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7년 차 나는 그냥 통장이었다

아내랑 마지막으로 둘이 밥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남

결혼 17년 차
아이는 고2
나는 월급날이 제일 대접받는 날이다

퇴근하고 들어가면 아내는 거실에서 학부모 단톡 보고 있고 아이 방 문은 닫혀 있다
다녀왔어 하면 응 한마디
아이는 이어폰 끼고 있어서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른다
장모님은 전화 오면 아내한테 김서방 요즘 일 바쁘냐부터 물어보신다 돈 잘 버냐는 소리다
밥은 식탁 위에 랩 씌워져 있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다
신혼 때는 바닷가 걸으면서 밤새 얘기했던 사람이다
애 생기고 나서 모든 게 아이 중심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빠는 돈 벌어오고 엄마는 애 키우고
그게 우리 세대 부모들이 다 하던 방식이니까

근데 아이가 크니까 이제 내 자리가 없다
아이 학원 상담은 아내가 가고 진로 얘기도 둘이서만 한다
내가 한마디 하면 당신은 요즘 입시 몰라서 그래 하고 끝난다
지난달엔 아이가 수학여행 갔다 온 것도 카드 명세서 보고 알았다

얼마 전에 아내 친구 모임 단톡을 우연히 봤다
보려고 본 게 아니라 아내 폰에 알림이 떠서
우리 집 양반은 그냥 통장이야 이런 말이 있었고 다들 웃는 이모티콘을 달았다
화가 나기보다 그냥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날 밤 아내 옆에 누워서 한참 천장만 보다가 잤다 아내는 내가 그걸 본 줄 아직도 모른다

남자들은 가장이라는 말에 너무 오래 속은 것 같다
돈만 잘 벌어오면 가족이 알아서 나를 존중해줄 거라고 믿었다
아니더라
돈은 당연한 거고 존중은 따로 벌어야 하는 거였다
그걸 나는 17년 동안 몰랐다

아내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아내도 혼자 애 키우느라 지쳤을 거고 내가 그동안 집안일에 손 놓고 있었던 것도 맞다
주말마다 낚시 간다고 나갔던 것도 나였다
작년 결혼기념일에는 내가 식당을 예약했는데 아내가 그날 아이 학원 설명회가 있다고 해서 취소했다
혼자 예약 취소 전화하면서 이상하게 창피했다
식당 직원이 다음에 꼭 오세요 하는데 그 다음이 아직 안 왔다
그래도 가끔은 누가 한 번쯤 오늘 고생했어 해줬으면 좋겠다

요즘 회사 후배들 결혼한다고 하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애한테만 몰빵하지 말고 부부끼리 얘기하는 시간을 꼭 남겨두라고
애는 크면 나가고 결국 남는 건 둘이다
우리 집은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오늘도 식탁 위 랩 벗기고 혼자 밥 먹었다
맛은 있었다 그게 더 씁쓸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