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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그레이스로 망한 사랑 보고 싶다 + 외전

식스그레이스로 망한 사랑 보고 싶다 1 그냥 보고 싶어서 쓴 식스 외전 난민캠프에 겨울이 다가오자 수많은 이들이 얼어 죽었다. 못먹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거나 매한가지였지만 얼어 죽는 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저체온증에 의한 사망이지만 몸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는걸 보면 얼어죽는거나 마찬가지다. 저체온증에 걸리면 사람의 뇌는 반대쪽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의료진을 따라 저체온증에 죽은 모녀를 수습했을 때, 그들은 온 몸의 옷이란 옷은 다 벗고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실 한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것만 빼면, 여느 엄마와 딸처럼 가난하지만 다정한 모습이었다. “이 사람들은 분명 덥다고 생각했을거에요.” 남자는 어미로부터 딸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이미 사후강박이 진행된 터라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힘을 써 시체의 뼈를 부러뜨리고나서야 떼어놓을 수 있었다. 아이는 어린이용에, 어른은 어른용 시체백에 담았다. 특수제작된 시체백 안에서 그들의 몸은 한없이 딱딱하게 건조될 것이다. 그리고 1년쯤 지나면 다른 이들이 그들처럼 죽지 않기 위해 불태워질 것이다. 장작들이 만들어질 때까지는 은박담요와 숯덩어리, 빌빌 말라 비틀어진 가축의 분변으로 견딜 수 밖에 없었다. 시체를 안치소에 옮기며 남자는 그레이스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감옥에서 결박당한 채로 화면 너머로 보았던 그레이스는 주홍색 시체백에 담겨 우주선에 실렸다. 그 때 스트라트는 무어라고 말했던가. 수차례 자살에 실패하고 결국 온 몸이 묶인채 연인이 죽으러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볼 수 밖에 없었던 그 때. 우리는 지옥에서 살아가야 해요. 이대로 도망치는 건 그에게도 못할 짓이에요. 이미 못할 짓은 충분히 했다. 도망치다 잡혀 살려달라고 소리쳤던 연인에게 안정제를 주사했을 때부터, 남자는 자기자신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짐승보다도 못한 자였다. 악마조차도 그를 비겁하다고 욕할 것이었다. 클레어를,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대의 따위로도 그를 변호할 수 없었다. 그는 천하의 개새끼였다.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 연인의 의식이 사라지자마자 칼의 품에서 권총을 빼앗아 제 목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철컹거리는 소리만이 울리자 옆의 경호원들이 그를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러자 그는 연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연인은 평온하게 잠들어있지 않았다. 연인의 얼굴은 두려움과 슬픔에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게 코틀랜드 젠트리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연인의 모습이었다. 난민캠프에서 남자는 시체를 옮겼고 가끔씩 들어오는 구호품을 날랐고, 바람으로 망가진 텐트를 수리했다. 오늘도 그는 모녀의 시체를 수습하여 건조장으로 옮겼다. 태양은 점점 더 어두워져가고 있었고 기온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세상은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사람들은 헤일메리호에서 전해올 소식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남자는 오늘의 일과를 마치고 텐트 속 침대에 누웠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는데 눕자마자 몸이 미친듯이 떨려왔다. 온 몸에서 열기가 올라와 마치 불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다. 행여나 의료진이 말했던 저체온증이 아닐까 했지만 온도계는 그의 몸이 한없이 뜨겁게 달궈져 있다는걸 알려주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해열제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헤아렸다. 난민캠프에서는 언제나 의약품이 부족했다. 자신이 쓸 양으로 아이 두 명을 살릴 수 있다. 이 얼마나 훌륭한 계산인가. 연인에게 주사를 꽂았을 때도 그런 계산을 했었다. 그의 목숨 하나로 얼마나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지를 셈했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도 똑같이 계산해야 했다. 만약 시체가 된다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지. * 시에라 식스는 대니 카마이클의 실각과 동시에 조건부 사면을 받았다. 계속 미국 내에 거주하고 CIA의 감시를 받는 조건으로 그는 자유인으로 돌아갔다. 그는 살려주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죽이기에는 피해가 너무나도 막심했다. 유럽에서 그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나라가 엉망이 되었던가. 회사에서는 그 일을 수습하느라 아직도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니 죽이는 것보다는 감시하는게 더 싸게 먹힌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그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가끔 회사에서 업무를 하달하긴 했지만 전의 일에 비하자면 나름 대우와 보수도 괜찮았고,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클레어를 지키면서 살 수 있음에 만족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그해 가을에 크게 앓았다. 몸에 총알을 맞아도 소독약 하나로 끝내던 인간이 열에 무너졌다. 40도를 넘나드는 고열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손가락 관절 하나를 움직이려고 해도 극심한 통증이 그를 덮쳤다. 그만큼 사선을 넘나들었음에도 느끼지 않았던 죽음이 바로 눈 앞까지 다가왔다. 다행히 열은 해열제를 투약받자마자 급격히 내려갔다. 미란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클레어는 또 다른 삼촌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는 몽롱한 정신머리로 침대 옆에서 울고 있던 대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열병이 주기적으로 온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그런 난리를 두번이나 더 겪은 뒤였다. 의료기록을 살피다 열로 병원에 실려간게 정확히 어떤 날짜를 앞두고였다는 걸 깨달았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 날짜에 식스는 쓴물을 삼켰다. 왜 하필, 분명 자신은 지금 행복한데 왜.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열병은 헤일메리 프로젝트를 위해 탑승했던 항공모함에서도 그를 덮쳤다. 그나마 나은 점이 있다면, 이제 그는 그 혼돈이 언제 자신을 찾아올지 대충 예상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일주일 전에 칼을 찾아가 몸상태가 안좋으니 이주동안 휴가를 받고 싶다고 요청했다. 너무나도 구체적인 날짜에 칼은 어떻게 알고 있냐고 되물었다. 식스는 그저 1년에 한번씩 오는 열감기라고 대충 설명했다. 그리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열이 시작되자 그는 의무실에 자리를 잡았다. 선실에 혼자 있다가 변사체로 발견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의무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동료들이 그를 찾아왔다. 평상시에는 절대로 보지 못할 환자복 차림에 껄껄 웃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깨를 두드리며 간식을 던져준 사람들도 있었다. 칼은 출장가서 사왔다며 그에게 버블리셔스 풍선껌을 주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동료들의 호의는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동료애, 분명 이 배에 오르기 전까지는 전혀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었다. 그리고 걱정어린 눈길로 찾아온 사람이 한명 더 있었다. 그는 하얀 가운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와서는 안절부절해가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식스씨, 혹시 더 아픈데는 없어요?” 그레이스 박사의 목소리는 걱정에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평상시에도 자신을 향해 웃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내뱉던 그가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는 모습에 식스는 속이 쓰려왔다. 무어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열에 달뜬 몸은 입을 여는 것도 힘들어했다. “...괜찮습니다.” 그레이스는 식스의 이마에 어린 식은 땀을 정성스레 닦았다. 미지근한 손이 이마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위험신호를 보내며 빠르게 뛰었다. 열 때문에 얼굴이 붉어져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같이 온 몸이 바닥으로 처진 상태에서라면 이 남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으니까. “아직 열이 있잖아요. 혹시 먹고 싶은거 있어요? 취사병들에게 말해서 특식을 만들어달라고 할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저런 제안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그럴 수 없노라며, 혹시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느냐고 물었다. 불현듯 머릿속에서 어렸을 적 감기에 걸릴 때마다 먹었던 치킨 수프가 떠올랐다. 아마 평소였다면 그런 추억은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몸살에 시달리고 있는데다 눈앞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둘 중에 하나라도 없었다면 결코 입을 열지 않았을 터였다. “...치킨 수프가… 아니요, 괜찮아요. 박사님 .”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미 그레이스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며칠 뒤 환자식으로 중국식 닭죽이 상에 올랐다. 쌀알은 뭉그러져있고 미국에서라면 절대로 쓰지 않았을 향신료가 가득했다. 환자식이라 간은 싱거웠다. 하지만 정성을 가득 쏟았는지 죽 자체는 상당히 맛있었다. 그 죽은 식스가 그 해의 열병에서 마지막으로 먹은 환자식이 되었다. 퇴원하고 다시 업무에 복귀하자마자 그는 함내식당에서 그레이스를 찾았다. 건강해진 자신을 보고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에 식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몸은 괜찮아요? 이제 일해도 되는거에요?” “네, 덕분에요. 닭죽 정말로 맛있었습니다.” 그레이스는 부끄러웠는지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그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입가에 보조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에 식스의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레이스가 저런 표정과 행동을 할 때마다 식스는 그가 너무 귀여워서 얼굴 근육에 힘을 줘야 했다. “ 다행이다. 입맛에 맞았군요.” “네.” 식스는 그레이스의 맞은 편에 앉아 그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다행이라고, 다음에도 아플때는 꼭 얘기해달라고 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입가가 올라가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처음에는 그저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는 사이였다. 다른 과학자들이 말하길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해괴한 이론을 주장하다 학계에서 퇴출당했다. 유엔 회의에서 권위자에게 입에 담기도 힘든 막말을 했다고 했다. 능력은 출중하지만 성격은 개판이기에 일할 때 빼고는 언제나 혼자였다. 식스는 그 해괴한 이론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배척당하기에는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같이 밥을 먹었다. 그러다 그의 재밌는 과학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렸고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레이스는 상대방이 반응을 보이면 목소리를 높이며 수다를 떨곤 했다. 그럼 식스는 그 모습이 좋아서 더욱 말을 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식사시간마다 그레이스를 기다리는 자신이 있었다. 어떤 날은 같이 술을 마시자고 권한 적도 있었다. 맥주와 감자튀김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감정이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조금만 더, 이 시간이 영원하기를. 시에라 식스가 되고나서 잊고 지냈던, 타인을 향한 갈망이었다. * 함내에서 두번째로 열에 시달렸을 때는 이미 그레이스와 마음을 확인한 뒤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로서는 전혀 기대도 예상도 못했을 기적이었다. 처음에는 단 둘이 있는 순간이 꿈만 같았다. 그를 품에 안고 이야기를 나누고, 복슬거리는 밀빛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을 수 있다는게. 그리고 그때마다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는게.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황홀했기에 만약 꿈이라면 이대로 깨지 않기를 바랐다. 연인을 안고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다. 헤일메리호에 탑승할 승무원을 선발하는 일에 그레이스가 바빠졌을 무렵이었다. 식스는 달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일주일이면 또 그 날이 온다. 칼에게는 미리 보고하여 병가를 얻어냈다. 그는 연례행사라는 말에 그런 날이 있다며 가볍게 넘어갔다. 동료들은 시에라 식스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있기에 그의 말을 믿었다. 모두들 유난히 몸이 쳐지고 힘들어지는 날이 있었다. 사랑하는 동료가 게릴라가 설치한 폭탄에 비명횡사했거나 어쩔 수 없이 소년병을 죽였던 날들이었다. 그들은 식스에게도 그런 날이 있으리라 여겼다. 게다가 요즘 연애중이 아닌가. 사랑은 인간은 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더없이 연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정작 연인에게는 곧 있을 열병을 이야기하기 힘들었다. 그걸 설명하려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교도소에 들어갔고 CIA라는 곳에 몸을 담게 되었는지까지 설명해야 했다. 그건 무척이나 길었고 연인에게만큼은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갑자기 몸이 안 좋은 척을 했다. 칼이 훈련을 너무 힘들게 시켜서 몸살이 났다고, 의무실에 가보겠노라고, 곧 나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물론 그런다고 걱정하지 않을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매일 밤 식스를 찾아와 소등시간까지 함께 했다. 옆에 앉아 식사와 약 복용을 도와주고 식은 땀을 닦아주었다. “... 어서 들어가서 쉬어요.” 인류를 위해 자살할 수 있다는 명분에 달려든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에게 필요한건 긴 우주여행을 버티고 희망을 다시 보낼 수 있는 인재였다. 특히 그레이스는 과학멤버 선발에 큰 공을 들이고 있었다. 아무리 우수한 파일럿과 엔지니어가 같이 간다고 해도 타우세티의 아스트로파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모든 일이 다 허사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최근 며칠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했다. 그리고 퇴근하자마자 연인에게 달려와서는 그를 간병했다. 식스로서는 미련하고 바보같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 소등시간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잖아요. 괜찮아요, 곧 갈거에요.” “...매일 오잖아요.” 식스는 무거운 몸을 침대에 눕혔다. 평소라면 연인이 제 머리칼을 쓰다듬고 이마에 손을 올리면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초췌해져가는 연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조바심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회복하자마자 연인이 이 침대에 눕게 될 것만 같았다. 그는 연인의 손길을 거부하고는 반대로 누웠다. 평상시에는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갈 곳을 잃은 손은 식스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게 너무나도 좋았지만 동시에 화가 일었다. “. ..작년에도 이렇게 아팠었죠.” 식스는 숨을 들이켰다. 몽롱했던 정신이 순간 명료해졌다. 그는 제 뒷머리를 헤집는 연인의 손길에 집중했다. 혹시 알아버린건가, 불안함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 그 때도 이렇게 매일 오고 싶었어요. 그리고 지금처럼 당신을 보살피고 싶었어요.” 쪽- 그레이스는 모로 누워있던 연인의 관자머리에 뽀뽀했다. 일부러 소리를 내며. “그냥 내 어리광 좀 받아주면 안돼요?” 그 말에 식스는 연인을 향해 돌아누웠다. 짙은 밀빛 머리칼 아래 눈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뭐가 그리도 힘들었는지 눈가가 붉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을때마다 속이 쓰려왔다. “ 난 당신이 아플 때 곁에 있고 싶은데.” 식스는 크게 한숨을 내쉬려고 했다. 하지만 순간 숨이 막혀서 여러번 숨을 나눠 쉬어야 했다. 괜찮냐며 걱정하는 연인을 보니 방금 전까지 품고 있었던 화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그는 힘겹게 손을 들어올려 연인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리고는 밀빛 머리칼을 사정없이 헤집었다. “ 잠깐, 식스! 갑자기 왜 이래요?!” “.....박사님이 걱정돼요.” “...네?” “...이러다… 박사님이 입원할까봐.” 숙소에는 제대로 돌아가느냐, 잠은 잘 자고 있느냐, 밥은 어떻게 먹고 있느냐. 묻고 싶은게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 대신 나름대로 연인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만 전했다. “... 무리하지 마요.” 그 말에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풀이 죽은 여우를 본 느낌이었다. 부드럽고 귀엽고 무엇보다도 사랑스럽다.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 이 세상의 온통 좋은 것들이란 좋은 것들을 죄다 뭉쳐놓은 것 같은 당신을. 그 뒤로도 그레이스는 매일 병실에 드나들었지만 한시간 정도만 있다가 숙소로 돌아갔다. 가고 싶지 않다고 떼를 쓰는 날-특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도 있었다. 그 때마다 식스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곧 나을테니 그 때는 데이트를 하자고 달랬다. 그러면 연인은 다음에는 꼭 먼저 키스해달라고 말하며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식스는 빨리 이 열이 내려가기를 빌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그를 품에 안고 얼굴 이곳저곳에 키스를 퍼부어줄 생각이었다. * 또 그날이 온다. 코틀랜드 젠트리는 눈을 찌푸리며 덤벨 앞에 있던 달력을 노려보았다. 벌써 6년째였다. 가뜩이나 연인은 프로젝트팀의 개편과 새로 들어온 승무원들 때문에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작년처럼 걱정을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다른 나라의 병원에서 몸살을 넘길까. 그레이스는 매우 서운해하겠지만 이이상 그에게 걱정거리를 늘리는건 사양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 코틀랜드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각자 기구를 붙잡고 운동에 전념하는 체력단련실에서 누군가에게 저렇게 정중한 인사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초로에 들어선 중국인이었다. 이제 흰머리가 검은 머리를 덮어버렸고 눈가와 입가에는 주름이 가득하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탄탄하고 눈동자는 희망에 가득 반짝이고 있었다. 야오 뤼지에. 헤일메리호의 캡틴이다. “... 안녕하십니까, 캡틴 야오.” 그와 악수를 나누면서도 코틀랜드는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자신은 경호팀에서 일하고 있고 그는 파일럿팀에 있다. 원래라면 체력단련실 같은 공공시설이 아니라면 마주칠 일도 없는 상대였다. 야오는 의뭉스런 미소를 지으며 코틀랜드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자신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 모든 감각이 눈앞의 남자에게 집중되었다. “ 그레이스 박사님의 남자친구가 누군지 궁금했는데, 들은 것보다 훨씬 더 멋있는 분이군요.” 연인의 이름에 그는 금방 긴장을 풀었다. 야오는 그런 모습을 보며 얕게 웃음을 흘렸다. “ 박사님 이름만 나와도 얼굴이 풀리다니, 역시 남자친구군요.” 일부러 중국어로 놀리자 코틀랜드도 똑같이 중국어로 응답했다. “ 네, 저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오, 중국어를 잘 하시는군요. 이런, 박사님을 놀리기 딱 좋은 방법이었는데.” 그레이스가 말하는 야오는 파일럿이라는 진중한 위치에 어울리지 않게 꽤나 장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날 자기 아들처럼 보는 것 같아요, 라고 투덜거리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그나저나 야오가 자신을 알아본게 나름 신기했다. 그들은 함선 내에서는 제법 조용하게 연애하고 있었다. 데이트도 선실 내에서만 하고 바깥에서는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정도였다. 그것도 데이트라면 데이트였지만, 적어도 밖에서는 손을 잡거나 껴안은 적은 거의 없었다. “용케도 절 찾으셨군요.” “일류키나가 말해주더군요. 날렵하면서도 흑곰처럼 생긴 남자였다고.” 아, 그제야 의문점이 풀렸다. 며칠 전, 연인의 사무실에서 조금 진한 스킨쉽을 한 적이 있었다. 여전히 연인은 일때문에 골치아파하고 있었고, 그걸 위로하기 위해서 책상 밑에서 구강성교를 했었다. 성기를 빨리면서도 언제라도 남들이 올 수 있는 공공장소에서 성행위를 하고 있다는 배덕감에 연인은 더욱 더 흥분했었다. 제발, 코티. 신음소리와 울음소리가 섞이고 이윽고 백탁액이 꿀렁거리며 입으로 넘어왔다. 코틀랜드는 그 백탁액을 한방울도 남김없이 삼켰다. 그걸 왜 삼키냐고 연인이 타박했을 때, 갑작스런 노크소리에 둘 다 숨을 죽였었다. 서둘러 옷을 추스르고 나오니 일류키나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야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체력단련실에는 여댓명의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 사람들을 하나씩 훑어보고는 목소리를 줄였다. “ 저도 왕년에는 아내랑 뜨거웠었죠. 간부숙소에서 사랑을 나누다 걸려서 영창에 간 적도 있었고요.” 들켰구만. 코틀랜드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 만약 드부아 박사와 셔피로 박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둘은 박사님께 사무실을 요구할겁니다.” 요는 애정행각을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 였다. 그걸 그레이스도 알고 있냐는 사실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나중에, 박사님을 놀릴 거리가 떨어지면 그 때 말할 겁니다.” “...부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빌겠습니다.” 그러자 야오는 다시금 의뭉스런 미소를 지었다. 과연 헤일메리호의 승무원답게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칼에게 병가에 대해 말하자 그는 아예 일정 자체를 빼버렸다고 말했다. 3년 연속으로 거의 같은 날짜에 휴가를 낸다. 어쩌면 그 날짜가 어떤 날인지를 알아챈 걸수도 있다. “ 계속 이렇게 지내다가는 그레이스 박사님이 눈치챌겁니다.” “...네?” 어쩌면 그 이상을. 칼은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도 그레이스를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칼은 어깨를 으쓱였다. 코틀랜드의 이마에 식은 땀이 어렸다. “박사님이 바보는 아니잖습니까. 뭐, 귀여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나 저기나 연인을 무슨 귀여운 여우마냥 여기고 있다. 코틀랜드는 속에서 끓는 질투를 누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칼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연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헤일메리 프로젝트가 외부에 가시화되고 아스트로파지 연구가 전세계로 공유되면서 그는 차기 노벨상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물론 본인은 그런 대우를 끔찍해했다. 평범한 중학교 과학교사에게 노벨상은 오히려 분란을 조장할 뿐이다. 게다가. 코틀랜드는 자신의 선실로 향하다 걸음을 멈추었다.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본인이 부담을 느낄 정도로 막대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아마 자의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시에라 식스가 병가를 신청했다는 소식이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연인의 ‘본명’을 알고 있었다. 인터넷에 이름과 날짜만 치더라도 그 ‘일’이 나올 것이다. 당시에도 제법 논란이었으니 분명히 신문기사건 인터넷 기사건 남아있을 것이다. 코틀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인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다. 처음으로 손이 더렵혀졌던 그 일 만큼은. 하지만 칼이 예상했듯이 코틀랜드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건 시간문제였다. 아무리 신들이 경고했더라도 판도라는 결국 상자를 열고 말았다. 다음날 그는 연인에게 클레어를 보러 미국으로 갈 일이 생겼다고 전화로 전했다. 매스컴까지 상대하느라 한참 바빴던 연인은 부디 잘 다녀오라고, 배웅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했다. 짐을 싸면서 거짓말이 통했다고, 그나마 다행이라도 스스로를 위로하며 잠시 마음을 놓았었다. 하지만 새벽 2시에 누군가가 자신의 방 문을 두드렸을 때, 문 너머로 깨어있는 거 안다고 제발 문을 열어달라는 소리가 들렸을 때 그는 깨달았다. 기어코 그 상자가 열려버렸다는 걸. “. ..라일리.” 연인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지만 표정은 결연했다. 코틀랜드는 얼굴을 찌푸리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어깨의 힘을 풀었다. 그러자 그레이스는 곧바로 제 연인을 품에 안고선 침대로 쓰러뜨렸다. “.... 코티 .” 그레이스는 스트레스때문인지 전보다도 더 가벼워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귓가에 맺히는 숨결이 약해져 있었다. 평소였다면 무슨 일이냐며, 또 일이 힘드냐며 토닥였을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코틀랜드는 조그맣게 연인의 부름에 응답했다. “...네. 라일리.” “....또 아플거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있는 터라 연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얼마나 비참해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걸 해결할 힘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작년처럼 또 아플거죠?” “...네. 아마 계속 그럴겁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열병은 매년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열병에 휩싸여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다. 망할 아버지같으니라고, 귀신이 되어서까지 자식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 그래서 일부러 미국으로 가는거에요? 또 내가 걱정할까봐?” “...지금도 충분히 바쁘잖습니까.” 이미 프로젝트의 2인자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이상 그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더 속상했는지 연인의 입가에서 짜증섞인 한숨을 터져나왔다. “왜 그런 말을 해요? 내가 여기서 일하는 동안 당신이 저 먼 곳에서 아프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모를거라고 생각했어요? 난 이제 좋든 싫든 이 함선에 있는 사람들의 건강상태까지 다 파악하게 되어버렸어요. 당신이 미국으로 가서 병원에라도 들어간다면 그 소식이 나한테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해요?” 제 가슴을 내리치는 연인의 주먹은 가벼웠다. 하지만 코틀랜드에게는 그 어떤 주먹보다도 아팠다. “내가 모를 리가… 모를 리가 없잖아. 당신이 언제 아프게 될지…. 왜 아픈지 .” 그레이스의 몸이 잘게 떨렸다. 입가에서는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그가 얼굴을 묻고 있는 코틀랜드의 어깨는 물기로 젖어갔다. 코틀랜드는 조심스레 팔을 들어 연인을 토닥였다. “...미안합니다 .” 만약 그 때 당신의 팔을 잡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당신에게 입술을 맞추지 않았더라면 그레이스는 지금 아무 것도 모른 채 웃고 있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덜 아파하긴 했겠지.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아프단 사실에 슬퍼했을 것이다. “ 미안해요, 라일리.” 당신을 속상하게 만들어서,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숨겨서, 이렇게나 많이 손을 더럽혔으면서 당신같은 보물을 사랑해버려서. 이런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어서. 하지만 그 모든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연인의 짜증섞인 주먹을 받아주고 또 받아주었다. 연인의 주먹은 매우 아팠다. 나중에 가서는 결코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란걸 깨달았지만 이 아픔마저도 그에게는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었어요.” 그레이스는 30분을 내리 연인의 품에서 울고나서야 진정했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눈가는 붉다못해 물러져 있었다. 애정과 슬픔이 뒤섞인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코틀랜드는 총을 제 입에 물고 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내 대학시절 은사님이었는데 아버지처럼 여기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정작 내가 외계생명체에 물은 필요없다는 이론을 내세우니까 저를 무슨 사이비로 몰더군요. 처음에는 한번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연구라고 했으면서. 학계에서 쫓겨나고 학교에서 간신히 적응했을 때, 그 사람이 미생물과 관련된 제 연구를 빼돌렸다는걸 알게 되었어요. 말이 안나오더군요. 그 연구와 관련된 아이디어와 실험은 전부 다 내가 한건데. 그 때는 정말로 눈이 돌아버려서 그 인간을 죽이면 어떻게 죽여야 하나 고민만 했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죠. 그랬다면 여기 없었을 테니까요.” 그레이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 ..호스피스 병동에 있더군요.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을 죽여봤자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요.” 아마 그 은사가 건강했더라도 그레이스는 화를 내고 끝냈을 것이다. 그는 천성이 상냥해서 누군가를 해칠 이가 되지 못했다. 코틀랜드는 그가 자신을 위로하려 일부러 옛 상처를 들추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연인이 사랑스러웠고, 또한 미안했다. 그레이스는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코틀랜드 젠트리가 매년 열병을 앓는 날이 무슨 날인지, 왜 그가 아버지를 죽였는지까지. 그에게는 에바 스트라트 다음으로 막대한 권한이 쥐어져 있었다. 피츠로이도 아버지란 인간의 가정폭력을 알고 있었으니, 그도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 난 그 인간을 죽인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후회하는 건, 그 때 배심원단에게 좀 더 감정적으로 호소하지 않았다는 것 뿐입니다.” 나중에 수감되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이 가진 패가 생각보다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는걸 깨닫고는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지금 여기에 있지는 못했겠죠. 당신을 만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이 CIA의 개가 되어서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그리고 매년 열병에 휩싸여 생명을 위협받는다는걸 알게 되더라도 아마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 그랬다면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지 못했겠죠.” 바다같이 짙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닦아주자 연인은 다시금 코틀랜드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양 더욱 강하게 그의 옷자락과 몸을 붙었다. “....가지 마요. 아무 데도 가지 마요.” “...작년처럼 또 무리하려고요?” “아파봤자 일주일 정도잖아요. 그것도 못견디면 여기서 일 못해요.” “...내가 만약 못 일어난다면요?” 그 말에 그레이스는 더욱 연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는걸 오롯이 느낄 정도로 가깝게. “...죽을 거라면 내 앞에서 죽어요.” “...하하하.” 코틀랜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평소에는 덤벙거리고 말랑하지만 가끔씩 이렇게 단단해질 때가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애틋했다. 그래서 더욱 놓을 수가 없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답변에 그레이스의 입가에도 눈물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나도 듣기 좋아서 코틀랜드는 연인의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얼마든지, 내가 죽을 때 곁에 있어달라고, 그 때가 오게 된다면 이 사람의 품에 있게 해달라고 어딘가에 있을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 “....아저씨!” 남자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처음에는 자신이 있는 곳이 지옥인줄 알았다. 아마 죽어서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가 누워있던 공간은 아수라장이었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울려퍼졌고 코 끝에는 지린내와 소독약냄새가 뒤섞여 풍겨왔다. 그러다 다시금 들리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여자를 확인하자마자 이곳이 지옥은 아니란 걸 깨달았다. 클레어라면 지옥에 있을 리가 없었다. 살아버리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아직 운명의 여신은 그의 실을 끊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저씨, 정신이 들어요? 괜찮아요?” 클레어는 남자가 정신을 차렸다는걸 깨닫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를 불렀다. 어제까지 같이 시체를 옮겼던 의무관이 급하게 달려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냐는 말이 너무나도 시끄러워서 그는 눈을 감았다. 분명 꿈을 꾼 것 같았는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혹여나 그레이스가 나왔을까, 나왔다면 무어라고 했을까 상상해보았지만 머릿속에 울리는 그레이스의 목소리라고는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그 욕이 다였다. 그레이스는 꿈속에서조차 그를 만나러 와주지 않았다. 그걸 바랄 면목도 없다는걸 알면서도 남자는 꿈을 꾼 것 같다 하면 그레이스를 찾았다. “아저씨.” 남자는 제 손목을 붙잡는 손길에 다시 눈을 떴다. 클레어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에 제 얼굴을 비볐다. 그레이스를 팔아서 얻은 존재이니만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었다. “...잘 지냈니?” “...나만 잘 지내면 뭐에요? 아저씨 죽을 뻔 했어요. 조금만 늦게 왔어도 그냥 죽었다고요!” 남자는 간신히 손을 들어 대녀의 머리를 엉망으로 쓰다듬었다. 그제야 클레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다는 작은 말이 흘러나오자 아예 남자가 눕혀져 있는 침대에 반쯤 몸을 기대기까지 했다. 클레어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난민캠프를 돌아다니며 의약품을 보급하고 있어요. 그는 다행이라고 속삭이는 대녀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눈을 감았다. 나는 또 다른 사람의 몫을 가로채 살아남고 말았습니다. 당신에게 했던 대로요. “미안하다.” 아직 열이 다 가라앉지 않아 몽롱한 머리로 우주 너머에 있을 그레이스를 떠올렸다. 그는 주홍빛 시체백에 담겨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나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클레어의 뺨은 따뜻했다. 머리카락은 부드러웠고 눈에서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 특유의 냄새가 풍겨왔다. 그레이스를 팔아 얻어낸 미래였다. 남자는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꿈속에서조차 찾아오지 않는 옛 연인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마지막이 다가올 때, 주마등 속에서나마 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잠에 빠져 들며 남자는 언젠가 올 그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 날이 온다면, 그 때는 당신에게- 고슬고슬 고슬사자 프로젝트 헤일메리 그레이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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