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좌표 : chapter 29 의역, 오역 개많음 대충 요약) 볼드모트가 아기 해리를 안죽이고 전쟁에서 이김 혼혈이랑 머글태생 차별받는 개노답 세계관에서 고아로 자란 해리 정체를 숨기고 어마방 교수로 호그와트에 찾아온 리들 29. 시리우스와 무디는 이후 며칠간 안전가옥을 드나들었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일은 없었다. 한 사람이 나가 있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언제나 그곳에 남았다. 해리는 그게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호그와트에 몰래 숨어드는 것 같은 무모한 짓을 혼자서 벌이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해리는 더는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는 걸 굳이 그들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네빌과 함께 주방에 들어섰을 때, 해리는 무디와 그레인저가 열띤 언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무디는 그녀를 미네르바가 있는 곳으로 보내려는 것 같았다. 그레인저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무디는 그녀의 방어 마법이 전선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수준이란 것을 지적하며 그레인저는 벨트에 함께 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게다가," 눈가가 붉어진 그레인저에게 무디가 말했다. "론이 널 기다리고 있을 거다. 사랑하는 남편을 못 본지 오래 되었잖아, 그렇지? 오늘 아침에 루마니아에서 돌아왔다는구나." 그레인저의 목소리가 떨리자 흉터로 얼룩진 무디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그는 아까보다는 덜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봐라, 이제는 미네르바한테서 제대로 된 변신 마법을 배울 수도 있을 거다. 벨트에서 돌아오면 나한테 새 의족이 필요할 테니 네가 하나 만들어줘야지." 그레인저에게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늙은 마법사을 와락 껴안았다. 낡은 가죽 외투 위로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무디는 다소 어색하게 그녀의 뒤통수를 토닥였다. 그의 거친 손이 그레인저의 부스스한 머리카락 너머로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닿았다. "이 흉측한 글씨들도 없애고. 이것 때문에 표적이 되잖아. 론이랑 같이 루마니아로 가도 되겠지. 아니면 프랑스나. 영국에 남아 있지 말아라. 만약 우리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레인저가 무디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말하지 마세요. 부정 탄다고요." 그녀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지르더니 몸을 돌려 해리와 네빌을 바라보았다. 그레인저가 비틀거리며 다가와 네빌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해리를 껴안았다. 해리는 놀랐다. "죽지 마." 그레인저가 짧게 힘을 주어 그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뱀의 말에 대한 논문을 쓰는 걸 도와줘야지. 널 공동 저자로 올려줄 수도 있어." 그녀의 팔 아래에서 해리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런 건 익숙하지 않았다. 그레인저를 마주 안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하지만 그럼 그 외에 이런 상황에서 적절한 반응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럼 아주 짧은 논문이 되겠네." 해리는 자신의 턱 아래에 닿은 그녀의 부스스한 갈색 머리카락과 그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그레인저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바보 같긴." 그레인저가 떠난 뒤로 안전가옥은 조용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말이 별로 없었고, 그때쯤 해리는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시리우스와 무디 사이에 맴도는 고요한 긴장감에 익숙해져 있었다. 해리와 네빌에게 빗자루가 하나씩 주어졌고, 두 사람은 그걸 탄 상태로 적과 싸우는 방법에 대한 집중 훈련을 받았다. 무디와 시리우스가 해변가에서 두 사람을 가르쳤다. 회색이 섞인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들이 파도 위를 스치며 날아가는 동안 갈매기들이 주위에서 끼룩끼룩 소리를 냈고 바람에 섞인 소금기에 해리의 입술이 말랐다. 네빌의 비행 실력은 여전히 형편없었지만 그는 꿋꿋이 훈련을 이어갔다. 해리는 하늘로 높이 솟구쳤다가 수면을 향해 빠르게 하강했다. 바닷물이 신발 끝을 적셨다. 그는 시리우스의 공격을 모두 피했고 놀랍게도 주문을 몇 번 날려 보내기까지 했다. 심지어 무디조차 네빌과의 훈련을 잠시 멈추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시리우스는 해리가 짙은 색의 암초 주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보았고, 이따금씩 그의 눈동자에는 물기가 반짝였다. ―그런 식으로 비행하는 다른 누군가를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시리우스는 제임스 포터가 한때 퀴디치 수색꾼이었단 걸 해리에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해리는 그 얘기를 할 때 시리우스가 얼마나 자랑스러워 보였는지를 기억했다. 시리우스는 훈련을 할 때 말이 많은 편이었지만, 해리의 비행 실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훈련이 끝나고 네 사람은 해변가에 내려섰다. 해리와 네빌은 각자의 빗자루를 깨끗이 청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죽음을 먹는 자들이 네 뒤에 따라붙은 순간에 모래를 들이마시고 기침하고 싶지는 않겠지." 무디는 빗자루 끝에 붙은 모래를 털어냈다. "그나저나, 볼디가 전령을 보냈다. 우리 제안에 동의했어. 그 놈들은 사흘 뒤 새벽에 벨트에서 우리를 마주할 거다." "사흘 뒤요?" 네빌의 스코지파이 주문이 갑작스럽게 멈추자 그의 빗자루가 모래 먼지를 내뿜었다. "볼디가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는 편이 좋아." 무디는 시리우스와 함께 안전 가옥을 향해 걸어갔다. "너희 둘은 푹 자고 많이 먹어 둬라. 냉장고 안에 돼지고기가 좀 있다. 어제 밤에 들어온 거야." 해리는 해변가에 떠밀려온 뭉툭한 나무토막 위에 걸터앉았다. 스코지파이 주문을 쓰는 대신 손으로 직접 빗자루를 닦기로 했다. 하얀 알갱이가 손가락 사이에 끼어 피부를 쓸었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작업이 마음을 진정시켰다. 네빌이 그의 곁에 앉았다. 바람이 불어와 네빌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사흘이라니." "말포이도 거기 있을 거야." 해리가 말했다. 빗자루 끝의 가지가 마치 긴 송곳니처럼 그의 손가락을 찔렀다. "무디가 하는 말 들었지. 이번 작전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거야. 기사단은 가진 전력과 디멘터를 남김 없이 동원할 거고. 어떻게 할 생각이야?" "걘 패트로누스를 불러낼 수 있어. 내가 뭘 어떻게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기사단이 말포이를 해칠 수도 있어." 갈매기 한 마리가 그들의 머리 위를 스치며 날아갔다. 두 사람은 말없이 그 새를 바라보았다.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마치 장례식의 종소리처럼 허공을 찢었다. 네빌의 시선이 깃털 달린 동물의 자유롭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쫓았다. "어째서 그 사람 편에 서지 않은 거야?" 해리는 운동화를 벗어 던지고 양말도 벗은 다음 발가락을 상아빛 모래 안에 파묻었다. "왜냐하면, 무디가 아무리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해도 이거 하나만큼은 그가 옳으니까. 기사단은 살인을 최소화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어. 최선을 다해 그런 상황을 막는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잖아." 맨발 아래에서 모래는 축축하고 차가웠다. 마치 뼈가 타고 남은 잿가루 같았다. "반면에 볼드모트는 그런 걸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 그가 영원히 살아서는 안 돼." 그 남자는 아이들과 여자들이 흐느끼고 피 흘리는 광경을 차갑고 검은 눈동자로 바라볼 것이다. 꿈틀대는 그들의 몸 위에 담뱃재를 털어 내고 그들의 죽음이 그 자신에게 얼마만큼의 이득을 가져다 줄지 계산할 것이다. 해리는 그 남자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이미 정해진 절차를 따르듯 그런 짓을 하는 걸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그 자신을 위해 갈려 나가는 것이 너무나 마땅한 일이라는 듯. 네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덤블도어가 네게 남긴 기억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할머니는 덤블도어가 괴짜 늙은이긴 해도 자기가 이때까지 본 마법사 중에 가장 영리한 사람이라고 했어. 덤블도어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 기억을 남겼을 거야." 네빌이 나무토막 옆에서 작은 조약돌을 집어 들고는 무게를 가늠해보더니 바다를 향해 휙 던졌다. "예언이 정해 준 너의 적에 대해 좀 더 알아 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잖아, 안 그래?" 해리는 조약돌이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더니 물결 하나 남기지 않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펜시브는 싱크대 아래 세번째 서랍에 있어." 네빌이 그에게 말했다. * 그건 푸른빛 기억 줄기가 그에게 보여준 것 중 가장 오래된 과거였다. 비가 내리는 주위의 풍경이 마치 빛이 바랜 듯 회색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해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빗줄기가 시들어가는 정원의 정돈되지 않은 나무 덤불 위로 떨어졌다. 잡초가 정원을 뒤덮고 있었다. 축축하고 황량한 길 끝에는 저택 한 채가 홀로 서 있었는데, 한때는 웅장한 모습이었겠지만 지금은 검은 빗물이 흐른 흔적과 새똥 자국이 저택의 돌벽을 뒤덮고 있었다. 해리의 뒤쪽에서 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리자 젊은 남자 한 사람이 녹슨 철문을 지나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방문객의 얼굴은 납작한 모자 테두리의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그 남자는 검은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해리는 그게 호그와트의 교복이란 걸 알아차렸다. 색은 바래고 있었지만 원단은 깨끗했고 다림질까지 잘 되어 있었다. "누구십니까?" 낡은 양복을 입고 누렇게 변색된 새틴 장갑을 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검은 우산을 들고 손님을 향해 걸어왔다. "리들 씨는 오늘 누굴 만나실 예정이 없는데요. 저는 프랭크 브라이스입니다. 그분 아래서 일하고 있지요." 저택의 방문객이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이 해리의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완벽할 정도로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브라이스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 환한 미소가 해리의 망막을 태워버리는 듯했다. 그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보게 된 것이 얼마나 생경한 일이었는지. 그 남자는 저런 식으로 웃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다. 물론 눈 덮인 산 속에서 뱀과 단 둘이 있었던 짧은 순간만큼은 그렇게 웃었을지도. 하지만 사람을 상대로는 더 이상 그렇게 웃는 법이 없었다. 해리는 톰 마볼로 리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모든 부분이 훗날의 그 자신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이점 역시 놀라울 만큼 또렷했다. 어린 리들이 말을 꺼내기 전 눈을 깜빡이는 모습에서는 약간의 망설임이 엿보였다. 웃을 때에는 눈가에 주름이 깊게 잡혔고 미소를 지을 때에는 한층 더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표정에 진심 어린 온기는 없었지만, 저런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리들 씨는 지난 17년 간 제 가족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하셨습니다. 오랜 지인과 차 한 잔 나누는 정도의 일을 그분께서 거절하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젊은 날의 그가 말했다. 브라이스가 그를 가늠하듯 살폈다. 훌륭한 집사가 주인의 별 볼 일 없는 친척을 대할 때 응당 그러하듯, 상대의 매력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태도였다. 저택의 상태로 보아 그 주인의 상황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듯했지만 오랜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리들 씨는 제 어머니와 아는 사이셨습니다." 젋은 방문객이 덧붙였다. 브라이스의 얼굴에 어떤 깨달음이 떠올랐다. 어쩌면 오래 전의 불장난일지도 모른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들 말이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브라이스는 뒤로 물러나서 정원에 난 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집사의 접객 태도가 형편없다는 건 해리조차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가 오는 날에 철문 바깥에서 손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해리 자신 역시 고아였기 때문에 그런 취급에는 익숙했다. 볼드모트는 브라이스의 목을 곧바로 베어버렸을 테지만 어린 리들은 그런 무례함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아니, 이런 대접을 받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이 저택에 찾아왔으니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한 걸까? 아니면 고아로 자라왔던 지난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어째서인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해리는 그 질문의 대답이 전자이기를 바랐다. 어린 리들이 정원을 가로질러 거닐었다. 호그와트 교복 위로 떨어진 빗방울은 그 위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망토 위에는 단 한 방울의 얼룩조차 남지 않았다. 해리는 그의 뒤를 따랐다. 기억 속에 있는 채로 데자뷔를 느끼다니, 기묘한 일이었다. 이 남자의 뒤에서 한 걸음 뒤처져 걷던 모든 순간들을, 그가 뒤돌아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랐던 모든 순간들을 해리는 떠올렸다. 어린 날의 이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먼 훗날의 그가 그랬던 것처럼. 화단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나무들은 산책로를 침범하며 자라고 있었다. 그렇지만 저택 앞쪽으로는 키가 작은 푸른 관목 하나가 자라고 있었다. 무성한 잎사귀와 부러진 가지들 사이로 분홍색과 노란색 장미 봉오리들이 고개를 내민 채였다. 은은한 무늬의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저택에서 걸어 나왔다. 20대 중반쯤 되었을 그녀는 크림색 린넨 천으로 만든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손으로 놓은 자수로 장식된 그 물건은 비를 피하기보다는 햇빛을 가리는 데 더 적합해 보였다. 느슨하게 풀어 둔 드레스의 허리춤 아래로는 배가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여자가 장미꽃을 꺾으려 가지를 잡아당겼지만 꽃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크림빛 우산이 날아가버리자 여자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매끄러운 나무 손잡이가 창백한 손 위로 턱 내려앉았다. "도와 드려도 될까요?" 어린 리들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웃었다. 비가 내리는 하늘은 회색 빛이었지만 시들어가던 정원은 그 미소 앞에서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우산을 돌려주는 대신 능숙한 태도로 여자의 머리 위에 그것을 씌워 주었다. 그녀는 뺨을 붉혔다. "오늘 손님이 오시는 줄은 몰랐어요. 이런 모습을 보여드린 건 양해해 주세요." 그리고는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댁의 집사는 리들 씨를 찾고 있습니다. 전 응접실에서 기다리는 것 보다는 잠시 바깥 바람을 쐬는 게 좋을 것 같아 나왔고요." "그럼 프랭크를 이미 만나셨군요." 그녀는 안도했다. "손님이 오신다는 얘기를 남편한테서 듣지 못했네요. 부디 그 사람을 너그러이 봐 주세요. 저희는 전쟁 때문에 힘든 일을 너무 많이 겪었는데, 제 남편은― 이런 일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요." 해리는 그녀가 어떤 전쟁을 이야기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머글 연구 수업을 들을 때 군사 작전에 관한 내용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워야 할 내용들이 너무 많았는데, 해리에게는 역사적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기억하는 재능이 전혀 없었다. "유서 깊은 여러 가문들이 전쟁으로 같은 어려움을 겪었죠." 리들이 말했다. 진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제가 실례를 했네요. 어느 가문 분이신지…?" "저를 성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변호사나 수녀님들 밖에 없습니다." 그는 분홍색 장미 한 줄기를 깔끔하게 꺾어 여자에게 건넸다. "부디 절 마볼로라고 불러 주세요." 그녀는 분명 그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도 사교계에 처음 발을 내딛은 소녀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럼 저도 로즈라고 부르세요. 이 꽃들도 그래서 심은 거예요, 제 이름을 따라서요."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군요." 남자가 우산을 기울였고, 그녀는 자신이 자수가 놓인 우산 아래에 서있는 동안 남자는 비를 맞고 있었단 걸 알아차렸다. "날씨가 이렇게 좋지 않으니 안으로 들어오세요. 남편은 서재에 있을 테니 제가 안내해 드릴 게요. 차도 좀 끓이고요." "아주 좋습니다." 그는 또 다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해리로 하여금 송곳니를 번뜩이는 뱀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 리들 저택의 내부는 그리몰드 광장과 비슷했다. 저물어가는 영광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구석에 드리운 거미줄과 노랗게 바랜 벽지가 세월 속에 방치되고 닳아버린 저택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냈다. 복도는 어두웠다. 응접실을 제외하고는 촛대는 모두 비어 있었다. 해리는 전등이나 촛불이 하나도 켜져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서재로 향하는 길에 두 사람은 프랭크 브라이스를 마주쳤다. 그는 여주인과 그녀가 데려온 손님을 보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프랭크, 손님을 위해 다과를 좀 준비해야겠어요." 로즈는 그렇게 말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브라이스는 어린 리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리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그들은 작은 서재로 들어섰다. 해리가 본 저택의 다른 방들과 마찬가지로 그곳 역시 그다지 잘 관리되지는 못한 모습이었다. 책장은 절반쯤은 비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에는 찢어진 양장 책들이 여기저기 널린 채였다. 박제된 딱따구리가 들어 있는 보관함은 유리가 깨져 있었고 딱따구리 역시 부리가 사라진 모습이었다. 옆면에 길게 찢긴 자국이 난 가죽 의자에 남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30대 후반쯤이었겠지만 그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남자와 젊은 방문객이 혈연 관계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군가 해리에게 마법을 쓰지 못하고 알코올에 중독된 톰 리들 주니어를 상상해보라고 한다면 눈 앞에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숱이 줄어든 곱슬머리와 혈관이 터져 불그스름하게 부어 있는 얼굴, 이따금씩 경련하듯 떨리는 손. 리들 시니어는 부어오른 그 손으로 담배를 들고 있었다. 그는 두툼한 고급 시가만 피울 것 같은 사람이었지만, 다른 이들이 그렇듯 그 역시 전쟁을 거치며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탁자 위에는 반쯤 열린 담뱃갑이 놓여 있었다. 해리는 겉면의 디자인과 오렌지 색 로고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우드바인 담배였다. 리들 시니어의 곁에 놓인 술병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즈의 미간이 구겨졌다. "여보, 손님이 오셨어요." 그녀의 말투에 가벼운 책망이 담긴 것으로 보아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닌 듯했다. "손님?" 리들 시니어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아내 곁에 서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에 그의 탁한 눈동자가 미미하게 커졌다. "차를 가져올 게요." 그녀가 말했다. "이 분은…." 로즈가 말끝을 흐렸다. 임신한 아내가 낯선 사람을 스스럼없이 이름으로 부르는 모습이 남편의 눈에 좋지 않게 보이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곤트입니다. 제 어머니 쪽 가문을 선생님도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소?" 리들 시니어가 다리를 꼬아 앉았다. 로즈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차를 가져온다면서?" 그녀의 남편이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막고 기침했다. 로즈는 잠시 망설이더니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서재를 떠났다. 리들 시니어는 아내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고는 입을 열었다. "요즘은 요리사와 가정부 노릇을 하는 걸 좋아하더군. 차와 샌드위치를 직접 만들고 말이야. 전쟁 전에는 달걀 하나도 삶아본 적 없는 여자였는데. 유감이지만 그러려니 해 주게. 제대로 된 하녀나 가정부, 하인들이 있던 시대는 끝났어. 다들 갑자기 간호사나 비서가 되겠다고 하니." "그래도 집사는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남자가 코웃음 쳤다. "글쎄, 아내가 풋맨Footman 노릇을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마차나 자동차의 문을 열어주거나― 초대도 없이 온 손님을 쫓아내는 일 말이야." 리들 시니어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그 뒤로 가려진 젊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안주인이시더군요." 젊은 남자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축하를 드려야 마땅하겠군요. 곧 부모가 되실 테니 두분 다 아주 기쁘시겠습니다. 전쟁이라는 가혹한 현실 앞에 꼭 필요한 위안이겠지요." 매끄러운 화법이었다. 그 안에 담긴 진심은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해리는 나이 든 남자의 눈동자 안에서 날카로운 경계심을 읽었다.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방문객은 자리를 권하지 않는 주인 앞에 여전히 서 있었다. "로즈는 어떻습니까? 어머니를 닮아 사랑스러운 여자 아이라면 말입니다." 크고 늘씬한 남자의 몸이 비좁은 서재를 집어 삼킬 만큼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남자 아이라면, 아버지를 따라 톰이라고 할까요?" 리들 시니어의 부어오른 얼굴 근육이 꿈틀했다.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부인께는 마볼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젊은 남자의 차분한 표정과 태연한 태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제 미들네임이죠." 리들 시니어는 자신의 옆에 놓인 술병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가 그것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그는 기다란 병목 위에 손을 얹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젊은 남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오래된 기억이 흐릿하게 번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해리는 어린 리들이 숨을 죽인 채 가느다란 기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체 뭘 기대한 건데? 당신한테는 부모가 없잖아. "내 뒤에 있는 캐비닛 안에 1926년산 맥캘란이 한 병 있네." 리들 시니어가 말했다. "훌륭한 물건이지. 싱글 몰트야. 저 술을 파는 증류소에서 하는 말에 따르면 맥아를 만드는 데만 80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하더군. 그 당시에도 아주 비쌌어."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말은 어눌하지 않았다. "이 저택은 이제 잡화점이나 다름없게 되었어. 한 푼이라도 가치 있는 것들은 전부 저당 잡히거나 팔렸지. 하지만 그 탐욕스러운 놈들이 내 위스키에 손을 대려고 했을 때 난 사냥총으로 그 자식들을 때려눕혔어. '어림도 없다.' 그렇게 말했지. '다음번에 저 술을 쳐다보기라도 했다가 나한테 걸리면, 술 대신 탄약을 맛보게 될 거다. 저 맥캘란은 이 저택에 남을 거고 난 죽는 순간에 저걸 마실 거라고.'" 그가 거친 웃음을 터트렸다. "좀 가져와주지 않겠나? 응? 한잔 하자고." 저 사람 술에 취한 상태일지도 몰라, 해리는 생각했다. 어린 리들이 캐비닛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으나 상대가 그를 멈춰 세웠다. "지금 뭐하는 건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이 든 남자의 눈은 누렇게 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흑요석 같은 검은 색이었다. "손을 댈 필요 없잖아, 그렇지? 저것들이 자네에게 오도록 할 수 있잖아." 젊은 남자는 말이 없었다. 리들 시니어가 입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씁쓸한 담배냄새가 해리에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익숙했다. "자네가 마차나 차를 타고 오지 않았다고 프랭크가 말해 주더군." 나이 든 남자가 말했다. "걸어서 정문으로 왔다고 하던데. 우산도 없이 말이야. 그런데 자네 옷과 신발을 봐. 비 한 방울 맞은 흔적도 없이 말끔하군." 나이 든 남자가 그 앞에 놓인 빈 병을 응시했다.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그 여자도 그런 짓들을 할 수 있었지." 남자의 창백한 목 아래에서 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해리는 그것이 자신의 이빨 아래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떠올렸고, 억지로 그 기억을 떨쳐냈다. 열 일곱의 톰 마볼로 리들은 감정을 숨기는 일에 완벽하지 않았다. 그는 어렸고 그의 가면에는 빈틈이 있었다. 그 미세한 불완전함을 바라보고 있으니 해리는 어째서인지 마음이 아팠다.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빈틈없이 차갑고 잔혹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어린 리들은 외투 아래서 천천히 지팡이를 꺼내 들고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 아씨오. " 캐비닛의 문이 활짝 열렸다. 짙은 갈색의 액체가 담긴 밀봉된 술병 하나와 빈 잔 두개, 디캔터 하나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장례 행렬의 악단처럼 엄숙하게 줄 지어 다가왔다. 그것들은 부드럽게 달각이는 소리와 함께 탁자 위에 자리를 잡았다. 나이 든 남자는 그 광경에 감탄하는 대신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 여자는 그런 건 전혀 못했는데." 그는 결연한 기세로 1926년산 맥캘란의 마개를 따고는 비어 있는 잔 두 개에 위스키를 따랐다. 술이 쏟아지고 튀어 오르며 손가락 세 마디 정도의 깊이를 채웠다. "와서 들게." 젊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건배." 리들 시니어는 그 젊은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배사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 모금에 술을 다 털어 넣었다. 위스키의 맛을 음미하는 듯 잠시 눈을 감더니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여자가 죽고 난 직후에 저 위스키를 샀지. 내가 그 여자에게서 달아났던 바로 그 해에 말이야." 젊은 남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런 반응에 해리 역시 몸이 굳었다. "그때 난 열 아홉이었어. 가족들은 내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지. 한 문장도 제대로 못 끝맺는 밋밋하게 생긴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으니 말이야. 마을 사람들은 그 여자 집안을 두고 미친 사람들이라고 했다. 오라비는 깡패 같은 작자였고 아버지는 헛소리를 주절대는 늙은이였으니까. 2년동안 난 행복에 젖은 남편이었다. 제대로 기억나는 건 별로 없지만 충분히 얼빠진 모습이었겠지. 그 여자가 그 모든 게 진짜라고, 내가 마침내 자기를 정말로 사랑하게 된 거라고 믿을 만큼. 그래서 그 여자는 내 찻잔에 약초를 넣는 짓을 멈췄어. 그때는 임신한 상태였으니, 어쩌면 자기 뱃속의 아이가 약초와 똑같은 효과를 내 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나이 든 남자가 손바닥으로 입가를 쓸었다. 값비싼 위스키조차 그 기억의 불쾌한 뒷맛을 씻어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난 2년동안 눈이 멀어 있던 거야. 2년 동안 . 사람들은 내가 그 여자와 약혼해서 아이를 갖는 걸 내 의지로 원했다고 생각했고, 난 실제로도 그 여자와 같은 침대를 썼어. 그 약초의 효과가 사라졌단 걸 깨달은 순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뭐였는지 알아?" 그의 축 늘어진 입이 쩍 벌어지며 이를 드러냈고 부푼 얼굴이 일그러졌다. 방문객은 아무 말도 없었다. "교회에 갔다. 누군가, 이를 테면 목사 같은 사람과, 이제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고 내게 말해줄 만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그곳 안뜰을 겨우 가로지르자 마자 난 속을 게워냈다. 전날 먹은 빵과 생선이 목구멍을 지나서 하수구의 물처럼 터져 나왔지. 수녀 한 명이 내 옆을 지나가면서 역겨워했던 게 기억난다. 감히 신을 섬기는 성전을 더럽혔으니 그랬겠지. 나 역시 내가 역겨웠다. 죽고 싶었지." "결국엔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아무도 내게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지 않았어. 집을 떠났던 탕아가 돌아왔으니 더 바랄 게 뭐 있겠느냐, 안 그래? 쓸 수 있는 돈이 손에 들어왔을 때 난 가장 먼저 내가 구할 수 있는 제일 비싼 술을 샀다. 1926년의 그날에 난 다시 태어난 거라고 생각했지. 영국 최고의 증류소에서 만들어진 최고급 위스키를 가지고 싶었다." 그는 반쯤 비어 있는 술병을 가리켰다. "이건 내가 새 삶을 얻은 그 해에 만들어 진 물건이다. 자유를 얻었다고, 해방되었다고 생각했지. 실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죄수 같은 처지였던 거야." 나이 든 남자는 스스로의 말장난에 크게 웃더니 이어서 몇 번 기침했다. "그 뒤로 몇 년 정도는 좋은 시절이었어. 빌어먹을 나치 놈들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이제 내게 남은 건, 글쎄, 자네 눈에 보이는 게 전부야." 젊은 남자가 리들 시니어를 서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고급 위스키로 당신 새 인생을 축하하고 있는 동안, 그 여자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어. 당신 아이를." 리들 시니어가 잔을 다시 채웠다. 금빛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당신의 아들을 낳았어. 알고 있었나?"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옅게 떨리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해리의 착각이었을까? 어린 그는 상대방에게서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확신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 아들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거야. 수녀들이 기록을 잘 보관하고 있었으니까, 찾을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겠지." 서재의 문이 열리며 로즈가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들린 쟁반 위에는 꽃무늬 주전자와 함께 무늬가 맞지 않는 찻잔과 받침들이 쌓여 있었다. 오이와 약간의 햄으로 속을 채운 샌드위치는 작게 잘린 정사각형 모양이었다. "내올 만한 게 이것 뿐이라 죄송해요." 그녀는 조금 숨이 가쁜 듯 말했다. 부푼 배를 누르지 않으려 다소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쟁반을 든 채였다. "햄이 부족한데 다음 배급일까지 나흘이나 남았거든요." 그녀는 맥캘란의 마개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란 듯 남편을 바라보았다. "햄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다니. 자네가 마음에 들었나 본데." 리들 시니어가 잔인한 웃음을 터트렸다. "순진한 사람들을 꼬여내는 데 재능이 있군, 안 그런가? 그 여자와는 달리 자네는 약초를 쓸 필요도 없겠어." 그가 담배 연기 사이에서 몇 번 더 기침했다. 로즈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말들에 경악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방금 전까지 어린 그 남자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소년 같은 활기는 마치 뱀이 숲 속에 몸을 숨기듯 사라져버렸다. 그의 얼굴은 빈틈없이 냉혹했다. 열 일곱 소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냉정함이었다. "그 여자랑 같이 죽었어야지." 유리잔 안에 담긴 술처럼, 늙은 남자의 목소리에는 독이 담겨 있었다. "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냐. 왜 그 여자랑 같이 흙 아래서 썩어 문드러지지 않은 거냐고." 그 잘생긴 얼굴은 이제 완벽하게 가면을 쓴 채였다. "난 절대 죽지 않아." 안돼. 해리는 그 남자의 어깨를 붙들어 흔들고 싶었지만 그의 손은 마치 유령처럼 남자를 통과할 뿐이었다. "당신 말이 맞아. 난 약초 같은 건 필요 없어." 남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악의를 담아 말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지팡이를 겨누었다. 흔들림 없이 능숙한 자세였다. 그 순간 해리는 눈 앞의 어린 소년에게서 훗날의 그 남자를 본다. " 임페리오. " 리들 시니어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손이 흠칫 떨리며 담배를 떨어트리더니 반쯤 빈 맥캘란 병을 집어 들었다. 나이 든 남자가 그 병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 쳤다. 한번, 그리고 또 한번 더, 박자감이 느껴 질만큼 기계 같은 움직임이었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숨을 너무 오래 참은 사람처럼 목이 부풀었다. 관자놀이에서 흐른 피가 호박색 액체와 뒤섞였다. 다섯 번을 내려친 끝에 숨이 끊어진 그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며 유리 파편에 꿰뚫렸다. 로즈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쟁반을 떨어트리고는 뒷걸음질 치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두 손이 본능적으로 배를 끌어안았다. 남자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가늠하듯 내려다보았다. 억눌린 잔혹함을 언제든 드러낼 듯한 모습이었다. 로즈는 마침내 남자의 완벽한 얼굴에서 남편과 똑같은 검은 눈동자를 알아본다. "제발, 저, 저 아이가 있어요." 그녀는 몸을 떨고 있었다. 흰 드레스는 차와 크림으로 얼룩진 채였다. "절반은 당신 동생이기도—" "내게 아버지 같은 건 없어." 지팡이는 이제 그녀를 향해 있다. "그러니 저 자의 자식은 내 동생이 아니지." 로즈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해리의 속이 울렁거렸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는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았다. 해리는 눈을 감았다. 다음 장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귓가에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가벼웠다. 그러나 해리가 예상했던 말은 아니었다. " 오블리비아테. " 잠깐, 뭐라고? 눈물이 맺힌 로즈의 갈색 눈동자 위로 희뿌연 막이 드리웠다. 그녀의 몸이 흠칫 떨리더니 힘없이 늘어졌다. "당신은 알코올중독자인 남편이 자살하는 모습을 봤고 이 저택을 빠져나가서 도움을 요청할 거야." 어린 남자가 의식을 잃은 그녀의 몸에 대고 말했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마. 가족이나 다른 지인들에게 의탁해 지낼 곳을 찾아." 그 말들이 그녀에게 밀려들었다. 로즈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눈을 떴다. 그녀에게 보이는 것은 러그 위에 놓인 시체뿐인 것 같았다. 충격에 빠진 채 로즈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를 뛰쳐나갔다. 해리는 겁에 질린 그녀가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소리를 듣는다. 서재의 모든 것들이 죽은 듯 멈춰 있었다. 심지어는 공기조차 그 자리에 고인 채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젊은 남자는 바닥에 놓인 시체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리고는 해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딱딱한 걸음으로 마호가니 탁자를 향해 걸어갔다. 빈 술잔 옆에는 리들 시니어가 뜯었던 우드바인 담배갑이 놓여 있었다. 남자는 담배갑을 뒤집고는 엄지 손가락으로 로고 윗부분을 쓸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W'와 'O'의 곡선을 따라 그리며, 눈 아픈 주황색 포장 위에 머물렀다. 그러더니 그 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들고는 짧게 인센디오 주문을 외워 불을 붙였다. 아무리 볼드모트라고 해도 열 일곱 살에 지팡이도 주문도 없이 마법을 쓸 수는 없었구나. 해리는 멍하니 생각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은 불꽃이 이내 카펫에 옮겨 붙더니 곧이어 커튼을 타고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재는 새하얀 화염에 휩싸였다. 책장이 쓰러지며 그 안의 책들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딱따구리 박제는 불길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남자는 어떤 것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재와 불꽃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가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해리는 깊고 낮은 목소리를, 마치 시냇물이 조약돌을 다듬듯 그 목소리가 각 음절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는 것을 듣는다. 그 말들이 갈라지는 공기와 끓어오르는 열기 속으로 증발하고, 남자는 온몸에 힘을 푼 채 그 마법의 리듬이 자신을 휩쓸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에 화답하듯 검은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 올랐다. 그것들은 남자의 눈과 귀에서부터 흘러나와 그의 긴 손가락 위의 반지에 고여 들었다. 금빛의 고리가 대답하듯 박동했다. 그곳의 공기는 이제 액체가 된 금속처럼 나른하게 뒤섞이며, 맥동하는 마법을 끌어 안았다. 해리는 쇠와 소금의 냄새를 맡는다. 그러지 마. 녹아 내린 루비 같은 색의 핏줄기가 남자의 눈과 코에서 흘러 내렸다. 진득한 붉은 색은 너무 짙어 거의 검은 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어린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환각에 빠진 듯 두 눈을 감은 채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피로 물든 입술 사이로 한 줄기 담배 연기가 피어 올랐다. 불씨와 화염이 그의 주위를 벽처럼 에워싸며 사나운 기세로 높이 치솟았다. 해리는 그에게 닿을 수 없었다. 너무 늦었으니까, 이건 그저 기억일 뿐이니까. 그럼에도 해리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야생의 동물을 대하듯이. 해리는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이 주제를 알게 해주겠다며 제 얼굴을 뒷마당의 진흙 위로 처박았을 때 미네르바가 그에게 속삭여줬던 말들을 어설프게 흉내라도 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해리의 목은 잠겨버린 듯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제발 그러지 마, 해리는 숨죽여 애원했다. 부탁이야 . 그의 절박한 마음을 느끼기라도 한 듯 남자는 눈을 떴다. 검은 눈동자는 곧장 해리를 향한 채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의 잘린 단면처럼 투명하고 차갑고 깊었다. 남자의 얼굴은 마치 신처럼 찬란하고 무자비했다. 신이란 자비 따위는 없는 존재일 테니까. 세상이 이토록 비참한 곳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면, 일리아드를 읽으며 몰래 담배를 숨기던 소년이 저런 남자로 변해 버리도록 허락한 것이라면. 불타오르는 저택의 서재 한가운데서, 해리는 톰 마볼로 리들이 고아가 되는 것을, 스스로에게 또 다른 이름을 왕관처럼 씌우는 것을 지켜 보았다. * 저 기억 보면서 해리가 리들 위로해주고 싶어하는게 정말 하 깊생을 하게 함 완결까지 세 챕터 남았네... 같이 달려주는 해포비들 고마워! 리들해리 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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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해리 the Orphaned King 영픽 번역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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