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형제자매 여러분, 풍요로운 이 계절에 우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가진 모든 것을 내어 준 수많은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올바른 삶의 자세입니다. 올바른 삶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여, 우리는 서로 이끌고 밀어주며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결국 하나로 귀결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가, 그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더라도 오직 한 가지만을 바라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만을 따르고 성사를 통해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신앙을 지키십시오. 교회를, 지키십시오. 서로 사랑하십시오." 바람이 서늘해지는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강론을 진행하던 인노첸시오가 잠시 교회를, 에서 반 박자의 시간을 둔 것에 주목한 이는 없었다. 미사가 끝나고 제대 앞에서 물러나던 그가 베드로좌를 잠시 쳐다본 것에도 사람들은 굳이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다만 산 마르코 성당에서 생중계로 그 장면을 보던 베네치아 총대주교만은 송출된 강론 말미에서 미묘한 느낌을 잡아내었다. 오래 전 주님의 품으로 떠난 이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그는 미사가 끝나고 화면이 꺼진 뒤에도 한참동안 빈 벽에 걸린 낡은 사진을 올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협탁 위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날 밤, 추기경단장 로렌스는 퇴근 시간까지 정신없이 업무에 열중하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사도궁을 찾아갔다. 낮에 걸려 온 전화가 영 신경이 쓰였던 탓이다. -진실로 성하께서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그 무엇이 스쳐 지나가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실 것이요, 그 분께서 세우신 교회도 굳건해야 합니다. 데까노, 난 성하의 이런 점이 참으로 맘에 들어요. 벼랑 끝으로 폭주하는 기차같으실 때도 많습니다만, 근본은 확실하시잖소. 어쨌든 그 분의 의도만은 정말 순수하시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요. "예에, 고프레도.. 압니다. 세상의 빠른 변화 속에서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려면 기본이 확실해야겠지요.." -거룩한 교회를 뒤흔들어 멋대로 분열시키는 자들, 신앙을 호도하여 형형색색의 온갖 이념으로 덧칠해버리려는 저 저, 세속적 이상주의자들에 맞서려면 아무렴요! 우리가 이 나이에도 곁에 남아 충언을 올리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성하께서 가실 길을 밝혀 드리는 것이 내게는 정말 큰 기쁨입니다.. 낮의 강론에 대해 평소처럼 빠르고 열정적인 어조로 의견을 늘어놓던 것을 예, 예 하고 받아주는 동안 로렌스의 빈 위장은 쓰려왔고 머리엔 두통이 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뭘까. 혹시 그냥 수다 떨고 싶었던 건가.. 인노첸시오가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의 교황임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총대주교와 잘 지내다 보니, 그가 기존 전통주의적 친구들에게는 쉬이 털어놓지 않는 생각을 떠들기 위해 중도파인 자신을 찾는 일이 늘어났다. 이 통화도 그런 맥락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혹시 행간에 숨어 있을 어떠한 함의를 찾기 위해 쉬이 물리칠 수도 없다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관리자의 운명이란! -그런데 데까노, 요즘 성하께선 강녕하시오? 그러다 슬쩍 던져진 말은 난데없었다. 로렌스는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던 정신을 바짝 당겨 잡았다. 오늘 생방송된 미사에서 혹시 내가 보지 못한 사이에 어떤 실수가 있었나? 전례 문제였을까? 헛손질이라도 하셨나? 테데스코가 성하를 알현한 지 몇 달이 되었더라.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혹시 그가 심어둔 이들이 무언가를 전한 것일까? 그는 머릿속에 경고등을 밝게 켠 채 너무 늦지 않게 대응을 시작했다. "여전히 업무가 많으시지만, 어느 시대든 그러지 않았습니까. 교황청의 모두가 성하를 보필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지요. 고프레도, 당신이 먼 곳에서도 성하를 이리 걱정하는 줄 미처 몰랐군요." 조심스레 뭉뚱그린 답변을 들은 총대주교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그러나 휴식 시간은 충분히 즐기시는지, 밤엔 편히 주무시는지, 식사는 거르지 않으시는지.. 뭐 그런 게 다 소소하지만 중요한 것 아니겠소. 우리 모두 성하께서 오래토록 건재하시길 바라니 말이오. 그런 것치고 여전히 총대주교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의 펜 끝은 상당히 날카로워 보이지만.. 로렌스는 말을 아꼈다. 선대에 비하면 많이 정제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이어진 긴 통화를 겨우 끝낸 로렌스는 밀린 업무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예전 사진을 찾아보았다. 인노첸시오 성하의 즉위 초와 지금을 함께 띄워 놓고 비교해 보니, 예전 사진이 더욱 혈기왕성해 보이긴 했다. 그야 세월도 삼 년이나 흘렀고, 교황과 선교사의 업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직에 적응하시면서 그 천진한 미소와 활기찬 몸동작은 위엄과 우아함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노첸시오의 고난을 생각하며 침묵했다. 휴식 시간은 어찌 보내시는지 묻던 총대주교의 말이 쉬이 넘어가지지 않았다. 재위 3년차, 바티칸의 복잡한 전례와 쉴새없이 돌아가는 행정에 충분히 익숙해지신 교황께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짬짬이 생기는 여유를 거의 즐기지 못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대외적으로야 변화는 크지 않았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정도는 날마다 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사건사고들이나 가끔 크게 터지는 각국 정치인과 거대 기업가들의 비상식적일 정도로 부도덕한 언행들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여길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인내심이 강한 그의 교황께서는 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여전히 피어나는 백합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웃음을 달고 계셨으며, 튼튼한 팔다리로 교회과 온 세상으로 거침없이 달려나가셨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진 자들의 심기는 불편해지고 갖지 못한 자들에게는 희망이 되는 말씀을 서슴없이 하셨다. 그 분께서 갈색 눈망울을 반짝이며 적절한 재치를 내 보이는 순간들은 짧게 편집되어 신자가 아닌 이들 사이에도 널리 퍼지곤 했다. 그러나 측근들이 보기에 요즘의 성하께서는 어딘가 전대 성하를 닮아가는 것 같았다. 인생의 말년에 다다른 노인같은 구석이 있다는 얘기였다. 아직 풍성한 머리가 검게 반짝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일을 끝내두지 않으면 안 될 것마냥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모습이 그러했다. 몸이 서너 개는 되는 것처럼 이것저것 일거리를 끌어당기시는 것은 물론,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라곤 짧은 기도의 순간 뿐이라 요즘은 정원 산책도 거의 주치의가 끌고 나가야 하실 뿐이었다. 그래도 거북이 연못에는 꾸준히 가시는 것이 다행일까. 가까운 이들에게 던지는 농담은 산처럼 쌓인 서류더미 넘어에서 날아왔고, 오후의 티타임은 업무 보고 시간으로 변질되기 일쑤였다. 보다 못한 이들이 억지로 집무실에서 침실로 모셔다 드려도 밤늦게까지 패드와 휴대폰으로 일을 보시는 일이 잦았다. 바티칸에서는 이제 아침 일찍 출근해서 업무용 프로그램을 켜 보면, 정규 출근시간에 맞추어 여러 건의 결재완료 알림이 동시에 울리는 것을 목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분께서는 그 모든 일을 당장 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계셨다. 이에 관해 걱정스러운 말씀을 올린 적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 때마다 돌아오는 답변은 비슷했다. '바그다드와 카불에서는 이보다 더 바쁜 날도 많았는걸요. 할 수 있을 때 해 둬야지요.' 기준점이 하필 분쟁지역에 있다 보니,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바티칸의 높으신 분들은 더 말을 얹을 수 없었다. 이럴 때 마리안 수녀라도 곁에 있었다면 서슴없이 반박하였을 텐데.. 그녀가 떠난 빈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무엇이 당신을 그리도 재촉합니까? 로렌스는 거뭇한 눈가를 화장으로 가린 것을 알아챌 때마다, 보즈니아크 대주교가 아침부터 유달리 안절부절하며 인노첸시오에게 가까이 붙어 있을 때마다 가슴이 조여왔다. 과거의 시련들일까? 아니면 현실 교회의 짙은 그림자일까? 그는 더없이 순수한 저 사람이 과거나 현실에 짓눌려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베드로 광장의 불마저 꺼진 밤, 아직 침실에 들지 않았다는 이를 찾아 나선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인노첸시오는 모든 관람객들이 빠져나간 빈 성전에 홀로 돌아와 다시금 초대 교황이 앉았다던 성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뒷편 상단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글귀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O PASTOR ECCLESIAE TU OMNES CHRISTI PASCIS AGNOS ET OVES, 교회의 목자여, 모든 양떼를 목장으로 인도하여라." 로렌스는 여전히 울림이 좋은 바리톤의 목소리로 그것을 읽어내었다. 뚜벅, 뚜벅,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인노첸시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벽에 새겨진 글귀만을 바라보던 그는 반 걸음 뒤에 로렌스가 다가와 서자 고요히 말했다. "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 .. 사도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지요." "그리고 당신께서는 베드로의 후계이십니다." 그 때 인노첸시오는 고개를 돌려 가까이 다가온 로렌스를 바라보았다. 갈색과 푸른색의 눈이 허공에서 만났다. 로렌스는 그의 눈빛이 베드로좌 위에 날개를 펼친 성령의 형상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대리석을 얇게 깎아 만든 그것은 맑으면서도 단단하였다. "아직 침소에 들지 않으셨다 하여 와 보았습니다. 제가 묵상에 방해가 되진 않았는지요." 조심스러운 눈길을 마주한 인노첸시오는 낮보다 편한 기색으로 방긋 웃었다. 작은 데이지 꽃이 피어나듯 사랑스러웠다. "방해는요. 저야말로 단장의 퇴근시간을 늦춰 버려 죄송한걸요." "오, 저는 퇴근했습니다. 지금은 자유 시간이랍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산책도 좀 하고, 소중한 분(My dear)도 만나는 호사를 누리는 중이지요." "그럼, 제 앞에 계신 분은 단장님이 아니라 토마스겠군요. 저는 빈센트고요." 그가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것을 본 로렌스는 가벼운 화두를 던지며 분위기를 따뜻하게 이끌었다. 노련하게 업무가 연상될 만한 것은 피하고, 너무 뻔하지도 않은 그런 이야기들을 골라 내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대성전 안의 고요한 공기가 떨리며 작은 웃음이 퍼질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로렌스는 빈센트가 계속 무엇을 말 할 듯 말 듯 머뭇거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엇을 그리 고민하십니까? 제게 말씀하십시오. 당신의 말씀은 온점 하나까지도 소중하니까요." "토마스..." 어떤 고민이기에 이리 뜸을 들이실까, 궁금해하며 얼굴을 더욱 가까이 하자 빈센트가 그의 목덜미 즈음에다가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오늘 저의 강론을 들으셨지요." "예, 참으로 적절하고 아름다운 말씀이었습니다." "... 당신께 특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속삭여진 말은 산들바람처럼 가벼이 날아와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 제게 말씀입니까? 되묻기 위해 로렌스는 입술을 떼었으나, 당장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낮의 강론과 테데스코의 전화가 동시에 재생되었다. -성하께선 요즘 강녕하시오? "토마스, 사랑하는 형제여." 빈센트가 고요히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텅 빈 성전 벽에 고요히 스며드는 것 같았고, 로렌스는 생각을 멈추었다. 어쩐지 주변에 너무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앞으로 돌리면 네 명의 교부들이 베드로의 성좌를 떠받치고 있었고, 그 위에는 비둘기의 모양을 한 성령이 있었다. 머리 위, 돔의 네 모서리에는 복음사가들의 모습이, 그 아래 벽감 안에는 성유물과 성상들이 그들을 향해 있었다. 육신은 죽었으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이들이 침묵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7) 벽에 새겨진 저 말씀을 하시기 직전,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을 물으셨다. 베드로는 세 번을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처음 두 번에 걸쳐 물으신 것은 αγαπώ, 아가페적 사랑이었고, 베드로가 답한 것은 φιλέω, 우정에 가까운 사랑이었다. 낮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이제 제 앞에 떨어진 물음은 아가페인가, 필레오인가? 아니면... 로렌스는 건조한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여 대답하였다. "... 예,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아십니다.(요한 21:15~17) 그에 질문을 던진 이는 눈매를 한껏 휘며 꽃이 피는 듯 웃었다. 아, My dear, dearest, Vincent. 인노첸시오, 존경하고 사랑하는 자신의 교황. 베드로좌 앞에서 마음을 고하니 그는 여지없이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히 미소지었다. 로렌스의 가슴 속엔 작은 바람이 일고 입술은 더욱 말라왔다. "My dear Thomas." 오래 된 성전의 벽을 타고 온 목소리는 끝까지 부드럽게 속삭였다. "신앙을, 교회를, 지켜 주십시오. 나와 당신을 위해." 제 말을 받아들이려고 떨리는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빈센트는 속으로 한숨을 지었다. 아, 토마스. 충성스런 이여. 자신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미심쩍은 변방의 인펙토레를 기꺼이 형제로 받아들이고, 그 무엇보다 파괴적인 비밀마저 침묵으로써 지켜준 이. 확신 사이의 틈을 볼 줄 아는 이. 흔들림 속에서도 길을 따라 걸으려는 이. 낯선 바티칸 언덕 위에서, 자신을 위해 밝혀진 등불같은 이.. 당신의 사랑이 무엇이든 나는 상관없노라, 생각하며 빈센트는 로렌스를 제 곁에 두신 주님께 감사드렸다. 더불어 지난 모든 삶에서 그와 같은 이들을 보내주심에 감사드렸다. 돌이켜보면 아무리 험난하고 외로운 길일지언정,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바깥에서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낯설고 이질적인 자신을 받아들여 준 모든 이들을 떠올렸다. 그 모든 이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피난 생활, 발흐를 떠나 산맥 아래를 떠도는 한 무리의 실향민들이란 참으로 쉬운 표적이었다. 그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종종 마주치는 다른 떠돌이들도 비슷한 피해를 호소했다. 가진 것이 없어 보여도 뭐든 뜯어내려는 도적들은 심심찮게 달라붙었고 각종 규격의 화기와 납탄들은 사방에 널려 있어 사람의 목숨을 희롱했다. 화기들. 너무나 흔한 그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수염도 나지 않은 소년이 양을 치러 나가면서도 소총을 집어드는 곳이었다. 가난한 젊은이들은 탄피를 갈아 연인의 손을 꾸며주곤 했다. 그런 곳에서 비무장 상태로 떠도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는 일이었다. 차라리 혼자라면 모를까,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지켜야 할 무리가 서른 명도 넘었기 때문에 등에 빈 총을 짊어지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콩고와 이라크에서 수없이 보았던 피의 강, 사람을 집어삼키는 절망의 구렁텅이들, 다시는 그런 상실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위협들은 길다란 총신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순순히 물러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더욱 유혹적이었다. 신부님 것도 구해다 드릴까요, 어느 날 이스하크가 빈센트의 빈 어깨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막 두 정의 빈 권총을 허리춤에 꽂은 참이었다. 그리고 그가 여전히 비슷한 것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빈센트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낯설거나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화약 냄새를 풍기는 도구들은 어린 시절 고향 길거리에서부터 평생토록 흔히 보아 온 것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느껴지는 죽음의 낌새엔 이골이 나 있었다. 단지 그 주체가 된다는 개념이 거북했을 뿐이었다. 성직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그는 손쉬운 죽음의 도구들에 특히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것은 거리의 문제였다. 칼은 그것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붙어야 비로소 상대를 해칠 수 있다. 그러므로 칼을 쓰는 사람은 상대방의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살을 가르는 감촉을 손바닥으로 느낄 수 있다. 제가 낸 피를 뒤집어 쓰며 죄악의 무게를 짊어진다. 그러나 총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도 목숨을 앗아간다. 느껴지는 것이라곤 차가운 무생물의 반동과 귀를 찢는 소리 따위이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상대방은 사람이라기보다 인형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어 버리고 죄악감은 희미해진다. 목숨의 무게가 덜어진다. 그 거리감이 괴로웠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 게임을 하듯, 좌표값만으로 미사일을 날리고 드론으로 폭탄을 실어나르는 지금의 전쟁은 더 심하다. 내가 누구를 죽이는지, 누가 나를 죽이는지 알 수 없게 하여 죄책감은 생기기도 전에 사라지고 목숨은 효율이라는 미명 아래 더욱 쉽게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빈센트는 화기를 멀리했다. 오로지 파괴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어느 도시에서의 일로, 결국은 그들도 결정의 기로에 서 버렸다. 소도시에서 추위 피할 곳을 알려 준다더니 돌연 자그만 여자아이의 팔을 낚아채고서 숙박료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던 자들이 있었다. 더욱 어이가 없던 것은 그들 또한 이 도시 저 도시를 전전하는 떠돌이들이었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도시의 흔한 사기꾼들이었다면 그렇게까지 화가 치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병상련의 처지이면서도 기어코 타인을 착취해 욕심과 욕망을 채우겠다는 심보에 그의 분노는 더욱 크게 타올랐다. 오래 전, 콩고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보호소에서 출산한 여인을 내놓으라며 며칠째 깽판을 치던 남자가 있었다. 아내가 도망간 원인을 일면식도 없던 빈센트에게 돌리며 외국인 신부가 유부녀를 꾀어냈다느니 하는 중상모략을 퍼붓다가 어느날은 기어코 총을 들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가 향한 곳은 하와의 집이 아닌 그 옆의 수녀원이었다. 신부가 제 아내를 훔쳐갔으니 자기도 예수의 아내를 취하겠다며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수녀 하나를 잡아끌고 나오던 그에게 빈센트는 맨 몸으로 달려들었다. 한창 젊었던 터라 혈기를 앞세워 막무가내로 힘겨루기를 한 끝에 총부터 뺏었지만, 그땐 냅다 후려치는 데에나 써먹었더랬다. 길고 튼튼한 총신은 훌륭하게 남자의 의식을 날려버렸다. 그런 기억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자아이를 잡아끄는 사내들을 보자 다시 되살아났다. 상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서 하나의 차갑고 둥근 구멍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긁힌 자국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구멍을 들여다보니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흰 문짝과, 가슴팍에 눌리던 묵직함 같은 것들이 차례로 떠올라 온 몸의 털이 삐쭉 서는 기분이었다. 그는 가까이 들이밀어진 총구를 충동적으로 덥석 잡았다. 차가운 금속 관은 단단하고 묵직하여 현실감을 되살렸다. 뒤에서 교우들이 숨을 들이키며 주춤 물러서는 것이 느껴졌다. 아, 지금 이 곳은 니아마타가 아니다. 바그다드도 아니다. 그는 눈 앞의 사내를 똑바로 쏘아 보며 말했다. "치우세요. 당장." "하, 손은 덜덜 떨면서 어줍잖은.." -탕! 탕! 갑작스런 총성은 그의 뒤에서부터 나왔다. 망설임 없이 허리춤의 권총을 뽑은 이스하크가 순식간에 두 사람을 맞추었고, 그것으로 상대측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빈센트는 등에 솟은 소름을 무시하고 달려들어 겨누어진 총구들을 하늘 높이 쳐 넘겨버리고서 발을 동동 구르는 어머니에게 딸을 돌려주었다. 대신 날아온 칼날에 뺨과 어깨 따위를 내어 주어야 했지만, 화기를 다시 들이밀 겨를도 없이 오가는 주먹들이 상황을 해결했다. 본전도 찾지 못한 쓰레기들은 저 멀리 달아났고, 소란을 들은 탈레반 치안대가 달려오기 전에 그들 역시 부랴부랴 도시를 떠나야 했다. 도망치는 동안 빈센트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보며 걷는 이스하크를 바라보았으나,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탄창은 비어있다지 않았나요, 따지는 것이 이제 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언제부터, 아니 얼마나, 지금은, 하는 것을 물어야 할까.. 삶을 통틀어, 보라색 영대 앞에서 무릎 꿇고 흐느끼던 군인들에게 무어라 했던가. 군복을 입은 채 영성체를 원하던 이들 앞에서 죄를 먼저 물었던가, 용서를 먼저 말했던가.. 방위를 위하여, 혹은 약자들을 위하여,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하여라는 문구를 앞에 두고 나는.. 다를 바가 무엇인가. 다만 아이와 부모가 그를 붙잡고 고마워하는 것을 보며 마음을 정했다.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들은 손쉬운 폭력의 유혹 앞에 지금처럼 버티다 무너지느니 차라리 도망치기로 하였다. 사람의 흔적을 피해 깊이 깊이 들어가다 보니 어느 순간 무선 통신이 터지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의 자연물 뿐인 사이에서, 길이 아닌 곳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마주친 산짐승과 나무 열매와 계곡물 같은 것들이 배를 채워 주었다. 광야의 아침에 빛나는 만나가 따로 없었다. 초목이 각기 제 결실을 맺는 계절이었고, 그들은 할랄 같은 것을 신경쓸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섭취했다. 다만 빈센트는 짐승은 잡기만 하고 나눌 때는 어김없이 제 몫을 무릎 위 아이들의 입 속에 밀어넣었는데, 먹을 것은 늘 귀했기 때문에 몇몇 어른들이 아이들을 향해 핀잔을 주는 것만 넘기면 대체로 그의 뜻대로 되었다. 깊은 산맥 틈에서 동서남북만 알고 물길을 따라 헤매이던 그들은 아주 우연히 버려진 마을을 발견했다. 높은 봉우리 사이에 작은 물줄기가 흘렀고, 약간의 평지와 비탈에 옹기종기 모인 작은 집들이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치는 인공물이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보니 밭에는 수확 시기를 놓친 작물들이 스러져가고 있었고 인기척은 없었다. 빈센트는 건장한 형제들 몇 명만 데리고서 조심스레 마을을 돌아보았다. 산새의 지저귐만 울리는 동네 곳곳에는 지나간 약탈의 흔적이 역력하여, 부서진 벽과 문짝에 남은 총칼의 흔적은 물론이고 뒤집어진 가재도구와 숨이 끊어진 지 오래된 시신들이 마을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대부분 노인들이었고, 끌려다니거나 부상당한 흔적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지 쉬이 짐작가는 꼴이었기에 날짐승과 산짐승과 벌레들이 먼저 파헤친 시신을 마주한 그들은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 성호를 그었다. 그렇게 모든 집의 문을 열어보아 정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나머지 일행들도 옥수수밭 앞에 모일 수 있었다. "비워진 지 한참 된 것 같습니다. 적당한 집을 골라 하룻밤 쉬어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아요, 오늘은 별을 보며 잠들진 않겠네요." "그런데 혹시 사람들이 돌아오면 어쩌죠? 싸움이라도 붙으면.." "그건 그 때 돼서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개중에 좀 멀쩡한 집을 대강 치우고 밤을 보냈다. 고산 지대의 해는 더 빨리 떨어졌고 추위를 막을 것이라곤 겹쳐 입은 옷가지와 얇은 담요밖에 없었으나, 사방에 벽이 세워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날 밤보다 훨씬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아침이 되어 떠오르는 태양 아래서 미사를 올린 이들은 다시 동네를 돌아다니며 혹시 식량이나 초 같은 것들이 남아 있는지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광은 약탈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고, 깨진 항아리 몇 개가 겨우 굴러다니고 있었다. 돌아보는 김에 여기저기 방치된 시신들도 대강 수습해 마을 뒤편에다 모아 매장하였다. 잘못 만지면 살이 흩어질 지경이었기에 아주 조심해야 했다. 이름도 모르는 시신들이었지만 그들은 나름의 위로를 담아 저녁에 그 앞에서 다시 제대를 꾸미고 위령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렇게 하룻밤이 또 지났다. 아무도 없는 마을에서 그들은 며칠을 더 머물렀다. 오랜 도피 생활에 지쳐 안락한 벽 틈을 벗어나기 어려웠던 탓이다. 버려진 밭에는 아직 먹을만한 작물들도 조금 남아 있었다. 집집마다 돌며 아직 멀쩡한 가재도구나 옷가지 같은 것들을 모아다 고쳐 쓰기도 했다. 운 좋게 털리지 않은 어느 지하 토굴에서는 가을이 오자마자 수확했음직한 감자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미 파종하기엔 늦었지만, 먹기엔 충분해 보였다. 작은 모스크의 창고에선 항아리에 담긴 종자씨도 찾아내었다. 물길을 따라 올라가본 이들이 서너 쌍의 산양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람을 피하지 않는 것이 야생 무리는 아닌 듯 하였다. 빈센트가 먹을 것을 들고 살살 달래어 마을로 데려오자 순순히 울타리가 부서진 헛간으로 찾아 들어갔다. 제 집인 양 하였다. 빈센트는 그런 것들을 지켜보며 고민하다가, 교우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구했다. 토의 끝에 그들은 몇몇 집을 더 수리하기로 하였다. 찾아낸 종자들 가운데서 겨울 밀과 보리, 시금치 따위를 알아보고, 더 늦기 전에 밭을 갈아 심기로 하였다. 산양을 키워 젖을 얻어내기로 하였다. 겨우내 잘 키우면 요긴할 것이었다. 빈센트와 교우들은 조금씩 낯선 마을에 스며들었다. 어영부영 겨울을 그 곳에서 났다. "신부님, 신부님!! 빈센트 신부님!" 그들이 찾아온 것은 땅이 막 녹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 콘클라베 난 베니테스텀을 좋아하는데... 근데 애들 연애시킬 기력이 없음 어흐흑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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