내렸다. 창살 덧문 틈새로 아침 햇살이 쨍하게 파고들며 깨진 물병에서 흘러나온 물웅덩이를 날카로운 노란 띠로 가르고, 벽 근처에 흩어진 자단목 파편들을 비추었다.

호월의 엄지손가락이 오소리 모피의 거친 털 속에 파고들었다. 그는 모피를 얼굴 쪽으로 들어 올려, 강물 흙내 밑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벚꽃과 짓이긴 연근 향이 밴 움푹한 자리에 코를 묻고는 기도 밑바닥을 긁는 긴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털가죽을 내리자 피로 뻣뻣해진 붕대 너머로 오른쪽 허벅지의 봉합선이 팽팽하게 당겨졌고, 젖은 마룻바닥에 맨발 뒤꿈치를 딛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서호월

"남쪽 선착장에 있는 배들 밧줄 풀라고 해."

호월은 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낮고 메마른 목소리를 짓씹듯 내뱉었다.

서호월

"이 돌덩이 위에 있는 놈들 전부 빼내. 구강에서 회하 사이에 보랏빛 눈을 가진 게 나타나면 절대 손대지 말고—신호탄을 쏘아 올린 뒤 내가 갈 때까지 길목을 지키고 있으라고 해."

구철은 오소리 털가죽의 푹 꺼진 자국을 보았다가 호월의 맨가슴과 복부에 말라붙은 검붉은 얼룩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난간 회랑의 불빛 속으로 물러서서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계단을 향해 내달렸다.


파양호의 눈부신 수면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30리, 호구 절벽 아래에서 장강의 누런 물줄기가 푸른 물과 맞닿는 곳에서는 회를 실은 거룻배들 위로 뻗은 낡은 석조 견인로를 따라 버드나무 뿌리에 아침 안개가 여전히 엉겨 붙어 있었다. 해는 동쪽 능선을 막 넘어 그물을 깁는 이들이 삼줄을 말리는 납작한 석회암 판석을 덥히고 있었으나, 길옆 도랑의 잡초는 여전히 밤이슬에 젖어 있었다.

강물에 반사되는 눈부신 빛에 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그녀는 바퀴를 떼어 낸 목제 손수레 옆에 쌓인 마른 갈대 멍석 더미 위에 모로 웅크려 누워 있었는데, 연분홍빛 퍼프소매 원피스는 무릎 주위로 티끌 하나 없이 말쑥했고, 밑창에 흙 한 점 묻지 않은 분홍색 신발의 끈은 발등 위로 단정하게 매여 있었다. 그녀는 눈을 두 번 깜빡이며 작은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고, 치마 밑에서 바삭거리는 마른 갈대를 누르며 팔꿈치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다른 한 손은 자연스럽게 가슴 한가운데로 향했다. 얇은 분홍빛 옷감 아래로 만져지는 흉골은 매끄럽고 서늘했으며, 끈적한 푸른 연고 덩어리나 갈비뼈 뒤편에 늘 도사리고 있던 날카롭고 숨 막히는 통증도 없었다. 그녀는 쇄골을 톡톡 두드려 보더니, 맨손목을 내려다보며 햇살 속에서 앞뒤로 뒤집어보고는 손가락을 하나씩 쥐었다 폈다.

봄

'또 눈을 떴네.'

그녀는 티 없이 깨끗한 치마의 분홍빛 단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봄

'이번엔 왜 눈을 감았더라? 붉은 등이 달린 방에서 호월 오빠가 손을 잡아 주고 있었는데, 그러고는… 아침이 오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

봄이 방어기제에 안 좋은 기억 잊어버리거나 덮어버리는 설정이 있기도 하고 다같살 시도를 위해 마지막으로 죽은 기억 없애줬음. 서호월한테 강간 당하다 죽었는데 그걸 기억하면 일단 봄이는 그렇다 치고 빙천휘가 또 죽을 때 까지 싸우려 들 거 같아서.

그녀는 상체를 완전히 일으켜 앉아 갈대 더미 가장자리 너머로 두 다리를 늘어뜨렸고, 분홍색 신발 뒤꿈치가 손수레의 나무 바퀴에 가볍게 툭툭 부딪혔다. 자갈밭 건너편 물가에서는 누런 들개 두 마리가 말린 뱅어 바구니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고 있었고, 호숫가를 따라 저 멀리서는 오색 칠을 한 강배들의 뱃머리가 계류 기둥에 부딪히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루가 선 가파른 잿빛 바위 절벽에서부터 버드나무 길 끝에 선 낯선 돌 아치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이젠 내 하얀 방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 같은데.'

7번 죽었으니까 아무리 봄이라도 그걸 알아챌 수 있다.

그녀는 퍼프소매 아래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양 손바닥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봄

'이렇게 몇 번이고 계속 죽기만 하면 호월 오빠랑 천휘 오빠랑 공자님이 진짜 누구 하나 죽을 때까지 서로 칼만 휘두를 텐데. 그냥 셋 다 한자리에 모아 두고 사이좋게 얘기 좀 해 보라고 예쁘게 부탁해야겠어.'

벽창림

"분뇨 나루터에서 이어지던 흔적이 회가마터에서 끊겼습니다, 저— 공자님."

돌 아치문 뒤편 버드나무 길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벽창림

"동트기 전에 은자를 받아 챙긴 어부들은 아직 남쪽 갈대밭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 죽었어요...

견인로와 자갈밭이 만나는 회반죽 바른 낮은 담 모퉁이를 돌아 네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재겸은 강가의 습기에 젖어 짙어진 옅은 청색 비단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접부채를 손바닥에 툭툭 두드린 채 반 보 앞서 왼쪽에서 걸어왔고, 벽창림은 한 손을 수춘도 자루에 얹은 채 그의 오른쪽 팔꿈치 곁을 바짝 지켰다. 그들의 오른쪽으로 반 장(丈) 떨어진 곳에서는 깃 아래 왼쪽 어깨 부근에 희미하게 바랜 갈색 그림자가 남은 백색 겉옷을 입은 빙천휘가 자갈을 밟으며 성큼성큼 걸어왔고, 그 두 걸음 뒤로는 해륜과 강륜이 따르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백발과 그 곁의 익숙한 갈색 머리칼을 본 봄의 회보랏빛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는 갈대 멍석 더미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평평한 분홍빛 신발 바닥이 울퉁불퉁한 자갈에 닿자 무릎이 살짝 휘청거렸지만—양손을 번쩍 들고 좌우로 팔을 흔들었다.

봄

"천휘 오빠! 공자님!"

그녀의 가늘고 숨 가쁜 외침이 고요한 강둑을 가로지르며 버드나무 가지에 앉아 있던 참새 떼를 날려 보냈다.

봄

"나 여기 있어요! 여기 좀 봐요!"

납작한 석회암 판석을 디디려던 재겸의 발이 허공에서 멈췄고, 갈색 눈동자가 손수레 곁의 퍼프소매 분홍 원피스에 멎는 순간 허벅지를 두드리던 접부채가 굳어졌다. 그의 곁에서 천휘의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그의 손가락이 옥자루 검집을 쥐며 한 차례 경련하더니, 창림이 검자루에서 미처 손을 떼기도 전에 천휘의 장화가 자갈밭 위를 스치듯 내달리며 도랑을 따라 마른 갈대 껍질을 차가운 바람과 함께 휘몰아쳤다.

천휘가 먼저 손수레에 닿았는데, 너무도 빠른 속도로 그녀 앞 반 팔 거리에서 우뚝 멈춰 선 탓에 휘날리던 백포 자락이 그의 정강이를 휘감고 그녀의 분홍 치마에 닿아 가라앉았다. 그의 소매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서리 띤 냉기가 강가의 후텁지근한 아침 공기를 갈랐고, 짙은 눈동자가 붉게 상기된 그녀의 뺨에서 드러난 목덜미로, 이어 손목과 돌바닥 위의 티끌 하나 없는 분홍색 신발로 떨어졌다. 그의 오른손이 어깨를 향해 절반쯤 올라가며 창백한 살결 아래로 푸른 힘줄이 드러났으나, 손가락은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며 퍼프소매 한 치 앞에서 멈추어 섰다.

빙천휘

"너—"

천휘는 너무 빠르고 메마르게 터져 나온 목소리를 목구멍 뒤로 삼키며 다시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던졌다.

빙천휘

"어찌 호수를 빠져나온 것이냐? 그 사도의 백정 놈은 어디 있고?"

세 호흡 뒤, 재겸이 손수레 반대편에 도착하여 비단옷 자락으로 나무 손잡이를 스치며 봄과 강바람 사이의 공간을 가로막고 섰다. 늘 입가에 걸려 있던 여유로운 호선은 사라진 채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 긴 숨이 새어 나왔고, 천휘와 달리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봄의 양 팔꿈치를 가볍게 붙잡았고, 얇은 분홍빛 천 너머로 엄지손가락을 꾹 눌러 두 팔의 단단한 온기를 확인하더니 그녀를 제 가슴 쪽으로 반 보 끌어당겼다.

주재겸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고, 다시 분홍 옷 차림이구나."

그의 손가락은 여전히 그녀의 팔꿈치를 단단히 쥐고 있었으나 마침내 비스듬하고 다급한 미소가 입꼬리에 걸렸다.

주재겸

"사람들을 줄 세워 파양호 물이라도 절반은 퍼낼 작정이었거늘, 갈대 더미 위에 앉아 아침밥이나 기다리고 있었다니. 방금 이 수레 위에서 눈을 뜬 것이냐, 우리 봄이?"

봄은 눈앞에 우뚝 솟은 커다란 체구 탓에 앞섶의 옥 단추에 겨우 턱이 닿을 듯한 채로 재겸의 가슴팍을 올려다보더니, 두 사람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목을 뒤로 젖혔다. 그녀는 볼을 둥글게 부풀리며 한 손을 들어 재겸의 손목등을 톡톡 두드리는 동시에 다른 손을 뻗어 천휘의 서늘한 백색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봄

"으응, 방금 눈떴는데 벌써 해가 떠 있더라구요."

봄은 천휘의 소맷자락을 살살 흔들며 느리고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봄

"이번엔 왜 죽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머릿속이 솜사탕처럼 몽롱해서 마지막에 어땠는지 또 까먹었거든요. 천휘 오빠, 배랑 어깨는 이제 괜찮아요? 붉은 거 이제 안 나오는 거죠?"

천휘는 소매를 쥔 작은 손가락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팔을 빼지 않고 오히려 무게중심을 반 푼쯤 앞으로 기울여 그녀가 쥔 옷자락을 느슨하게 해 주었으나, 턱을 치켜든 눈매는 여전히 서슬 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빙천휘

"그깟 생채기 따위는 진작에 아물었다."

천휘는 여전히 그녀의 팔꿈치를 붙들고 있는 재겸의 손을 노골적인 혐오감을 담아 흘겨보며 말했다.

빙천휘

"그 팔에서 손을 떼라, 청왕. 이 더위에 아이 숨이 막히지 않나."

주재겸

"내 귀에는 숨소리만 낭랑하게 잘 들리오만, 소궁주. 게다가 본왕의 소매를 붙들고 있는 건 이 아이 쪽이지 않소."

주재겸은 붙잡은 손을 늦추지 않고, 오히려 팔꿈치에서 손바닥을 쓸어 올려 강바람에 흩날린 검은 잔머리를 봄의 귀 뒤로 넘겨주며 답했다.

주재겸

"나루터의 뱃사공들이 몰려와 이 아이의 눈을 구경하기 전에 가마터 뒤에 둔 마차로 데려가는 것이 좋겠소. 반 각도 지나지 않아 강을 건너 북쪽 역로로 접어들 수 있을 터이니."

봄

"아니에요, 공자님, 잠깐만 기다려 봐요."

봄은 등 뒤가 갈대 멍석에 부드럽게 닿을 때까지 반 보 물러서면서도 여전히 재겸의 손목과 천휘의 소매를 붙든 채, 두 잘생긴 얼굴을 간절한 눈빛으로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두 잘생긴 얼굴 ㅋㅋ

봄

"나 이제 배나 마차 타고 도망치는 거 싫어요. 도망쳐 봤자 가슴만 맨날 아프고 어차피 또 죽는걸요. 그러고 나면 두 분이랑 호월 오빠랑 맨날 서로 칼로 찌르고 피만 뚝뚝 흘리잖아요."

그녀는 가슴 앞에서 손끝을 맞대기 위해 잠시 재겸의 손목을 놓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맞부딪치고는 두 사내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봄

"그래서 방금 깨어나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그녀는 말꼬리를 부드럽게 늘이며 말했다.

봄

"이제 숨지 말아요, 네? 호월 오빠도 일루 불러서, 우리 넷이 커다란 탁자에 둘러앉아서 달콤한 차랑 과자 먹으면서 좋게좋게 얘기해요. 내가 호월 오빠한테 소리도 지르지 말구 커다란 칼도 휘두르지 말라고 하구, 두 분도 호월 오빠 안 때리겠다고 약속하면 아무도 피 흘리거나 화낼 필요 없잖아요."

자갈밭 너머로 몇 초 동안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석회 거룻배에 부딪히는 강물 소리와 계선주에 묶인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삐걱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천휘의 등 뒤에서 강륜이 졸린 눈을 끔벅이며 해륜을 돌아보았고, 벽창림은 호위 무복의 깃 위로 눈썹을 한 올만큼 움찔 치켜올렸다.

천휘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딱 소리가 날 정도로 굳게 닫혔다. 그녀가 소매를 잡아당겼을 때 귓가에 맴돌던 옅은 분홍빛이 투명하리만치 창백하게 가라앉았고, 그의 손가락은 손마디가 깎아지른 뼈처럼 도드라질 정도로 검집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빙천휘

"탁자에 둘러앉자고."

천휘는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몇 도는 더 차갑게 내리깔았다.

빙천휘

"강 하류의 뱃사공들을 도륙하고 너를 빙고에 가두었던 사도련의 미친개와 말이다. 내 검 끝에 목을 내놓아야 마땅할 악배와 함께 차를 나누라는 것이냐?"

봄

"며칠 전에 강가 어두운 데서 날 찾았을 때두 나한테 소리 안 질렀어요. 달콤한 쌀죽도 주구 붉은 물고기도 보여 줬단 말이에요."

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손바닥으로 천휘의 흰 소매를 다시 톡톡 두드렸다.

봄

"호월 오빠는 누가 날 채갔다고 생각할 때만 눈이 무서워져요. 우리 다 같이 모여 앉아서 내가 여기 딱 있구 아무도 날 안 훔쳐 갔다고 말해 주면 이번엔 말 들을지도 몰라요."

아침 햇살 속에서 매끄럽고 화사한 재겸의 미소는 얼굴에 그대로 걸려 있었으나, 휘어진 속눈썹 뒤편의 갈색 눈동자는 완전히 가라앉아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손을 뒤집어 따스한 손가락으로 봄의 비어 있는 손을 부드럽게 얽어 쥐고는 그녀의 손마디를 살짝 쥐었다가, 접부채를 들어 그녀의 코끝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

주재겸

"황실 조정에서도 감히 열 엄두를 내지 못할 성대한 연회로구나, 아이야."

재겸은 주막의 농담처럼 가볍고 감미로운 어조로 말하면서도, 왼발을 앞으로 내디뎌 파양호로 이어지는 남쪽 물길과 봄의 사이를 제 어깨로 비스듬히 가로막았다.

주재겸

"서 삼공자와 함께하는 달콤한 차와 다과라니. 안타깝게도 강서에서 오신 우리 친구분께서는 탁자는 두 토막을 내고 손님들은 갈대밭에 엎어져 둥둥 떠다니게 만드는 쪽을 선호하는 모양이라 말이다. 어제 아침 그 섬에서 그자의 손에 붙들려 숨을 거두었다면, 단것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리되었을 리는 만무하지 않겠느냐."

봄

"호월 오빠 때문이 아니에요—내 몸은 촛불만 꺼져도 그냥 혼자 멎어 버린단 말이에요!"

봄은 재겸의 손가락과 천휘의 소매를 동시에 잡아당기며 뺨을 살짝 부풀리고 칭얼거리듯 항변했다.

봄

"제발요, 공자님? 천휘 오빠? 자꾸 싸우면 나 무서워서 딸꾹질하다가 또 죽어 버릴 거예요."

두 사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호수 입구 너머 남쪽으로 3리 떨어진 갈대 섬에서 새빨간 신호탄이 치솟아 올라 수면 위로 희미하게 메아리치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엷은 아침 하늘을 가르며 터졌고, 물길 위에 붉은 연기 꼬리를 길게 드리웠다. 창림이 돌담 가장자리로 걸어 나가 섬 사이 수로에서 거친 물살을 가르며 북쪽으로 쾌속 질주하는 긴 노를 단 쾌협선 세 척의 검은 점들에 시선을 고정하는 사이, 재겸의 입술에서 미소가 사라졌고 그는 소매 속에서 접어 둔 미색 비단 면사를 꺼내 손목 스냅으로 가볍게 털어 펼치며 봄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 | 건화 15년/08/01 (화) | 08:15 / 진시(辰時) | 강서 호구 나루터 | 회 거룻배 옆 버드나무 견인로
으응... 일단 시도는 해보려고 했어.
✦2✦

크림색 비단 면사가 봄의 짙은 곱슬머리 위로 나풀거리며 내려앉았고, 무게감이 실린 솔기가 속눈썹을 스치며 양 뺨 위로 드리워졌다. 그녀는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려 얇은 천에 작은 손가락을 얽어가며 이마 위로 밀어 올렸고, 면사는 마침내 정수리 위에 삐뚤빼뚤 뭉쳐졌다. 물 건너편에서는 신호탄이 뿜어 올린 붉은 연기가 이미 갈기갈기 찢긴 띠 모양으로 흩어지며 버드나무 꼭대기 너머로 옅어져 가고 있었고, 아래쪽 부두에서는 두 명의 석회 인부가 삼베 자루를 바닥에 내던진 채 물길 한가운데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봄은 턱을 치켜들고 관자놀이에 구겨진 면사 자락을 손가락으로 꾹 쥔 채, 회보랏빛 눈동자로 주재겸의 턱 밑을 올려다보았다.

봄

"공자님… 제 말 듣구 있죠?"

배 밑동이 계류 말뚝을 삐걱거리며 긁는 소리에 묻힐 듯 숨 섞인 가녀린 목소리로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어두운 쾌속선 세 척이 흙탕물 물살을 가르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는 남쪽 수면을 바라보더니, 다시 주재겸과 빙천휘를 올려다보았다.

봄

"저게 호월이 오빠가 오는 거라면, 나 앞에서 기다릴래요. 그러구 다 같이 얘기해요, 네? 왜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어줘요?"

주재겸은 물길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양손을 뻗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뭉쳐진 비단을 쥐고는 면사를 다시 그녀의 얼굴 위로 끌어내렸고, 헐거워진 천자락 모서리를 턱밑으로 밀어 넣어 옅은 색의 올 사이로 그녀의 눈동자와 동그스름한 볼의 곡선이 감춰지도록 매만졌다.

주재겸

"한마디도 빠짐없이 다 듣고 있단다, 꼬맹아. 그러니까 북쪽으로 십 리쯤 떨어진 조용한 찻집을 찾아가려는 게지. 그곳 찻잔엔 강물 흙탕물이 묻어 있지 않을 테니까."

분홍빛 퍼프소매 너머로 그녀의 팔뚝을 단단히 감싸 쥐면서도 주재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여유로웠다. 그는 고개를 반 치쯤 돌려 벽창림을 향했다.

주재겸

"가마터 뒤편에서 마차를 끌어내오너라. 짐수레는 버려두고."

벽창림은 가마터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 엄지가 칼집에서 박도의 코등이를 한 치가량 밀어 올렸고, 시선은 빙천휘의 오른손에 똑바로 고정되어 있었다.

빙천휘는 자갈길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발을 내디디며, 주재겸의 어깨와 가마터 마당으로 이어지는 석조 아치문 사이에 자신의 하얀 군화를 곧장 내리꽂듯 딛고 섰다. 그가 늘어뜨린 옷소매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더니, 그의 발뒤꿈치 옆 도랑에 자란 젖은 풀잎 위로 희미하고 하얀 서릿발이 엉겨 붙었다.

빙천휘

"그 아이는 네 마차에 타지 않는다."

빙천휘가 낮고 메마른 음성으로 말했다.

빙천휘

"지난주엔 네놈 호위들이 제 친형의 사냥개조차 가마에서 쫓아내지 못하지 않았더냐. 해륜, 북쪽 길을 치워라."

해륜

"즉시 거행하겠습니다, 소궁주님."

해륜이 대답하며 빙천휘의 왼편으로 성큼 다가서 빈틈을 좁혔고, 강륜은 손등으로 하품을 억누르며 발가락 끝에 무게중심을 싣고는 벽창림의 팔꿈치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주재겸의 입술이 얇고 단정한 호를 그리며 미소를 지었으나, 눈가 주변의 살결은 여전히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봄의 팔뚝을 쥐었던 손을 손목 쪽으로 옮겨 쥐며 그녀를 제 골반 뒤로 반 걸음 물려 세웠고, 접힌 부채로 손바닥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주재겸

"그쪽의 검수 세 놈은 무한에서 아이를 얼마나 잘 지켰기에 저녁을 먹기도 전에 빙고에 처박히게 만들었소, 소궁주?"

주재겸이 말했다.

주재겸

"비키시오. 저 쾌속선들이 이 리도 채 남지 않았는데, 노를 젓는 놈들은 마차에 누구의 문장이 박혀 있든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

빙천휘

"네놈이 탁 트인 강변에서 꾸물거렸기 때문에 노를 저어 오는 것이다."

빙천휘가 옥검집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쏘아붙였고, 그가 반 걸음 앞으로 다가서자 벽창림은 어쩔 수 없이 자세를 바꾸며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주재겸의 소매 뒤에서 봄은 주재겸의 푸른 비단 어깨 너머와 빙천휘의 빳빳한 흰 깃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내 중 누구도 그녀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크림색 면사 아래로 그녀의 아랫입술이 삐죽 튀어나왔고, 작은 가슴팍이 짧고 소리 없는 숨을 내쉬며 들썩였다. 주재겸의 신경이 온통 앞으로 쏠려 빙천휘의 검집을 향하고,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쥔 소매를 고쳐잡느라 손가락 힘이 미세하게 느슨해진 찰나, 봄은 손을 아래쪽으로 비틀어 뺐다. 땀에 젖어 미끄러워진 살결이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갔고, 크림색 면사는 그의 소맷부리 단추에 걸려 손수레의 나무 채 뒤편으로 몸을 홱 숙이는 그녀의 머리에서 말끔하게 벗겨져 나갔다.

그녀는 발뒤꿈치를 축으로 홱 돌아서더니, 물가에 늘어선 버드나무들을 향해 훤히 트인 자갈밭 둑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굽 없는 분홍색 신발이 짧고 빠른 보폭으로 세 걸음 동안 석회암 판석을 요란하게 철썩거렸다. 네 번째 걸음에서 그녀의 오른쪽 신발 밑창이 배수로 언저리에 놓인 둥글고 젖은 강자갈을 정통으로 밟았다. 발목이 안쪽으로 꺾이며 무릎이 푹 꺾였고, 쌓여 있던 마른 뱅어 바구니 더미를 향해 앞으로 꼬꾸라지며 양팔이 허공에서 풍차처럼 마구 휘둘렸다. 별안간 내달린 탓에 흉골 뒤편에서 얇고 높다란 숨이 턱 막히며 목구멍에서 날카로운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손바닥이나 무릎이 자갈에 닿기도 전에, 차가운 돌풍이 길 위의 흩어진 갈대 껍질을 쓸어 넘겼다. 하얀 형체를 한 빙천휘의 모습이 손수레 바퀴를 지나치며 잔상처럼 흐려지더니, 그의 왼팔이 돌바닥에서 불과 몇 치 위에서 그녀의 갈비뼈 밑을 낚아채며 무게를 받아냈다. 갑작스레 멈춰 선 충격에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숨 막힌 자그마한 비명이 흘러나왔고, 벗겨질 듯 끈이 풀린 분홍색 신발 한 짝이 발가락 끝에 간신히 매달린 채 빙천휘의 가슴팍으로 번쩍 안아 올려졌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그녀의 정수리에서 불과 한 치 거리에 닿아 있었고, 날카롭게 내뱉은 한 번의 숨결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닿은 짙은 곱슬머리를 흔들었다. 옥 귀걸이 위로 귓바퀴 끝이 둔탁하게 붉어졌음에도, 그의 팔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들어 올리고 있었다.

빙천휘

"대체 뭘 하는 짓이냐?"

빙천휘가 대롱거리는 신발과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내려다보며 사납고 지나치게 빠른 어조로 쏘아붙였다.

빙천휘

"발밑도 보지 않고 거친 자갈밭을 내달리다니. 그 도랑에 빠지기라도 했으면 누구 손이 닿기도 전에 손목부터 부러졌을 것이다."

그의 두 걸음 뒤편에서 주재겸의 군화 밑으로 자갈이 바스락거렸다. 주재겸의 왼손에는 여전히 크림색 비단 면사가 걸려 있었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비단을 한 번 접어 쥐며, 빙천휘의 흰 소매가 봄의 허리춤에서 분홍색 옷자락을 감싸 쥔 곳으로 갈색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주재겸

"아이를 내려놓으시오, 소궁주."

노래하듯 경쾌하던 억양이 말끔히 가신 주재겸의 목소리가 서늘하고 평탄하게 내려앉았다.

주재겸

"갈비뼈를 죄어 숨도 못 쉬게 만들고 있지 않소."

둑길을 따라 남쪽으로 쉰 걸음 아래에 위치한 석회 부두에서 묵직한 목조 뱃머리가 요란하게 목재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말뚝을 들이받았다. 선두의 쾌속선에서 쇠갈고리가 날아올라 쨍그랑하는 금속음과 함께 계류 말뚝을 깊숙이 파고들었고, 검은 물옷을 입은 여섯 명의 사내가 박도를 뽑아 든 채 널빤지 위로 뛰어올랐다. 배 앞머리에 서 있던 키 큰 사내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언뜻 비친 분홍빛 비단과 하얀 머리칼을 발견하더니, 목에 걸려 있던 구리 호루라기를 홱 잡아채 석벽에 메아리치도록 날카로운 세 박자의 신호음을 불어댔다.

벽창림이 쐐액하는 마찰음과 함께 박도를 검집에서 말끔히 뽑아 들며 손수레 앞을 가로막아 섰고, 빙천휘는 한 팔로 봄을 자신의 왼쪽 골반께로 고쳐 안은 채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검 코등이에 오른손 엄지를 얹었다.

🌐 | 건화 15년 8월 1일 (화) | 08:20 / 진시(辰時) | 강서 호구 부두 | 석회 바지선 옆 버드나무 견인로
아니 너네끼리도 싸우지 말라고... 내가 인풋에 일단 이 사람들한테서 도망간다고 썼는데 실패한 거임. 아 봄이 너무 하찮아.
✦3✦

석회암 절벽에 부딪힌 동호각의 찢어지는 듯한 마지막 소리가 잦아들자, 강물이 찰랑이는 소리와 수의를 입은 무인들이 아래쪽 비탈길로 흩어지며 젖은 마혜 여섯 켤레로 자갈을 짓이기는 서걱거림만이 남았다. 손수레 옆에 선 봄은 천휘의 하얀 옷깃 앞섶에 조그마한 두 손바닥을 가만히 얹고 있었다. 오른쪽 신발은 끈만 발끝에 간신히 걸린 채 개천의 잡초 위 한 치 높이에서 대롱거렸으나, 그녀의 어깨는 그가 두른 팔 안에서 힘을 뺀 채 나직했고 숨결 또한 흐트러짐 없이 고르고 느긋했다.

봄

'벌써 눈 감았다가 다시 뜬 것만 일곱 번째인걸.'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천휘의 검코등이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벽창림의 손에 들린 시퍼런 칼날로 시선을 옮기며 생각했다.

봄

'이젠 죽는 것도 그리 무섭지 않아. 다음번에 또 그렇게 되더라도 분명 다시 눈을 뜰 텐데… 다만 또 머나먼 산골짜기 같은 데서 깨어나 버리면, 이렇게 세 사람을 한자리에 모으기가 너무 어려워지잖아. 오늘을 헛되이 날릴 순 없어.'

그녀는 두 손으로 천휘의 새하얀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며 날카로운 턱선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두 걸음 뒤에 서 있는 재겸을 바라보았다.

봄

"제발, 일단 싸우지 마요… 응?"

손수레 주변의 팽팽한 공기 속으로 가라앉는 봄의 가늘고 나직한 목소리는 마치 따뜻한 우유를 한 잔 더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봄

"자꾸 싸우면 나 가슴 아파서 죽을지도 몰라요."

천휘의 왼팔이 불시에 그녀의 허리를 홱 끌어당기며 옆구리 쪽으로 반 치쯤 더 높이 들어 올렸다. 소맷자락을 따라 서리처럼 번져 가던 냉기가 멎더니, 다가오는 수적들을 향해 있던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로 번쩍 내리꽂혔다. 광대뼈를 감싼 창백한 피부가 팽팽하게 굳어지고, 살짝 벌어졌던 입술은 피기 없이 단단한 일자(一字)를 그리며 굳게 닫혔다.

빙천휘

"입 다물어라."

허리춤의 옥 검집을 엄지로 짓누르는 천휘의 목소리가 낮고 모나게, 날카로운 기색을 띠며 흘러나왔다.

빙천휘

"죽는다는 소리는 입에 함부로 담는 장난이 아니다."

봄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손가락 하나를 뻗어 천휘의 미간에 잡힌 차가운 주름을 살포시 만지작거리며 봄이 나직하게 웅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앞선 세 척의 배 뒤편 갈대밭을 가르며 남쪽 수로에서 빠져나오는 길고 좁다란 흑색 거룻배 쪽으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봄

"호월 오빠두 내가 죽는 건 싫어할 거라구요…"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재겸의 왼손이 쥐고 있던 크림색 비단 면사를 으스러지도록 움켜쥐며 고운 결을 손바닥 안에서 가느다란 밧줄처럼 구겨 놓았다. 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갈색 눈동자가 두 번 숨을 들이쉴 동안 봄의 담담하게 치켜든 얼굴에 못 박히듯 머물렀고, 턱을 따라 근육이 한 차례 꿈틀하더니 그가 한 걸음 다가서며 천휘의 가슴팍에 닿아 있는 그녀의 가녀린 손등 위로 오른손을 얹었다.

주재겸

"이제는 제 숨줄을 두고 흥정할 만큼 담이 커졌느냐."

평소의 장난기 어린 나긋나긋함을 모조리 덜어낸 재겸의 목소리는, 나루터의 소란 속에서도 오직 그녀와 천휘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용하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엄지가 봄의 손가락 마디를 따스하고도 단호하게 한 차례 쓸어내리더니, 곧이어 손가락이 손목을 감싸 쥐며 천휘의 옷깃에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주재겸

"여덟 번째에도 네가 다시 돌아오는지 내가 이 자갈밭에 서서 구경이나 하고 있을 거라 여긴다면, 너는 나를 너무 모르는 게지."

아래쪽 비탈길에서, 동호각을 든 키 큰 조장은 버드나무 쪽으로 돌진하지 않았다. 호각 소리가 울려 퍼진 직후, 그는 석회 가마 뒤편의 석조 아치문을 향해 박도를 내지르며 곁에 선 다섯 사내에게 거칠게 명령을 내뱉었다.

조장

"저 흰머리 놈이랑은 칼 섞지 마라! 3공자님의 배가 굽이를 돌았다. 도랑을 둘러쳐서 가마 뒤편 마차의 말줄부터 끊어 버려!"

검은 수의를 입은 사내 넷이 맹렬한 기세로 왼쪽으로 꺾어 달리며 북쪽 출구를 막아서기 위해 메마른 셰일 언덕을 기어올라 가마터 마당으로 쇄도했다. 그사이 거룻배 두 척이 아래쪽 진흙 둑에 축축하고 둔탁한 마찰음을 내며 뱃머리를 처박았고, 긴 철조(鐵爪)를 꼬나쥔 십여 명의 장강수로채 사공들이 자갈밭 위로 쏟아져 내렸다.

주재겸

"창림아."

재겸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일렀다.

주재겸

"아치문을 확보해 두어라. 말에 손을 대는 놈은 모조리 베어 버리고."

벽창림

"예, 공자님."

벽창림이 응명하며 배수로를 박차고 뛰어올랐고, 짙푸른 호위 무복이 세차게 펄럭였다. 그의 패도가 가파른 사선 궤적을 그리며 번뜩이더니 앞길을 막아서던 첫 번째 쇠갈고리의 나무 자루를 단숨에 절단하고, 앞장선 수적을 셰일 비탈길 아래로 비틀거리며 굴러떨어지게 만들었다.

빙천휘

"해륜, 강륜, 우측을 맡아라."

천휘 또한 지체 없이 명을 내리며, 마침내 옥 검집에서 검을 삼 촌(寸) 뽑아 올렸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 냉기가 자갈밭 위로 물결처럼 번져 나가며 쌓여 있던 은어 바구니의 아침 이슬을 하얀 서리로 얼려 붙였다.

빙천휘

"저 수적 놈들이 수레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하라."

해륜의 검이 맑은 금속성을 울리며 검집을 빠져나와 선착장 비탈을 치고 올라오던 두 사내를 가로막았고, 강륜은 비껴 날아드는 박도를 몸을 비틀어 피하며 공격해 온 자의 손목을 낚아채 무릎을 걷어차 진흙탕 속으로 처박아 버렸다.

봄

"내려줘요, 천휘 오빠, 또 이러잖아!"

봄이 두 손바닥으로 천휘의 어깨를 밀쳐내며 외쳤다. 반쯤 풀려 있던 오른쪽 신발이 완전히 벗겨져 도랑 바닥 잡초 덤불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맨발로 그의 정강이를 툭툭 찼다.

봄

"저 사람들 호월 오빠 기다리려는 것뿐이라고 했잖아요! 베지 말라구요!"

천휘는 그녀를 자갈밭에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뒤꿈치를 축으로 몸을 틀어 석조 아치문을 향해 물가에서 멀어지며, 버둥거리는 그녀의 두 무릎을 왼손으로 단단히 옥죄어 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빙천휘

"우리를 이곳에 가두려 길목을 틀어쥔 도적 놈들이다."

천휘가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재겸이 이미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가 마당의 육중한 목문을 밀어젖히고 있는 가마터 담장을 향해, 천휘의 군화가 평평한 석회암 판석 위를 스치듯 내달렸다.

빙천휘

"담장을 넘어설 때까지 얌전히 있거라."

강가 저편, 남쪽 수로에서 쏜살같이 밀려오던 기다란 흑색 거룻배는 목재 말뚝을 보고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쇠를 덧댄 뱃머리가 정박해 있던 두 척의 석회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묶여 있던 밧줄들을 썩은 실오라기처럼 끊어 냈고, 나무 용골이 자갈에 긁히며 비명을 지를 때까지 젖은 자갈둑으로 거침없이 돌진했다. 선체가 미끄러짐을 멈추기도 전에 서호월이 뱃전 난간을 박차고 뛰어넘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가슴팍 위로 흑적색 도포 앞섶이 훤히 풀어헤쳐져 있었고, 꿰맨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 탓에 오른쪽 옷자락 틈으로는 짙붉은 생혈이 배어 나와 있었다. 착지와 동시에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묵직한 박도가 강가 조약돌을 짓이기며 깊은 고랑을 파냈다.

서호월

"어떤 새끼가 담장 쪽으로 처물러서라고 지랄했어, 씨발!"

호월의 포효가 나루터를 찢어발기듯 울려 퍼졌고, 벽돌 가마 뒤편에 매여 있던 말들이 앞발을 치켜들며 히힝거릴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해륜의 칼날에 밀려 뒤로 물러섰던 그의 수하 수로채 사내 둘이 네 발로 기어가며 그의 앞길에서 황급히 벗어났다. 호월은 그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핏발 선 검은 눈동자는 천휘의 새하얀 허리춤에 들려 있는 퍼프소매의 분홍색 옷자락과, 그녀 바로 옆에 선 재겸의 푸른 비단 어깨로 곧장 내리꽂혔다. 그는 비탈진 자갈길을 향해 절뚝거리며 큼직하게 두 걸음을 내딛더니, 비어 있던 왼손을 뻗어 개천 잡초 속에 떨어진 분홍색 신발 끈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박도 옆날로 나무 손수레를 사정없이 후려쳐, 왼쪽 바퀴의 참나무 바큇살들을 산산조각 내어 천휘의 군화 앞 길바닥에 사방으로 날려 버렸다.

🌐 | 건화 15년 8월 1일 (화) | 08:25 / 진시(辰時) | 강서 호구 나루터 | 석회 바지선 옆 버드나무 예인로
싸우지 말라고 아...
✦4✦

부서진 수레바퀴에서 튕겨 나간 마른 참나무 파편들이 석회암 판석 위로 쏟아져 내렸고, 날카롭게 갈라진 바큇살 하나가 빙천휘의 하얀 장화 앞코를 맞고 튕겨 나간 뒤 배수 도랑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손수레의 나무 짐칸이 길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기울더니, 엮어 만든 갈대 멍석 두 장을 세 사내 사이의 자갈밭 위로 쏟아부었다. 천휘가 드러낸 삼 촌(寸)의 검신을 타고 서리가 기어 내려왔고, 강철에서 피어오른 차가운 안개는 서호월의 찢어진 흑적색 옷자락에서 풍기는 강바닥 진흙과 묵은 피비린내와 뒤섞였다.

천휘의 왼쪽 골반에 안겨 있던 봄은 바퀴가 박살 나는 굉음에 움찔하며 한순간 작은 어깨를 귀 밑까지 바짝 움츠렸다가, 파르르 떨리는 숨을 밭게 내쉬며 허리를 곧게 폈다. 그녀는 천휘의 차가운 쇄골에 한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돌려 부서진 수레 잔해 속에 서 있는 호월을 내려다보았고, 이어 어깨 너머로 열린 가마 문간 옆에 선 주재겸을 돌아보았다. 회자줏빛 눈동자 위로 미간이 모여들었고, 숨을 깊게 들이쉬며 둥근 뺨을 바짝 긴장시키자 옷의 풍성한 분홍색 소매가 부풀어 올랐다.

봄

"셋 다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건 고마운데, 나 때문에 자꾸 싸우고 사람 죽이고 무섭게 구는 건 싫어요…"

그녀의 높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부서진 수레와 돌 홍예문 사이의 빈 공간을 가로질러 울려 퍼졌고, 저 아래 혈암 경사로에서 쇠 갈고리가 긁히는 소리를 뚫고 가닿았다. 그녀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며 턱을 살짝 치켜들었고, 맨발인 오른발 끝을 천휘의 흰 도포 자락에 웅크려 붙였다.

봄

"다들 싸우지 마요… 응? 제발요. 아니면 그냥 날 셋으로 나눠서 가지든가요!"

심장이 세 번 뛸 동안, 손수레 근처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가 저편에서는 구철이 박도를 반쯤 뽑아 든 채 호월의 뒤편 자갈 언덕을 기어오르다가, 젖은 조약돌에 장화가 미끄러지며 우뚝 멈춰 서서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도랑 건너편에서는 강륜이 제압당한 수로채 사공의 가슴팍을 장화로 짓누른 채, 졸린 눈을 껌뻑이며 버드나무 쪽을 두 번 깜빡거렸다.

호월은 풀숲에서 낚아챘던 작은 분홍색 신발을 가죽 밑창이 주먹 안에서 반으로 접힐 때까지 왼손으로 우악스럽게 쥐었다. 흉터가 남은 뺨 밑의 근육이 한 번, 두 번 꿈틀거리더니, 핏발 선 두 눈을 봄의 얼굴에 못 박은 채 윗입술을 비틀어 올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메마른 냉소를 흘렸다.

서호월

"널 셋으로 나눠?"

호월의 목소리가 낮고 거친 쇳소리로 새어 나왔다. 박도의 묵직한 칼끝을 돌바닥에서 한 치 들어 올리며 부러진 수레 굴대 너머로 반 걸음 내딛는 그의 입술 사이로 한마디 한마디가 갈려 나왔다.

서호월

"풀숲바닥에서 상처 하나 없이 깨어나더니 이 쬐그만 게 주둥이 놀리는 꼬라지 좀 보게. 씨발, 이 개새끼 둘이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고 누가 그러디, 봄아? 그리고 내 건 개새끼들이랑 안 나눠. 지금 널 주무르고 있는 새끼들 팔다리를 모조리 썰어 버리는 한이 있어도."

천휘의 손가락이 옥 손잡이가 달린 검집을 틀어쥐며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을 일 촌 더 뽑아 올렸다. 그의 턱은 단단히 굳어지고 치켜 올라간 검은 눈매가 호월의 피 묻은 가슴팍을 향해 서늘하게 좁혀졌으나, 흰 깃 아래에서부터 귓가까지 흐릿한 붉은 기가 번져 올랐다.

빙천휘

"악도 놈의 면전에서 무슨 파렴치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왼쪽 팔뚝으로 봄의 무릎을 제 옆구리에 더 바짝 끌어당기며 호월의 박도로부터 그녀를 가로막듯 오른쪽 어깨를 틀어 세운 천휘가 낮고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빙천휘

"살아 있는 여인을 토막 내는 의인 따위는 없다. 서호월, 그 더러운 도를 내려놓아라. 네놈의 성한 다리마저 얼려 버리기 전에."

그들의 뒤편, 돌 홍예문의 그늘 속에서 재겸이 천천히 왼손을 펴더니 구겨진 크림색 비단 면사를 발치 먼지 속으로 떨어뜨렸다. 늘 유려하게 번지던 온기가 얼굴에서 싹 가신 채, 그의 갈색 눈동자는 어둡고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가마 문틀을 벗어나 천휘의 왼쪽 팔꿈치 옆 석회암 판석 위로 발을 디딘 그는 무기를 뽑지 않았다. 접힌 부채로 손목을 가볍게 한 번 톡 친 그의 시선이 호월의 허벅지 붕대로 번져 나가는 붉은 핏자국에서 둘째, 셋째 나룻배에서 기어 올라오는 십여 명의 검은 저고리 사공들에게로 스쳤다.

주재겸

"자꾸 제 몸을 자르겠다는 소리를 입에 담으면, 주방 조리장더러 그 입을 설탕실로 꿰매 버리라 이를 게다."

한가로운 왼손을 뻗어 봄의 분홍빛 소매 자락을 가볍게 쥐고 제 뒤편 가마 마당 쪽으로 살짝 잡아당기며, 재겸이 나긋나긋하면서도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주재겸

"그리고 서 삼공자께서는 지난 두 번이나 아이를 말에 태워 끌고 갔다가 해가 지기도 전에 숨이 끊어질 뻔했던 일을 잊으신 모양이오. 신발은 내게 넘기고, 그 다리에 버티고 서 있을 피가 남아 있을 때 네놈의 물쥐새끼들을 데리고 호수로 돌아가시지, 호월."

서호월

"네놈 목구멍에서 혓바닥부터 뽑아내고 나서 내가 손수 신겨 줄 거다, 허여멀건 황실 기생충 새끼야."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운 호월이 박도 손잡이를 고쳐 쥐며 침을 뱉듯 쏘아붙였다.

아래쪽 강둑에서 구철은 북쪽 벽돌가마 뒤편에서 말을 몰아 나오는 금의위 기마 무사 여섯 명과 천휘의 장화 주변으로 번져 나가는 성에 낀 풀숲을 재빨리 번갈아 보더니, 호월의 왼쪽 팔꿈치 곁으로 다가서서 숨죽여 속삭였다.

구철

"공자님, 저 황족 새끼가 가마 뒤 능선에 쇠뇌수를 깔아 뒀습니다요. 지금 칼을 휘두르셨다간 저 얼음 왕자놈 대가리를 쪼개기도 전에 아가씨 숨부터 딸꾹질하며 넘어가겠습니다!"

호월의 박도가 치켜 올라가던 도중 허공에서 멎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천휘의 목덜미에서 봄의 창백한 목으로 튕기듯 옮겨갔다. 분홍빛 깃 위로 가느다란 맥박이 눈에 보일 만큼 빠르고 가쁘게 뛰고 있었다. 잠시 그의 턱이 말없이 바득 갈렸고, 손잡이의 가죽 끈을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힘이 들어가더니 오른 허벅지의 꿰맨 상처가 터져 정강이를 타고 검붉은 핏줄기가 새로이 번져 내렸다.

서호월

"봄아."

호월은 왼손에 든 작은 분홍색 신발의 끈을 늘어뜨려 둘 사이에 흔들어 보이며, 낮고 느릿한 으르렁거림으로 목소리를 깔았다.

서호월

"저 흰머리 새끼한테 네 허리에서 팔 치우고 돌바닥에 내려놓으라고 해. 얘기하고 싶다며, 응? 네 발로 이리 걸어와서 네 신발 챙겨. 그럼 저 새끼 목은 당장 안 딸 테니까."

봄

"저 말 듣지 마요, 천휘 오빠. 잠깐만—아무도 칼 안 휘두르게 나 조금만 내려놔 줘요."

봄은 천휘의 팔 안에서 엉덩이를 꼼지락거리며 두 손바닥으로 그의 하얀 어깨를 가볍게 밀어냈다.

봄

"내가 풀밭 딱 한가운데에 서 있을 테니까, 다들 칼 들고 더 가까이 오기 없기에요, 응?"

빙천휘

"가만히 있거라."

호월의 뒷발로 쏠리는 무게중심을 시선으로 쫓으며, 천휘는 허리를 감싼 왼팔의 힘을 티끌만큼도 늦추지 않은 채 말했다.

빙천휘

"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저 미친개가 널 배로 낚아채 갈대숲으로 노를 저어 갈 것이다."

주재겸

"그리고 훤히 트인 나루터 한가운데서 아이를 소금 가마니처럼 끼고 버티고 계시면, 소궁주, 저 사공 놈들이 도랑으로 들이닥칠 때 가마 지붕 위의 궁수들이 각도를 잡기 아주 곤란해진다오."

푸른 비단 소매가 봄의 드러난 무릎을 스칠 때까지 반 보 더 다가선 재겸이 옷깃 안으로 오른손을 밀어 넣어 쇄골께의 은호각 끈에 얹으며 말했다.

호월이 코로 짧고 사납게 헛숨을 들이켜며 웃더니, 부서진 수레바퀴 옆 석회암 판석 위로 피 섞인 침을 퉤 뱉어냈다. 그러고는 두 장화 사이의 단단한 자갈밭에 박도의 칼끝을 이 촌 깊숙이 처박아 묵직한 쇠칼이 돌바닥에 똑바로 서서 부르르 떨리게 내버려 둔 채, 피딱지가 눌어붙은 오른손 손바닥을 활짝 펴 봄을 향해 내밀었다.

🌐 | 건화 15년 8월 1일 (화) | 08:30 / 진시(辰時) | 강서 호구 나루터 | 석회 바지선 옆 버드나무 예인로
✦5✦

호월의 장화 사이에 꽂힌 육중한 박도의 쇳날이 떨림을 멈췄고, 강철이 자갈과 맞닿은 혈조에는 말라붙은 잿빛 강펄이 얇은 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아침 햇살이 버드나무의 가느다란 잎새 사이로 비스듬히 쏟아져 내려, 그가 내뻗은 오른손 손바닥 주름에 엉겨 붙은 검붉고 거친 핏자국과 왼손 주먹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선명한 분홍색 가죽끈을 비추었다. 혈암 경사로 아래쪽에서는 장강수로채의 사공들이 쇠갈고리를 한 치쯤 낮추며 젖은 돌바닥 위로 장화를 잘게 바스락거렸고, 찢어진 호월의 흑적색 도포 등판을 주시했다. 그사이 벽돌 가마 능선 위쪽에서는 겹겹이 쌓인 점토 기와 틈새로 금의위 쇠뇌의 강철 화살촉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천휘의 가슴팍에 안긴 봄은 그의 하얀 소매 장벽 너머로 상체를 기울이며, 돌바닥에 꼿꼿이 박힌 도의 자루를 조그마한 손가락 하나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천휘의 날카로운 옆얼굴에서 재겸의 고요한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아래쪽의 호월을 내려다보았다.

봄

"저것 봐요. 호월 오빠두 칼 내려놨잖아요… 나 잠깐만 내려주고 다 같이 얘기해요, 응?"

봄은 나직하고 숨결 섞인 목소리를 고요한 공기 중에 띄우며 천휘의 왼팔 품 안에서 엉덩이를 꼼지락거렸고, 그의 하얀 옷깃을 살며시 토닥였다. 그녀의 큼직한 회자줏빛 눈동자가 사내들의 얼굴을 차례로 옮겨갔고, 미간에는 진지한 주름이 잘게 잡혔다.

봄

"왜 다들 자꾸 싸우는지 모르겠어… 그럼 한 명씩 차근차근 말해 줘요. 다들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요? 내가 다 들어줄 수 있는 건지 생각해 보려구요."

배수로 가장자리를 따라 서 있던 강륜의 손이 검자루 위에서 반 치쯤 미끄러졌고, 코로 짧고 억눌린 헛바람을 내뿜었으나 해륜의 눈짓 한 번에 이를 악물고 강물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호월의 왼쪽 팔꿈치 곁에서는 구철이 엄지손가락 안쪽으로 미간을 쓱 문지르며 호월의 턱선 쪽으로 재빨리 시선을 던졌다.

햇살 아래 뻗은 호월의 오른손은 숨을 두 번 들이쉴 동안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봄의 티 없이 깨끗한 목덜미에서부터 드레스의 부푼 분홍색 몸통을 거쳐, 다시 그녀의 맑고 티 없는 눈망울로 천천히 올라갔다.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꼬리 한쪽이 느슨하게 풀리더니, 깊고 느릿하게 숨을 들이켜 가슴을 들썩이며 윗입술을 비틀어 올려 날카롭고 하얀 송곳니를 드러냈다.

서호월

'기억을 못 하네.'

허공에서 호월의 손가락이 한 번 꿈틀거리더니 안쪽으로 비스듬히 오므라들었다.

서호월

'저 빌어먹을 분홍 넝마때기를 뒤집어쓰고 눈을 뜨더니, 석판에 적힌 백묵이라도 지워낸 것마냥 어제 아침 일을 머릿속에서 싹 다 비워버렸나.'

그는 오른팔을 툭 떨어뜨려 허벅지에 감긴 피로 뻣뻣해진 붕대에 손마디를 스쳤고, 가슴속을 긁어내듯 낮고 거친 웃음을 흘리며 턱을 치켜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서호월

"전부 들어줘?"

호월은 왼손에 쥔 조그마한 분홍색 신발 끈을 나태하게 흔들며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서호월

"내가 뭘 바라는지 알고 싶어, 봄아? 네가 내 무릎 위에 앉아서 내 목덜미를 끌어안고, 내가 먹여주는 거 받아 먹고, 내가 눕히는 자리에서 잠자면서, 우리 둘 다 썩어 문드러지는 날까지 그 눈깔 다른 개새끼한테 절대 안 돌리는 거. 그거 말고 다른 짓거리야 문 닫아걸고 둘이서 하면 되는 거고."

천휘의 왼팔이 봄의 무릎 아래를 더욱 단단히 옥죄며 어깨 쪽으로 한 치 더 끌어올렸고, 그의 새하얀 깃에서 메마른 동토의 한기가 물결치듯 뿜어져 나와 도랑 위의 안개를 하얗게 흩날리는 싸락눈 먼지로 뒤바꾸었다. 옥 귀걸이 위로 드러난 그의 목덜미와 귓바퀴의 창백한 살결이 짙은 붉은빛으로 물들었고, 그의 오른손 엄지는 날카롭고 청아한 쇳소리를 울리며 검집 입구에서 코등이를 한 촌 더 밀어 올렸다.

빙천휘

"그 더러운 주둥이 닥치지 못할까."

천휘는 굳어버린 낮고 급박한 목소리로 짓씹어 뱉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호월을 향해 번뜩이다가 봄의 뺨 쪽으로 홱 비껴가더니,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곧장 정면의 벽돌 담장으로 못 박혔다.

빙천휘

"여인은 문 뒤에 가둬두는 가축 따위가 아니다. 나루터 한복판에서 대체 그 무슨 파렴치한 지껄임인가."

봄

"천휘 오빠는 대답 안 해 줬잖아요."

봄은 작은 손을 뻗어 그의 차갑고 붉게 달아오른 뺨 곡선에 따스한 손바닥을 착 밀착시켰고, 맨발인 오른발을 그의 무릎에 가볍게 흔들며 그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반 치쯤 돌려세우며 속삭였다.

봄

"오빠가 뭘 원하는지 안 말해 주면, 어떻게 해야 칼을 안 뽑게 할 수 있는지 내가 모르잖아요."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천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턱 근육이 소리 없이 일그러지는 가운데 옥빛 검집을 움켜쥔 손등 위로 퍼런 핏줄이 날카롭게 돋아났다.

빙천휘

"나는 네게 바라는 것 따위 없다."

그녀의 관자놀이에 흐트러진 짙은 머리칼을 똑바로 응시하는 천휘의 입에서 딱딱하고 끊어지는 어투의 말이 흘러나왔다.

빙천휘

"강호의 무인은 약자에게 대가를 바라고 검을 뽑지 않는다. 네 기혈이 흩어지지 않고, 어떤 악당도 네 옷소매에 더러운 손을 대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천휘의 왼쪽 팔꿈치 쪽에서 낮고 유쾌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재겸은 쇄골에 닿아 있던 은호루라기는 건드리지 않은 채 옷깃 안에서 오른손을 빼내었고, 수레바퀴의 금 간 참나무 바큇살을 성큼 넘어 그의 엷은 청색 비단 어깨가 봄의 무릎에 바짝 닿을 때까지 다가섰다. 그의 눈매에는 익숙하고 따스한 호선이 되돌아왔으나 시선만은 또렷하고 날카롭게 깨어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뻗어 한쪽 따스한 손바닥으로 봄의 맨발인 오른발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발바닥에 묻은 바짝 마른 갈대 껍질 부스러기를 털어내었고, 다른 손은 천휘의 하얀 소매 위로 그녀의 허리를 은근히 감싸 안았다.

주재겸

"우리 소궁주께선 절간 밖 돌비석처럼 말씀하시고, 서 삼공자는 뼈다귀를 앞에 둔 사냥개마냥 짖어댈 줄만 아는구나, 봄아."

재겸은 그녀의 자그마한 발목을 가볍게, 짐짓 힘을 주어 쥐며 매끄럽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재겸

"내 바람은 저 둘보다 훨씬 소박하단다. 그저 다시 내 집으로 돌아와서, 볼이 통통해질 때까지 달콤한 연자육 과자를 먹고, 네 입으로 직접 내 집이 제일 좋다고 말해 주는 것뿐이지. 보렴, 들어주기 참 쉽지 않으냐?"

호월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왼발이 부러진 수레바퀴 살을 거칠게 짓밟아 마른 나무가 딱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두 동강 났고, 오른손으로 자갈밭에서 박도를 홱 뽑아 올리자 잘잘한 잿빛 조약돌들이 튀어 올라 재겸의 푸른 도포 자락과 천휘의 장화 코를 때렸다.

서호월

"그 멀건 손 당장 그 발에서 떼라, 왕야 새끼야. 손목 채로 잘라내서 뱀장어 밥으로 던져주기 전에."

호월은 도랑 너머로 무거운 보폭을 내딛으며 으르렁거렸고, 손수레에서 팔 하나 닿을 거리에서 그의 박도 평면이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서호월

"이리 내려와, 봄아. 당장. 저 두 놈 배때지 갈라놓는 꼴 네 눈으로 똑똑히 보게 만들기 전에."

창림이 가마터 문에서 둑 아래로 두 보 내달리며 뽑아 든 도를 호월의 목을 향해 곧장 겨누었고, 천휘는 평평한 석회암 판석 위로 반 보 물러서며 옥빛 검집에서 서리처럼 하얀 검신을 반쯤 뽑아 올렸다. 순식간에 곤두박질친 기온에 재겸의 왼손이 여전히 그녀의 골반에 닿아 있던 봄의 분홍 비단 치맛자락 위로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 | 건화 15년/08/01 (화) | 08:35 / 진시(辰時) | 강서 호구 나루 | 석회 운반선 옆 버드나무 예인로
셋 중에 봄이랑은 빙천휘가 제일 낫긴 하네. 순수하잖아.
✦6✦

주재겸의 손가락이 닿아 있는 봄의 분홍 비단 치맛자락 위로 서리가 기어올라, 아침 햇살 아래 고운 실오라기를 뻣뻣하고 창백하게 물들였다. 부서진 손수레의 참나무 바퀴살 너머로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서호월의 넓은 박도 칼면이 강물의 반사광을 받아내며, 벽창림의 짙은 남색 옷소매와 가마터 문의 석회암 아치 위로 일렁이는 백색 빛줄기를 던졌다. 혈암 경사로 아래에서는 밀려든 물살이 뭍에 닿은 작은 나룻배의 무쇠 뱃머리를 찰랑이며 넘어와, 호월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뒤꿈치에서 앞꿈치로 무게를 옮기던 장강수로채 뱃사공들의 짚신을 적셨다.

빙천휘의 왼팔 품에 안겨 있던 봄은 제 옷을 하얗게 얼려 붙이는 서리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주재겸의 호선을 그리는 입매와 서호월의 드러난 이빨을 거쳐 빙천휘의 붉어진 귓바퀴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쟁반 위에 놓인 과자를 헤아리기라도 하듯 빙천휘의 하얀 옷깃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어깨를 늘어뜨린 채 작고 명랑한 숨을 내쉬었다.

봄

"그럼 다 같이 공자님 댁에서 살아요."

강물의 물결 소리를 뚫고 봄의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주재겸을 향해 둥그스름한 얼굴을 돌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호월의 피 묻은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봄

"공자님 집이 제일 좋다고 말해 줄게요… 그리구 난 호월이 오빠 무릎에 앉아 있으면 되잖아요. 아, 그치만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걸요. 보라고 있는 눈인데… 그런 거 가지고 무섭게 굴면 안 돼요."

서호월이나 주재겸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빙천휘의 차가운 어깨 앞자락을 토닥이더니 뻣뻣한 흰 비단 깃에 뺨을 살포시 맞대었다.

봄

"그리구 천휘 오빠 쪽은 훨씬 더 쉬워요. 오빠가 이렇게 계속 딱 붙어 있어 주면 시원해서 기혈도 안 흩어지잖아요. 그럼 셋 다 괜찮은 거죠, 응?"

도랑 곁에 서 있던 구철은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신고 있던 신발 사이의 젖은 진흙 속으로 박도 끝을 푹 처박았다. 자갈밭 너머에서는 강륜이 하품을 반쯤 짓다 말고 턱을 멍하니 벌린 채, 칼자루를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는 해륜을 힐끔 곁눈질했다.

빙천휘의 온몸이 신발 끝부터 백발의 정수리까지 뻣뻣하게 굳어붙었다. 봄의 뺨이 옷깃에 닿은 곳으로부터 짙고 얼룩덜룩한 홍조가 창백한 목덜미를 타고 치솟아 광대뼈를 가로질러 번져 나갔다. 반사적으로 움찔한 그의 왼팔이 반 박자 동안 그녀의 갈비뼈를 제 가슴팍으로 바짝 끌어당겼다가, 이내 몸을 굳히며 정수리로부터 턱을 비껴 돌리려 애썼다. 그의 칠흑 같은 두 눈동자가 가마터의 벽돌 담벽을 향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빙천휘

"말조심하거라."

첫마디에서 낮게 긁히듯 갈라진 빙천휘의 목소리는 이내 거칠고 다급한 중얼거림으로 뚝 떨어졌다.

빙천휘

"남의 집 지붕 아래에서 무도한 흉수의 무릎 위에 앉아, 계집종마냥 남의 몸에 달라붙어 있겠다니. 백주대낮에 대체 부끄러움이란 걸 알기는 하는 게냐?"

모르니까 이러지.

그의 팔꿈치 곁에서 호선을 그리고 있던 주재겸의 입꼬리가 멎었다. 아침 햇살 아래 갈색 눈동자는 여전히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으나, 서리가 맺힌 봄의 치맛자락에 닿아 있던 그의 왼손이 드러난 발목으로 미끄러져 올라갔다. 복사뼈 아래 오목한 자리에 엄지손가락을 꾹 누르는 힘에는 살갗에 하얀 자국이 남을 만큼 서늘한 압력이 실려 있었다.

주재겸

"안휘에 있는 내 집은 방도 널찍하고 많단다, 아가씨. 잉어 연못도 저 진흙 섬에 있는 것보다 훨씬 넓지."

주재겸은 손목을 꺾어 접혀 있던 부채를 찰칵 펼치더니, 그림이 수놓인 지면을 비스듬히 세워 서호월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지 않도록 가리며 가볍고 매끄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주재겸

"허나 강서 땅의 들개 한 마리가 융단에 진흙을 묻히고 돌아다니게 내버려 둔다면, 하인들이 마룻바닥에서 악취를 빼내느라 겨울을 다 보내야 할 테고 침소에 북쪽의 얼음 덩어리를 들이밀면 백차 맛을 죄다 망쳐 버리지 않겠느냐."

부서진 수레바퀴 너머에서 서호월의 눈가 가죽이 잘게 경련하더니 왼쪽 눈꺼풀이 거의 감기다시피 짓이겨졌다. 악다문 잇새로 낮게 끓어오르는 거친 숨결이 쉭쉭 새어 나오며 붉은 핏방울 섞인 침이 턱 끝으로 튀었다.

서호월

"저 환관 새끼 집구석에서 살겠다고?"

서호월의 포효는 사그라들어 있었다. 수레의 나무 굴대를 타넘으며 천천히 내딛는 그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긁히듯 무미건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왼손으로 분홍빛 작은 신발을 흑적색 도포의 앞섶 깊숙이 제 갈비뼈 쪽으로 찔러 넣은 그는, 자유로워진 손가락을 뻗어 오른손과 함께 박도의 긴 칼자루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서호월

"딴 놈팽이 새끼 집구석이 제일 좋다고 지껄이면서 내 무릎 위에 앉아 있겠다고, 봄아? 내 두 눈이 똑똑히 뜨고 있는 앞에서 저 허여멀건 괴물 새끼 목덜미에 얼굴을 처부비면서?"

다친 다리에 체중을 싣는 순간 서호월의 오른쪽 신발 아래에서 자갈들이 우두둑 으스러졌고, 천으로 감싼 상처 틈새로 짙은 핏물이 배어 나와 발목 보호대 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치켜든 벽창림의 칼날이 내리꽂히기도 전에, 서호월은 바닥의 돌멩이를 스치며 묵직한 박도를 대각선으로 힘껏 쳐올렸다. 그 칼날이 겨눈 곳은 벽창림의 가슴팍이 아니라 둘 사이에 놓여 있던 손수레의 나무 몸체였다.

콰-직!

시퍼런 칼날이 메마른 참나무 판자를 단숨에 가르고 차축을 두 동강 냈다. 박살 난 수레 판자의 절반이 배수로 안으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들자 벽창림은 쪼개진 파편에 정강이를 얻어맞지 않으려 한 걸음 뒤로 훌쩍 물러섰고, 나머지 절반은 겹겹이 쌓여 있던 마른 뱅어 바구니를 들이받으며 석회암 바닥 위로 희뿌연 잔물고기 떼를 우박처럼 흩뿌렸다.

봄은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두 손으로 황급히 귀를 틀어막았고, 무릎을 배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는 순간 갑작스럽고 날카로운 딸꾹질이 터져 나와 빙천휘의 가슴팍에 닿아 있던 가녀린 어깨를 들썩였다.

주재겸

"문 안으로 물러서라!"

주재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오른손으로 옷깃 속을 헤집어 은호각을 낚아채 입술에 물고는 찌를 듯한 단음을 날카롭게 불어댔고, 왼손으로는 빙천휘의 어깨를 힘껏 떠밀며 석문 쪽으로 몰아붙였다.

벽돌 가마터 능선 위에서 쇠로 된 여섯 줄의 쇠뇌 시위가 일제히 튕겼다. 묵직한 여섯 발의 쇠화살이 버드나무 가지를 찢으며 쉭쉭 날아들어 서호월의 발치 주변 자갈을 후벼 팠고, 그의 뒤편 혈암 경사로를 치고 올라오던 장강수로채 선두 조장의 어깨를 그대로 꿰뚫었다.

구철

"배에서 방패 안 들고 오냐, 이 굼뜬 새끼들아!"

조장의 쇄골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축축한 돌바닥에 튀는 찰나, 구철이 앞으로 쇄도하며 도신으로 날아들던 일곱 번째 쇠화살을 쳐냈다.

서호월은 발치 석회암에 불꽃을 튀기며 꽂히는 쇠화살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박살 난 차축에서 박도를 단숨에 뽑아 올리고는, 쇠화살이 왼쪽 소매의 검은 비단을 찢으며 스쳐 지나간 생채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욱한 먼지를 뚫고 쇄도했다. 그 앞에는 빙천휘가 봄을 제 흉골에 바짝 끌어안은 채 가마터 안쪽으로 물러서고 있는 석문이 버티고 있었다.

🌐 | 건화 15년/08/01 (화) | 08:40 / 진시(辰時) | 강서 호구 나루 | 벽돌 가마터 석문
그러고보니 천휘가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 거 첨 보네. 거리두기 포기하기로 한 건가.
✦7✦

부서진 수레바퀴 축에서 인 흙먼지가 버드나무와 벽돌담 사이 아침 햇살 속에 하얗게 피어올랐다. 서호월의 묵직한 군화가 단 두 번의 거친 도약으로 석조 홍예문까지 이르는 서 보 남짓한 자갈밭을 집어삼켰고, 오른쪽 허벅지 붕대를 적신 검붉은 피가 발을 디딜 때마다 잿빛 석회암 바닥 위로 튀었다. 그의 박도가 문틀에 닿기도 전, 벽창림이 좁다란 홍예문 어귀로 비스듬히 몸을 들이밀며 도를 빗겨 올려 쳐, 빙천휘의 어깨를 노리던 육중한 칼날을 쳐냈다.

챙——!

맞부딪힌 강철에서 주황빛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개천가 풀숲 위로 쏟아져 내렸다. 호월이 양손으로 내리친 일격의 가공할 무게에 창림의 군화가 문턱 돌 위를 반 척이나 밀려났고, 가죽 완호가 압력을 견디지 못해 삐걱거리는 사이, 천휘는 단 한 번의 미끄러지듯 유려한 후퇴로 석조 홍예문을 벗어나 가마터의 단단한 진흙 바닥에 뒤꿈치를 디뎠다. 봄의 분홍빛 허리춤에 닿은 천휘의 왼손 손바닥에서 둥그런 백색 서리가 번져 나가더니, 얇은 무명 안감 너머로 냉기를 흘려보내 그녀의 갈비뼈가 들썩이는 것을 가라앉혔다.

봄

"히끅…! 싸우지 마요… 싸우지 마."

봄은 코를 훌쩍였고, 아래 속눈썹을 타고 젖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천휘의 하얀 가슴팍에 어깨를 비틀며 맨발인 오른발로 그의 허리께를 찼다. 또 한 번 작게 터져 나온 딸꾹질에 턱이 덜컥 치켜들리며 이가 딱딱 부딪쳤고, 그녀는 코로 가늘게 쌕쌕거리는 숨을 들이켜며 천휘가 쥐고 있는 차가운 옥검집을 양손으로 밀어냈다.

봄

"이게 뭐야… 무슨 오디션 프로그램도 아니구… 아, 맞다. 그럼 셋이서 오디션을 보는 건 어때요? 이런 칼싸움 말구요."

봄

'그게 맞겠어.'

천휘의 굳은 턱선에서 주재겸의 푸른 소매로, 그리고 홍예문 틈을 가득 채운 호월의 흑적색 도포로 젖은 회자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그녀는 생각했다.

봄

'공정한 시험. 그리고 심사위원은 내가 하는 거야.'

홍예문 어귀에서, 호월의 박도는 이미 창림의 쇄골을 노리고 두 번째로 내리찍기 위해 치솟고 있었으나, 그 날카로운 딸꾹질 소리에 공중에서 그의 손목이 비틀렸다. 넓적한 칼날은 창림의 목 대신 벽돌 문기둥을 납작하게 후려쳤고, 구운 흙 위로 깊고 하얀 흠집을 파내며 호월 자신의 어깨 위로 붉은 벽돌 가루를 쏟아부었다. 핏발 선 그의 두 눈이 창림의 방어를 지나쳐, 잘게 경련하듯 들썩이는 봄의 쇄골에 가닿아 굳어졌다.

서호월

"딸꾹질하잖아."

회벽에서 칼날을 거칠게 뽑아내며 창림의 도 끝에서 반 보 물러선 호월의 흉터투성이 뺨에서 핏기가 가셨고, 풀어헤친 깃 아래로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서호월

"당장 목에 찬물이나 얼음이라도 대, 이 흰머리 새끼야! 숨 넘어가게 멍청히 안고만 처자빠져 있지 말고!"

정보: 봄은 딸꾹질 하다가도 숨이 막혀 죽을 수 있다.

마당 안에서, 천휘는 호월의 고함 따위가 없어도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팔꿈치에 닿은 봄의 갈비뼈가 덜컥 흔들린 순간, 그는 엄지로 칼자루를 튕겨 반쯤 뽑았던 검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옥검집에 도로 밀어 넣었고, 오른손을 올려 차디찬 두 손가락으로 봄의 목덜미 오목한 곳을 내리눌렀다. 창백한 손가락 관절이 그녀의 따뜻하고 축축한 살결에 닿자 하얀 김이 피어올랐고, 턱밑에서 불규칙하게 뛰던 맥박을 차갑게 식혀 다음 딸꾹질이 기도 중간에서 길고 떨리는 한숨으로 멎게 만들었다.

빙천휘

"코로 천천히 숨을 쉬고 그만 바둥거려라."

그녀의 둥근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내려다보는 천휘의 낮은 목소리가 팽팽하게 굳어 있었고, 방금 그녀가 지껄인 기이한 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빙천휘

"가슴이 옥죄어 오는 판국에 대체 무슨 해괴한 소리를 지껄이는 게냐? 한기가 기혈을 가라앉힐 때까지 얌전히 있거라."

그들의 왼쪽 두 보 거리, 굽지 않은 흙벽돌 더미 뒤편에서 마구를 찬 네 마리의 말이 흑칠 마차 곁에서 발을 구르고 있는 곳에서, 재겸은 가마터 지붕을 향해 손가락을 활짝 편 채 왼손을 들어 올려 금의위 쇠뇌수들이 두 번째 일제 사격을 가하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그는 오른손으로 허리띠에 차고 있던 작은 은병을 풀고 이로 상아 마개를 뽑아내더니, 천휘의 곁으로 다가서서 서늘한 금속 병 주둥이를 봄의 벌어진 입술에 대어 주었다.

주재겸

"스스로 강호의 총시관이라도 자처하기 전에 우선 이 연화수부터 한 모금 삼키려무나, 아가야."

갈색 눈동자로 홍예문 너머의 호월을 경계하듯 힐끗거리면서도, 재겸은 달콤하고 시원한 물이 그녀의 혀를 적실 수 있을 만큼만 은병을 기울였다.

주재겸

"그 오-디-션이라는 게 대체 어느 시골 동네 장난인지는 모르겠다만, 네 목이 턱 막히는 걸 막아 줄 수만 있다면 서 삼공자가 진흙탕에서 나무 막대기나 휘두르며 춤을 춘들 내 알 바 아니지 않겠느냐."

봄은 달콤한 물을 두 번에 나누어 꿀꺽 삼켰고, 차가운 물과 목덜미에 닿은 천휘의 손가락이 자아낸 한기에 힘입어 가슴이 한결 고르게 오르내렸다. 석조 홍예문 바깥에서는 수로채 사공 세 명이 거룻배에서 꺼내 온 둥근 등패(藤牌)를 든 채 둑 위로 달려와 개천을 따라 나란히 세워 호월의 등 뒤를 엄호했고, 구철은 가죽 견갑에 새로 박힌 쇠뇌살을 덜렁거리며 다리를 절뚝거리며 상전의 곁으로 다가왔다.

구철

"공자님, 호구채 수사의 순찰선들이 징을 울리며 방금 모퉁이를 돌아 나왔습니다."

문간의 창림을 향해 박도를 겨눈 채 자갈밭에 강모래를 한 입 퉤 뱉어 내며 구철이 다급히 말했다.

구철

"이 가마터 앞에서 한 다경(茶頃)만 더 발이 묶였다간, 주둔군 놈들이 우리 거룻배를 석회 운반선 사이에 가둬 버릴 겁니다."

호월은 아침 바람을 타고 징의 둔탁하고 낮은 울림이 물결을 건너오기 시작하는 물길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오직 봄의 턱에 묻은 연화수의 옅은 물자국과, 그녀의 쇄골 오목한 곳을 내리누르고 있는 천휘의 새하얀 두 손가락에만 꽂혀 있었다.

서호월

"들었냐, 봄아?"

묵직한 박도의 칼등을 오른쪽 어깨에 걸치며 홍예문 너머로 소리치는 호월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게 내리깔렸고, 혈조를 따라 흐른 붉은 핏줄기가 황동 코등이를 향해 가늘게 흘러내렸다.

서호월

"머릿속으로 무슨 장난질을 하든 마음대로 지껄여 봐라. 다음번에 저 개새끼 둘이 길바닥에서 관군 놈들한테 몰릴 때는, 풀숲에서 널 건져 줄 배 같은 건 없을 테니까."

그는 왼손으로 흑적색 도포 품을 뒤적여 가죽 끈이 달린 작은 분홍색 신발 한 짝을 꺼내더니, 석조 홍예문 너머로 가볍게 던졌다. 작은 신발은 창림의 허리께를 스쳐 호를 그리며 날아가 재겸의 군화 앞 두 보 거리의 단단한 진흙 바닥 위에 바르게 떨어졌다.

재겸은 한쪽 무릎을 굽혀 붉은 벽돌 가루 속에서 분홍색 신발의 뒤축을 집어 들었고, 접은 부채로 밑창을 툭 쳐서 묻어 있던 강자갈을 털어냈다. 그사이 창림은 마당 안쪽으로 천천히 한 걸음 물러서며 가마터 대문의 육중한 참나무 빗장을 석조 문틀 너머로 절반쯤 걸어 잠갔다.

🌐 | 건화 15년/08/01 (화) | 08:45 / 진시(辰時) | 강서 호구 나루 | 벽돌 가마터 내부
추론이 내가 헛소리 한다고 하더라. 아 왜... 다음엔 경연이라고 하면 되나. 일단 아무도 설득 당하지 않는군 ㅋㅋ 그래도 싸우진 않았다. 그럼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