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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해리가 팜보이루크와 한심해하던 커플처럼 지지고볶는게 보고싶다 하

상 # 중 # 중하 # 루크해리 물질주의자들 페파해리 별전쟁 루크 하루가 온통 생각지도 못한 충동의 연속이다. 다짜고짜 학과 사무실에 찾아가서 거짓말까지 해가며 학생 정보를 알아낸 것도, 비서에게 대뜸 핸드폰을 내놓으라며 채근한 것도. 그리고 지금은 손수 차를 몰아 이스트 빌리지의 워크업 아파트로 향하는 중이다. 면접자 중에 루크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는 일정대로 움직인 일이 단 하나도 없었다. 분명 인사팀 플로어에 방문하려던 다른 이유가 있었을 텐데 너무 사소해서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미 스케줄은 꼬일 대로 꼬였고, 남은 시간도 예정대로 돌아갈지 불투명하기만 하다. 해리는 운전하는 내내 손끝으로 초조하게 핸들을 두드렸다. 사무실을 박차고 나올 때 비서가 뭔가 소리치긴 한 것 같은데. 벌써 몇 개의 일정을 미뤘는지 모르겠다. 머리로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몸뚱이가 먼저 움직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무런 계획조차 없었다. 단지 목소리를 가장할 수 있는 전화 따위보다는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리라는 얄팍한 믿음 하나뿐이었다. 아무런 근거도 논리도 없는 계산이었다. 정작 루크가 똑같은 말을 했을 때는 달라질 것도 없다며 냉정하게 등을 돌려놓고서 이제 와 그 애의 마음이 이해되다니. 자신의 꼴이 우습기만 하다.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일찌감치 현관의 문턱까지 발을 들여서 다행이었다. 정확한 층과 위치까지 알고 있으니 말이다. 길가에 적당히 차를 세워놓고 묵직한 출입문을 밀고 들어갔다. 루크가 거주하는 곳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에서 제일 꼭대기였다. 아마도 주거 비용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었겠지. 루크가 있을 때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좁은 나무 계단이 층계를 올라가는 내내 삐그덕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해리는 다섯 층을 쉬지도 않고 걸어 올라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현관을 두드렸다. 점잖을 떨기에는 마음이 급한지라 노크라고 표현하기에는 거친 소리가 길게 뻗은 복도에 흩어졌다. 쾅! 쾅! 주먹을 움켜쥐고 두 번. 그리고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이름을 부르면서 또다시 쾅! 쾅! 신경질적인 소리가 두 번. “루크 스카이워커!” 모르는 척하기에는 큰 목소리가 복도 안을 쩌렁쩌렁 울린 탓일까. 차단된 전화 너머의 무음처럼 아무 반응도 없을 것 같았던 현관이 벌컥 열렸다. 흠칫 당황한 해리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문밖으로 몸을 내민 사람은 기대했던 샛노란 금발이 아니라 낯선 남자였다. 그제야 혼자 사는 집이 아니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룸메이트가 있다고 했었다. 그것도 두 사람이나. 루크가 온몸으로 막아서면서까지 보이기를 질색했던 쪽이 누구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불량스럽기 그지없는 자세로 문틀에 기대어 서서 팍 오만상을 쓴 채 초면인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가 그리 가까이 두고 싶지는 않은 인상의 남자이긴 하다. 해리는 그의 무례한 모습에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고 그 다음으로는 생각보다 많은 나이에 놀랐다. 비슷한 또래와 지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뉴욕대 학생이 많은 지역이니만큼 동기나 선후배이겠거니, 짐작했었다. “뭐야?” 남자는 대뜸 반말을 했다. 마치 잡상인이라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자 성급하게 문을 두드렸던 행동에 뒤늦은 자각이 찾아와 큼, 작게 헛기침을 했다. “여기 사는 학생의 지인입니다. 루크 스카이워커를 만나러 왔습니다만.” “아아—… 걔?” 무성의한 대답을 툭 내뱉더니 턱을 추켜들고 흐음, 무언가를 고민하듯 눈을 굴렸다. 해리는 남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좁은 실내를 훑었다. 세 사람이 지내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공간이었다. 나름대로 정리를 하는 것 같다만, 현관에서 거실과 방의 위치를 대강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집은 조금만 흐트러져도 금세 태가 나는 법이라. 해리의 눈에 보이는 모습은 난잡하기만 했다. 그런 해리의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내부를 가리듯 슬쩍 몸을 움직인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이사 갔어.” “…예?”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치듯 되물었지만 남자는 뻔뻔했다. “걔 방 뺐다고.”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해리는 분명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있는 방 안에 눈에 익은 모형이 있는 것을 발견했었다. 어수선한 거실과는 달리 두꺼운 전공 서적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갈하게 꽂혀있는 책상 위에 놓인 그것은 루크와 보았던 영화의 피규어가 틀림없었다. 가상 캐릭터를 구분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는 해리였으나 흥분한 얼굴로 입을 헤벌쭉 벌리며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녹색 외계인을 업은 헬멧 쓴 남자라니 워낙 특이하기도 했고. 방을 빼기는커녕 짐을 싸려는 흔적조차 없었던 그 공간이 루크의 방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쩌면, 아니 아주 높은 확률로 루크가 없다는 것까지 거짓말일 테다. 해리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학과 사무실을 쳐들어갔던 것처럼 무작정 밀고 들어갈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 자리에 서서 루크가 얼굴을 내밀 때까지 이름을 부르며 고함을 치는 방법도 있다. 그래봤자 남자의 체구는 해리와 비슷한지라 드잡이를 한다면 제치지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후줄근한 차림새를 하고서 해리를 평가하듯 위아래로 눈을 굴리는 남자의 시선이 불편하기 짝이 없어서, 이런 남자와 비슷한 수준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서 루크를 불러내고 나면, 그다음은? 아무런 계획도 대책도 없었기에 방해물 앞에서 행동의 동기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이게 정말로 얼굴을 마주보고 말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가? 해리는 차마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루크의 이유를 내심 납득하고 말았기에 더욱이. 머리가 차가워지자 비로소 현실이 사고를 덮쳤다. 루크 한 명으로 인해 하루 중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낭비되었는지, 그로부터 야기될 손해가 얼마나 자신을 번거롭게 만들지. 문밖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으면서도 없는 척, 룸메이트를 내세워 유치하게 숨어버린 어린애를 계속 신경 쓰기에는 해리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가 너무나 많았다.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가 이내 힘없이 늘어트린 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실례했군요. 소란을 부려 미안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오히려 남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거— 되게 잘난 분이시네.” 남자의 이죽거림으로부터 등을 돌리자 미련없이 문이 닫혔다. 방음이 그리 좋지 못한 건지 문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루크의 이름이 섞여 있는 것도 같았지만 애써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머릿속으로 서로 다른 생각이 산발적으로 떠올라 실타래처럼 엉켰다. 우선 비서에게 전화부터 해야겠지. 이대로 자퇴하는 건가? 변동된 스케줄을 확인해야 하니까. 정말로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펑크 난 업무를 수습하려면 퇴근은 못 하겠어. 이번에도 잊을 수 있을까? 화가 났을 테니 비서에게 줄 디저트를 좀 사자. 루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도, 함께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밖으로 나왔더니 보조석의 유리가 깨져있었다. 보아하니 옆 좌석에 던져놓은 재킷을 집어 간 모양이다. 신고하기에도 애매한 피해인 탓인지 별달리 화가 나지도 않는다. 해리는 꼭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무심하게 돌아가 운전석에 올랐다. 기계적으로 안전 벨트를 매고 시동을 넣고 운전대를 잡았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어야 하는데 생각과 다르게 움직이는 몸은 엉뚱하게도 핸들 위에서 손가락 끝만 까딱거리고 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톡. 톡. 톡. 하염없이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한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타인으로부터 이토록 일방적으로 배제되기란 처음이었다. 낯선 기분이 나아갈 방향을 잃고 주변을 배회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야 해리는 늘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깨진 조수석 창을 통해 이스트 빌리지의 소음이 여과 없이 들어왔다. 뉴욕 어디든 예외 없는 사이렌 소리나 골목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웃음소리 같은 것. 해리는 시트 위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치워야 하겠지만 굳이 급할 건 없었다. 차는 바꿔 타면 그만이고 어차피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옆 좌석은 늘 비어 있다. 당연한 일이다. 해리는 그 당연함에 새삼 적응해보려는 듯 한참을 더 빈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철컥.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렸다. 비스듬히 틀어진 차량이 느릿한 속도로 도로에 진입했다. 해리는 백미러를 보지 않았고 백미러에 비치는 다섯 칸 위의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차가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손가락 끝은 여전히 핸들을 두드렸다. 톡. 톡. 톡. 깨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깥바람이 빈 공간을 휩쓸고 자꾸만 해리의 머리카락을 성가시게 흩트렸다. / 해리의 일과는 얼핏 변함이 없었다. 그는 상심했다고 해서 업무에 개인의 문제를 끌고 들어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비서는 그에게 약간의 잔소리와 불만을 토로했지만 유능하게 업무 스케줄을 재조정했다. 다행히 그날의 일로 펑크 난 일정 중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다만 꼬여버린 일정을 수습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수고스러움이 뒤따른 건 당연하다. 해리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면 불필요한 생각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날짜를 가늠해 보면 루크와 있던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짧았다. 파인다이닝에서 루크를 마주치고 카렌과 세 번의 데이트가 있기까지 고작해야 20일 남짓.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세 번의 주말이 지나갔다. 타트빌에서 보냈던 날들과 꼭 비슷한 시간이다. 그때도 해리는 타트빌의 기억을 잔뜩 끌어안고 뉴욕으로 돌아왔었다. 나즈막한 언덕을 타고 올라오던 타트빌의 풀잎 소리와 소 울음소리가 뉴욕으로 향하는 해리의 등 뒤를 끈질기게 쫓았다. 어린 소년의 되바라진 고백과 그 아이가 건네준 흙내 섞인 과실의 향기가 마치 감각에 새겨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주 잠깐 동안은 그랬었다. 기억 속에 머금은 타트빌의 정취를 잊기까지 얼마나 걸렸더라. 고작 20일이라는 시간 치고는 인상적으로 남은 기억이었으나 그래봤자 20일이었다. 일주일? 아니, 열흘은 걸렸던가. 바쁜 일상에서 추억은 사치품이었기에 해리는 루크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머릿속에서 완전히 그를 지워놓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평소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휩쓸리다 보면 고작해야 20일에 지나지 않는 시간쯤은 썰물처럼 밀려 나가고 말 거라고. 다만 해리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수가 있다면 루크의 삶에 슬쩍 발을 디딘 것이 전부였던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 침범당한 쪽은 해리였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해리 스스로 발을 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이미 한 번 스며들었던 것을 희미한 자국으로 남겨놓는 것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더 큰 차이가 있었다. 찬장을 열면 나초 봉지와 코코아 가루가 보였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바구니에는 낱개 포장이 된 잼 쿠키가 담겨있지만 손을 대는 사람이 없으니 도통 줄어들지를 않았다. 빨래통에 넣어놓은 캐릭터 셔츠가 깔끔하게 세탁되어 일상복과 함께 걸려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그것을 서랍 깊숙이 넣는 정도가 해리의 최선이었다. 차라리 전부 쓰레기통에 쏟아버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일주일, 그리고 열흘이 지나도 그러지 못했다. 지우지 못한 흔적은 계속해서 해리에게 남았다. 익숙함을 찾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다. 해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울컥, 짜증이 올라오는 순간 무심코 핸드폰에 손이 가는 것은 이미 해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진 행동이었다. 그때마다 해리는 더는 아무런 알림이 없다는 걸 상기하면서도 메시지 목록 최상단에 올려놓은 핀 표시를 풀지는 못했다. 이미 길들여진 익숙함이 본래의 궤도라고 여겼던 일상에서 자꾸만 해리의 신경을 건드렸다. 스트레스는 쌓이는데 그것을 풀어줄 전화벨은 결코 울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해소할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은 쌓인다. 보고서를 뭉치로 짊어지고 퇴근 아닌 퇴근을 했다. 시장은 늘 시간과의 싸움이다. 날이 바뀌기 전에 확인하고 분석해야 하는 자료들이 너무 많았다. 펜트하우스로 들어오자마자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서재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를 대신해 머그컵 하나로 대충 때울 심산이었다. 늘 마시는 짙은 에스프레소를 내렸다가, 아직까지도 냉장고에 남은 우유 팩을 떠올리고서 조금이나마 허기를 달래보기 위해 라떼로 만들었다. 그것을 데스크에 두고 서류를 검토하던 해리는 한 모금 마셔본 후에야 우유가 진작에 상해있었음을 알았다. 하기사 벌써 몇 주나 지났으니 상한게 당연하다. 대체 언제부터 우유가 있는 게 자연스러웠다고, 상했을 걸 생각도 못 한다니. 문득 몸을 내리누르는 피로감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보고서를 덮었다. 결국 라떼를 전부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다시 에스프레소를 내리면서 예전에는 스트레스 관리를 어떻게 했었더라,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기억을 떠올리다가 와인 셀러에 생각이 닿았다. 술을 마셨다가 거하게 사고를 친 이후로는 비즈니스 자리에서 곁들이는 반주마저 기피하는 중이지만 본래 기분이 언짢거나 유난히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가벼운 시음을 했었다. 루크가 왔던 날 새로 딴 와인이 아직도 반병이나 남아 있는데 손을 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향은 다 날아가고 시큼한 식초 냄새를 풍길 것이다. 이번 주에는 아직 한 병도 열지 않았고 그건 지난주도 마찬가지였다. 해리는 새 와인을 구매하지도 않았다. 메일함에는 애용하는 샵으로부터 받은 시즌 추천 메일이 열어보지도 않은 채 묻혀 있을 테다. 셀러의 유리문 안쪽에서 반짝이는 온도 표시등을 바라보다가 결국 이번에도 건드리지 않고 등을 돌렸다. 새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생수 한 병만 들고서 서재로 돌아갔다. 메일함을 열어보니 예상대로 열람하지 않은 추천 메일이 있었다. 모든 고객에게 뿌리는 공통 카탈로그가 아니라 해리의 취향을 고려하여 선별했을 이번 시즌의 맞춤 제품은 피에몬테의 화이트 모스카토와 에밀리아 로마냐의 레드 와인이다. 해리는 추천서에 적힌 노트를 읽었다. 모스카토 다스티, 아카시아꽃의 달큰한 꿀 향기. 오렌지와 살구의 산뜻. 풋풋한 과일 껍질의 풍미. 람브루스코, 청량한 제비꽃 향기. 은은한 체리와 딸기의 상큼함. 붉은 장과의 잔향… 노트북의 셀러 관리 어플리케이션을 열어 보았다. 분기마다 재고 점검을 하면서 소소하게 시음 노트를 기록했고, 구매 내역을 정리해 왔다. 이번 분기 점검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해리는 습관처럼 숫자를 확인했다. 산지 순으로 정렬된 목록에는 부르고뉴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은 루아르, 그리고 보졸레였다. 대체로 탄닌이 적고 산뜻한 종류다. 그때그때 짤막하게 적어놓은 시음 노트에 비슷한 키워드가 반복되었다. 적사과, 체리, 산미 높음. 젖은 흙내음. 약한 탄닌과 단향. 사과 껍질. 붉은 과일, 약한 오크향. 풀 향기. 매입 순으로 정리해도 마찬가지였다. 스크롤을 쭉 내리며 침체된 시선이 대강 화면을 훑었다. 붉은 과실. 달큰한 향기. 흙내음. 청량감. 햇볕에 데워진 풀밭. 그러다 어느 해의 겨울에는 보르도를 몇 종류 시도 본 흔적이 있지만 재구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무거움. 과한 탄닌. 변덕을 부리듯 끼어든 말벡도 마찬가지였다. 거칠고 건조함. 결국은 다시 부르고뉴. 피노 누아와 같은 가벼운 것들. 의도하지 않더라도 취미가 길어지면 취향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법이다. 일관된 선호 지표에 의미 부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역순으로 내려가던 스크롤이 페이지의 맨 끝에 다다르자 해리의 시선은 오 년 전의 가을이 저물어갈 무렵에 적힌 첫 번째 노트에 머물렀다. 해리의 첫 와인 컬렉션은 초심자가 고를 법한 달콤한 리슬링이었다. 마치 막 짜낸 주스처럼 입안 가득 과즙을 터트리는 그 투명한 과실주는, 언제나 해리의 와인 셀러 한 켠에 놓여 있다. 해리는 어플리케이션을 종료했다. 등받이에 몸을 파묻으며 고개를 젖히고,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해의 타트빌. 그리고 뉴욕. 해리는 짧은 휴가가 안겨준 달콤함으로부터 돌아와 완벽하게 일상으로 복귀했었다. 분명 그랬을 텐데도. / 아침저녁뿐만 아니라 한낮에도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맨해튼의 최남단에서 넘어오는 강바람이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고층 빌딩의 사이사이를 휩쓸면서 거리에는 짧은 코트를 걸치거나 머플러를 두르는 사람이 늘었다. 며칠 전부터 약한 난방을 가동하기 시작한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해리는 거슬리는 항목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분기 보고서의 수치 하나가 맞지 않았다. 영향력 없는 미미한 오차에 지나지 않았으나 원인도 모르는 값을 못 본 척 넘길 수는 없었다. 관련된 모든 항목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는 데에만 두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도 여전히 그 미세한 숫자의 맥락이 보이지 않아 비서에게 지난 분기 서류를 요청했다. 어쩌면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해리는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이미 인지한 오류를 허투루 넘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비서는 농담에 약간의 진심을 섞어서 피곤하게 군다고 말하곤 했다. 업무와 인간관계는 다르다지만 혹시 카렌도 그랬을까? 하지만 처음에는 분명 기쁘게 장미꽃을 받아주지 않았던가. 그날을 떠올리자 집중력이 흐트러져 펜을 내려놓았다. 카렌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못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생각이 닿았다. 변명도 수습도 해보지 못하고 루시에게 결과만을 통보받았으니 그날의 데이트는 그녀에게 여전히 엉망으로 남았을 것이다. 해리는 곧장 나머지 스케줄을 확인했다. 카렌의 연락처를 받기 전에 종료된 매칭이었지만 첫 데이트에서 들었던 갤러리의 이름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고, 때늦은 사과가 성의를 보이려면 차라리 직접 방문하는 편이 나았다. 오후에 비는 시간이 있어 곧바로 예약을 잡았다. 마음속에 남은 껄끄러움을 잠시 밀어놓고 다시 업무로 복귀했다. 해리를 거슬리게 만들었던 문제는 두 분기의 서류를 확인하고서야 정확하게 정정되었다. 하마터면 아주 작은 오차 하나 때문에 몇 년 치를 거슬러 올라갈 뻔했다. 다행히 예약에는 늦지 않아서 해리는 남은 서류를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 카렌의 갤러리는 첼시의 오래된 공장을 개조한 건물이 모여있는 예술 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근방의 여느 건물들이 그렇듯 빛바랜 벽돌이 제 나이를 숨기지 못했고, 그 사이에 철제 프레임을 두른 통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통유리 너머의 갤러리 내부는 붉은 벽돌과 철제 프레임의 빈티지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흰 벽과 흰 바닥, 넓은 공간에 드문드문 걸린 작품들이 전부인 거대한 큐브였다. 거리에서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벽에는 이름이 알려진 작가의 그림이 걸려있어 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아래에서 액자의 고정 와이어를 살피던 카렌이 고개를 돌렸다. 유리 너머로 카렌과 눈이 마주쳤다. 해리는 가볍게 고개를 기울여 인사를 건네고서 묵직한 출입문을 열었다. 손은 비어 있었다. 사과에 구태여 물질적인 선물을 곁들이는 건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메리지 에이전시를 통해 만난 관계이니만큼 괜한 오해를 살 여지는 카렌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카렌이 곧장 마중을 나왔기에 리셉션을 지나쳐 가장 안쪽의 오피스로 이동했다. 걸음마다 핀 라이트가 비추는 작품들이 하나씩 옆을 지나쳤다. 해리가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카렌이 먼저 운을 떼었다. “예약자 명단에 미스터 카스티요의 이름이 올라와서 놀랐어요.” “갑작스러웠다면 미안합니다.” 카렌이 작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아직은 그녀가 짓는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오피스는 높은 층고와는 달리 절제되어 있었다. 구두 소리가 서늘하게 울리는 대리석 바닥은 소호의 테라스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마블 테이블과는 정반대의 온도를 품었다. 책상 모서리에 놓인 비닐도 뜯지 않은 도록을 책장에 대충 꽂아 넣고, 카렌은 티백을 뜯었다. 물이 끓는 건 금방이었다. 허브티가 담긴 두 개의 찻잔을 내려놓고서 재킷을 벗은 카렌이 그것을 소파 등받이에 적당히 걸쳤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는 동작이 헐거웠다. 데이트를 할 때의 카렌은 더 꼿꼿하고 힘이 들어가 있었다는 걸, 해리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내게 미련을 둘 만한 분도 아니시잖아요.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이었지만 괜히 더 마음이 불편해졌다. 해리는 정중하게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늦었지만 직접 사과드리는 게 도리에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디 그날 일이 너무 불쾌하지 않았으면 해서요.” 카렌의 눈이 살짝 커졌다. 과연 어떤 용건일지 마땅히 예상한 것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사과일 줄은 조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눈을 깜박인 카렌이 이내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애써 자제하려는 듯 소리를 죽였지만 어깨의 들썩임까지 가라앉히지 못한 그 웃음은 꼭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그 학생이 없으면 정말 한결같으시네요.” 그날을 화제 위에 올린 이상 충분히 언급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각오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루크의 존재가 끄집어내져서 내심 긴장했다. 적어도 옅은 미소를 입꼬리에 머금은 카렌의 웃음이 조소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기에 불안감을 떨치려 애썼다. 그녀는 의자 소리에 가려져 루크가 한 말을 전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입안이 마르는 것 같아 괜히 찻잔을 기울였다. 입술에 묻은 찻물을 핥으려는 것처럼 잇사이로 살짝 아랫입술이 살짝 말려들어 가는 모습을 보고서 카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사과는 괜찮아요. 그만두기로 정한 건 저인데, 미스터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그녀의 어조는 평이했고 정말로 그날의 소란에 대해 아무런 유감도 없어 보였다. 해리가 준비해 온 말들이 순식간에 방향을 잃고 흩어졌다. 받아들여졌다기에도, 그렇다고 거절되었다기에도 애매한 사과의 말이 불필요한 것이 되어 두 사람 사이에 덩그러니, 부자연스럽게 떠돌았다. 그러자 해리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형식적인 사과나 면피스러운 양해 따위가 아닌 다른 종류의 언어가 남았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어 그에게 미세한 균열을 남겼던 의문이었다. 결국 해리는 그것을 버려두지 못하고 물었다. “안심했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대답을 정리하려는 듯 카렌은 잠시동안 으음, 찻잔을 쓰다듬었다. “전 늘 자신에게 당당하지만 완벽하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에요. 냉정하게 말해서, 당신과 비교하면 조건도 한참 부족해요.” 루시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리고 그녀와도 끝까지 가지는 못했지. 루시에게 그랬듯 카렌에게도 오직 그녀만이 가진 매력이 있었지만 그걸 모르기에 하는 말은 아닐 테다. 무엇보다 지금 와서 카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애당초 앞선 매칭 상대들과 달리 카렌과는 만남을 이어가려 했던 이유는 결국 가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중요한 건, 당신은 내게 틈을 보이지 않았잖아요. 그저 완벽했어요.” 루시는 해리를 유니콘이라고 표현했다.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과연 현실에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환상적인 사람. 해리는 자신을 그런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지만 적어도 타인의 앞에서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능숙하게 둘러낼 수는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매너, 배려, 선물, 화술, 사람을 대할 때 활용되는 모든 것.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상대가 원하는 대로 맞추어 꺼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자기 자신을 좋은 모습으로 포장하고 싶은 건 누구나 가진 욕구가 아닌가. 해리 역시 마찬가지일 뿐이다. 상대를 위한 무결함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카렌은 결국 장미를 받았고 기뻐하지 않았던가. 더없이 황홀하다는 얼굴로 말이다. 그렇기에 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해리의 표정을 보고서 그녀가 쓰게 웃었다. “장미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꿈을 꾸고 싶어질 정도로. 사실 지나치게 아름다웠죠.” 통상 칭찬으로만 쓰이는 단어의 나열이었지만 단순히 칭찬으로만은 들리지 않았다. 그건 해리와 만나는 동안 카렌이 느꼈던 불균형이었을 것이다. 값을 매기고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자산을 통해 만났음에도 루시의 고객 목록에 적힌 등급만으로는 결국 수평을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알겠더군요. 아, 이 남자도 약점이 있는 보통 사람이구나. 단지 날 위한 게 아니었던 거야.” 해리와 정면으로 시선을 맞추고서 카렌이 말했다. 옅은 한숨이 섞였지만 동시에 홀가분한, 확신이 담긴 모습이었다. “저는 저에게 더 나은 결정을 내렸을 뿐이에요. 욕심을 부렸다가 후회하지 않으려고요.” 당연한 말이다. 결정을 내린다는 건 더 좋은 방향을 고르는 행위여야 하니까. 일상뿐만 아니라 업무에서도 늘 선택과 계산이 몸에 밴 해리에게는 익숙한 논리였고 불과 얼마 전에도 지극히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선택을 했었다. 더 나은 쪽을 골랐으면, 응당 더 좋아져야 하지 않겠나. 카렌이 찻잔을 들었다. 편안한 미소와 가벼운 몸짓이 말해주듯 카렌은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자신의 커리어에 날개를 달아줄 사람을 놓치고 말았다는 미련과 아쉬움은 어디에도 없다. 카렌은 차를 한 모금 넘기고 데워진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학생은 어떻게 지내요?” “루크는…” 무심코 입을 열었지만 이어지지는 못했다. 무슨 말로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루시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때에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늘어놓기에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과거의 나열이 되었다. 그 아이의 노력이며 성취 모든 게 다. 이력서에도 적을 수 있을 법한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루크에게는 어떤 것들이 남을까. 해리는 대답을 고민했다. 루크는 곧 메인의 시골 농장으로 돌아갈 터였다. 혹은 이미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다. 뉴욕에 오지 않았다면 삼촌의 과수원을 물려받았을 아이지만 이제는 그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루크는 나 하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걸고 뉴욕으로 왔다. 나를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려는 아이가, 나와 처음 만난 곳에 계속 머무르려 할까. 그 애가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알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리라고 짐작해 볼 뿐이다. 루크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내가 있는 곳이 그 애를 더 괴롭게 만드는 탓이리라.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은, 그러나 카렌에게 꺼내놓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해리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다. 그날의 테라스에서는 이명처럼 멀어져 닿지 않았던 루크의 얼굴이 지금은 아무런 방해물도 없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웃을 때 입꼬리가 얼마나 올라가는지, 눈꼬리는 또 어떻게 아래로 휘어지는지. 작은 미소부터 개구진 웃음과 시원스러운 청량함까지도. 머리를 내밀려던 서두가 무엇과도 연결되지 못하고 부자연스럽게 끊겨버렸지만 카렌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 해리에게 시간을 주려는 듯 찻잔을 들어 올렸고 희미하게 피어오른 김이 입술 아래에서 흩어졌다. 절반 이상 줄어들어 색이 옅어진 카렌의 찻잔과는 달리 해리의 것은 거의 줄어들지 못했다. 미지근해진 표면을 만지작거린 해리가 저도 모르게 잔의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그런 버릇이 있었네요?” 해리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카렌은 그리 놀랍지 않다는 듯 웃었다. “사과는 받을게요. 그게 마음 편하다면야.” 해리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섰다. 들어왔을 때처럼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 해리에게 카렌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차 안으로 돌아와서 바로 시동을 걸지 못하고 핸드폰부터 꺼냈다. 목적은 있으나 목적의 이유를 찾지 않고 이어진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건조하게 늘어지는 학과 안내 멘트가 끝나고 또 한 번 반복을 시작하려는 찰나 기억에 있는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학과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에 대면했던 그녀는 짧게 신분을 밝히자 곧바로 해리를 기억해 낸 눈치였다. 응대하는 목소리에 긴장과 약간의 호기심이 섞인다. 해리는 자퇴 처리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물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면서도—설령 예상과는 다른 답변을 받는다 한들 약간의 유예에 지나지 않는다.—명확한 답을 들어야 했다. 타인에게 말해도 되는지 껄끄러워하던 과 조교는 재촉하지는 않을지언정 고집스러웠던 해리의 태도를 상기했는지 머뭇거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완료되었어요.” 행여 또 집요하게 굴세라, 재빨리 번복할 수 없는 쐐기를 박기까지 한다. “학생이 확인증까지 받아 갔고요.” 해리는 별다른 항의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학과 사무실을 나설 때 수리하지 말라는 소리를 했지만 말도 안되는 억지로 그녀를 곤란하게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 순간에는 그저 루크의 철없는 투정처럼만 여겼고 잠깐의 방황이나 변덕으로 끝날 줄로만 알았기에 한 말이지만 얼마나 경솔한 생각이었는지.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핸들에 기댄 팔에 고개를 묻었다. 더는 부정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결과가 눈앞에 닥쳤다. 루크가 뉴욕에 있었던 모든 시간이 끝내 얇은 종이 한 장에 담겼다. 고작해야 이름과 날짜, 학교 인장으로 이루어진 문서 속의 문장 몇 줄만으로 모든 정산이 끝났다. 비슷한 종류의 서류를 하루에도 수도 없이 주고받는 해리가 그 한 장의 무게감을 모를까. 전화를 통한 구두 확인이 아니라 직접 제 손에 확인증을 받아 든 루크는 더욱 선연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는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리는 의연하게 굴려고 노력하던 루크의 마지막 얼굴과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않은 카렌의 후련함을 떠올렸다. 포기할 각오를 다지고 해리를 찾아온 아이는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마음속 한구석에서 떠날 예감을 품기 시작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래, 너도 너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한 것뿐이겠지. 루크의 5년은 오로지 해리에게 닿을 수 있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기에, 거부당한 순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회수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럼 나는 어떻지? 루크는 해리에게 행복하라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행복할 수 있으리라 믿어서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세상에는 최선이라는 단어도 있지 않던가. 어차피 최고란 대개 허상의 개념이기 마련이고 짧은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감정은 최선이 될 수 없으리라 믿었을 뿐이다. 해리는 월스트리트도, 트라이베카도 아닌 미드타운 이스트 60번가로 향했다. 반대 방향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루크를 허락한 날에 가까워졌다. 타트빌에서 문을 닫고 나간 어린 소년이 청년이 되어 들어온 곳에서, 이제는 선택의 결과를 확인해야 했다. / 그때와 같은 주차장에 차를 넣어놓고 트램 정거장으로 들어갔다. 위를 향해 곧게 뻗은 트램 레일과 빨간 트램카는 변함이 없었으나 정오였던 그날과는 달리 늦은 오후인 탓인지, 트램카에서 내려오는 사람 중에는 퇴근길을 서두르는 지친 현지인도 적지 않았다. 관광객들만큼이나 신이 난 루크의 옆에서 어색하게 떠 있었던 해리는 이제 자연스럽게 탑승 티켓을 끊었다. 신용 카드로도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걸 루크가 모르지 않았을 텐데 굳이 메트로 카드가 있는지 물었던 행동은 지금 생각하면 꽤 귀여운 수작질이었다. 고작해야 왕복 12달러에 불과한 금액이었지만 첫 데이트 못지않은 마음가짐으로 임하면서 해리에게 지갑을 열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해리가 당황한 틈을 타 재빨리 매표소 앞에 서는데 성공했으니 유난히 뿌듯해 보였던 표정이 이해되어서 웃음이 났다. 두 번째로 타보는 트램은 외형도 내부 구조도 그리고 덜컹이는 탑승감도 여전했지만 퀸즈보로 브릿지의 양옆으로 탁 트인 이스트강을 타고 넘어온 어스름한 노을빛은 그날에는 없던 것이다. 그때는 유리 가루를 뿌려놓은 것만 같았던 강가의 반짝임이 금빛으로 물든 지금은 꼭 불씨를 튀기는 것 같다. 이스트강의 저 먼 곳에서부터 느릿하게 주홍색 물결을 퍼트리는 트램카 바깥의 전경은 여전히 새롭기만 한데, 그걸 말해봤자 좋아할 사람은 옆에 없다. 그날 루크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뭐든지 처음을 함께 하고 싶다고 퍽 수줍게도 말했다. 첫 트램이기도 했지만 언젠가를 위해 꽁꽁 아껴두었을 것을 마침내 타게 되었으니 들뜰 만도 했다. 관광객이 오가는 시간인데도 포 프리덤스 공원은 여전히 한산한지 끄트머리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도 소음도 줄었다. 고요한 강변으로 밀려오는 강바람은 쌀쌀해졌고 하나둘씩 점등을 시작하는 미드타운 이스트의 눈부신 도시 빛이 강 너머의 수면에서 넘실거렸다. 루크와 있을 때에는 매 순간마다 느꼈던 신선함이 지금은 처음과 다른 풍경을 마주하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때와 같은 자리에 앉으려 했건만 강변을 따라 드문드문 늘어선 벤치 중 몇 번째였는지 헷갈렸다. 해리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른쪽에서 들리던 루크의 목소리와 그들 사이에 놓인 도시락을 풀던 손이었다. 손끝을 식혀주었던 차가운 물방울의 감촉과 알루미늄이 부딪히는 청량감이 생생해졌다. 맥주를 사와야 했을까. 혹은 샌드위치라도. 그래봤자 홀로 캔 탭을 따고서 끝나버릴 짤막한 소리와 소스를 흠뻑 적신 샌드위치로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이미 수확철이 지나간 매킨토시는 이제 뉴욕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울 터라, 서늘하게 뺨을 할퀴는 저녁 바람에는 아무런 향취도 실려 오지 않았다. 해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해가 기울 때까지 마냥 앉아 있었다. 사방으로 강렬한 주황빛을 흩뿌리는 따듯한 노을빛이 강변까지 넘쳐와 눈이 시렸다. 그러나 몸을 일으킬 때쯤에는 물결도 차가운 색으로 식어있었다. 내 선택이 네 바람대로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었나. 마지막 부탁이니 들어주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해가 진 후에는 트램에도 사람이 적었다. 루스벨트 아일랜드에 있는 내내 조수석에 방치된 핸드폰에는 비서에게 걸려 온 부재중 내역이 있었다. 해리는 회신을 걸어 몇 가지 일정을 조율하고 사흘 간의 짧은 휴가를 썼다. 개인적인 사정이 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통상적인 일과 시간이 끝나고서 날아든 갑작스러운 휴가 통보에 비서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말했다. 푹 쉬셨으면 좋겠어요. 요 근래 부쩍 피곤해하셨잖아요. 소소하게 건네던 스몰 토크는 줄어들고, 에스프레소를 요청하거나 한숨을 쉬는 횟수는 늘었다고 했다. 미처 몰랐는데 비서실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얼추 가늠이 되었다. 미안하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 중에 무엇을 먼저 꺼내야 할지 난처할 정도로 복잡한 기분이었다. 펜트하우스로 돌아오니 택배가 도착해 있다. 그제서야 어렴풋이 루크와 보았던 영화의 블루레이에 예약 구매를 걸어 놓았었음을 깨달았다. 미디어룸의 선반 한 칸을 통째로 차지한 시리즈의 맨 끝자리에 꽂아놓고서 앞에서부터 죽 목록을 훑었다. 루크와 어디까지 봤더라. 어떤 순서로 봐야 한다고 했었지? 그때 본 건 영화였나 드라마였나. 결국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서 영화를 재생했다. 옆구리를 쿡 찌르면 논문을 쓸 기세로 줄줄 대답해 주던 애가 없으니 영화의 내용도 캐릭터의 행동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면 순서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한 편이 끝나면 다음 편을 찾아 트는 일은 루크의 몫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를 모르니 다음은 뭘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중간에 재생을 멈추고 다른 디스크를 넣었다. 오프닝 장면이 낯이 익었다. 아, 이건 이미 보았던 거다. 세세한 장면 장면을 전부 떠올리지는 못해도 꽤 재미있었다는 기분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했다. 널찍한 모듈 소파에 등을 기대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 집중하려 했다. 현란한 화면과 다채로운 사운드가 흥미를 유발시켰지만 두 번째 보는 탓인지 그때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SF영화 특유의 효과음이 시끄럽게 느껴져 볼륨을 줄이려다가 딱 중간에 맞춰진 눈금을 보고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자신이 지내고 있는 워크업 아파트의 거실보다 큰 방이 꼭 영화관에 있는 기분이라면서 루크는 오히려 볼륨을 조금 더 높이고 싶어 했었다. 그럼에도 눈금이 절반을 넘기지 못한 것은 해리가 남겨준 자리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한 루크의 조잘거림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장면이 넘어가는 사이에 신이 난 루크가 추임새처럼 설명을 끼워 넣으면 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들었다. 무료함은 옆자리에 커다란 팝콘 통을 가져다 놓고서도 나아지지 않았다. 슬슬 루크가 끼어들 타이밍이라고 생각되면 장면이 전환되고 새로운 배경음악이 깔려 해리가 기다린 목소리를 대체했다. 찬장 구석에서 꺼내 온 팝콘은 먹다 남긴 뒤로 손을 대지 않아 눅눅해져서, 씹을 때마다 이에 달라붙었다. 해리는 결국 절반도 채 보지 못하고 영화를 껐다. 뚜껑 열린 팝콘통을 그대로 방치해버리고 미디어룸을 나왔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겼다. 해리의 발걸음을 따라 어둠이 깔린 복도에 하나씩 센서 등이 켜졌다. 허기는 지는데 무언가를 먹을 생각은 들지 않고, 피곤이 달라붙은 어깨가 무겁지만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그저 몸에 밴 버릇대로 에스프레소를 내리려던 해리는 다이닝룸의 구석에서 깜박이는 와인 셀러의 온도 표시등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푸르스름한 내부 조명이 투명한 유리 안을 비추면서 마지막으로 딴 와인이 떠올랐다. 유리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발목을 휘감았다. 우웅, 냉각팬의 낮은 울림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진동이 손가락을 타고 올라왔다. 해리는 절반이 남은 와인의 마개를 열었다. 예상대로 산폐된 와인에 과실 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저 시큼한 쉰내만 남았다. 마실 수 없는 와인을 대신해 저도 모르게 손이 간 것은 리슬링이었다. 항상 같은 자리에 연도만을 바꾸어가며 동일한 라벨을 두르고 서 있다. 한 병이 비면 새로운 병이 그 자리를 채웠다. 수집을 시작하면서 매 시즌마다 종류를 바꿔가며 시음을 해 보는 와중에도 리슬링은 한결같이 같은 자리를 지켰다. 새로운 시도를 할 기분은 아니었기에 늘 마시는 익숙함에 이끌려 와인을 잡았다. 포일을 벗기고 와인 오프너를 돌려 넣었다. 코르크는 부서지지 않고 깨끗하게 올라왔다. 퐁, 마개가 뽑히는 짤막한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긴 여운을 남겼다. 몇 주 만에 따는 병이더라. 투명한 잔에 내리쬐는 햇볕 같은 옅은 금빛이 천천히 차올랐다. 굳이 코끝까지 잔을 들어 올리지 않아도 진한 과즙의 향기가 올라와 주변에서 넘실거렸다. 그것만으로도 취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잔을 건들지 않았다. 와인의 마개도 닫지 않은 채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돌아가는 냉각팬 소리를 들으면서 한참을 더 그렇게 서 있었다. 사실은 방법을 알고 있지 않던가. 나에게는 네가 필요하다. / 한 솔로가 오전에 깨어있는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의 일과는 대체로 백수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을 만큼 제멋대로 돌아갔다. 물론 한은 백수가 아니었고 나름대로의 돈벌이 수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규칙적인 사이클 안에서 움직이는 직장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자고 싶을 만큼 자고 일을 하고 싶을때—혹은 일해야만 할때—일했다. 밤낮이 바뀌는 건 일상이라 언제 마지막으로 아침 해를 보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한의 싹수 노란 룸메이트가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도 아늑한 이불 속에 몸을 뉘이고 있었을 것이다. 대체 뭐가 그리도 급하다고 아침부터 떠나려 드는지.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뉴욕에 영원히 뼈를 묻을 것처럼 굴었으면서 말이다. 눈을 떴을 때 막 출근하려는 참의 츄바카와 마주친다는 건 한에게는 거의 재앙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한량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한 솔로라도 룸메이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할 정도의 의리는 가지고 있었다. 비록 당장 이번달부터 펑크나는 월세의 1/3을 메꿔줄 새 룸메이트를 구해놓지 않고 가버릴 정도로 괘씸한 놈이다만, 생활 공간을 공유하면서 쌓인 정은 괘씸함을 상쇄할 만큼 두터웠다. 사실 그 돈많은 양반이 아파트까지 쳐들어오지만 않았어도 루크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새 룸메이트가 구해질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한이 나서서 해리를 상대하는 동안 방 구석으로 도피했던 루크는, 당장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짐 정리를 시작했고 타트빌에 이사 박스를 보냈다. 그렇게 자퇴 처리가 완료되기를 기다리면서 하나씩 하나씩 물건을 비워가더니 확인증을 받기가 무섭게 다음날로 기차표를 끊었다. 한은 루크의 결단력과 추진력을 보면서 감탄을 해야 할지 타박을 해야 할지 헷갈렸다. 이런 녀석이니 메인의 촌구석에서 뉴욕으로 올 수 있었나 싶다가도, 그런 큰 결정은 충분히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소리가 절로 나왔었다. 그러나 한은 결국 루크에게 그 어떤 충고나 조언도 해주지 못했다. 너 보다는 쟤가 훨씬 더 번듯하게 살테니 네 살 궁리나 하라며 정곡을 찌른 츄바카의 면박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꽤 맞는 말이긴 하다만, 뉴욕에서 마침내 해리와 재회한 후의 루크를 쭉 보아왔다면 누구라도 한과 같았을 것이다. 마지막 아르바이트 날이라며 집을 나선 녀석이 귀까지 발갛게 상기된 채 돌아왔던 날에는 한도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다. ‘어쩌나, 원래 첫사랑은 실패하는 법인데.’ 루크는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들어오자 마자 침대 위에 엎어져 손바닥만한 명함 한 장을 쥐고 한참을 헤실헤실 웃기만 했다. ‘돈이 많으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 부자는 잡아야지.’ 마냥 성격 좋은 줄로만 알았더니 명함 좀 뺏었다고 얼마나 잡아먹을 듯이 굴던지. 그리고 엉덩이를 걷어 차여 방 밖으로 쫓겨났었다. 루크가 품은 마음의 크기라는 것이, 단순히 첫사랑을 잊지 못한 순진한 꼬맹이 쯤으로 치환될 수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면 그딴 실없는 농담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단 한 사람의 존재 만으로 울고 웃고 상처받으며 즐거워하는 마음이란 대체 얼마나 맹목적인 걸까. 막 뉴욕에 와서 해리를 찾으며 보냈던 루크의 모습을 보아온 한으로서는, 그 3년에 가까운 시간보다 해리를 만난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시간만이 루크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는 걸 알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뉴욕대의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을 손에 쥐었을 때 성공을 말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인생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루크는 해리를 만나고서야 만개했다. 싹싹한 웃음 뒤에 감춰놓은 상실과 갈망의 그늘이 걷히자 얼굴에는 점점 더 생기가 돌았다. 어느날 아침, 갑자기 다 죽어가는 얼굴로 돌아와 한의 새벽잠을 방해하기 전 까지는. 기름칠도 제때 하지 않아 녹슨 경첩이 달린 현관문은 모두가 잠들어있는 시간에 여닫기에는 너무 큰 소리를 내었다. 츄바카의 출근 준비보다 더 이른 시간에 닥쳐온 소음으로 인해 번쩍 눈을 뜬 한은 베개를 던질 준비를 하고서 방 밖으로 나왔다. 옆 집 아저씨의 화장실 루틴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방음이 형편없는 아파트에 살면서 이 시간에 기어들어 온다는 건 응징을 각오했다는 뜻이렸다. 그러나 전날 입고 나간 옷을 그대로 입고 돌아와 현관에 우두커니 선 루크를 본 한은 베개를 던질 수도, 그렇다고 저속한 농담을 던질 수도 없었다. 루크는 그 어떤 종류의 말도 붙여볼 엄두가 나지 않는 표정을 하고서 쓰러질듯 비틀대는 걸음걸이로 집 안에 들어왔다. 그대로 두면 안 될 것같아 간신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자동응답기같은 혼잣말이 되돌아왔다. 괜찮아. 그냥, 시간이 좀 필요한 것 뿐일 거야. 방으로 들어가는 위태로운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루크는 그 날부터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무언가 메시지를 잔뜩 작성하는 것 같다가도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는 핸드폰을 뒤집고, 또 다시 집어들고서 방 안이며 거실을 맴돌고, 금방이라도 버튼을 누를 듯 아슬아슬하게 엄지손가락을 띄워 놓은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일의 반복이었다. 한은 그 모든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시간이 남아 도는 게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걸 실감하는 날들이었다. 노닥거린다는 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눈에 들어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루크는 며칠 동안이나 하루 종일 핸드폰을 떼어 놓지 못했다. 세 사람이 사는 집은 문이라는게 아무런 효용이 없을 정도로 좁았고, 얇은 벽 너머로 휴대폰 알림음이 울릴 때마다 침대 스프링이 튀어오르는 소리가 났다가 곧이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털썩 가라앉는 소리가 뒤따랐다. 처음에는 망설이는가 싶었는데 날이 갈수록 망설임은 흐려지고, 틈이 날 때마다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 대더니만 매번 풀이 죽은 얼굴로 입술을 잘근거리기만 했다. 대답이 없는 상대를 향해 어떻게든 마음을 전하고자 닿을 방법을 찾아 해메는 모습은 꼭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았다. 제 정신이 아닌 것같은 와중에도 행여 성적이 부족해 인턴십에 지원하지 못하게되면 해리가 실망할 거라면서 이를 악물고 출석을 하는 발걸음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기계 장치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의 루크는 하루하루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더니만 다 무너진 얼굴을 하고 귀가한 어느 날에는 한을 붙잡고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어떻게든 해리를 만나 대화를 하겠다고 이를 악물고 나간 날이었다. 넋이 나간 눈에는 간절함밖에 남지 않았건만 정작 그걸 알아야 할 사람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상처를 받은 건 분명 루크였을텐데 두서없이 쏟아내는 말은 온통 자책뿐이었다. 제가 다 망쳤어요. 기다리라고 했는데. 해리가 저를 미워하면 어떡하죠? 그러면 안됐는데, 내 생각만 해서 해리가 가장 싫어할 짓을 했어요. 분명 실망했을 거야. 다시는 저를 안 보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한이 내뱉은 과거의 입방정이 업보처럼 떠올랐다. 첫사랑은 실패하는 법이라고 지껄인 것도, 부자는 잡아야 한다고 장난 삼아 등을 떠민 것도 한이었지만 이번에는 차마 어느 쪽도 입에 올릴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더이상 핸드폰만 붙들고 있지는 않았으나 동시에 영 집에 붙어 있지도 않았다. 통학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수업과는 상관없이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왔다. 뭘 하고 다니는지 구태여 묻지는 않았어도 짐작은 되었다. 그 짓이 며칠 지속되는가 싶더니 웬일로 일찍 돌아온 루크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져 있었다. 한에게는 그 초연한 낯빛이 바로 그날 아침까지도 걷히지 않았던 울상보다 훨씬 더 불길하게만 보였다. 무언가 일이 생길 때마다 손바닥 뒤집듯 감정을 바꾸어가며 널을 뛰던 녀석이 갑자기 모든 것에 무감각해 진것마냥 텅 비어버렸다. 그날 저녁 완전히 닫히지 않은 방 문 틈으로 엿본 루크는 침대 끄트머리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전처럼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고민에 빠지지 않았고, 오지 않는 연락을 하염없이 기다리지도 않았으며, 치미는 물기를 꾹 꾹 눌러 삼켜가며 붉어진 눈가를 문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고도 고요하게 현실을 소화하고 있는 루크의 얼굴은, 그러나 한이 보았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진득한 고통이 스며들어 있어서 그저 조용히 방 문을 닫아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마침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온 루크가 처음 꺼낸 말은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한.” 이었다. 한은 그 말의 의미를 빠르게 알아차렸다. 미쳤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를 뻔 했으나 전날의 얼굴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웃고 있는 애의 면전에 어떻게 내뱉겠나. 루크의 결정은 한으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아픔으로 꽁꽁 싸여있어서 함부로 말을 얹을 수도 없었다. 그저 별 일도 아니라는 듯, 나갈거면 새 룸메이트는 구해놓으라는 핀잔이 고작이었다. 결국은 그 조차도 망했지만. 아직 새 주인을 찾지 못한 방에는 얇은 매트리스를 얹은 침대 프레임과 텅 빈 책상만 남았다. 늘 책상에 먼지 한 톨 없게 깔끔을 떨던 녀석이건만 피규어를 놓았던 자리에 생긴 받침대 자국은 미처 지우지 못했나보다. 한은 순식간에 넓어진 것같은 방 안을 둘러보면서 앞으로 내야 할 월세를 계산해 보려다가 관두었다. 이번 달만 버티면 다음 달에는 구해지겠지. 적어도 지금 생각할 만한 걱정은 아니었다. 루크를 역 대합실에 내려놓고 겨우 한 시간이 지났다. 뉴욕에 남은 미련을 벌써 다 털기라도 했는지, 혹은 마저 털어낼 작정인지 루크는 열차 시간보다도 훨씬 빠르게 남은 짐을 챙겨 아파트를 나섰다. 대합실 의자에서 반도 채 차지 않아 작아진 백팩을 끌어 안은 모습이 눈에 밟혔지만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보여 먼저 돌아섰다. 츄바카는 한이 기차역에 다녀오는 동안 출근했고, 반갑지 않은 아침 해가 어느새 거실 바닥까지 기어들어와서 다시 잠들기에는 진작에 글렀다. 이런 시간에도 할 일 없는 놈들이 모이는 곳은 하나뿐이다. 한은 컴퓨터를 켰다. 오랜만에 지구 반대편에서 똑같이 밤낮바뀐 삶을 사는 놈들을 상대로 티어를 높일 생각을 하면서 커튼을 치려는데, 창 밖에 낡은 워크업 아파트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세단이 멈추어 섰다. 끝내주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감탄은 곧 차에서 내린 남자를 확인하고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얼씨구. 한이 커튼을 닫았다. 모르는 척 헤드셋을 쓰려다가 끄응, 난처한 신음을 내뱉고는 어디 한 번 기다려보기로 했다. 현관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더니 곧 청각의 끄트머리에 한 계단씩 가까워지는 구둣발 소리가 걸렸다. 그날은 루크와 마지막 전화 통화를 끝내자마자 득달같이 들이닥쳐놓고서, 한의 앞에서는 격식을 차리듯 굴던 남자는 이번에는 어째 올라오는 속도가 느렸다. 한은 로그인을 기다리는 게임 화면과 현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체력이 형편 없으신가. 고작 다섯 층을 올라오면서 숨을 몇 번이나 고르는건지 싶었으나, 발소리는 문 앞까지 다가와서도 여전히 바깥을 맴돌았다. 바로 앞에 멈추어 섰다가, 왔다갔다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가, 또 다시 멈추어 섰다가. 한은 도저히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문을 열고 말았다. 어색하게 주먹을 든 채 굳어버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막 노크를 하려던 순간 녹슨 경첩이 쇳소리를 내어 해리는 어깨를 움찔거릴 만치 당황하고 말았다. 그의 모습은 한의 생각과는 달리 땀에 젖었거나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지도 않아서 그 느릿했던 걸음걸이가 사실은 망설임의 흔적이었음을 알았다. 다만 그렇다고 썩 멀쩡해보이는 몰골도 아니다. 그때는 반지르르한 양복을 빈틈없이 차려입고 있었는데 오늘은 어째 되는대로 집어입고 나온 것이, 오후 느지막이 간식거리를 사러 나갈때의 한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문제는 지금은 오후가 아니라는 거다. 한이 삐뚜름한 목소리로 툭 던졌다. “그때 그 잘나신 분이잖아?” 노골적인 이죽거림에 불쾌감을 숨기려 하지 않던 남자는 이번에는 어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침부터 뭐야?” 오늘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한의 단잠을 방해했을 시간이었다. 이른 시간의 방문은 미리 예고를 해야 한다는 게 기본 매너 아니던가. 그걸 모르지는 않는지, 아예 한숨도 자지 못해 파리한 얼굴인 것치고 해가 뜨고 나서야 찾아오긴 했다. 그러나 한의 기준에서 오전은 전부 이른 아침이었다. 그러니 빨리 용건이나 말하라는 듯 턱을 추켜들었다. “루크를… 만나고싶습니다.” 또? 뭔가 다른 소리를 하려나 싶었더니만 그때와 똑같다면 한이 대답할 말도 같았다. “방 뺐다니까.” “거짓말이었죠.” 알고계셨겠다? 한이 한 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그러고도 그렇게 쉽게 돌아섰으면서 이제와 무슨 할 말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다. 한은 변명할 생각도 없이 뻔뻔스럽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건 그때고. 지금은 진짜야.” 시야를 막고있던 몸을 틀어 집 안을 보여주었다. 어차피 주인도 없는 방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현관에서도 텅 빈 책상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더는 한을 추궁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때처럼 곧장 몸을 돌리지도 않았다. 대신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루크가 없는 경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주먹 쥔 손을 초조하게 폈다가 움켜 쥐기를 반복했다. 해리가 다급하게 물었다. “고향에 가겠다고 했습니까?”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누구라도 당연하게 여길 일이거늘 그걸 굳이 확인하려 든다는 건, 루크가 뉴욕을 떠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소리다. 자퇴를 기다리면서 앞으로의 일을 묻는 한에게 루크는 제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거친 끝에 대답해 주었다. 마냥 슬픔에만 잠겨있지 않으려면 새로운 목표가 필요하니 말이다. 일주일 정도는 삼촌 부부와 있으면서 오로노에 지낼 곳을 알아보고, 이후로는 그곳에서 주립 대학에 편입할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아직 전공을 정하지는 못했지만 아예 해외로 나가는 것도 고려하는 것같았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두고 심지어는 입대까지 입에 올리기에 얼마나 진땀을 빼서 말려야 했던지. 물론 해리에게 곧이 곧대로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괜스레 눈을 굴리며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글쎄?” 순식간에 해리의 표정이 무너졌다.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일말의 침착함마저 잃어버려 핏기가 가시는 얼굴에 외려 한이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해리가 한의 팔을 붙잡자 엉겁결에 한 걸음 물러섰다. 지금을 놓치면 다시는 잡을 수 없다는 간절함 때문인지 해리는 오히려 한을 따라 한 걸음 집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했다. 허투루 퍼스널 스페이스를 허용하지 않을 것같은 고고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으레 보일 법한 모습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방어선이 무너져 밖으로 드러나버린 날 것의 감정은 한이 문틈 너머로 엿보던 루크의 모습과 겹쳐졌다. 해리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루크와 연락할 수 있습니까?” 한은 저런 종류의 표정을 지겹도록 보아 왔다. 새벽에 돌아온 루크의 비틀대는 걸음걸이과 자동응답기 같던 혼잣말에서, 며칠간을 썼다가 지우기만 수십번씩 반복하다 끝내 아무것도 적지 못한 채 뒤집어진 핸드폰에서, 마침내 문장을 완성해 놓고서도 엄지를 액정 위에 띄워놓고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하던 손끝에서, 그러고도 억지스럽게 일상을 이어 가던 구겨진 운동화의 뒷꿈치에서. 해리는 저 얼굴 위에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전부 다 드러내고 있었다. 도대체가 이 집구석은 벽만 얇은게 아니라 들어선 사람의 마음까지 얇아지게 만드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루크가 겪어야 했던 그 간의 방황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해리가 예뻐 보일 리는 없었다. 여전히 마음에 차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루크가 그랬었듯 해리에게도 한이 보지 못했을 뿐 나름대로 방황의 시간은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한은 거기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붙잡힌 팔에 전해지는 떨림과, 그 필사적인 움켜쥠에 처음보다 힘이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 짐작할 수는 있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본 한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기차 시간이 남긴 했는데…” 그러자 언제 그렇게 목 졸린 얼굴을 했냐는 듯, 해리에게는 단번에 생기가 돌았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상대의 존재 만으로 휙휙 기분을 갈아 끼우는 작태가 똑같아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왁스로 쫙 넘기고 있을 때엔 몰랐는데 이 양반, 머리카락이 생각보다 더 곱슬거렸다. 루크가 처음으로 외박을 하고 돌아온 날, 귀엽다느니 푸들같다느니 귀에 피가 나도록 주접을 떨어대던 지극히 편파적인 호들갑이 환청처럼 되살아 나는 것만같아 둘 다 꼴도 보기 싫어졌다. 한은 최대한 빠르게 눈앞에서 해리를 치워버리기로 했다. 기차 시간을 알려주기가 무섭게 해리는 손목시계를 확인해볼 여유도 없이 몸을 돌렸다. 과연 루크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루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지 한이 알 도리는 없었다. 어쩌면 괜한 짓일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한가지만큼은 확실했다. 기차에 올라 탄 루크가 울면서 전화라도 했다가는 당장 저 놈을 잡아와 계단에서 굴려버리고 말테다. 5층 짜리 건물이니 길쭉한 몸으로도 잘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요란하게 쿵쾅대는 성급한 발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알아서 잘 구를 것 같기도 해서, 그런 심술궂은 생각마저도 곧 사그라들었다. 발소리는 금세 멀어졌다. 한은 창가로 가 닫아둔 커튼을 열었다. 그 사이 햇빛이 더 강해져서 어휴, 눈살을 찌푸렸다. 눈부심을 참아가며 조금만 기다리자 출입문을 밀고 튀어나온 자그마한 인형이 허겁지겁 운전석에 올랐다. 엔진이 데워지길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움직이는 차를 보면서 끌끌 혀를 차던 한이 뒤늦게 아차 싶어 중얼거렸다. 돈도 많은 양반인데, 정보료라도 받을 걸. /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차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는데, 분명 일정하게 움직일 터인 시계바늘을 확인할 때마다 흐름은 다르게 체감되었다. 시간이 좀 더 더디게 가면 좋겠다가도 그래봤자 뭐가 달라질까 싶어 차라리 빨리 가버리길 바라기도 했다. 이럴거면 기차 시간에 딱 맞추어 나올 걸 그랬나. 일찍 일어나는건 몸에 밴 습관이었고 3년을 보내놓고도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한 곳에 멀거니 앉아있기에는 괜히 마음만 상해서 일찍 현관을 나섰다. 학기에 한 번씩, 타트빌로 돌아가는 창구였던 기차역에 있으면 조금 나을 줄 알았건만 이제는 편도가 되었기 때문일까. 기차역에서 느끼던 귀환의 설렘은 온데간데 없고 사라지지않는 술렁임만 남았다. 전광판의 맨 아래에 묻혀있는 차량 번호가 한 칸씩 위로 올라올 수록 서늘한 한기가 팔뚝을 쓸어내렸다. 확인증을 쥐고, 기차표를 예매할때도 명확하지 않았던 실감이 이제야 손에 잡히려 하고 있었다. 끝이구나. 루크는 느릿한 속도로 그것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마지막은 혼자라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놓은 전화가 울렸다. 한이었다. 바래다 주고서 벌써 한 시간은 지났으니 진작에 집으로 돌아가 자고 있을 줄 알았다. 루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잊을 만한 것도 없었다. 물건들을 전부 미리 보내버려서, 농장에서나 입던 낡은 옷을 주워입고 나왔을 정도로 남겨놓은 게 없지 않았던가. 전화를 받자 한은 대뜸 아직 그 대합실에 있는지 물었다. 물론 루크는 한과 헤어진 의자에서 여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네. 같은 곳이에요.” 뭐라도 가져다 주러 왔나 싶었는데 다른 용건은 없는건지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진짜 뭐지? 귀에서 전화를 뗀 루크가 액정을 확인해보았다. 분명히 한이 맞았다. 목소리도 한이었고. 루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수상쩍기 그지없는 짧은 침묵. 그러나 대답은 태연하게 흘러나왔다. “아니, 기차 시간 얼마 안남았잖아. 어디 다른데 어슬렁거릴까봐.” “…제가 어린애에요?” “알아. 그냥 걱정되잖아.” 가끔 실없는 구석이 있다지만 어딘지 한 답지 않다고 생각할 뻔 했다가도, 걱정이라는 말에 의아스러움이 누그러져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작업 공간은 칼같이 관리하면서 공용 공간에는 툭하면 때묻은 옷가지나 속옷 따위를 널려놓는 밉살스러운 룸메이트였으나 지내는 동안 많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겉으로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굴면서도 늘 루크를 지켜봐 준 사람도 한이었다. “고마워요. 한 말대로 시간도 얼마 안남았으니 계속 여기 있으려고요.” “그래라.” 어쩌면 기차 시간까지 있어주지 못한 게 미안하기라도 했던 걸까—정작 루크는 한이 그 아침에 현관 밖에 나온 것만으로 감동했다.—정말 그 하나때문에 전화했었던 듯, 목소리에는 마침표가 찍혔다. “화장실 가고싶어지면 그냥 싸.” “한!” 막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들려온 농담에 왈칵 짜증을 부리려 했더니 얄미울 정도로 호쾌한 낄낄거림을 남기며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뾰루퉁해진 얼굴로 액정을 내려다보던 루크의 입가에 슬쩍 작은 웃음이 걸렸다. 울적했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덕분에 오거스타로 마중나온 오웬과 베루를 만났을 때 눈물부터 보이지 않을 수 있을 것같았다. 루크는 한결 차분해진 마음으로 대합실에 걸린 거대한 시계를 바라보았다. /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내려다 본 해리는 분침이 가리키는 정확한 숫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차에서 내려 발렛에게 팽개치다시피 키를 넘겼다. 주차 타워에서 모이니한 트레인 홀로 건너가는 그 한 블럭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정오를 앞둔 오전 시간은 너무 이르지도, 그렇다고 애매하게 늦지도 않아 트레인 홀의 맞은편 횡단보도부터 사람들로 붐볐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해리는 세 번을 더 손목을 내려다 보았지만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여전히 숫자는 머릿속에 남지 않았고, 분침이 어디에 있든 숨돌릴 수는 없었다. 인파에 섞여 길을 건너고 남쪽 출입구로 들어갔다. 이중으로 된 첫 번째 유리문이 열리기 무섭게 통로 너머로부터 기차 시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의 잔음이 들렸다. 다급한 발걸음이 대합실로이어지는 통로를 지났다. 고작해야 20미터 남짓을 가로지르는 십여초의 시간에도 해리는 쫒기는 기분을 느꼈다. 마침내 좁은 통로를 나와 대합실로 뛰어들었다. 넓게 트인 중앙 광장의 어지러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대합실 내부는 이미 캐리어를 끌거나 커다란 가방을 짊어진 사람들로 가득했다. 웅장한 아치형 천장의 유리를 투과해 쏟아지는 햇빛이 실내를 훤히 밝혔다. 미국 전역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기차역에는 분 단위로 출발과 도착이 오갔고, 건조한 안내 방송이 잠깐의 공백도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안내 방송은 출발 시간 10분 전부터 탑승을 재촉했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아날로그 시계의 눈금이 하나 더 줄어들자 해리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저 우두커니 서 있는 것만으로는 찾을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이면서도 시선은 계속해서 방향을 바꿔가며 다른 곳을 향했다. 그 바람에 몇 번이나 다른 사람과 부딪혔지만 해리는 그때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반사적인 사과를 내뱉기만 했다. 불쾌함을 토로하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는 별 의미도 없이 한 귀로 들어왔다가 반대쪽 귀로 흘러나갔다. 해리는 그런 것보다도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안내 방송에 집중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안내 방송은 야속할 정도로 꾸준하게 루크가 타야하는 기차의 탑승 시간을 좁혀 나갔다. 해리의 숨이 가빠졌다.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을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초조함이 커지자 오히려 감각은 무뎌졌다. 어느덧 해리는 더이상 안내 방송이 알리는 시간조차 듣지 않고 그저 시야 속에 걸리는 익숙한 금발 머리를 찾았다. 불규칙하게 움직이던 해리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린 해리의 주변은 여전히 저마다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어서 각양각색의 모습을 한 사람들로 해리의 시야가 가려지다가 트이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한 곳에 못박힌 시선이 더는 헤메지 않고 지표와 같은 샛노란 머리칼을 바라보자, 그 외의 존재가 하나 둘씩 지워져 끝내 끄트머리에는 단 한 사람 뿐이 남지 않게 되었다. 해리의 시선 속에서 유일하게 반짝거리는 사람이었다. 루크는 가장 큰 전광판 밑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보스턴을 경유하는 오거스타행 기차의 게이트 넘버가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합실 시계를 한 번 바라본 루크가 다시 전광판으로 고개를 돌리자 비어있었던 트랙 칸에 숫자가 떠올랐다. 띠링, 공기를 깨는 전광판의 알림음과 동시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 보스턴 경유 열차의 탑승객 분들께서는 5번 게이트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보스턴 경유 열차의 탑승객 분들께서는… ] 갑자기 수많은 인파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이들도 게이트 위치를 확인하자 그 한결같은 흐름에 합류했다. 순식간에 루크의 모습이 가려져 해리가 황급히 발을 떼었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루크가 백팩을 메면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붙잡고 싶은데,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인파가 자꾸만 해리를 방해했다. 잠깐이라도 시야에서 놓쳤다가는 마치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 것만 같아서 해리는 고민할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루크. 사방에서 산발적으로 흘러 넘치는 크고 작은 소음과 안내 방송의 울림, 게이트 번호를 띄우는 전광판의 시스템음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외침이 인파를 뚫고 모이니한 트레인 홀을 가로질렀다. “루크!!” / 루크가 멈추었다. 막 5번 게이트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로 가려던 참이었다. 이름을 불린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홀로 남은 대합실에서 딱히 그를 부를 사람이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막상 떠나려니 아쉬워서 헛것이라도 들은 걸까. 설령 진짜라고 한들 흔한 이름이었다. 씁쓸하게 웃고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헛된 상념을 떨치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또 다시 이명처럼 날아든 부름이 발목을 붙잡았다. 한층 더 분명해진 그것은 정말로 환청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럴리 없다는걸 알면서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백팩 끈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환청보다 훨씬 더 선명한 환영이 그 자리에 있었다. 울컥, 치솟으려는 울음을 삼켰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한을 향한 원망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리가 여기에 있는 건지, 그 수상쩍었던 전화가 스쳐 지나가면서 바로 눈치챘다. 루크의 방황과 각오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한이다. 그라면 자신을 충분히 알 줄 알았는데, 하필이면 지금 해리와 마주치게 하다니. 이 넓은 대합실을 메운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정확히 자신을 찾아내었는지 당황스럽기만 하다. 어느새 루크와 같은 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고, 출발 시간까지는 십분도 채 남지 않았다. 차마 해리와 눈을 맞추지 못해 엉뚱한 곳을 맴돌던 루크의 시선이 에스컬레이터를 향했다. 그러자 해리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성큼 다가와 손목을 붙잡아서 움찔 놀랐다. 해리를 피해 푹 고개 숙인 루크의 목 울대가 또 한 번 움직였다. 목 아래를 꽉 조이는 것처럼 먹먹해졌다. 힘있게 붙잡은 손바닥의 체온이 전해지자 어차피 이걸로 끝이라면 잠깐은 당신을 마주봐도 괜찮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약간의 타협을 제시했다. 그저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 뿐이다. 생각해보면 제대로 된 인사도 주고 받지 못했으니, 서로에게도 마무리가 필요할 테다. 해리를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루크는 있는 힘껏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해리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못내 계속 기차 시간을 신경쓰고 있던 루크가 마침내 해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웃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당신이 없는 곳에서도 잘 지낼 거라는 듯이. “배웅해주려고 오신 거에요?” 다행히 목소리를 떨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크 나름의 최선을 다한 웃음에도 불구하고 해리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오히려 떨리는 쪽은 해리였다. 그는 힘겹게, 짜내듯이 대답했다. “…아니.” 어른스럽게 담담하면서도 기분 좋게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제서야 갑작스럽게 해리와 대면했다는 당황감으로 인해 미처 꼼꼼히 살펴보지 못했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혀 손질을 하지 않은 머리는 수더분한 곱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었고 제 아무리 캐주얼한 차림새더라도 깔끔함을 유지하던 옷매무새는 소매를 아무렇게나 밀어 올려놓았다. 루크와 함께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낼 때의 편안함과는 달랐다. 나른하게 풀어진 것과는 다른 가라앉은 표정에 보이는 것은 차분함이 아닌 그늘이었다. 해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혹은 한이 그에게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걸까. 루크가 알고 있는 정돈된 모습과는 전혀 다른 해리가 신경쓰이는데, 섣불리 걱정을 내비치기에는 그럴 자격조차 없는 것같아 망설여졌다. 루크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가벼운 분위기로 말했다. “음, 설마 한이 억지로 보낸건 아니죠? 무시해도 됐는데. 한도 참, 안그런 것 같으면서 오지랖이…” “가지 마.” 떠오르는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려던 루크를 가로막은 해리에게 반대쪽 손까지 붙잡혔다. 루크는 그의 말이 아닌 행동때문에 놀라고 말았다. 거의 밀착하다시피 다가오더니 몸을 움츠리며 루크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댔다. 구불구불하게 풀려있는 머리카락이 코끝에 닿을 것같아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꼭 안도하는 것만 같은 긴 날숨이 가슴께를 간질이는 것같았으나 애써 떨쳐내려 했다. 그보다는 해리가, 더 정확히는 해리와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신경쓰였다. 한창 붐비는 시간의 대합실 한가운데에서 다 큰 남자 둘이 달라붙어 있는 건 누구라도 무시하기 힘든 광경일 터였다. 루크는 살그머니 그를 떼어내려 했다. “해리, 사람들이 봐요.” 그러면 곧장 물러서서 애써 민망함을 지우려 할 줄 알았는데, 슬쩍 밀어내려는 손을 오히려 더욱 강하게 움켜쥐어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해리는 그대로 도리질을 쳤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턱 아래를 스쳤다. 루크만큼이나, 해리 역시도 정돈되지 않은 말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상관없어. 아냐, 그러니까… 미안해. 내가 했던 말 전부 다…” 해리의 어깨가 잘게 경련했다. 루크는 썰물처럼 한꺼번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분명하게 들렸을 만큼 이름을 크게 외치던 해리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단정하지 못한 차림새와 필사적인 몸짓까지 전부 다 본래의 해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그는 항상 정제된 사람이었고 그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그때처럼 희게 질린 얼굴로 무결함을 붙잡아두려 하지 않고 날 것의 말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내가… 괜찮아지려고 해봤는데… 도저히 못하겠어.” 이젠 정말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 더 이상 대합실에 루크와 같은 기차를 타야하는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지체되긴 했어도 지금 당장 뛰어가면 충분히 탈 수 있을 테지만 루크는 움직이지 못하고 해리가 전부 쏟아내 주기를 기다렸다. 찬찬히 호흡을 고르며 입 안에서 할 말을 걸러내는 그 짧은 시간이 루크에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너 없이 행복할 수가 없어.” 루크가 숨을 삼켰다. 간신히 말할 수 있었던 마지막 부탁에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무심한 표정이 아직도 머릿속에 윤곽을 남겨 떨어지지가 않는데, 이제는 전혀 다른 얼굴로 다른 대답을 했다. 그러나 소호의 그 거리에서 쏘아붙였던 서슬 퍼런 목소리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해서 기쁨보다는 의심이 먼저 목에 걸렸다. 제 아무리 루크라도 세 번의 실연은 견딜 자신이 없었다. 혹시 이게 내 착각이라면?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그의 변덕이라면? 해리의 손가락 끝이 손바닥 안쪽을 쓰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떨어져나갔다. 한 걸음 물러나 루크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토록 바라왔던 것이지만 선뜻 손을 마주잡지 못했다. 그러자 망설이는 루크의 가슴에 해리의 단정적인 목소리가 들어와 묵직하게 고였다. “가지 마. 말했잖아, 너랑 하는건 뭐든 다 좋아. 계속 너와 있고 싶어.” 경유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안내 방송 소리가 들렸다. 반복해서 같은 내용을 전하는 방송 소리가 전부 끝날 때까지 수차례 입술을 달싹이던 루크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내 목구멍에 달라붙어 있느라 눅눅해진 목소리가 힘겹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루크는 금방이라도 꺾여버릴 듯 연약한 물음을 해리에게 내밀었다. “…사랑도요?” 행여 거절될까 불안감을 가득 담은 가녀린 울림이 주변을 둘러싼 대합실의 소음보다도 더 선명하게 해리에게 와 닿았다. 해리가 루크에게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뺨에 닿아 움찔 놀랐다가도 루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발그레한 뺨을 문지르자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그래.” 해리가 말했다. 사실 처음부터 알았다. 네가 뭘 원하는지, 그리고 내가 그걸 줄 수 있다는 것도. 항상 입 안에서 제 자릴 찾지 못해 맴돌기만 했던 단어가 정확한 방향을 찾았다. “사랑도.” 이게 뭐가 그렇게 어려웠나 싶을 정도로 짧은 말은, 그만큼 가볍게 떠올라 몸을 감싸듯 하늘하늘 내려앉았다. 이토록 쉬운 말이었는데 입 안에서는 왜 그리도 버거웠는지. 말이 입을 떠나면서 가슴께를 누르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풀려나가자 물 밑에서 올라온 것마냥 참고 있던 숨이 트였다. 루크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물기를 머금어 투명하게 반짝이지만 더는 흘러내리지 않는 새파란 눈동자에 해리의 얼굴이 비쳤다. 캐리어를 끄는 바퀴 소리나 끊이지 않는 안내 방송도, 힐끔거리는 시선과 웅성거림과 전부 눈동자 바깥으로 밀려나 흐릿해져 버렸다. 오로지 같은 속도로 뛰는 손바닥 아래의 맥박만이 감각에 새겨졌다. 그제야 명확하게 깨달았다. 이래서 사랑인 거구나. 멍청해지는 게 아니라 내 세계에 너 하나만 남는 것. 이마를 기댔을 때부터 코끝에 걸렸던 냄새가 실체를 얻었다. 햇볕에 데워진 풀과 젖은 흙내음, 그리고 루크가 건네던 사과 향기. 오 년 동안 셀러의 같은 자리를 채워온 그리움의 정체였다. 유리 천장을 투과한 햇빛이 루크의 머리칼과 셔츠 위에서 따듯하게 데워져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아, 그 해의 가을이다. 해리는 망설이지 않았다. 뺨을 감싼 손을 그대로 뻗어 루크를 끌어 안고 입술을 겹쳤다. 허리를 감싼 팔이 몸을 당겨오면서 입술 사이로 루크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문질러진 입술이 간질거려서 해리는 마주 웃었다. 탑승 플랫폼은 이미 텅 비어있을 것이다. 더는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루크가 해리에게 모든 것을 걸었듯, 해리 역시 루크에게 전부를 걸고 그 자리에 섰다. 여전히 리스크는 남아있고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하다. 그러나 투자가 그렇듯 어차피 사랑이란 그 불확실성마저 끌어안는 일이 아니던가. 비록 사랑에는 서투를지언정 투자라면 자신이 있었다. High Risk, but High Return. 이 업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진리이지 않나. 오 년 전 해리의 포트폴리오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된 이름은 지금 해리에게 가장 큰 가치를 품고서 눈앞에 있었다. 입술을 떨어트리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이마를 맞댄 두 사람은 멈추는 법을 모른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저 행복뿐이다.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 모은 최고의 배팅이 마침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결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끝.....!!!!!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거였는데 이게 이렇게 길게 갈줄은 몰랐다. 나홀로먹는 루크해리였는데 끝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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