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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ind] 나는 할머니가 늙는동안 바빴다

나는 할머니가 늙는동안 바빴다. (블라블라) # 할머니가 늙었다. 당연한 말인데 이번 추석에는 그게 좀 이상했다. 내가 어릴 때도 할머니였으니까, 거기서 더 늙으실 거라는 생각을 잘 안 했던 것 같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고 사는 곳도 몇 번 바뀌었다. 근데 할머니는 그냥 계속 할머니였다. 적어도 내 머릿속에서는 그랬다. 이번에 집에 들어갔는데 현관에 신발이 몇 켤레 없었다. 우리가 일찍 온 줄 알았다. 아빠한테 다른 사람들은 언제 오냐고 물었다. 다 왔다고 했다. 여섯 명이었다. 예전에는 할머니 집에 들어가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문을 열면 신발이 걸렸다. 누구 운동화 위에 누구 구두가 올라가 있었고 내 신발을 벗으려면 먼저 다른 신발을 좀 밀어야 했다. 안에서는 얼굴도 보기 전에 내 이름을 불렀다. 왔냐고. 밥 먹었냐고. 키가 또 컸다고. 나는 인사만 대충 하고 작은방에 들어갔다. 거기 형들이 있었다. 일 년에 두 번 보는 사이인데 신기하게 어색하지 않았다. 가방 내려놓고 옆에 앉으면 바로 같이 놀 수 있었다. 게임 잘하는 형 하나가 계속 하고 나머지는 구경했다. 내 차례는 잘 안 왔는데 그래도 재밌었다. 어른들이 제사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그렇게 놀았다. 밥 먹으라는 소리가 나도 한 판만 더 하겠다고 했다. 밤에는 이불을 세로로 깔고 사람은 가로로 누웠다. 누구 발이 내 얼굴에 닿으면 밀지 말라고 하다가 또 웃었다. 큰방에서 안 자냐고 하면 다 같이 자는 척했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어른들이 다시 떠들었다. 그때는 사람들이 많은 게 당연했다. 명절이면 원래 다 오는 줄 알았다. 어디서 얼마나 걸려 오는지, 누구는 다음 날에도 일을 해야 하는지, 음식은 누가 언제부터 준비했는지. 그런 건 몰랐다. 그냥 날짜가 되면 다들 그 집에 있었다. 이번에는 큰아빠가 없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작은아빠네는 올해 사돈댁에 갔다고 했다. 고모는 무릎 수술을 해서 오래 차를 못 탄다고 했다. 형 하나는 해외에 있고 다른 형은 애가 아프다고 했다. 한 사람씩 들으면 다 이해되는 이유였다. 누가 크게 싸운 것도 아니고 이제 모이지 말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각자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됐다.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 집이 조용해졌다.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 계셨다. 내가 들어가니까 일어나려고 하셨다. 그냥 앉아 계시라고 하고 내가 가까이 갔다. 할머니가 내 팔을 만지면서 살이 빠졌냐고 하셨다. 안 빠졌다고 했다. 밥 잘 먹고 다닌다고. 나는 거의 그대로였다. 오히려 조금 쪘을 수도 있었다. 근데 내 팔을 잡은 할머니 손이 너무 가늘었다. 밥을 먹으려고 상을 폈다. 예전에는 큰 상 두 개를 붙여도 자리가 모자라서 우리는 작은방에서 따로 먹었다. 어른들 상에는 더 맛있는 게 있나 싶어서 자꾸 기웃거렸다. 이번에는 상 하나에 다 앉았다. 엄마가 반찬을 가져와도 누가 밥그릇을 옮길 필요가 없었다. 그냥 빈 곳에 놓으면 됐다. 할머니는 자꾸 더 먹으라고 하셨다. 나는 충분히 먹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까 할머니가 얼마나 드셨는지는 잘 못 봤다. 내 밥그릇이 비었는지는 할머니가 계속 보고 계셨는데. 밥을 먹고 앨범을 봤다. 어릴 때는 할머니 집에서 앨범 같은 걸 본 적이 없었다. 그걸 보고 있을 만큼 심심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사진 속 집은 지금이랑 똑같았다. 장롱도 같고 벽에 걸린 시계도 같았다. 사람들 때문에 바닥이 안 보이는 것만 달랐다. 나는 그 집이 원래 좁은 집인 줄 알았다. 사진 한쪽에 어떤 형이 내 목을 팔로 감고 있었다. 나도 그 형한테 붙어서 웃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엄마가 이름을 말해줬는데 기억이 안 났다. 누구네 아들이라고 했는데 그 누구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설명을 몇 번 듣고 나니까 아빠 사촌형의 아들이었다. 나랑 육촌이라고 했다. 그제야 조금 생각났다. 문방구 갈 때 나를 데리고 가던 형이었다. 나는 돈도 없으면서 그 형이 나가면 꼭 따라갔다. 오락기 앞에 서면 내 키가 작아서 의자를 가져다줬다. 그런 건 기억이 났다. 근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났다. 지금 어디 사는지, 결혼은 했는지, 마지막으로 언제 만났는지도 몰랐다. 어릴 때는 육촌이 뭔지도 몰랐다. 그냥 좋아하는 형이었다. 지금은 나랑 무슨 관계인지는 설명할 수 있는데 길에서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옆에서 사진을 보면서 한 명씩 얘기하셨다. 얘는 이때 감기에 걸려서 못 온다고 했다가 왔다고 했다. 얘 옷은 고모가 사준 거라고 했다. 나는 이날 마당에서 넘어졌다고 했다. 무릎이 까져서 약을 발라줬다고. 사진에는 무릎도 안 나와 있었다. 나는 같이 놀았던 사람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데 할머니는 내가 다친 것까지 기억하고 계셨다. 앨범을 더 넘기니까 젊은 여자 사진이 나왔다. 머리를 하고 치마를 입고 밖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라고 했다. 한 번에 못 알아봤다. 엄마가 그때 할머니 나이를 말해줬는데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다. 그 사진을 좀 오래 봤다. 할머니도 이런 때가 있었구나 싶었다. 당연히 있었을 텐데 제대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나처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걱정하고, 친구를 만나서 얘기하고, 새 옷을 입으면 사진도 찍고 싶었던 때가. 누구의 할머니도 아니고 누구의 엄마도 아니었던 때가. 나는 할머니가 나를 키워준 얘기는 안다. 내가 뭘 좋아했는지, 어릴 때 얼마나 말을 안 들었는지, 아팠을 때 누가 업고 병원에 갔는지. 근데 할머니가 어릴 때 무슨 일을 하고 싶었는지는 모른다. 제일 친했던 친구가 누구였는지도 모르고 어떤 날이 가장 좋았는지도 모른다.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여태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잘 지내시냐고만 했다. 약 잘 챙겨 드시라고. 아프지 마시라고. 할머니는 사진 속 자기 얼굴을 보면서 한참 웃으셨다. 나는 그때 할머니 표정을 보고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얘기가 아직 저렇게 많은 사람이었구나 싶어서. 사실 자주 못 내려왔다. 멀리 살기도 했고 일이 계속 있었다. 중요한 일정이 있었고, 쉴 수 있는 날을 맞춰야 했고, 며칠을 비우려면 돈도 계산해야 했다. 한 가지가 끝나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끝나고 나면 다른 게 생겼다. 이것만 마무리하면. 이번에 자리만 잡으면.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그때는 내려가서 오래 있다 와야지 생각했다. 그게 다 핑계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때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일들이었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모든 걸 내려놓고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 생활도 지켜야 했고 나한테 기대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할머니도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다. 너 바쁜 거 안다고. 힘들게 오지 말고 네 일부터 잘하라고. 여기는 괜찮다고. 그 말을 들으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번에는 안 가도 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할머니가 괜찮다고 할 때마다 나는 시간이 더 생긴 줄 알았다. 근데 이번에 보니까 아니었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데 시간이 걸렸고 같은 말을 조금 더 크게 해드려야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부엌이랑 거실을 계속 왔다 갔다 했는데 이제는 엄마가 대부분의 음식을 날랐다. 내가 다음에 온다고 했던 동안에도 이런 일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을 거다. 전화로는 몰랐다. 밥 잘 먹고 있다. 별일 없다. 너는 잘 지내냐. 그 얘기만 들으면 지난번이랑 똑같이 계신 줄 알았다. 오래 못 뵌 건 나중에 오래 같이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돈을 더 벌면 좋은 곳에 모시고 가고, 여유가 생기면 자주 찾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는 채워지는 건 줄 알았다. 근데 지금 오래 앉아 있다고 해서 그 때의 할머니를 만날 수는 없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잘 걷고, 조금 더 잘 듣고, 내가 오면 현관까지 나오던 할머니는 그때만 볼 수 있었다. 그걸 너무 늦게 생각했다. 오후가 되니까 갈 준비를 했다. 길 막히기 전에 출발해야 했다. 나도 일찍 가는 게 낫겠다고 했다. 하루 종일 이런 생각을 해놓고도 그랬다. 엄마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상을 접었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어릴 때는 형이랑 둘이 낑낑거리면서 옮기던 상이었다. 이번에는 혼자 들어서 벽에 세웠다. 할머니가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셨다. 엄마가 집에도 먹을 거 많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냥 가져가라고 하셨다. 나는 이거 다 못 먹는다고. 예전에도 늘 음식을 싸주셨다. 그때도 같은 말을 하셨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했어도 우리한테 더 주려고 그러시는 줄 알았을 거다. 이번에는 정말 다 못 드시겠구나 싶었다. 차에 타기 전에 할머니를 안았다. 어깨를 감싸고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옷 안쪽으로 등이 너무 작게 만져졌다. 할머니는 조심히 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든 비닐봉지를 보더니 똑바로 들라고 하셨다. 국물 샌다고. 나는 봉지를 고쳐 잡고 다음에 또 오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래, 하셨다. 언제냐고는 안 물으셨다. 차가 출발하고 엄마가 말했다. 할머니가 너 온다고 어제부터 저거 준비하셨다고. 그냥 냉장고에 있던 반찬을 꺼내주신 줄 알았다. 뒤를 봤는데 이미 집은 안 보였다. 그러고 나는 평소처럼 출근했다. 동료들이 연휴 잘 보냈냐고 해서 잘 쉬었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밥도 잘 먹었고 가족들도 봤고 별일 없이 다녀왔다. 휴대폰을 보다가 어제 찍은 사진을 다시 봤다. 상 앞에 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사진이 잘 나왔다. 누구 얼굴이 가려지지도 않았고 끝에 앉은 사람이 잘리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뒤에 앉은 사람한테 얼굴 좀 내밀라고 하고 애들한테 붙으라고 했다.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요일 오후에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더니 저녁 쯤에야 할머니가 답을 보내셨다. 다들 와서 좋았다. 그 문장을 몇 번 읽었다. 할머니는 예전 사진에 있는 사람들도 다 기억하고 계셨다. 누가 아팠는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까지. 이번에 누가 안 왔는지 모르실 리가 없었다. 나는 오랜만에 가서 사람이 줄었다고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그 집에서 계속 사셨다. 내가 이번에 한꺼번에 느낀 걸 몇 년 동안 조금씩 겪으셨을 거다. 그래도 다들 와서 좋았다고 하셨다. 나는 누가 없었는지만 세고 왔는데. 가끔은 그냥 예전 그대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지금처럼 살아도 되는데 할머니만 내가 어릴 때 모습으로 계셨으면 좋겠다. 내가 몇 살이 되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엌에서 나오셨으면 좋겠다. 얼굴 좀 보자고 두 손으로 붙잡으셨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가만히 있을 수 있는데. 형들이 불러도 조금 있다 간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안 되는 일인 건 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자주 뵈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근데 나는 아마 앞으로도 바쁠 거다. 해야 할 일이 있을 거고 돈이 필요할 거고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날도 있을 거다. 갑자기 모든 걸 깨닫고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게 좀 무섭다. 이렇게 마음이 안 좋다가도 며칠 지나면 다시 내 일부터 급해질까 봐. 이번에도 괜찮다는 말을 듣고 정말 괜찮은 줄 알까 봐. 어제 밤 늦게 할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무슨 일 있냐고 하셨다. 없다고 했다. 반찬 잘 먹겠다고. 맛있었다고. 할머니가 다음에 오면 또 해주겠다고 하셨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하라고. 나는 그냥 잠깐 듣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아직도 밥을 잘 못 챙겨 먹는 애인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는 모르셔도 내가 좋아하는 반찬은 다 알고 계셨다. 나는 그동안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뭘 해드릴지만 생각했다. 좋은 걸 사드리고 좋은 데 모시고 가고,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 모습으로 찾아가야 그동안 못 간 것도 조금 덜 미안할 것 같았다. 근데 할머니는 이번에도 내가 빈손으로 들어가자마자 일어나려고 하셨다.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데 얼굴부터 보려고 하셨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도 그랬다. 나는 돈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고 인사도 제대로 안 했다. 그냥 왔다는 이유로 좋아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잘되기를 바라셨지. 잘돼야 보고 싶어 하신 건 아니었는데. 나는 자꾸 잘되고 나서 뵈러 가려고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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