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Cxx_OVOVUw?si=K3EVaANoywQLnHMI "만약에… 그가 목마의 배를 열고 나와서 트로이의 성문을 열었을 때, 10년간 쌓인 분노가 하룻밤 사이에 도시로 쏟아지는 것 을 보았다면요?" -오디세우스 역사적으로 항복을 거부한 도시가 저항끝에 뚫리면 "약탈 " 당하는것이 승자의 당연한 권리이지 관행 취급 받았음. 물론 악에 받친 병사들에 의해 안에 있는 거주민들의 운명은 뭐... 학살, 약탈, 방화, 강간 등등... 티레 함락 (332 BC) 티레에서 7개월에 걸친 완강한 저항에 격분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도시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시민 6,000~8,000명을 살해하고 생존자 2,000명이 해변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지고 3만 명을 노예로 팔아넘겼다고 함. 예루살렘 함락 (70 AD) 티투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유대 반란을 진압하며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함락해 제2성전을 파괴하고 시내를 초토화함. 요세푸스는 포위 중 사망자를 약 110만 명, 포로를 약 9만 7천 명으로 기록되었으나 실제로는 수만에서 수십만 명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 예루살렘 함락 (1099) 제1차 십자군이 십자군이 한달간의 공성전 끝에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무슬림, 유대인 주민을 대규모로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여 3천에서 3만명 사이가 죽음. 성전 안까지 피가 흘렀고 무릎까지 피가 찼다는 과장된 기록이 남아 있음. . 베지에 학살 (1209) 알비 십자군 당시 프랑스 남부의 도시 베지에가 카타리파 주민들을 넘겨주라는 요구를 거부했고, 십자군이 베지에에 진입하자 대규모 살육과 약탈이 자행되어 2만명이 죽었다고 기록됨. 어떻게 이단을 가리냐는 질문에 특사가 "다 죽이면 하느님께서 가려 주신다"라는 주옥같은 명언을 남겼다고도 전해짐. 바그다드 함락 (1258) 훌라구 칸의 몽골군이 13일간의 공성전 끝에 아바스 왕조의 수도를 함락한 뒤 대규모 학살, 약탈을 자행하하여 칼리프도 처형되고 사망자 기록이 20만에서 최대 200만까지 다양함. 도시가 거의 폐허가 되고 지식의 보고였던 도서관 지혜의 집이 파괴된 사건은 이슬람 황금기 종말의 상징으로 여겨짐. 그 밖에도 메르브, 니샤푸르 등 저항한 수많은 도시가 본보기로 박살나고 학살됨. 제2차 진주성 함락 (1593) 임진왜란 당시 9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진주성이 무너졌고, 성안으로 밀려든 일본군은 부상자와 피란민을 포함한 조선인 6만여 명을 창고 등에 몰아넣고 불을 지르는 등 학살을 자행함. 마그데부르크 약탈 (1631) 30년 전쟁 당시 주로 용병이었던 신성로마제국군이 개신교 세력의 도시였던 마그데부르크를 함락한 후 약 2만~2만 5천 명의 주민이 학살당하거나 화재로 사망함. 당시 유럽에서 “마그데부르크의 공포”로 불리며 전쟁 잔혹성의 대표 사례가 됨. 양주대학살 (1645) 명청교체기 당시 청군의 거듭된 투항 권고를 거부하고 저항하던 양주성이 함락되자 다른 도시들에 본보기를 보여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병사들에게 약탈과 학살을 허용해 약 6~10일간 성내에서 무자비한 도륙, 방화, 강간이 자행되었고 80만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나 과장되었을것으로 보임. 난징대학살 (1937)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당시 중화민국 수도인 난징의 방어선이 붕괴된 뒤 많은 중국군 병사들이 퇴각하거나 군복을 버리고 도시 안에 남았는데, 일본군은 점령 이후 포로와 투항병을 대규모로 처형했고, 동시에 약 6주간 민간인에 대한 살해, 강간, 약탈, 방화가 광범위하게 자행되어 약 10만~30만 명대가 죽은 것으로 추정됨. 알파시르 학살 (2025) 수단 내전에서 북다르푸르주 주도 알파시르에서 반군인 신속지원군(RSF)이 2년간의 포위끝에 도시를 점령한 뒤 대규모 학살 및 인종청소를 자행했는데, 최종 공세가 시작된 뒤 첫 3일 동안 6,000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기록되었고 이 가운데 최소 약 4,400명은 시내에서, 1,600명 이상은 탈출로에서 살해되었다고 함. 위성사진에서도 시체더미가 찍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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