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억의 재고, 매달 빠져나가는 창고비… 결국 ‘파쇄’를 결정하기까지 출판사를 운영하며 가장 마음이 무거운 순간은, 책이 안 팔릴 때가 아닙니다. 물류창고 랙에 묵묵히 쌓여 매달 보관료라는 이름의 고정비를 갉아먹는 재고들을 마주할 때입니다. 몇 해 전, 공들여 준비했던 외국 코에디션 도서들. 국내 판권 계약부터 번역, 제작 감리까지 수억 원의 자본과 시간, 정성을 쏟아부었습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고, 남겨진 수십 개의 파레트는 고스란히 물류창고의 붙박이가 되었습니다. 매몰비용의 덫과 창고비의 역습 처음 1~2년은 '언젠가는 털어낼 수 있겠지'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정가의 절반이라도 건져보자", "랜덤박스나 이벤트 배송비만 받고 독자들에게 선물처럼 보내보면 어떨까", "작은도서관이나 단체에 기부라도 할까." 하지만 계산기를 두드릴수록 잔인한 현실만 마주하게 됩니다. 기부? 장부상 취득원가로만 처리되는데, 운반비와 인건비, 행정 공수를 들이고 나면 현금 기부보다 생색도 안 나고 손해입니다. 이벤트나 덤핑? 출판문화산업 진흥법, 즉 도서정가제라는 벽에 가로막힙니다. 정가 이하의 헐값 판매는 물론이고, 2,000원이 넘어가는 도서를 사은품(비매품)으로 끼워 파는 것조차 불법 과태료 처분 대상입니다. 결국 합법적으로 털어내려면 복잡한 재정가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그사이에도 물류창고는 하루도 쉬지 않고 보관료를 청구합니다. 몇 년간 누적된 창고 보관료만 이미 수천만 원. 정리하는 데 또 운반비와 인건비를 쓰자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습니다. '언젠가 팔릴 것'이라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라, 매몰비용의 덫에 갇혀 매달 현금을 태우는 고문이었습니다. 책을 살리자고 만든 제도가, 책을 제지공장 분쇄기로 내몬다 도서정가제의 본래 취지는 중소 출판사와 동네 서점을 보호하고 다양한 출판 생태계를 지키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체감하는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출판사가 시장에서 실패한 재고를 유연하게 할인해 독자에게 건네거나, 덤핑으로라도 현금화할 수 있는 퇴로를 완전히 막아버렸습니다. 독자는 저렴하게 책을 접할 기회를 잃고, 출판사는 탈출구가 없어 창고비 고통 속에서 피를 흘립니다. 결국 출판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하게 합법적이고,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제지 수거 트럭을 불러 전량 파쇄하는 것." 독자의 손에 1,000원에라도 쥐여주면 '위법'이지만, 제지공장 분쇄기에 갈아 넣어 톤당 몇만 원짜리 폐지로 만드는 것은 '합법'인 기형적인 구조. 책을 아끼고 지키겠다는 법이, 역설적으로 멀쩡한 새 책을 가장 비정한 방식으로 쓰레기로 내몰고 있습니다. 미련을 털어내야 다음이 시작된다 결국 결단을 내렸습니다. 더 이상의 매몰비용에 끌려다니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형 파지 수거 업체를 창고로 불러 파레트째 상차하고, 공인 계량 증명서와 파쇄 사진을 챙겼습니다. 수억 원의 재고를 장부상 '재고자산 폐기손실'로 털어내며, 비로소 몇 년간 짓누르던 물류비 고정비의 족쇄를 끊어냈습니다. 종이 더미로 부서져 나가는 책들을 보는 마음이 편할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미련을 붙들고 있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나태함이었습니다. 끝없는 보관료 출혈을 멈추고, 0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창고 문을 닫고 나오는 길, 비로소 무거운 짐을 하나 내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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