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이 안 와서 거실에서 씁니다 작년 가을에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어요 마흔 앞두고 갑자기 일이 없어지니까 처음 석 달은 진짜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와이프가 대신 출근하고 저는 소파에 누워서 구인 사이트만 새로고침하고요 그러다 어느 날 와이프가 퇴근하고 들어와서 싱크대에 쌓인 그릇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고무장갑을 끼는데 그 뒷모습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집안일은 제가 다 하기로 했어요 처음엔 엉망이었습니다 흰 빨래에 빨간 양말 넣어서 와이프 블라우스 분홍색 만들어놓고 미역국은 미역을 너무 많이 불려서 냄비가 넘치고요 유튜브 보고 하나씩 배웠습니다 반찬 세 가지는 이제 레시피 없이 합니다 애 학교 준비물도 제가 챙기고 학부모 단톡방에도 제가 들어가 있어요 거기서 유일한 아빠입니다 장 보는 것도 제가 하는데 마트 전단지 비교해서 한 달 식비를 15만 원 넘게 줄였어요 와이프가 가계부 보고 놀라더라고요 어제가 와이프 생일이었는데 퇴근 시간 맞춰서 갈비찜이랑 잡채를 해놨어요 와이프가 식탁 보더니 한참 서 있다가 당신 없었으면 나 올해 못 버텼을 거라고 하는데 결혼하고 12년 동안 그런 말 처음 들어봤습니다 솔직히 좀 울컥했어요 저 혼자 부엌 가서 물 마시는 척했습니다 근데 기분 좋은 게 오래 안 가더라고요 밥 먹고 있는데 장모님한테서 생일 축하 전화가 왔습니다 와이프가 스피커로 받았는데 장모님이 첫마디로 김서방은 아직도 집에 있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와이프가 엄마 오늘 이 사람이 다 차렸다고 하니까 남자가 그런 거 잘해서 뭐하냐고, 그 시간에 원서를 한 장 더 쓰라고 하십니다 스피커라 다 들렸어요 애도 듣고 있었고요 열 살짜리 딸이 아빠 백수야? 하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었습니다 와이프가 엄마 그만하라고 하고 바로 끊긴 했는데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었습니다 지난 추석에 처가 가서 전 부치고 설거지까지 제가 다 했을 때도 장모님은 별말 없으셨어요 물론 장모님 마음도 이해는 합니다 딸 혼자 벌어 오는 게 속상하시겠죠 저도 원서 계속 쓰고 있고 다음 주에 면접도 하나 잡혀 있어요 근데 1년 동안 집에서 한 일이 그냥 노는 걸로 정리되는 건 좀 억울하더라고요 와이프는 엄마 말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래도 오늘은 고맙다는 말 들은 걸로 버티려고요 갈비찜 남은 건 내일 도시락으로 싸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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