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2WDYVzAxRkE =================== 영화 암살자(들)이 한국에서 개봉되기 열흘 전 쯤 스포일러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제목이 왜 암살자(들)인지 미리 스포해 드릴게요 : 클리앙 그 이후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우들의 난동이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중 입니다. 배후가 누구냐 논란 이전에 육영수가 누구의 총에 맞았는지 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밝혀지지 않은 이유가 당시 청와대 경호실이 사건현장 증거인멸을 했기 때문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입니다. 참, 김정일이 2002 년 방북한 박근혜에게 문세광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는 헛소문, 여기서도 보이던데, 김정일이 사과한 건 1968 년 발생한 1.21 사건이었습니다. 1.21 사건에 대해서는 김일성도 1972 년 방북한 이후락 당시 중정부장에게 유감표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은 극우난동의 막간을 이용해 영화를 둘러싼 쓰레기같은 시비에서 벗어나 사건의 주인공 ‘인간 육영수’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하게 해 볼까 합니다. 2016 년 11 월 김종필 씨(작고)의 양심선언 비슷한 회고를 듣고 많은 한국인들이 놀랐을 것 입니다. 사촌처제 박근혜를 두고 '옛날 (최태민과 어울려 다닐 때) 부터 미쳤었고 지금도 미쳐서 (청와대에서 나가지 않고) 저러고 앉아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야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이니까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그 박근혜의 고집을 비롯한 나쁜 성격이 어머니 육영수에게서 물려받은 성품 중 한 면에 기인한다는 회고와 폭로에 놀랐던 것 입니다. '육영수 씨에 대한 이미지가 조작된 것' 이라는 사실 역시 이미 그때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거였지만, 입이 무겁고 신중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당사자의 조카사위 김종필의 입을 통해, 그것도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어가며 폭로될 줄은 몰랐던 거죠. 조카사위라고는 하지만 육영수 씨와 김종필 씨는 1926 년 생 동갑내기 입니다. 육영수가 1974 년 8 월 15 일 청와대 경호원의 오발로 보이는 탄환에 피격되어 사망했던 당시 김종필은 국무총리였습니다. 2016 년 당시 김종필가 나이 90 이 되어 처음으로 박근혜 씨의 오만한 성정과 비정상적 고집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 육영수 비화를 털어놓기 5 년 전에 저는 이미 고 육영수의 이미지 조작에 관한 글을 써서 올린 적이 있습니다. 국립극장 총잡이들의 서부활극 이야기는 제가 쓴 15 년 전 글을 복사해 올렸지만, 이번에는 제가 역시 그 해 2011 년 썼던 글을 리메이크해 보겠습니다. 대중기만과 여론조작을 통해 특정인의 인품이나 업적을 과대포장 하는 것은 다반사입니다. 형편없이 나쁜 인간의 인격을 미화해서 영웅처럼 각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외적으로 조용하고 평범한 사람의 소소한 일상들을 조금씩 아름답게 꾸며서 ‘국민천사’로 뒤바꾸어 놓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죠. 형편없이 나쁜 인간은 누군가가 아무리 감쪽같이 거짓말로 미화해 놓았더라도 오래 못 가 꼬리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국민천사로 미화되어서 일단 public image 안에 자리잡은 주인공이 모난 데가 없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에 대한 과대 포장 이미지가 의외로 오래갈 수 있습니다. 꼬리 밟힐만한 당사자의 튀는 언행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천사 원조 할머니 육영수가 이런 경우에 속합니다. 육영수는 박정희의 두 번째 부인입니다. 한국전쟁 중 육영수가 박정희와 사귈 당시 박정희는 열 세 살 짜리 딸이 있는 유부남이었습니다. 대한민국 50 대 이상 기성세대에게 육영수 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일까요? 목련입니다. 육영수=목련이라는 이미지 등식을 성립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은 시인 박목월이었습니다. 박목월이 육영수를 목련에 비유했기 때문입니다. 박목월이 왜 육영수를 목련이 비유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습니다. 그냥 무슨 꽃에 비유하면 좋겠는데 육영수 사후 그녀의 전기를 쓰다 말고 갑자기 생각난 게 자기가 예전에 쓴 4 월의 노래가 떠올라 ‘옳거니’ 하고 가져다 붙인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박목월은 전기 <육영수 여사>에서 육영수를 학(鶴)에도 비유했습니다. 학은 목련에 비해 오히려 비유연상이 쉽습니다. 육영수는 목이 긴 편이기 때문입니다. 근데 박목월이 학에 비유한 또 하나의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박목월의 제주도 ‘학’ 소녀와의 연애스토리 일화는 이 글에서는 생략- 제가 보기에 육영수는 전형적인 시골 부잣집 둘째 딸이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근데 이런 제 추측을 좀 더 정밀하게 다듬을 수 있었던 계기가 김종필의 회고였습니다. 육영수가 부잣집 딸이었던 것은 맞는데, 아주 욕심이 많은데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는 인간형이었다는 게 김종필 씨의 충격적인 폭로였습니다. 육영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증오했던 것 같습니다. 걸프렌드(첩) 다섯 명이나 두고 어머니를 맘 아프게 하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 딸들의 공통점이겠지만 정작 문제는 육영수가 서울 배화여고에 입학하면서부터 터졌습니다. 육영수의 부친 육종관의 혼외 걸프랜드 5 인방 중에는 자매지간인 두 여자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어린 육영수 소녀는 자매가 한 남자의 소실로 들어와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 장본인이 자기 아버지라는 현실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 입니다. 그 자매 소실 중 언니를 큰 개성댁이라고 불렀고 동생을 작은 개성댁이라고 불렀는데 육종관은 서울 사직동에 집을 한 채 장만한 뒤 언니인 큰 개성댁을 그리로 보냈습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자녀들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육영수 역시 배화여고 학창시절을 그 집에서 큰 개성댁을 작은 어머니로 모시며 살아야 했습니다. 여고생 육영수 양의 입장에서는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참담한 세월이었을 것 입니다. 저는 박목월이 개발새발 늘어놓은 육영수 인생사를 읽으면서 문득 두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첫째는, 사려 깊은 부잣집 둘째딸 육영수가 당시의 관념으로는 명백한 불륜임에도 불구하고 유부남 박정희와의 결혼을 왜 그렇게도 적극적으로 고집했을까 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1935 년 박정희와 결혼한 직후부터 끈질기게 이혼을 강요당해왔음에도 무려 15 년 동안이나 꿋꿋하게 버티던 박정희의 본부인 김호남이 1950 년 11 월에 와서 육영수와의 결혼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이혼에 합의해 준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첫째 이유, 육영수의 불륜에 대한 제 개인적인 추측은 이렇습니다. 육영수는 비정상적 여자관계를 통해 어머니와 가족들을 괴롭혀 온 아버지 육종관에 대해 또 다른 잘못된 관계를 무기로 복수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이 부녀는 1950 년 이래 1965 년 육종관이 사망할 때까지 연을 끊고 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워터호스를 휘두르며 야만적 가정폭력을 행사한 윤석열의 부친만 자식을 망가뜨린게 아니라, 본처 이경령 + 다섯 명의 첩 사이에서 난 22 명의 자녀를 거느리며 (세종대왕 자녀 수와 동수임) 가부장적 전횡을 휘두른 폭군같은 아버지도 딸을 정신적으로 망가뜨린게 틀림없어 보입니다. Family Orientation이 중요하다!! 클립보드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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