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부터 그들을 기다리는 시간 내내 떨림이 멈추질 않았어. 친구로 지낸 지 꽤 오래됐는데도 이런 적은 없었기 때문에 두근거리고 긴장되고 또 설렜지. 딱 맞게 식사 준비를 끝마치자마자 거의 다 왔다는 메시지가 도착했어. “진짜 궁금해. 어떤 사람일지.” 짙은 네이비 컬러의 니트로 먼저 갈아입고 나온 윌이 크리스를 뒤에서 살짝 안으며 말했어. 나도. 크리스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저를 향해 숙인 입술에 짧게 키스했어. 커다란 손이 크리스의 어깨를 잡고 드레스룸 쪽으로 부드럽게 돌려세웠어. 거의 다 왔대, 얼른. 윌은 이제 더 할 것도 없지만 나머지는 제게 맡기고 옷을 갈아입으라며 그를 안쪽으로 보냈어. 잠시 후 크리스가 비슷한 디자인의 연한 회색 니트 소매를 걷어 올리며 나왔고, 때맞춰 초인종 소리가 울렸어. 이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들이 도착하자 크리스는 어쩔 줄 몰라서 그 자리에서 굳었고 얼굴과 어깨를 다 구겨버린 채로 윌을 쳐다봤어. “네가 나가. 어색해서 미쳐버리겠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윌이 낮게 울리는 소리로 큭큭 웃으며 현관문을 열어주겠지. 문 너머에는 두 사람 못지않게 어색함에 몸부림치기 직전인 밥이 크리스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서 있었어. 오랜만이야, 하고 건네는 짧은 인사에도 민망함이 뚝뚝 묻어났어. 와, 둘이 진짜 똑같아. 윌은 장난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줬어. 근데 크리스 말대로 어색해 미쳐버릴 것 같은 두 사람과 달리 행맨은 여유롭겠지. 이미 몇 번 왔었던 집으로 들어설 때 바지에 긴장한 손바닥을 문지르는 어색한 자세로 들어오는 밥과 반대로 생전 처음 온 곳,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행맨은 전혀 낯설어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윌에게 악수를 건넸어. 그리고 이어서 크리스와도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지. 이번에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를 보자마자 지난번에 차에서 읽힌 메시지 내용이 떠올랐어. 빌어먹게 잘생긴. 먼저 꺼낸 건 밥이었겠지만 똑같은 말로 돌려주던 크리스가 바로 이 사람이구나 했지. 네 사람은 행맨이 선물로 가져온 온 와인을 나눠마시며 저녁을 함께했어. 첫 만남에서 의외로 몸서리치게 어색해하던 크리스는 그나마 식사를 시작하면서 긴장이 풀리는 듯했어. 그는 본래 유쾌한 사람이고 애교도 은근히 많은 편이거든. 그러니까 이제 밥만 정신 차리면 되겠지. 그래도 뭐 딱히 난감하거나 당황스러운 순간은 없었어. 누구를 놀리자고 만든 자리도 아니고 크리스와 윌에게 행맨을 소개해 주는 건 밥으로선 큰 결심이자 정말 진심이었으니까. 단지 이런 만남을 위한 자리 자체가 낯설 뿐이었어. “얼마나 잘생겼나 궁금했는데. 진짜 잘생겼네요.” 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와인잔을 들고 서성이던 행맨이 근처로 다가오자, 크리스가 옅게 미소 지은 얼굴로 조용히 말을 건넸어. 식사하던 중 두어 번 봤던 익살스러운 표정과는 딴판인 부드러운 미소였어. 그는 바체어에 앉았고 행맨은 잔을 내려놓은 뒤 아일랜드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비스듬히 기대섰어. 크리스의 말에 털털하게 웃으면서 대꾸했지. “그 얘길 많이 했나 보죠?” “네. 안 그렇게 생겨서 로버트가 얼굴 엄청 보거든요.” “어쩐지. 자주 그러더라.” 지지 않고 받아치는 행맨 대답에 이어서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어. 잠시 웃다가 먼저 그친 크리스가 이번에는 로버트와 윌이 있는 쪽을 가만히 쳐다봤어. 윌이 뭔가를 부탁해서 밥은 그와 함께 소파에 앉아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어. 밥보다 더 곱슬거리는 금발의 윌을 한 번, 저번에 봤을 때보다 약간 길어진 갈색 머리의 밥을 한 번씩 번갈아 봤어. 둘은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연신 웃었고 로버트는 제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치기도 했어. 그리고 크리스가 윌과 밥을 보는 동안 행맨 역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어. 이렇게 떨어져서 보니까 자연스럽고 좀 더 편안하게 있는 밥이야. 그렇다고 제 앞에서 불편해 하는 건 아닌데 간혹 긴장하던 건 알아봤으니까. 물론 좋은 의미로. 밥이 풀어진 듯 편안하게 있다는 건 이들과 그만큼 편한 사이라는 뜻이겠지. 행맨은 그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어. “셋이 오래됐나요?” “저 둘은 한 8년? 비 오는 날 윌이 로버트랑 부딪히면서 시작됐거든요. 어디 부러졌나 싶게 아주 요란하게 넘어진 건 쟤였는데 그때 눈은 나랑 맞았지.” “재밌네요.” “로버트랑 나는. 우린 훨씬 전부터 알았어요. 진짜 어릴 때. 아, 혹시 궁금하거나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요. 오늘은 첫 만남이고 특별하니까 이번만 말해줄게요. 대신 딱 하나만. ” “두 개는 안 돼요?” “네. 두 개부터는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로버트는 그럼.” 자세를 바꿔서 한 손으로 아일랜드 식탁을 짚은 채로 고민하던 행맨은 그러나 전혀 생뚱맞은 소리를 했어. 진지한 얼굴과 진지한 목소리로 뜬금없는 걸 물었지. “딸기셰이크를 좋아하나요, 바닐라셰이크를 좋아하나요?” 크흡, 하고 헛웃음이 참을 새도 없이 터져버렸어. 반사적으로 크리스는 되게 황당한 표정을 한 채 행맨을 쳐다봤어. 근데 그의 덤덤한, 그저 한결같이 밥에게만 고정된 눈빛과 미소 띤 표정을 보니까 알겠는 거야. 뭐가 딱히 없다는 것을. 농담이면서 진심인 것 같은 얼굴이었어. “묻고 싶은 게 없나 보네요.” “궁금한 건 직접 들으려고요.” “아. 좋네요.” 그래, 쟤한테는 이런 사람이어야 해. 그 생각이 무심코 들었어. 크리스는 앉은 자리에서 그를 다시 올려다봤어. 밥을 향한 그의 시선에서 느껴지겠지. 진지하고 진심이라는 걸 말이야. 진짜로 진짜 같았어. 그러니까 밥을 향한 그의 감정이나 마음 그런 것들이. 와 진짜 좋아하나 봐,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크리스는 그게 좀 신기하고 얼떨떨하겠지. 저렇게나 좋아하는 감정을 전혀 숨길 마음도 없이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게, 크리스가 보기엔 신기했어. 말하자면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터질 듯이 커서 본인도 모르게 스며 나오는 것과는 달랐어. 행맨은 대놓고 보여줬어. 예전부터 그는 연애할 때면 밀당 같은 건 모르고 줄 수 있는 모든 걸 탈탈 털어서 내줬던 남자였으니까.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제 마음을 훤히 꺼내서, 다들 보라고. 그의 숨김없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커다랗게 꺼낸 마음을 가지고 밥에게 달려가는 것만 같았어. 문자 그대로 말이지. 감정이란 추상적인 것인데도 어쩐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기묘하고 한편으로는 대단했어. 정말이지 거창하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됐어. 알아보던 것은 끝났는지 윌이 노트북을 덮었어. 크리스는 슬슬 저들이 있는 소파로 자리를 옮길까 했어. 그러면서 줄곧 오래 참아온 것을 이제는 행맨에게 말하기로 했어. 이것조차 그가 딱히 궁금해하지 않더라도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 이건 아까 초저녁에 두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기도 훨씬 전부터야. 오늘의 약속을 잡던 과거의 날부터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낯설고 신기해서 설레기까지 했거든. 왜냐하면. “로버트가 누굴 소개해 주는 건 제이크 세러신 씨가 처음이에요.” 대강 헤아려본 햇수로만 로버트를 알게 된 지는 거의 이십 년 가까이 되어간단 말이지. 근데 진심으로 어디서 객사나 해버리길 바랐던 로버트의 첫사랑 이후로 이런 일은 처음이거든. 그러니까 여기까지 온 로버트가 기특할 지경이지. 사실 크리스는 첫사랑 그 자식도 직접 본 적은 없었어. 로버트는 그에게 이용당했고, 놀잇감이었고, 그들이 내기를 건 게임에서 그저 말에 불과했으니까. 연인이 아니라. 사랑이 아니라. “빈말 아니에요.” 크리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를 따라서 행맨도 기댔던 몸을 일으켰어. 크리스는 소파로 몇 안 되는 걸음을 떼면서 등 뒤에서 조용히 중얼거리는 혼잣말을 들을 수 있었어. 자기가 로버트를 기특하게 여기는 것과 비슷하게 그의 목소리에서는 언뜻 뿌듯함이 묻어났어. “역시 영광이라니까.” 행맨과 밥은 애초에 술 마실 생각으로 차를 두고 와서 집으로 돌아갈 때도 우버를 타고 갔어. 뒷자리에 앉아서 가는 동안 둘은 말없이 손을 마주 잡았어. 굳이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어. 행맨이 먼저 얹듯이 포개었다면 밥은 거기에 깍지를 껴서 고쳐 잡았어. 행맨은 그만의 이런 소소한 애정 표현이 아주 좋았어. 마음을 보여주는 데엔 뭔가 대단하지 않아도 이대로도 충분했지. 행맨은 어떤 말 대신 조용히 깍지 낀 손을 들어서 그의 손등에 입을 맞췄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법 늦은 밤이었어. 아직 주말이 하루 더 남았지만 시간이 시간인 만큼 그들은 서둘러 씻고 편한 차림으로 침대에 올랐어. 누군가와 침대에 같이 눕는 것은 곧 섹스로 이어지거나, 섹스 후 숨 고르는 순간이 전부였던 밥에겐 요즘 같은 나날이 더없이 행복하겠지. 여전히도 믿기 어려울 테고. 내가 누군가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정말로 잠만 잔다니. 그리고 아침이면 일어나서 또 같이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하고 돌아와서도 이곳에서 이 사람과 여전히 함께라니.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쉽게 믿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해. 밥은 그동안 단순하고 일시적인 쾌락만 좇으면서 살아왔잖아. 진지하고 깊은 관계는 시작될 기미도 보이기 전에 뼛속부터 거부하면서 말이야. 믿기지 않는 것과 별개로 때로는 그와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된 관계가 됐다는 사실이 무섭기도 했어. 하루이틀도 아니고 십 년이 넘도록 그에게 밴 습관 같은 거라서 고치기 쉽진 않겠지. 그저 지금처럼만 하고 바랄 뿐이야. 그래도 한 가지 바뀐 게 있다면. 전에는 언젠가는 끝나버릴 관계가 두려워서 시작하기도 싫고 시작하고 나서도 뒷걸음질 쳤는데, 지금은 그 막연한 두려움을 모르는 척할 수 있었어. 깔끔하게 떨쳐내는 것만이 이겨내는 법은 아니었던 거지. 있으면 있는 대로, 그러나 그게 날 좀먹지는 않도록 무시할 줄 알았어. 씻고 나서도 가시지 않은 술기운에 졸음까지 몰려와서 밥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도 못했어. 겨우 행맨을 쳐다봐도 커다란 눈은 약간 풀려 있고 그래. 분명 졸린데 저를 보려고 기를 쓰고 참는 것 같으니까 그게 귀여워서 행맨은 큭큭 웃으며 품에 안아주겠지. 자꾸 보려고 눈 뜨지 말라며 행맨은 제 손바닥으로 밥의 눈가를 잠시 가려줬어. 이렇게 있다가 잠들면 잠드는 거고 아니면 또 이대로 몇 마디 더 나누는 거지. 자자고 말은 안 하면서 제 눈을 덮은 손바닥을 알아차린 밥이 킥킥거렸어. 꼭 그게 아니어도 가끔 실없는 웃음이 터지곤 했어. 술에 취하기도 했지만 오늘은 유독 기분이 좋은 날이니까. 소중한 사람들에게 또 다른 소중한 사람을 소개했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크리스가 이상한 소리 안 해?” “잘생긴 사람만 좋아한다던데.” “맞아. 그래서 내가 좋아하잖아.” “누구를.” 눈 감은 채로 말하던 밥이 계속 눈을 감고서 손을 들었어. 제 뒷머리를 쓰다듬는 행맨의 손을 가져와 손바닥에 길게 키스했어. 졸음이 깃든 목소리가 낮게 울렸어. 그가 말할 때마다 입술이 닿은 손바닥으로 간지러운 숨결이 느껴졌어. “있어. 제이크 세러신이라고 빌어먹게 잘생긴 남자.” 이런 별거 아닌 시시한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잠드는 일상이 좋았어. “잘 자, 로버트.” 이대로 잠들면 내일 아침 눈 떴을 때 잘 잤어? 인사할 그가 있는 일상이 좋았지. “제이크.” “응.” “키스흡....” 잠결에 중얼거리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 입술에 호선을 그린 입술로 답하는 그와의 일상이 뭉클하게 좋았어. 요 며칠 행맨은 계속 바빴어. 웬만하면 그의 차로 함께 움직였고 밥의 서점과 행맨의 회사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먼저 끝난 행맨이 밥을 기다렸는데, 요즘은 밥이 그를 더 기다렸지. 야근이 너무 늦어지는 날을 빼곤 항상 같이 퇴근했어. 어느 평일 저녁, 먼저 퇴근한 밥은 어김없이 늦는 행맨을 기다리기로 했어. 기다리는 곳은 뻔했어. 서점이나 그들이 자주 가는, 회사와 서점 사이에 있는 그 카페. 이번에는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어. 카페 마감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았고 퇴근길에 가볍게 먹을 저녁을 사가는 직장인들이 많았어. 그 덕분에 밥은 자기들도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사서 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한 테이블을 차지했어.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끝났다는 행맨의 전화가 걸려 왔어. 밥은 그럼 일단 카페로 오라고 했지. 너무 늦은 시간은 아니어서 잠깐 앉아 있다가 가도 좋을 듯했어. “나 별로 안 늦었지?” “응. 수고했어, 오늘도.” 조금 뒤 행맨이 도착했어. 그는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았지. 밥은 커피 대신 셰이크를 마시며 두 손을 차갑게 얼리던 중이었어. 행맨이 오면 그의 셔츠 목 안으로 손을 넣어서 장난치려고. 역시나 목을 살짝 움츠리며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반응이 재미있었어. 근데 행맨도 지지 않고 반격하겠지. 제 목에 닿은 손을 잡아다가 손바닥 손등 손목 가리지 않고 다 입을 맞추기 시작했어. 조금 전에 오늘도 수고했다고 포옹하며 뺨에 키스하는 것 정도는 이제 익숙해졌는데, 그 외에 이런 식으로 그것도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애정 표현을 퍼부으면 밥은 지금처럼 곤란해하거나 고장나버리곤 해. “알았어, 이제 그만. 그...만, 미안해.” “늦었어. 확 눕혀버릴까 보다.” “무슨, 잠깐만. 진짜로 지금 우리 쳐다본다니까?” “이거 공짜로 보여주면 안 되는 건데.” 쉽게 물러서지 않는 입맞춤을 밀어내며 버텨보다가 이래선 안 되겠는지 밥은 역으로 물을 듯이 다가갔어. 계속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손등을 깨물려고 고개 숙여 들이대자, 행맨이 먼저 그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어. 어, 하기도 전에 쪽 하고 가볍게 훔치고 나서야 놔줬지. 먼저 시작했지만 대패한 밥은 입술을 축이며 똑바로 앉았어. 그제야 다 큰 성인 남성 둘이서 애들처럼 유치한 장난을 쳤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게 물들며 창피함이 몰려왔지. 이제 그만 일어날 때였어. 금세 귀부터 빨개진 걸 보면서 행맨은 작게 소리 내 웃었어. 같이 산 이후로 느닷없이 장난치는 일이 늘었거든. 자길 더 서슴없이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점점 편해질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밥은 계속되는 행맨과의 일상을 보내면서 제 예상이 틀렸음을 깨달았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믿었고 그래서 영원하지 않을 설렘이 사라지면 자긴 얼마나 추하게 변할까 걱정했는데. 그렇다고 벌써 그가 설레지 않다는 건 아니었어. 그는 여전히 생각도 못한 곳에서, 또는 예측 가능한 방향에서 설렘을 가득 안고 달려왔어. 밥이 몰랐던 것은 한 사람을 알아가며 편해질수록 설렘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거기에 다른 무언가가 새롭게 얹어진다는 거였어. 처음이 주는 특권 같은 설렘이 있다면, 여전히 두근거리게 지속되는 익숙한 설렘도 존재한다는 것을 행맨을 보며 깨달았어. “샐러드랑 샌드위치도 같이 사 가자. 커피 마실 거지?” 밥이 먼저 일어났는데 마침 행맨에게 전화가 걸려 왔어. 입모양으로 회사 라고 말하기에 밥이 얼른 물으면서 자기가 주문하겠다고 나섰어. 고개를 끄덕이는 행맨을 지나쳐, 천천히 통화하고 나오라며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카운터로 향했어.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아서 밥은 테이블로 돌아가지 않고 카운터 근처에서 기다렸어. 어차피 행맨도 전화를 끊으면 알아서 나올 테니까. 한쪽에 서서 휴대폰을 보며 기다리는 동안 그보다 앞서 주문한 커피들이 하나둘 나오고 있었어. 조금 더 기다리고 있으니 곧 그의 차례가 되었지. 통화가 길어지는지 그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은 행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이블로 다시 돌아가야 했어. 밥은 포장된 샐러드와 샌드위치, 커피까지 확인한 다음 그것들을 받아서 돌아갔어. 그리고 거기서 보게 되었지. 테이블에 혼자 있어야 할 행맨의 맞은편에 그때 봤던 키 작고 눈이 큰, 저처럼 갈색의 곱슬머리를 가진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밥은 그 남자와 마주보고 앉은 행맨의 뒷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파월풀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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