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분주한 일생이었다. 26년간 거의 꿈속에서 지내왔다. 불꽃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 짧은 일생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완전히 자신을 잊고 있었다. 모방과 허무함의 연속이다. 왜 좀 더 살지 못했는가. 비록 어리석고 불행한 삶일지라도 나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식이 무엇인가, 사상이 무엇인가. 적어도 내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남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것을 내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가련한 일인가. 친구여, 형제여, 자신만의 사상을 가지시오. 지금 나는 죽음을 앞두고 내 것이라곤 거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고향 생각을 해 보지만 잘 정리되지 않는다. 아니, 부모님과의 끈이 점점 끊어져 가고 있는 듯하다. 내 인생 최대의 고통이다. 이 방을 나갈 때까지가.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나고 얼마 남지 않았다. 자, 힘내자. 9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느긋하고 유유히 울려 퍼진다.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누님, 아우야 행복하기를 바란다. 1번 열차 출발! 장하다. 장하다. 나도 그렇게 하리라. 앞으로 2,3분이다. 나도 저렇게 만세를 외치리라. 왔다. 때가 된 것 같다. 이것으로 이 기록을 마치려 한다. 세상이여, 행복이 가득하라. 조문상. (개성출신 군인 군속. 1947년 2월 25일 싱가포르 장기형무소에서 사형.) ------------------------- 부산시민공원 안에 작은 역사관이 있는데, 거기에 '조선인 전범'으로 사형당한 몇 분의 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진으로 찍어왔다가 그 중 하나를 옮겨봤습니다. 부산시민공원 부지는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의 경마장이었고, 2차대전 중에는 일본군의 훈련장이었다가, 유엔 산하기구가 짧게 사용했던 시기를 거쳐 꽤 오랫동안 미군부대가 들어섰습니다. 시민공원으로 조성된지는 이제 한 10년 남짓 된 걸로 아는데, 지역 근대사의 일면을 간직한 곳이기에 시민사회의 오랜 노력을 통해 공원으로 조성했다고 합니다. 일제는 동아시아 각지의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기 위한 군속을 사실상 강제징용 했는데, 부산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3천여명이 동남아 각지로 파견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국인 포로감시원 중 일부는 전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았고, 징역을 살거나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조선인 B,C급 전범'입니다. 조문상은 경성제대 문과를 다닌 엘리트로 영어를 잘해서 통역을 했고, 90년대에 일본 NHK에서는 '조문상의 유서'라는 다큐를 방영하기도 했습니니다. 애초에 잊혀진 '조선인 전범'의 존재를 발굴해낸 것도 일본 지식인들이었다고 하네요. 그땐 지금처럼 극우화 되기 전이었으니.. 일제는 연합군 포로들에게 극한의 노동을 시켜 태국 - 미얀마를 잇는 태면철도를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콰이강의 다리' 건설 현장이 가장 악명 높았습니다. 천광린이라는 조선인은 이 현장에서 영국군 포로 250명을 관리하는 관리 노릇을 하다가, 전후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을 당합니다. (이 분의 유서 사본도 시민공원 역사관에 있음) 호주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의 맨부커상 수상작,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그 당시 호주군 포로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 조선인 포로 감시원이 등장하는데, 조문상을 모델로 한 것이라네요. <먼 북으로 가는 길>은 아마존 프라임에서 5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져 작년(2025)에 공개되었습니다. 주연배우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에서 피조물로 나왔던 제이콥 엘로디네요. https://youtu.be/DFlSCcnBLTw?si=-II4bpzXhbMi81_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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