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의 잔느와 사르트르의 초기 실존주의에 대한 주장을 다루는 글을 읽고서 든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혹 더 생각해 볼 것들에 대하여, 또는 저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신 분들께서는 댓글로 의견을 가르쳐 주시면 감사히 읽어 보겠습니다. 10장의 잔느 마리 사르트르, 패닉 유형의 명칭인 '라 노제' 에서도 알 수 있듯 사르트르의 소설인 '구토' 와 관련이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잔느의 라 노제 패닉 유형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첨언되어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구역질과 메스꺼움. 이 세계는 그저 있다. 모든 것에 의미라는 것은 없고, 그저 우연의 산물로 눈앞에 놓여있을 뿐이다. 단지 우연이다. 모든 것이. 저는 소설 구토의 주인공인 로캉탱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세상 만물로부터, 돌멩이처럼 사소하기 그지없는 사물에서조차 구토감을 느낀 이유가 둘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실존주의에서의 첫 걸음과도 같은 잔느의 저 문장이 이유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만이 실존합니다. 의미도, 목적도, 본질도 없이 그저 존재하기만 합니다. 그것에는 어떠한 모험도 없으며 삶은 오로지 우연한 순간의 연속일 뿐, 스스로에게 부여한 의미들은 전부 삶의 가치를 매기기 위한 인간의 하잘것없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티페리트의 미덕인 존재 의미에 대한 기대 입니다. 방금 말하였듯, 실존은 본질보다 앞서며 세상 모든 것은 그저 존재하기만 합니다. 이 빈 존재에 대해 타인의 시선은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자신의 시선은 타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무의식적인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있어야 한다는 그 기대 말입니다. 빈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강박과 같습니다. 잔느는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세상 만물에 대한 구토감을 느끼게 되었고, 끝내 뒤틀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존재 의미에 대한 기대, 이러한 기대로부터 오는 구역질,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인간의 모습. 이 모든 걸 우리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습니다. 8시의 서커스의 단장, 오스왈드입니다. 오스왈드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기대라는 감정으로 만들어낸 사탕의 맛이 형편없다는 걸 알면서도 타인에게 먹이고, 입에 넣어준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타인으로 하여금 역겨울, '구역질나는' 맛을 하고 있을 그 사탕을 타인의 입에 기대라는 이름으로 넣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가 말하는 실존주의에서는, 있을 수밖에 없는 부조리들에 저항하고 이를 직면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모범적인 삶이며 이 부조리들에 대한 반항은 바로 자신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반영한 선택, 즉 타인의 세계와 가치관 속에 나 자신이 섞여 살아감을 인정하되, 스스로가 선택의 주체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지향하는 삶이라 저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스왈드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주체가 되지도 않습니다. 언제까지고 공연을 이어나가겠지만 그는 그 중 단 한순간도 공연을 맡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까지고 광대일 테고, 광대는 스스로의 공연을 직접 맡지 않음이 그의 철칙일 테니까요. 그는 이로써 주체가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실존주의에 대한 카뮈의 주장을 빌리자면, 이는 자유의지를 가진 선택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기만이며, 카뮈가 강조하는 순간의 소진에 있어 곧 소진될 현재에 대한 모독입니다. 뫼르소의 인지에 의해 뒤바뀐 잔느의 밝은 방, 시지프 백화점의 7층. 시지프 시네마입니다. 우리가 이 공간을 다룸과 동시에 이야기는 다시 잔느에게로 돌아옵니다. 시네마, 영화. 잔느와 뫼르소의 대화로 알 수 있듯, 영화는 상영되는 동안 관객들의 시선을 스크린에 집중시킵니다. 잔느와 뫼르소는 관객들의 시선이 스크린에 끌린 동안, 여지껏 자신들에게 꽂혀왔던 모든 시선들에 대해 아주 잠시나마 해방됨을 느끼며, '못 박힘'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느꼈노라 회고했습니다. 영화는 무얼 상영하든 타인의 이목을 끌고, 이는 잔느와 뫼르소에게서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박았을 못들을 한순간이나마 빼내어 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잔느는 이런 순간으로부터 자유를 느낍니다. 그렇기에 영화를 통해 뫼르소만을 데리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쳐 온 저 공간, 시지프 시네마는 뫼르소의 인식과 잔느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합작이라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는 잔느의 욕망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영화는 본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관심거리를 던져준 후 자유로워진 두 남녀의 밀회, 테마곡의 이름인 랑데부의 의미입니다. 다만 그렇다면, 반면 서커스는 어떻습니까? 서커스는 본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 보여지기 위한 것. 잔느와 뫼르소의 시지프 시네마와는 완전히 반대의 성향을 지니기에 대비를 이룹니다. 오스왈드는 공연의 주체가 아니나, 남에게 보여진다는 사실만은 단원들과 같습니다. 오로지 남에게 보여주기만을 위한 광대의 공연, 8시의 서커스. 스스로가 주체가 되기를 거부한 오스왈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광대가 된 세상을 그립니다. 그 누구도 멋대로 존재 의미에 대한 기대 따위는 하지 않으며, 존재만으로도 그저 '웃어 줄' 인간을요. 그렇기에 모두는 오스왈드와 같은 광대가 되며, 타인의 웃음으로부터 삶의 이유를 찾습니다. 자신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타인의 무조건적인 긍정으로부터 그 가치를 찾아낸 삶. 그러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구역질나는 사탕 따위는 입에 넣어서도, 타인의 입에 넣어 줘서도 안 되는 거겠죠. 오스왈드는 단원을 뽑습니다. 사탕 따위 만들지 못하도록, 단원을 만들고, 공연을 이어가고, 무대를 넓히며, 또 단원을 만들어갑니다. 뒤틀림을 퍼뜨립니다. 8시의 서커스는 그렇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존재 의미에 대한 기대를 거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세상이어야만 오스왈드가 바라 마지않는, 오로지 타인의 웃음만으로 서로 연명할 수 있는 세상이 완성될 테니까요. 세상의 기대로부터, 의미로부터 구역질을 느꼈고, 잔느는 뫼르소만을 데리고 이어질 찰나의 은밀한 자유를, 오스왈드는 도시의 모든 사람을 데리고 존재의 의미 따위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으로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다름 아닌 스스로를 위해서요. 잔느와 오스왈드의 차이를 마지막으로, 이 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질문을 제외하고는 롭챈에 쓰는 첫 글이라 두서가 없고 근거도 빈약합니다.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지적과 다른 의견 모두 소중히 받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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