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약 안정이 최우선일 것 같은 국민연금도 지난 15년 동안 위험자산인 주식의 비중을 크게 높여 왔습니다. 2010년 말 국민연금의 채권 비중은 70.7%, 주식 비중은 23.1%였습니다. 2026년 7월 말에는 채권 22.9%, 주식 61.9%로 관계가 뒤집혔습니다. 국민연금의 성적표를 보면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금 설립 이후 2025년까지 연평균 수익률은 국내주식 11.26%, 해외주식 16.06%, 국내채권 3.54%, 해외채권 5.52%였습니다. 2026년 1~7월에도 국내주식 60.11%, 해외주식 10.72%, 국내채권 -3.36%, 해외채권 0.72%로 주식이 채권을 앞섰습니다. 일본과 캐나다의 공적연금도 채권 중심에서 벗어나 주식과 위험자산의 비중을 높여 왔고, 노르웨이 국부펀드도 주식 비중을 단계적으로 높였습니다. 그래도 이 기금들은 채권을 놓지 않습니다. 국민연금의 2026년 말 목표에서 채권은 30.5%입니다. 수많은 수급자에게 수십 년 동안 약속한 급여를 지급해야 하고, 거래 자체가 시장을 움직일 만큼 규모가 큽니다. 필요한 수익률을 얻는 것뿐 아니라 기금 전체의 위험도 관리해야 합니다. 제가 국민연금에서 배운 것은 더 높은 장기 기대수익률을 얻으려면 더 많은 주식 위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방향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연금이 상당한 채권을 보유해야 하는 제도적 이유는 저에게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수많은 사람에게 약속한 급여도, 시장을 움직일 만한 거래 규모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채권을 덜어냈습니다. 채권을 보유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채권이 하던 역할까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장이 크게 떨어졌을 때 생활비를 어디서 마련할지는 현금이나 연금소득, 낮은 인출률,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여유가 대신 답해야 합니다. 채권 없는 포트폴리오는 채권 없이도 시장의 회복을 기다릴 수 있는 사람에게만 열린 선택입니다. ■ 국민연금의 무게중심은 채권에서 주식으로 옮겨 갔습니다 국민연금은 출범 이후 오랫동안 채권 위주로 운용되었습니다. 이후 해외주식과 대체투자를 꾸준히 늘리면서 무게중심이 채권에서 주식으로 옮겨 갔습니다. 기금 설립 이후의 장기 성적표는 국민연금이 채권 중심의 운용에서 벗어나 온 배경 가운데 하나를 보여 줍니다. 연평균 수익률에서 주식은 채권을 크게 앞섰습니다. 다만 과거의 실현수익률이 앞으로의 기대수익률을 그대로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성과도 높았습니다. 국민연금공단은 2025년 수익률을 18.82%로 발표하면서, 같은 기간 기준으로 맞춘 해외 주요 기금의 수익률을 함께 제시했습니다. 일본 공적연금 GPIF(Government Pension Investment Fund) 12.3%, 노르웨이 국부펀드 GPFG(Government Pension Fund Global) 15.1%, 네덜란드 공무원연금 ABP(Algemeen Burgerlijk Pensioenfonds) -1.6%, 캐나다 연금 운용기관 CPPIB(Canada Pension Plan Investment Board) 7.7%입니다. 다만 2025년에는 국내주식 수익률이 82.44%에 이르면서 전체 성과를 크게 끌어올렸으므로, 한 해의 결과를 자산배분 전략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주식 비중이 늘어난 데에는 의도한 전략과 시장의 결과가 함께 작용했습니다. 2026년에는 국내주식이 크게 오르면서 실제 비중이 목표를 크게 웃돌았습니다. 국민연금은 연초 국내주식의 리밸런싱을 한시적으로 유예했고, 5월에는 국내주식 목표비중을 14.9%에서 20.8%로 높였습니다. 실제 비중이 목표를 크게 웃도는 상황, 대규모 매도가 시장에 줄 충격, 국내 증시의 구조적 변화 가능성을 함께 고려한 결정이었습니다. ■ 세계의 대형 기금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일본 GPIF는 2013년까지 국내채권 60%, 국내주식 12%, 해외채권 11%, 해외주식 12%, 단기자산 5%로 운용했습니다. 2014년에는 당시 연금재정에 필요한 수익률, 곧 명목임금상승률을 1.7%포인트 웃도는 수익률을 최소한의 위험으로 확보한다는 목표 아래 국내채권을 35%로 낮추고 국내외 주식을 합계 50%로 높였습니다. 2025~2029년 계획에서는 이 목표가 1.9%포인트로 높아졌지만, 국내주식과 해외주식, 국내채권과 해외채권에 각각 25%씩 배분하는 기본 구조는 유지했습니다. 캐나다 연금 기금은 1997년에는 전액이 정부채권이었습니다. 2026년 3월 말에는 공개주식 36%, 사모주식 22%로 주식성 자산이 58%에 이릅니다. 노르웨이 GPFG는 가입자에게 연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는 국부펀드입니다. 1998년 주식 투자를 시작한 뒤 주식 비중을 단계적으로 높였고, 2025년 말 주식 비중은 71.3%였습니다. 제도의 성격과 운용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방향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필요한 수익률을 확보하기 위해 채권 중심의 운용에서 벗어나 주식과 위험자산의 역할을 키워 왔다는 점입니다. ■ 그래도 기금들은 채권을 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채권을 없앤 곳은 없습니다. 국민연금은 2026년 말 목표에서 국내채권 23.1%, 해외채권 7.4%로 채권을 합계 30.5% 보유하도록 정했고, 2027~2031년 중기자산배분에서도 30% 안팎으로 유지합니다. GPIF는 채권이 절반이고, 캐나다 기금은 정부채권 13%를, 노르웨이 GPFG는 채권 26.5%를 보유합니다. 여기에는 자산배분의 기본 원리가 있습니다. 자산배분은 기대수익률이 가장 높은 자산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필요한 수익률을 감당할 수 있는 위험 안에서 얻는 일입니다. GPIF가 목표수익률을 높인 뒤에도 네 자산에 25%씩 배분하는 기본 구조를 유지한 것은 목표수익률뿐 아니라 전체 포트폴리오의 위험을 함께 고려한 결과입니다. 연기금에는 지급의무라는 조건도 있습니다. 주식시장이 크게 떨어졌다고 연금 지급을 몇 년 미룰 수는 없습니다. 연기금 운용에는 부채연계투자(Liability-Driven Investment, LDI)라는 접근법이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이 방식으로만 운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산의 수익률만 보지 않고 앞으로 지급해야 할 의무와 보유자산을 함께 고려한다는 생각은 같습니다. ABP가 이 차이를 보여 줍니다. ABP의 2025년 수익률은 -1.6%로 비교 대상 가운데 가장 낮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약속한 연금을 지급할 능력을 보여 주는 적립률은 111.7%에서 123.5%로 높아졌습니다. 금리가 오르면서 앞으로 지급할 연금 부채의 현재 가치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지급의무를 함께 보는 기금을 수익률 순위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대부분의 채권에는 만기와 약정된 현금흐름이 있습니다. 발행자가 약속을 지킨다면 앞으로 받을 현금흐름을 비교적 예측하기 쉽습니다. 물론 채권이 언제나 주식과 반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2022년처럼 금리가 빠르게 오르면 미래 현금흐름을 현재 가치로 바꾸는 할인율이 함께 올라가면서 주식과 채권 가격이 동시에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지급에 필요한 현금흐름을 마련하고 기금 전체의 변동과 위험을 조절하는 역할은 남습니다. 연금 지급 의무가 없는 노르웨이 GPFG가 채권을 4분의 1 넘게 보유한다는 점도, 채권의 역할을 지급 대비만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규모도 조건입니다. 이들은 모두 수백조원에서 수천조원을 운용하는 초대형 투자자입니다. 노르웨이 GPFG → 2025년 말 21조2,680억크로네, 약 3,000조원 일본 GPIF → 2026년 3월 말 293.6조엔, 약 2,800조원 한국 국민연금 → 2026년 7월 말 약 1,684조원 네덜란드 ABP → 2025년 말 5,331억유로, 약 900조원 캐나다 CPP → 2026년 3월 말 7,933억캐나다달러, 약 850조원 개인은 주식을 조금 사고팔아도 시장가격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만큼 큰 기금은 거래 자체가 시장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급할 때 한꺼번에 팔 수도, 원하는 만큼 한꺼번에 살 수도 없습니다. 국민연금은 당장 현금이 부족해서 채권을 들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국민연금연구원의 2026~2030년 중기재정전망에 따르면 2026년 보험료 수입은 약 68조6천억원, 급여 지출은 약 56조원으로, 들어오는 보험료가 나가는 급여보다 약 12조6천억원 많습니다. 그런데도 채권을 상당 부분 남겨 둡니다. ■ 저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은퇴 후 제 자산을 어떻게 운용할지 고민하면서 가장 먼저 들여다본 것이 국민연금의 포트폴리오였습니다. 수십 년을 내다보고 운용하면서 동시에 계속 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이 은퇴자의 처지와 닮았기 때문입니다. 국민연금에서 세 가지를 가져왔습니다. 첫째, 더 높은 장기 기대수익률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주식 위험을 받아들이는 방향입니다. 둘째, 여러 기업에 나누어 투자하는 구조입니다. 개인이 수많은 기업을 하나하나 골라 담기는 어렵지만, 시장을 대표하는 지수를 추종하는 ETF(Exchange Traded Fund)를 이용하면 여러 기업의 성과를 함께 보유할 수 있습니다. 셋째, 매달 정해진 날 생활비를 꺼내 쓰는 구조입니다. 국민연금이 수급자에게 정기적으로 지급하듯, 제 자산이 저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채권은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국민연금이 상당한 채권을 보유해야 하는 제도적 이유를 제 상황에 대입해 보았습니다. 저에게는 수많은 수급자에게 약속한 급여가 없고, 제 거래는 시장가격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제가 감당해야 할 지급의무는 제 생활비와 예정된 지출입니다. 그래서 제 자산 규모와 생활비 인출액, 예정된 지출을 함께 놓고 보았을 때, 장기 기대수익률을 낮추는 대신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자산의 상당 부분을 채권에 배분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개인에게는 증권계좌 밖의 현금흐름도 있습니다. 즈비 보디, 로버트 머튼, 윌리엄 새뮤얼슨은 1992년 연구에서 금융자산뿐 아니라 앞으로 벌어들일 근로소득과 노동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은퇴하면 근로소득은 대부분 사라집니다. 하지만 평생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연금소득은 금융자산은 아니어도, 가계 전체로 보면 채권이 맡는 역할 가운데 하나인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일부 대신할 수 있습니다. 저도 국민연금을 조기수령 중입니다. 금융자산이 같은 두 사람이라도 이런 현금흐름과 생활비가 다르면 알맞은 채권 비중도 달라집니다. ■ 다만 채권이 하던 일은 남습니다 채권을 덜어냈다고 위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올해 7월이 그 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국민연금 국내주식의 연초 이후 수익률은 6월 말 107.37%에서 7월 말 60.11%로 낮아졌습니다. 이를 역산하면 7월 한 달 국내주식 운용수익률은 약 -22.8%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국내주식만 보유하지 않습니다. 7월 말 자산은 국내주식 24.9%, 해외주식 37.0%, 국내채권 16.8%, 해외채권 6.1%, 대체투자 14.8% 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특정 자산에 집중하지 않는 구조는 한 자산의 급등을 모두 누리지 못하게 하는 대신, 그 자산의 급락이 기금 전체에 그대로 전달되는 것도 막아 줍니다. 주식에 훨씬 집중한 개인은 그만큼 더 큰 상승과 하락을 직접 감당해야 합니다. 생활비를 계속 꺼내 써야 하는 은퇴자라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예를 들어 1억원의 주식이 50% 떨어지면 5천만원이 됩니다. 이때 생활비로 1천만원을 꺼내면 4천만원이 남습니다. 이후 시장이 100% 올라 원래 가격으로 완전히 회복해도 남은 자산은 8천만원입니다. 시장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은퇴자의 자산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장기 평균수익률이 같더라도 돈을 계속 꺼내 쓰는 사람에게는 큰 손실이 초기에 오느냐 후반에 오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이를 수익률 순서위험(sequence-of-returns risk)이라고 합니다. ■ 채권 없는 포트폴리오, 연구와 사례 학계에도 하나의 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윌리엄 벵겐은 1994년 미국의 역사적 자료를 이용해, 은퇴자가 자산을 지속적으로 인출할 때 주식과 채권을 함께 보유하는 구성을 연구했습니다. 이 연구는 이후 이른바 '4% 규칙'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반대 방향의 연구도 있습니다. 아이잔 아나르쿨로바, 스콧 세더버그, 마이클 오도허티가 2023년 처음 공개하고 이후 보완한 연구는 여러 나라의 장기 자료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연구가 설정한 가정 아래에서, 자국주식 약 3분의 1과 해외주식 약 3분의 2로 구성하고 채권을 두지 않는 포트폴리오가 생애주기 자산배분에서 유리할 수 있다는 결과를 제시했습니다. 다만 이는 과거 여러 나라의 자료와 연구가 설정한 모형에서 나온 결과이고, 미래에도 같은 결과가 반복된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또한 채권 대신 국가 간 주식 분산을 전제로 하므로, 채권만 빼고 한 나라의 주식에 집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일본의 경험은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닛케이225 지수는 1989년 말 고점을 2024년 2월에야 넘어섰습니다. 약 34년이 걸렸습니다. 장기투자라는 말도 기관과 개인에게 같은 뜻은 아닙니다. 기금은 다음 세대까지 운용을 이어 갈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은퇴기간은 유한합니다. 개인에게는 시장이 언젠가 회복하느냐보다, 생활비를 꺼내 쓰면서 그 회복까지 기다릴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워런 버핏의 선택도 흥미롭습니다. 버핏은 2013년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서한에서,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아내를 위해 남길 자금의 90%는 비용이 매우 낮은 S&P500 인덱스펀드에, 10%는 단기 미국 국채에 두라고 밝혔습니다. 10%를 단기 국채에 두는 이유를 따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주식 비중을 매우 높게 가져가면서도 일부는 가격 변동이 작은 자산에 남겨 둔 구성입니다. ■ 같은 방향, 다른 도착점 채권을 덜어낼 수 있는지는 투자자의 담력이 아니라 형편에 달려 있습니다. 주가가 크게 떨어져도 겁내지 않는 것은 위험감수성향의 문제입니다. 하락이 몇 년 이어져도 생활비와 예정된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지는 위험감수능력의 문제입니다. 채권 비중을 결정하는 것은 이 능력 쪽입니다. 저는 국민연금과 같은 방향으로 출발했지만, 제 조건에서는 채권을 남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채권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시장이 크게 하락했을 때 주식을 팔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구조가 있느냐입니다. 제 경우에는 안정적인 현금흐름의 일부를 연금소득이 맡고, 생활비 구조와 낮은 인출 부담, 지출을 조절할 수 있는 여유가 시장의 회복을 기다릴 시간을 만들어 줍니다. 국민연금에 필요한 채권이 개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기금과 다른 제약이 있습니다. 생활비는 시장의 회복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채권이 10%일 수도, 30%일 수도, 그보다 높을 수도 있습니다. 자산배분은 과거에 가장 높은 수익률을 낸 자산부터 고르는 일이 아니라, 내 돈에 어떤 일을 맡길지를 정하는 일입니다. ※ 해외 기금 규모는 각 기관의 결산 기준일 무렵 환율로 단순 환산한 대략적인 원화 금액이며, 2026년 국민연금 수치는 7월 말 기준 잠정치입니다. 이 글은 특정 금융상품의 매수·매도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출처] 『부(富)의 에스컬레이터』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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