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 잭로즈 혁명길 프랭크에이프릴 그리고 인셉션 코브와 이터널 선샤인 클레멘타인 도미닉 코브는 건축가이자 도둑이자 남편이자 도망자이자 아버지다. 그는 24시간 중 도둑으로 있는 시간이 가장 길었다. 남의 꿈에 들어가 금고를 열고 남이 숨겨둔 생각을 훔쳐 달아나는 시간이. 코브의 이전의 어떤 생에서는 차가운 북대서양의 물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심장으로 천천히 들어왔고... 그는 연인의 손을 붙잡은 채 더 이상 힘을 줄 수 없었다. 또 다른 생에서는 침실의 창문 밖으로 아침 빛이 들어오던 날, 아내가 더 이상 이 집에서 숨 쉴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이름은 매번 바뀐다. 잭이었다가, 프랭크였다가, 코브로. 그러는 와중에도 늦는 건 변하지 않았다. 늦게 달려왔고 늦게 붙잡았으며 늦은 사과만 건넸다. 클레멘타인 크루친스키는 자기 자신을 자주 갈아엎었다. 머리색을 바꾸는 건 간단한 일이잖아? 빨강이었다가 파랑이었다가 주황이었다가 초록이었다가, 어느 날은 정확히 어떤 색인지 이름 붙일 수 없는 냉동 음료 같은 색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충동적이라고 했는데, 클레멘타인은 그게 엿같았다. 그녀가 꼭 생각 없이 움직이는 인간처럼 들렸기에. 클레멘타인은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생각들이 한 줄로 얌전히 서 있지 않았을 뿐이지. 줄을 세우면 도망가고, 붙잡으면 소리를 지르고, 사랑하면 갑자기 창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클레멘타인 크루친스키는 딸이자 연인이자 문제아이자 기억 삭제 고객이자 살아남은 여자다. 그녀의 이전 생에는 얼어붙은 바다 위에서 혼자 호흡을 이어가던 생이 있었다. 결혼이라는 이름의 완벽한 집 안에서 부서지다가 끝내 무너진 생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생의 클레멘타인은... 전생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창문이 많은 집을 싫어했고 배 모형만 봐도 손끝이 서늘해졌으며 남자가 늦게 사과하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혐오했다. 도미닉 코브는 매번 뒤늦게 사과했기에 클레멘타인은 그를 떠났다. 영화 속 이별은 비가 오거나 누군가 기차역에서 울거나 하는 둥 퍽 절절했는데 실제 이별은 토요일 오후 4시 17분에 세탁기가 탈수를 끝내는 소리로 시작된다. 클레멘타인은 그때 코브의 욕실 앞에서 젖은 양말 한 짝을 들고 서 있었다. 코브는 식탁 위에 놓인 설계도를 접고 있었고 그 설계도는 누군가의 꿈속 호텔 복도다. “돔, 당신은 내가 화난 이유를 몰라.” “알아.” “아니, 몰라. 당신은 늘 안다고 말만 해. 안다고 말하면 대화가 빨리 끝나니까 그렇겠지.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잖아.” “요즘 일이 복잡했어.” 요즘이라고? 클레멘타인이 기가 찬 듯 웃으며 빈정거린다. 당신 인생에서 안 복잡했던 적이 있긴 해? 당신은 항상 무슨 미로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굴어. 나는 문 앞에 서 있는데, 당신은 방 안에서 계속 벽만 더 만들잖아. 클렘. 그렇게 부르지 마. 클레멘타인. 그것도 싫어. 그럼 난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해. 코브는 그 말을 겨우 삼켜낸다. 클레멘타인은 젖은 양말을 세면대 안에 던져 넣고 현관으로 갔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아. 사랑하는데도 이렇게 형편없을 수 있다는 게 짜증 나. 차라리 안 사랑했으면 내가 좀 덜 멍청해 보였을 텐데. 클레멘타인이 문을 열자 복도의 찬 공기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붙잡았어야 했다. 당장 일어나서 맨발로라도 뛰어가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내가 망가져서 너도 망가뜨리고 있었다고 인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멍청히 앉아 있었다. 몸은 굳었는데 머리만 빠르게 움직였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어떤 말이 정확하지. 어떤 말이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지. 그 사이 문이 닫히고 만다. 제대로 잠들지 못한지 얼마나 되었더라. 일주일? 잠은 그의 직장이자 범죄 현장이자 유일한 피난처였으나 클레멘타인이 없는 침대가 너무... 넓었다. 사람 하나가 빠졌을 뿐인데 방의 면적이 달라지는 건 이상한 일이야. 새벽 3시에 냉장고를 열었다. 뭔가 먹을 게 정말 없었다. 물, 오래된 겨자, 레몬 반쪽, 그리고 한 번도 뜯지 않은 올리브 병이... 코브는 올리브를 싫어했다. 클레멘타인이 좋아하는 거지. 코브는 싱크대 앞에 서서 손바닥으로 눈을 눌렀다. 순간 아주 오래된 이미지가 떠올랐다. 차가운 물 위에 떠 있는 나무판자, 그 위에 누운 여자의 젖은.. 붉은 머리카락, 파랗게 질린 입술, 놓쳐서는 안 되는 흰 손. 숨을 들이켰다. 이건 기억인가, 악몽인가. 그리고 떠오른 것은 교외의 집이다. 깨끗한 잔디, 같은 모양의 창문들, 저녁마다 서로를 감시하듯 켜지는 조명들. 한 여자가 부엌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금발에 단정한 원피스, 눈 밑의 그림자, 웃을 때마다 부서질 것 같은 입매.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잖아, 프랭크. 코브는 그 이름이 제 것이 아님에도 대답하고 싶어 입을 열었다. 목구멍에서 나온 건 물이었다. 바닷물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것. 아서에게 전화를 걸었고 세 번째 신호음에서 연결됐다. 누가 죽었어? 아직은 아니야. 그럼 아침에 전화해. 클레멘타인이 라쿠나에 갔어. 코브는 식탁 위에 놓인 봉투를 보았다. 도미닉 코브에 대한 기억은 클레멘타인 크루친스키에게서 삭제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클레멘타인 크루친스키에게 다시 알리지 마십시오. “그녀의 기억에 들어가야겠어.” “안 돼. 라쿠나가 기억을 어떻게 지우는지 몰라? 감정의 연결점을 태워서 길을 끊는 거야. 남의 무의식에 들어가 금고 터는 거랑 달라. 거긴 폐허야. 그것도 무너지는 중인 폐허.” “그래서 지금 들어가야 해.” “코브, 너는 전 애인의 머릿속에 무단 침입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어.” “그녀의 기억을 되돌리고 싶은 게 아니야.” “되돌리고 싶은 거잖아. 솔직해져.” 코브는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사랑했던 기억을 훔쳐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왜 떠났는지,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이번에는 어디서 늦었는지 알고 싶었다. 코브는 실패의 구조를 알아야만 했다. 왜냐면, 그는 망할 건축가였으니까. “마지막으로 사과하고 싶어.” “그녀는 어차피 기억 못 할 거야. 그렇다면 그 사과는 누구를 위한 건데?” 코브는 냉장고 안의 올리브 병을 보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라쿠나의 기억 삭제 과정은 꿈과 비슷하지만 꿈이 아니다. 기억은 잠든 사람의 뇌 안에서 스스로 장소를 만들고, 라쿠나의 장치는 그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대상과 연결된 감정 표지를 태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인간 하나를 지운다는 건 단순히 사진에서 얼굴만 오려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 냄새, 노래, 계절, 말투, 습관, 특정 음식, 특정 농담, 특정한 침묵까지 줄줄이 끌려 나와 함께 지워낸다. 클레멘타인에게서 코브가 사라진다는 것은 코브라는 이름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새벽에 마신 탄 커피, 파리의 비좁은 호텔방, 설계도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 그녀가 싫어하던 코브의 회색 넥타이, 둘이 싸우고도 같은 우산을 썼던 밤, 당신 꿈엔 계단이 너무 많아, 침대맡에서 중얼거리던 목소리... 그것들이 하나씩 불에 타들어 갔다. “들어가면 오래 못 버텨. 라쿠나 장치가 삭제 중인 기억은 안정적이지 않아. 꿈보다 더 빨리 장면이 접힐 거야. 니가 뭘 건드리면 방어기제가 튀어나올 수도 있고.” “클레멘타인의 방어기제라면 이미 현실에서 충분히 겪어봤어.” “농담할 때 아니야.” “농담 아니야. 그 여자는 화나면 와인잔을 던지는 게 아니라 갖다 버려. 차라리 던지는 게 낫지. 던지면 피하면 되는데 버리면 다음 날 아침에 빈 찬장만 남아 있거든.” “이런 감상적인 짓에 내가 왜 협조하고 있지?” “니가 내 친구라서.” “나는 네 공범이지 친구는 아니야.” 아리아드네는 라쿠나 기계와 PASIV 장치를 연결하는 설계도를 훑어보더니 코브를 한참 바라봤다. 아리아드네는 코브의 가장 지저분한 꿈을 본 전적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아래층에 갇힌 말, 무너지는 해변, 아이들의 뒷모습, 그가 만들고 망친 모든 방.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쩔 거예요?” “기억 속의 그녀가 날 쫓아내면 나와야지.” 클레멘타인은 라쿠나의 작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머리카락은 선명한 오렌지색이다. 깨어 있을 때의 클레멘타인은 항상 세상과 그리고 자신과 맞서느라 얼굴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었는데 잠든 그녀에게는 힘이 빠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잊고 있는 동안 가장 평온해 보인다. 그건 아마 세상이 줄 수 있는 가장 모욕적인 진실 중 하나겠지. 아서가 주사기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이건 구조가 아니야. 사과도 아니야. 그녀가 못 들으면. 알아, 그래도 말할 거야. 아서는 대답 대신 주사기를 꽂았다. 세상이 부드럽게 기울었다. 천장의 형광등이 길게 늘어나고 아리아드네의 손이 기계 위를 움직이는 모습이 물속에서 보는 것처럼 보였다. 코브는 눈을 감는다. 마지막으로 본 클레멘타인의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불처럼 보였다. 아닌가? 구명보트의 조명이었나. 혹은 교외의 집 뒤뜰에서 마지막으로 타오르던 담뱃불처럼... 첫 번째 기억은 얼음 위였다. 눈을 뜬 코브는 몬톡의 겨울 해변에 서 있었다. 모래 위에 눈이 얇게 덮여 있다. 멀리서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이 장소를 알고 있었다. 클레멘타인이 좋아하던 곳. 헤어진 연인들이 우연히 다시 만났어야 했던 장소. 파도는 앞으로 밀려오는 대신 뒤로 접혔고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중간중간 끊겼다. 삭제가 시작된 것이다. 클레멘타인은 저만치에서 처음 만났던 날의 코트를 입고 걷고 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파랗다가 오렌지색이 되었다가, 로즈라는 이름이 어울리던 여자가 가졌던 붉은빛으로 흔들린다. 클레멘타인! 그의 외침에 돌아본 그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날 알아요? 각오 했지만서도 숨이 막혔다. 돔이야. 도미닉 코브. 그런 이름 가진 사람 몰라요. 알아, 지금은 모를 거야. 와우, 시작부터 최악이네. 나를 안다고 우기는 모르는 남자라니. 그녀가 몸을 돌려 계속 걷기에 코브도 따라갔다. 바닷가의 바람이 차다. 꿈에서는 온도가 가짜여야 하는데 이 기억 속 추위는 진짜처럼 손가락 끝을 깨물어댔다. “나는 당신의 기억 속에 있어. 당신이 지금 나를 지우고 있거든.” “내가 뭘 한다고요?” “라쿠나. 기억 삭제 회사야. 너는 나를 지우기로 했고, 나는…” “잠깐. 내가 당신을 지우기로 했다면, 당신이 대체 뭘 했길래 내가 그렇게까지 하는데?” 코브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해야 할 게 많아 거짓말을 하고 싶어졌다. “... 나는 너를 외롭게 했어.” 클레멘타인은 코웃음을 쳤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해봐요. 고작 그 정도로 사람을 지운다고? “당신이 말할 때 제대로 듣지 않았어. 당신이 떠난다고 했을 때 붙잡지 않았고, 당신이 무섭다고 했을 때 내 두려움만 설명했지.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당신이 내 폐허 안에서 조용히 살아주길 바랐어.” 클레멘타인이 그를 빤히 보았다. 파도가 거꾸로 쓸려가며 모래 위 발자국을 지운다. 그녀의 얼굴에 기억의 잔여물이 스쳤다. 감정의 그림자가 보이는 순간 머리 위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바다 쪽에서 새까만 균열이 밀려왔다. 해변의 끝이 종이처럼 말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삭제야. 여기서 나가야 해. 어디로? 코브는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다 멈췄다. 손끝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접혔다. 따라와 줄래? 클레멘타인은 그의 손을 보고 픽 웃었다. “예의 차리는 남자였어?” “배웠어.” “최악이네. 그래도 뛰어요.” 달리는 둘의 뒤에서 해변이 지워졌다. 발밑의 모래가 사라지고 나무 데크가 나타났다. 데크 위 조명들이 하나씩 켜진다. 몬톡은 갑자기 밤바다의 유람선 갑판으로 바뀌었다. 음악 소리가 들렸다. 이건 클레멘타인의 기억이 아니었다. 아니... 맞을진 몰라도 이번 생의 기억은 아니야. 클레멘타인의 코트는 어느새 하얀 드레스로 바뀌어 있다. 머리카락은 붉은 금빛으로, 목에는 목걸이가. 그녀는 옷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찌푸린다. 나 이런 취향 아닌데. “로즈.” 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왔다. 코브가 부른 것인지, 코브의 안에 있던 오래된 누군가가 부른 것인지 모를 일이다. 코브도 바뀌어 갔다. 낡은 재킷과 셔츠. 그는 떨리는 손으로 갑판 난간을 붙잡았다. 음악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배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지만 새겨진 기억은 결말을 알고 있다. 여긴… 코브가 중얼거렸다. 클레멘타인은 난간 밖 어두운 바다를 내려다본다. 나 여기 알아요. 기억해? “아니. 모르는데 알아요. 빌어먹게 싫은 느낌이네.” 기억하지 못해도 알 것 같다. 물의 온도와 놓친 손의 감촉. 마지막 숨이 폐 안에서 얼어붙는 감각이... 클레멘타인은 제 팔을 감쌌다. 코브는 그걸 본 순간 정말이지 견딜 수 없어졌다. “내가 죽었어.” “뭐?” “그때는 내가 죽었어. 당신은 살았고.” “이건 당신 꿈이에요, 내 꿈이에요?” “모르겠어.” “그럼 누가 책임져요?” 누가 책임지는가. 사랑은 둘이 시작하지만 실패의 책임은 한 사람이 들고 간다. 잭은 바다 아래로 가져갔고 로즈는 남은 평생 들고 살았다. 프랭크는 침묵 속에 들고 살았고 에이프릴은 스스로를 짓밟아 그 책임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코브는 그제야 깨닫는다. 그들은 생마다 한쪽이 죽고 한쪽이 살아남았다. “이번엔 아무도 혼자 두지 않을 거야.” 클레멘타인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말 하는 남자치고 멀쩡한 놈 못 봤는데. 나도 내가 멀쩡하다고는 안 했어. 배가 기울기 시작한다. 물건들이 미끄러지고 사람들이 한쪽으로 쏠렸다. 클레멘타인은 균형을 잃어 코브가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 감촉에 코브는 순간적으로 잭이 되었다. 잭 도슨, 위스콘신의 가난한 화가, 배표를 포커로 딴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소년. 그는 로즈를 바라보며 살아남으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놓지 마.” 이상하지. 분명히 클레멘타인의 목소리인데... 다른 여자의 절규가 들렸다. 코브는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안 놓아. 절대.” 기억의 갑판은 순식간에 얼어붙은 바다로 접혔기에 그들은 물속에 빠졌다. 코브는 본능적으로 클레멘타인을 위로 밀어 올렸다. 나무판자가 떠 있다. 과거와 똑같은 장면, 늘 똑같은 시험. 빌어먹을 사랑은 어째서 같은 문제를 다른 생에 걸쳐 반복 출제하는가. 올라가! 코브가 외치자 클레멘타인이 고개를 저었다. 같이! 안 돼, 공간이 없어! 또 그 소리야? 클레멘타인이 물을 뱉으며 소리쳤다. 우리는 왜 매번 공간이 없는 데서 만나는데! 판자는 작았고, 집은 좁았고, 꿈은 무너졌고, 코브의 마음에는 죄책감들이 잔뜩 들어 있어 클레멘타인이 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코브는 판자를 붙잡고 몸을 올리려 했다. 판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감각이 사라져 간다. 아아 이번에도 안 되는 건가. 포기하려는 찰나 클레멘타인이 그의 멱살을 잡는다. “당신 건축가라면서요. 공간을 만들어.” 건축가이자 도둑이자 남편이자 도망자이자 아버지인 도미닉 코브. 코브는 눈을 감았다. 이곳이 기억이라면 기억은 고정된 건축물이 아니라 감정으로 세운 임시 구조물이다. 라쿠나가 태우는 것은 장면이고 감정이 남아 있는 한 벽은 다시 세울 수 있다. 그는 판자를 넓히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기억과 싸워야 하므로. 대신 바다를 바꾸기로 한다. 물 아래에서 계단이 솟아올랐다. 얼음이 층층이 굳어 투명한 계단을 만들었고 그 계단이 판자 옆까지 올라왔다. 클레멘타인은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반칙 아니에요? 그들은 얼음 계단 위로 올라갔다. 여전히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지만 적어도 더 이상 가라앉지 않았다. 바다는 그들 아래에서 흔들리다가 갑자기 물러난다. 타이타닉의 밤이 멀어지고 이번엔 하얀 천장과 커다란 창문이 있는 거실이 나타났다. 교외의 집. 완벽한 잔디. 완벽한 거리. 완벽한 이웃이 있던 곳. 클레멘타인의 드레스가 단정한 원피스로 바뀐다. 양복을 입은 코브의 손에 위스키 잔이 들려 있다. 창밖에서는 아이들이 웃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커피가 끓었다. “그 배보다 여기가 더 엿같은데.” 코브는 이 집을 알고 있다. 혁명이라는 이름을 단 길, 그러나 아무도 혁명하지 않는 곳. 레볼루셔너리 로드. 꿈을 말하기 좋은 이름이었고 꿈을 죽이기엔 더 좋은 이름. 에이프릴. 코브가 이름 하나를 부르자 클레멘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또 누구야? 당신. 그리고 나는 프랭크였어. 프랭크. 그녀가 이름을 씹어보듯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 나도. 부엌 식탁 위에는 파리 여행 책자가 펼쳐져 있다. 페이지 한쪽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들의 도피처이자 실패한 약속. 그 책자를 보는 순간 목이 메었다. 전생의 기억들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에이프릴의 눈빛, 프랭크의 비겁한 농담, 임신, 출근 열차, 이웃들의 무해한 폭력, 특별하다고 믿었던 두 사람이 사실은 특별해질 용기를 서로에게 주지 못했다는 사실. 클레멘타인은 거실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집은 숨을 못 쉬게 해요. 그렇지. 내가 여기서 죽었어요? 응.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녀가 어울리지도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다. “당신은 뭘 했는데요?” 코브는 그 질문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 집의 모든 문이 갑자기 매력적으로 보였다. 현관문, 뒷문, 침실문, 욕실 문. 도망자의 눈에는 세상이 탈출구 목록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래도 도망치지 않았다. 이번 생의 코브는 전생의 프랭크보다는 조금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는 당신이 불행하다는 걸 알았어. 그런데 내가 원인이 아니길 바랐지. 그래서 당신을 설득하려고 했어. 당신은 괜찮다고, 우리가 괜찮다고, 이 정도면 다들 사는 거라고. 당신이 숨 막힌다고 했는데 나는 창문을 여는 대신 커튼을 쳤어.” 클레멘타인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녀의 머리색이 오렌지에서 금발로, 금발에서 파랑으로 번졌다. 그래서 내가 죽었구나. “내가 죽인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어. 오래도록. 그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내가 직접 밀어 넣은 건 아니라고, 나는 그날 집에 없었다고, 나는 몰랐다고.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아.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가는데 내가 내 억울함을 먼저 챙겼다면, 그게 이미 충분히 끔찍한 일이니까.” 집 안의 조명이 깜박인다. 라쿠나의 삭제가 다시 밀려왔다. 벽지가 재가 되어 떨어지고 창밖의 잔디가 검게 타들어 갔다. 클레멘타인은 식탁 위 파리 여행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파리에 갔나요? ... 못 갔어. 몬톡도 제대로 못 가고, 파리도 못 가고, 배는 가라앉고. 왜 죄다 이 따위야. 코브가 웃자 클레멘타인이 따라 웃었다. 그 때문일까. 완벽한 교외의 집이 미세하게 금이 갔다. “이번엔 가요.” “어디로?” “아무 데나. 근데 당신은 내 말 좀 들어주면서 가요. 중간에 설계도 펴지 말고, 내 머리색 가지고 심리 분석하지 말고, 내가 화내면 해결책부터 꺼내지 말고 그냥 들어줘요.” “그럴게.” 클레멘타인은 파리 책자를 그의 가슴에 툭 던졌다. “연습해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듣는 거. 나는 당신을 사랑했겠죠. 그리고 그게 너무 짜증 나. 나는 내가 똑똑한 줄 알았는데, 사랑에 빠지면 같은 실수를 계속해요. 다른 이름, 다른 시대, 다른 머리색, 같은 사람. 최악이야.” 코브는 중간에 변명하지 않고 사과를 끼워 넣지도 않으며 듣고 있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응, 계속해. 클레멘타인은 그 한마디에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 그거였나 봐. 거실이 무너졌다. 바닥이 아래로 꺼지고 두 사람은 함께 떨어졌다.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통로다. 코브가 잘 아는 곳. 그의 꿈속 가장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낡은 엘리베이터. 그런데 층수 표시판에는 이상한 단어들이 떠올랐다. 몬톡 타이타닉 레볼루셔너리로드 라쿠나 집. 클레멘타인은 엘리베이터 벽을 붙잡고 눈을 굴렸다. “당신 머릿속 진짜 끔찍해.” “당신 기억이랑 섞였어.” “내 탓 하지 마요. 나는 적어도 엘리베이터에 전생 목록 붙여놓는 취향은 없으니까.”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 앞에는 코브의 작업실이 있었다. 현실의 작업실과 비슷했는데 그보단 더 어둡고 벽에는 클레멘타인의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사진들이 하나씩 검게 타고 있다. 그녀의 웃는 얼굴, 화난 얼굴, 잠든 얼굴, 코브의 코트를 입은 얼굴, 식료품점에서 올리브 병을 들고 찡그리는 얼굴.... 라쿠나가 마지막 연결점들을 태우고 있었다. 클레멘타인은 사진들을 보며 걷다가 문득 한 사진 앞에 멈췄다. 사진 속 그녀는 파란 머리였고 코브의 낡은 셔츠를 입고 부엌 싱크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입에는 숟가락을 물고서. 코브는 그날을 기억한다. 둘이 처음으로 제대로 싸운 다음 날. 그녀가 새벽에 돌아와 남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사과할 때도 꼭 논문 발표하는 사람 같아. 그래서 코브는 처음으로 아무런 설명 없이 미안하다고 했다. 클레멘타인은 한참 그를 보더니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그의 입에 밀어 넣었다. 사진이 타기 시작한다. 코브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불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막을 수 없어요?” “당신이 원하면 막을 수 있어.” “내가 원한다는 게 뭔데요? 지금의 나는 당신을 모르고, 기억 속의 나는 당신을 사랑했고, 현실의 나는 당신을 지우기로 했어요. 셋 중 누가 결정권자예요?” “나는 당신의 선택을 빼앗고 싶지 않아. 그래서 여기 온 게 잘못일 수도 있어.” “근데 왔잖아요.” 코브는 불타는 사진들을 본다. 사라지는 클레멘타인들. 웃고, 찡그리고, 도망치고, 돌아오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살아 있던 모든 그녀. “이번 생에서만큼은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늦었다고 말하고 싶었어. 나는 항상 늦었으니까. 당신이 물에 떠 있을 때, 집 안에서 죽어갈 때, 현관문을 닫을 때. 매번 너무 늦게 알았어. 당신이 내 삶의 장식이 아니라 문이라는 걸. 나는 그 문을 열고 나가야 했는데, 계속 벽을 설계했어. 당신이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돼. 다시 사랑하지 않아도 돼. 당신이 나 없는 삶을 살고 싶으면, 나는 이번엔 그걸 방해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당신이 당신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신이 지우고 싶었던 건 사랑한 당신 자신이 아니라, 내가 남긴 상처였으면 좋겠어.” 사진들이 모두 타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작업대 위의 작은 팽이 하나뿐이다. 코브의 토템. 현실과 꿈을 가르는 물건. 클레멘타인은 그것을 집어 들어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이거 돌리면 깨어나요? 아마도. “나는 당신을 아직 몰라요. 근데 이상하게 당신 때문에 화가 나고 슬프고, 당신을 보면 왠지 아주 오래 기다린 기분이 들어요. 그게 사랑인지 전생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기분이 별로야.” 그녀는 팽이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당신을 다시 기억하게 되면, 당신은 또 늦을 거예요? “... 아마 또 늦을 때가 있겠지. 하지만 당신이 혼자 오래 기다리게 두지는 않을게. 늦었다는 걸 알면 돌아갈게. 문 앞에서 멈추지 않고.” 별로 낭만적이진 않네요. 그래도 그게 당신다운 것 같아. 클레멘타인은 그의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 않았으나 또 싫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때 작업실 문이 부서졌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밀려 들어온다. 얼굴 없는 방어기제들. 라쿠나의 기술자들이 기억 속에서 변형된 모습인지 클레멘타인의 무의식이 만든 경비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나가야 해. 어디로? 코브는 팽이를 보았다. 아직 돌지 않았다. 현실로 나가는 길은 깨어나는 것뿐이다. 그러나 클레멘타인이 깨어나면 삭제는 완료될 것이다. 그가 들어온 목적은 실패한다. 아니, 애초에 목적이 무엇이었지. 되찾는 것? 사과하는 것? 기억을 구하는 것? 선택을 존중하는 것? 늦지 않는다는 건 붙잡는 것이 아니라 빨리 놓아주는 것일지도 몰랐다. 코브는 팽이를 집어 클레멘타인에게 건넸다. 당신이 돌려. 그리고 당신이 정해. 내가 당신을 기억할지 말지? 그건 당신한테 너무 불리한데. 그래도. 클레멘타인은 팽이를 받아 들었다. 경비원들이 가까워졌다. 그녀는 팽이를 작업대 위에 세웠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면 끝이다. 코브는 숨을 죽였다. 이번만큼은 조종하지 않기 위해, 설계하지 않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위해 그는 모든 본능과 싸웠다. 돔. 클레멘타인이 그를 불렀다. “현실에서 만나면 올리브 좀 사놔요.” 팽이가 돌고, 세계가 뒤집힌다. 코브는 라쿠나의 침대 옆에서 눈을 떴다. 아서가 그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괜찮아? 코브는 곧장 옆 침대를 보았다. 클레멘타인은 아직 잠들어 있다. 기계의 화면에는 삭제 진행률이 떠 있었다. 99%, 100%, 완료. 아리아드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코브… 그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괜찮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클레멘타인의 잠든 얼굴을 본다. 이번에는 그 평온한 얼굴을 모욕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평온은 그녀가 어렵게 얻은 권리였다. 자신을 지운 뒤에야 얻은 평온이라면 코브에게는 그것을 슬퍼할 자격만 있고 빼앗을 권리는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버텼다. 아서가 부축하려 하자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걸어야 했다. 적어도 그녀의 인생에서 나가줄 때는 제 발로 나가야 한다. 코브는 라쿠나의 접수대 앞을 지나가다 멈췄다. 작은 분실물 바구니에 무언가 들어 있었다. 오렌지색 머리끈, 싸구려 선글라스, 구겨진 영수증. 그리고 작은 메모지 한 장. 왜 그것을 집어 들었는지 모르겠다. 메모지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올리브 싫어함. 그래도 사둘 것. 아리아드네가 뒤에서 다가왔다. 왜 그래요? 코브는 메모지를 손안에 쥐었다. 클레멘타인의 글씨다. 언제 썼지. 삭제 전에? 현실의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알 수 없었으나 코브는 처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코브는 몬톡으로 갔다. 그는 더 이상 클레멘타인을 찾아다니지 않기로 했고 라쿠나의 권고대로 그녀에게 자신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트에서 올리브 병을 산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기차역으로 가고 싶어졌다. 몬톡의 바다는 꿈속처럼 회색이었으나 세계가 접히지는 않았다. 갈매기의 울음이 끊기지 않았으며 모래 위 발자국은 평범하게 남았다. 코브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었다. 저만치에서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두꺼운 코트를 입은 클레멘타인이 해변 난간에 기대 서 있었다. 바람 때문에 오렌지색 머리칼이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그녀는 코브를 보지 못했다. 봤어도 어차피 알아보지 못했을 거고. 코브는 그대로 돌아서야 한다.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순간 클레멘타인이 말했다. 올리브. 클레멘타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았다. “방금 당신 보고 갑자기 올리브가 생각났어요. 이상하죠. 나 올리브 싫어하는데.” 수십 개의 문장이 코브의 머릿속에서 줄을 섰다. 나는 도미닉 코브야. 우리는 사랑했어. 당신이 나를 지웠어. 난 당신의 기억에 들어갔어. 미안해. 다시 시작하자. “나도 싫어해요.” 내뱉어진 건 고작 그거였다. 클레멘타인은 그 말에 픽 웃었다. 그런데 왜 당신한테 올리브 냄새가 나죠? 샀거든요. 싫어한다면서? 필요할 것 같아서. 클레멘타인이 그를 수상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당신 좀 이상하네요. 자주 들어요. 이름이 뭐예요? 코브는 잠깐 망설인다. 이름은 문이다. 이름을 알려준다는 건 누군가가 들어올 수 있도록 손잡이를 내어주는 일이다. 그는 이번엔 문을 잠그지 않기로 했다. 그녀와 약속했으니까. “돔이에요. 도미닉 코브.” “돔. 난 클레멘타인인데, 참고로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 부를 생각 말아요. 그거 정말 싫어해요.” 해변을 함께 걸으며 코브는 클레멘타인이 묻는 말에 대답했다. 직업은? 건축 관련 일을 한다고 했다. 정확히는? 복잡하다고 했다가 클레멘타인이 눈을 치켜뜨자 고쳤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공간을 설계해요. 흐음, 멋있는 척과 수상함 사이 어딘가네요. 해가 내려갈 때쯤 클레멘타인이 말했다. 나 이상한 말 해도 돼요? “당신을 보면 춥고 답답하고 화가 나는데, 동시에 집에 온 것 같아요. 근데 그 집이 좀 별로인 집이에요. 창문도 안 열리고, 냉장고엔 먹을 것도 없고. 그래서 내 말은,” 당신이 건축가라면 그 집부터 수리해 줬으면 좋겠어요. 특별한 삶, 파리, 영원한 사랑,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탁. 그런 큰 약속이나 맹세 말고 이번에는 작은 것부터 하기로 한다. 제대로 듣기. 제때 전화하기. 냉장고 채우기. 미안하다는 말을 논문처럼 만들지 않기. 문 앞에서 굳지 않기. 그녀가 내가 설계한 집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수리하기. 그는 건축가니까. 클레멘타인이 손을 내밀었다. “처음부터 다시 해요. 나는 클레멘타인. 가끔 충동적이고, 기억력은 좋은 편이었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고, 올리브는 싫어해요. 당신은?” “나는 돔. 늦는 버릇이 있었고, 꿈을 설계하고, 올리브를 싫어하지만 가끔 사둬요.” “왜죠?” “누군가 돌아왔을 때 냉장고가 비어 있으면 안 되니까.” 클레멘타인이 눈을 깜빡였다. 그 말이 그녀 안의 어딘가에 닿은 지도 모른다. 기억이 없어도 감정은 기어코 우회로를 찾아낸다. 그리고 팽이는, 코브의 주머니 깊은 곳에서 돌지도 넘어지지도 않은 채 조용히 있었다. 지금은 현실을 확인하는 도구가 필요 없었다. “돔, 만약 내가 화나서 가버리면, 그냥 가만히 있지는 마요. 따라와서 말해요. 내가 싫다고 하면 물러나고, 그래도 말은 해줘요. 내가 당신이 겁먹었다는 이유로 혼자 버려졌다고 느끼지 않게.” 그럴게요. 당신이 늦으면? 전화할게요. 전화 안 받으면 문자 하고, 문자도 씹으면 냉장고 채워놓고 기다릴게요. 올리브 빼고. 올리브 포함. 고집 있네. 좋아요, 너무 쉬운 남자 별로야. 사랑은 이번에도 쉬워지지 않을 것이다. 클레멘타인은 여전히 폭풍처럼 웃고 갑자기 사라지겠지. 어떤 때에는 코브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자기 자신을 바꿀 수도. 코브는 여전히 오래된 죄책감의 층계를 내려가다 길을 잃고 설명을 방패처럼 들고 침묵을 핑계로 삼고 싶어질 터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알고 있으니까. 물이 차오르기 전에 계단을 만들 수 있다거나 집이 숨 막히면 창문을 열 수 있다는 것. 기억이 사라져도 감정은 작은 메모처럼 남을 수 있다는 것들. 코브와 클레멘타인에게는 정해진 결말이 없다. 그들이 탄 배는 출항하지 않았다. 교외의 집도 계약하지 않았다. 꿈은 아직 설계 중이고 기억 삭제 신청서는 글쎄, 언젠가 다시 쓰일 수도 있겠지.
📰
이슈
-
·
-
·
약 1분 분량
·
0
|
댓글
댓글을 작성하려면 회원 로그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