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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시그널이 있는 식스그레이스가 보고싶다

식스는 남의 물건에 쉽게 손대지 않았다. 예의라 설명할 수도 있었고, 오랜시간 훈련받은 요원의 습관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손이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과 증거가 머물렀다. 쌓였던 먼지가 밀리고, 각도가 미세하게 바뀌었으며, 땀이나 각질 등의 DNA가 남았다. 그는 그런 것들을 배웠고, 오래 기억한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래서 허락받지 않은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레이스의 물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재 책상 위에 벗어 둔 안경, 소파 쿠션 사이로 반쯤 들어간 리모컨, 온 집 안을 돌아다니며 찾게 되는 자전거 열쇠 등, 식스는 대개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그레이스가 매번 머그컵을 놓고 일어나는 자리도, 냉장고 안에서 먼저 비워야 하는 우유도, 서재 두 번째 책장 맨 윗칸에 꽂힌 논문집은 - 문제의 그것이 맞다 -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도 모두 기억했다. 한 번은 그레이스가 볼펜 하나 때문에 서재를 엎은 적이 있었다. 식스가 보기에는 다른 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레이스에게는 달랐다. 이름까지 붙여 준 애착 볼펜이었다. 허리를 숙인 채 책상 아래를 살피다 다시 일어나 서랍을 뒤졌다. 잔뜩 애가 탄 손짓이 휩쓸고 지나간 책장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여기 어딘가 있을 텐데. "분명히 봤는데." 복슬한 뒷머리를 긁적이며 찾는 모습이 귀여워서 조금 더 지켜볼까도 했지만, 이대로 두면 하루 종일 집안을 뒤집고 다닐 게 뻔했다. 식스는 책에서 시선을 완전히 떼지 않은 채 의자를 말없이 가리켰다. 볼펜은 팔걸이 안쪽 좁은 틈에 애처롭게 걸려 있었다. 그레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멋쩍게 웃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식스는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에는 방금 전의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안경도 오랫동안 그런 물건이었다. 그레이스는 처음에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식스가 자신의 안경에 손을 대는 날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키스하다 걸리적거려서일 수도 있었고, 잠들기 전에 어차피 벗어야 해서일 수도 있었다. 종종 한쪽 귀 대신 턱에 걸치기도 했지만 본디 안경은 쓰고 있다가도 벗고, 벗어 두었다가도 다시 찾아 쓰곤 하는 물건이다보니 별일 아닌 해프닝으로 넘기기 쉬웠다. 다만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자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날은 벗겼고, 어떤 날은 그대로 두었다. 어느 날은 거실 소파에서 그대로 입을 맞추면서도 손대지 않았고, 어느 날은 아무 말 없이 가까이 다가와 코받침을 잡고 천천히 벗겨 내렸다. 기준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식스는 늘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으므로 오히려 그 차이가 눈에 띄었다. 그러니 안경에도 이유가 있을 터였다. 답은 늦게 오지 않았다. 식스가 먼저 안경다리를 잡는 날이면, 대개 그날의 다른 일들은 뒤로 밀렸다. 수업도, 논문도, 학생들도, 가끔은 골치 아픈 일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순서가 바뀌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안경을 벗기는 날에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다른 무엇보다 먼저 하려는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보통은 허리를 끌어안는 것으로 시작했다. 거실 소파, 서재 문 앞, 막 샤워를 끝낸 그레이스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욕실 등.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안경을 벗겨 테이블 위에 놓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감았다. 그 순서는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대개 침실에서 끝났다. 그레이스는 어느 순간부터 안경다리를 향해 뻗어 오는 손끝만 보고도 알게 되었다. 아, 오늘은 늦게 자겠구나. 그날 저녁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식스는 태블릿을 보고 있었고, 그레이스는 논문을 읽고 있었다. 둘은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논문 위로 그림자가 내려앉자마자 안경다리에 손이 닿았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 집에서 안경을 그렇게 만지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코받침이 들리고 귀 뒤를 누르던 얇은 압력이 사라졌다.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글자는 물에 젖은 잉크처럼 가장자리부터 무너졌다.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왜요." "그냥요." 식스는 안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안경을 쓰는 사람의 일부라도 옮겨 놓는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식스는 자기 물건에 애착을 두지 않았다. 망가지면 고쳤고, 고칠 수 없으면 버렸다. 오래 머물지 않는 사람에게 물건은 대개 그 정도였다. 그런데 그레이스의 안경만은 달랐다. "코트." "네." "이거 신호 맞죠." 식스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무슨."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그는 대답 대신 한 걸음 더 가까이 왔다. 그레이스는 논문을 덮었다. 종이 끝이 손가락 아래에서 부드럽게 밀렸다. 그런 다음 식스의 왼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처음부터 정해진 동작은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손끝이 반소매 아래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식스가 멈췄다. 숨도, 어깨도,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식스는 쉽게 멈추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그 짧은 정지를 기억했다. 그 뒤로 여러 번의 실험을 반복한 끝에 가설이 증명되자, 확인은 거리낌 없이 습관의 단계로 넘어갔다. 식스가 안경을 벗기면 그레이스의 손은 자연스럽게 같은 자리를 찾았다. 누가 먼저 정하거나 말로 합의한 적은 없었다. 다만 충분히 오래 반복되었다. 몇 시간 뒤 그레이스는 마주 보고 누운 식스의 팔을 만지고 있었다. 침대맡 조명의 조도는 낮았다. 노란빛은 피부 위를 지나가며 크고 작은 흉터들을 드러냈다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었다. 총알이 스쳐 간 자리, 칼끝이 들어왔던 자리, 부러진 뼈가 붙으며 남긴 굴곡들. 희미하게 남겨진 상처들은 CIA 비밀 요원 시에라 식스에 대한 일종의 역사이자 증거이다. 깊이 파인 궤적 위로 새살이 어설피 솟았다. 그레이스의 손가락이 팔 안쪽의 흉터에서 멈췄다. "이건요?" 식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총." "언제?" 대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그레이스도 재촉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쪽이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식스는 대답하지 않기로 마음먹으면 끝까지 입을 다물 수 있었다. 벌거벗겨진 채 전기 고문을 받고도 버텨낸 사내다. 그런데 그레이스의 침묵은 심문과 달랐다. 답을 계산하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결국 식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4년 전. 비행기에서요." 그레이스가 눈을 깜빡였다. "비행기 안에서요?" "예." "비행기 안에서 총을 맞았다고요?" "네." 비행기. 총상. 살아남음. 그 사이에 들어가야 할 설명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 설명으로는 아무것도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해 안 하셔도 됩니다." "그건 제가 결정하는 거구요." 식스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대부분은 상처를 보면 사건부터 물었다. 누구 짓인지, 작전은 성공했는지, 얼마나 심했는지, 복귀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등. 보고서에도 그런 것들이 적혔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달랐다. 언제였는지, 아팠는지, 무서웠는지, 혼자는 아니었는지를 궁금해했다. 처음에는 그 질문들이 낯설었지만 나중에는 조금 익숙해졌다. "튀르키예 국경 근처였습니다. 작전 끝나고 빠져나오던 중에." "그게 말이 돼요?" "됐으니까 살아 있겠죠?" 그레이스는 납득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넘어가겠다는 뜻에 가까웠다. 어차피 나중에 다시 물을 사람의 태도였다. 그의 엄지가 흉터 위를 천천히 문질렀다. "아팠어요?" 식스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결국 늘 그 질문이었다. 식스는 문득 병실 냄새를 떠올렸다. 소독약과 수액, 그리고 제 몸을 어설피 덮고 있던 얇은 담요까지. 의사는 운이 좋았다고 했고, 상관은 언제 복귀할 수 있냐고 물었다. 동료 중 누군가는 실없는 농담을 건넸지만 아팠냐고 묻는 이는 없었다. "총 맞으면 원래 아픕니다." "과학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답변인데요." "총 맞아 본 적 없잖아요." "없죠." "그럼 설명해도 모를겁니다." "흥." 그레이스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격하게 뒹굴고 난 뒤라 머리가 엉망이었다. 이번엔 갈비뼈 아래의 자국으로 옮겨 갔다. "이건?" "파리." 그레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좋은 도시잖아요." "별로." "파리는 낭만의 도시 아니에요?" "제겐 아니었습니다." "왜요?" "칼에 찔렸거든요." 짧은 정적 뒤에 그레이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낭만이라고는 없네." "제 직업이 원래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은 파리라고 하면 에펠탑이나 센강을 떠올린다. 식스에게는 비에 젖은 석재 바닥과 옆으로 넘어진 오토바이, 자켓 안쪽까지 스며들던 피 냄새가 먼저였다. 프랑스 관광청이 알면 펄쩍 뛸 기억이었다. 다만, 싫어하는 도시는 아니었다. 그저 좋아하는 도시와 싫어하는 도시는 따로 있고, 죽을 뻔한 도시는 또 따로 있을 뿐이었다. "불쌍해라." "진짜로?" "진짜." 그레이스는 오늘 날씨를 말하듯 담담했다. 식스는 그 얼굴을 슬쩍 보았다. 안쓰럽다거나 흥미로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엄지가 갈비뼈 아래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누가요?" "기억 안납니다." 그레이스가 이번에는 정말 놀란 얼굴을 했다. "찌른 사람을 기억 못한다구요?" "그 날 절 찌르려던 놈이 여섯 명쯤 됐어요." "...아." 이상한 기준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총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여섯 명에게 둘러싸여 칼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비교적 빠르게 이해하다니. "의외로 더 별로였네요." "뭐가요." "파리요. 소매치기만 조심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관광객이면 대개 그 정도면 됩니다." "코트는 관광객이 아니었으니깐." "그렇죠." 그레이스의 손가락이 흉터 주변을 느릿하게 훑다 끝자락에 머물렀다. "그래도 살아남았고..." 창밖 어디선가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가 멀어졌다. 그레이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손을 두고 있었다. 식스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레이스는 상처보다 그 상처를 지닌 사람을 더 오래 들여다보곤 했다. "전부 기억해요?" "기억하죠." "진짜?" 흉터는 많았다. 너무 많아서 거울을 보다가도 이런 게 있었나 싶은 자국을 발견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대부분은 기억이 났다. 솔직히 잊기 쉬운 일들은 아니었다. "전부는 아니고." "거짓말." "몇 개는 기억 안납니다." "그럼 그건?" 그레이스가 어깨 근처의 희미한 자국을 가리켰다. 총상, 자상, 화상 등 어느쪽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흔적이었다. 수술 자국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자국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진짜 모르겠는데요." 그레이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드디어." "왜 기뻐해요." "사람 같아서요." 식스의 입가가 살짝 풀렸다. 그레이스의 시선이 다시 내려갔다. 어깨, 쇄골, 팔뚝, 손목. 새로운 이론이 실린 학술지를 읽는 학자처럼 한 군데씩 천천히 훑었다. 빠진 내용이 있는지 확인하는 눈이었다. "또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닌 얼굴이 아닌데." 그레이스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생각보다 많아서요." 생각보다라, 자신도 가끔 그렇게 느끼곤 했다. 처음에는 하나였고, 그 다음에는 둘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세는 일을 그만두었다. 직업상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손끝 아래 차례로 놓이면 당연하다는 말은 조금 얇아진다. "진짜 기억 안나요?" "예." "신기하네." "뭐가요?" "그렇게 많은 걸 기억하면서 그건 모른다는게." 어떤 일은 날짜뿐만 아니라 날씨까지 기억이 났고, 누가 먼저 공격했고 마지막까지 누가 살아남았으며, 당시에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도 떠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저 자국만은 비어 있었다. 언제, 왜 남았으며 아팠는지 여부마저 기억나지 않았다. "찾아내게요?" "그래보려구요." "어떻게?" "생각 중이에요." "흉터를 보고?" "흉터를 보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식스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암살자 중 하나를 붙잡고 흉터의 출처를 추리하는 과학자라니. 몇 명을 죽였는지보다 왜 저 자국이 남았는지가 더 궁금한 표정은 덤이었다. 그는 아마 끝내 알아내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한동안 저렇게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때 식스의 시선이 제 손목으로 내려갔다. 오른쪽 팔목 안쪽에 남은 오래된 화상 자국은 다른 상처들과는 결이 달랐다. 저 흔적을 모를 리 없을 터였다. 처음에는 그저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우연일 수 있지만 세 번째쯤 되자 알아차렸다. 그레이스는 보았지만 알고도 묻지 않았다. "라이." "응?" 식스는 눈짓으로 손목을 가리켰다. "궁금해도 안 물어보는 거, 알아요." 그레이스는 말이 없었다. 부정할 타이밍을 놓친 얼굴이었다. "...티 났어요?"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났다. 그레이스는 식스의 손목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싫어할 것 같았어요." 그 말에는 덧붙는 설명이 없었다. 손목 안쪽에 남은 오래된 화상 자국은 총상이나 자상과 달리,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려면 훨씬 오래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레이스의 손이 팔 위에 내려앉았다. 흉터에서 한 뼘쯤 떨어진 자리였다. "궁금한 거랑 알아야 하는 건 다르니까." 한 박자 늦게 이해한 식스의 손목 근육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그런 예의를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식스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레이스의 머리칼을 헝클었다. "왜 그래요." "글쎄요." 그레이스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더 묻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은 이상하게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어렵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덜 익숙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냉장고가 낮게 울렸고, 밖에서는 늦게 귀가하는 누군가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그 소리는 금방 멀어졌다. 식스는 언젠가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묻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라면. 몸을 기울여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안경을 집어 들었다. 몇 시간 전 자신이 벗겨 두었던 그것을 아무 말 없이 그레이스의 얼굴에 씌워 주었다. 그레이스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번엔 또 왜요?" "그냥요." "아까는 벗기더니." 식스는 안경다리를 귀 뒤에 걸어 주었다. 섬세한 손짓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가 벗기는 거랑 라이가 안 쓰는 건 다르니까요." 그레이스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손끝을 다시 움직였다. 오래전에 아문 자국 위에서 가만히 머물렀다. 고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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